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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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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브론치노 또는 근대 예술의 역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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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브론치노가 그린 유명한 <비너스와 큐피드의 알레고리>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버거의 <보기의 방식(Ways of Seeing)>에 나오듯이, 이 그림은 노골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그럴듯한 신화적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 그림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이상적 여인의 육체와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상상되는 성적 쾌락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단순한 말을 하려고 이 그림을 여기에 끌어다 놓은 것이 아니다. 존 버거의 비평 또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보기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다면, 내 말의 진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존 버거와 같은 보기 방식에 내재한 문제점 -- 이른바 탈신비화를 통한 예술 범주의 해체 -- 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벤야민의 미학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독일 낭만주의에서 비평의 개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던 벤야민과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과 <생산자로서의 작가>라는 문제작을 쓸 무렵의 벤야민를 연결시키는 하나의 끈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일단 그림을 보면서 설명을 해보겠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으로부터 물화의 단계를 밟기 시작했던 서구 누드화의 한 면모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겉 보기와 달리, 이 그림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는 지극히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육체적 쾌락은 허상이라는 르네상스 특유의 내러티브를 이 그림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내러티브는 그냥 매너리즘일 뿐이고, 정작 이 그림이 소용되었던 바는 왕의 결혼 선물이자 침실 장식용으로, 성욕을 북돋우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르네상스 예술에 공존하는 역설적 이상과 현실의 공존이야말로 바로 벤야민 미학의 존재 조건이었던 셈이다. 벤야민은 이런 예술의 딜레마를 풀기 위해 탈신비화와 재신비화를 동시에 극복하고, 이 역설의 상황 그 자체, 말하자면, 지극히 신화적인 주제로 너무도 인간적인 현실성을 말하는 근대 예술의 속성을 긍정할 것을 주문했던 것이다. 내가 벤야민에게서 김영민의 그림자를 설핏 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서구 인문학으로 '우리'를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여기에서 우문으로 판명 나는 셈.
여하튼, 이런 관점에서 한번 그림을 들여다 보자.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상아처럼 매끄러운 육체를 가진 비너스가 큐피드와 입을 맞추고 있는 장면이다. 이 여인을 비너스로 볼 수 있는 까닭은 왼손에 들려 있는 황금사과와 발치에 있는 비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는 소년을 큐피드로 볼 수 있는 근거 또한 화살과 날개 때문이다. 이렇듯 이 그림은 등장인물 하나 하나가 알레고리를 함유하고 있는데, 비너스의 뒷편에서 장미 꽃잎을 두 손으로 한움큼 쥐고서 던지려고 하는 소년은 '쾌락'을 뜻하고, 그 소년의 발밑에 놓여 있는 가면은 실없이 웃고 즐기면서 세월을 허송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년의 뒤에 반인반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은 한손에 꿀을 들고 있고, 다른 한손에 전갈의 독침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속임수'를 암시하는 것으로 대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형상들에 비해 더 중요한 것들은 바로 이런 그림의 후면에 배치되어 있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형상들이다. 먼저, 오른 쪽에 우람한 팔뚝으로 푸른 베일을 걷어내고 있는 노인네가 유명한 크로노스로서, '시간'을 의미한다. 이 크로노스를 나타내는 애트리뷰트는 모레시계나 낫이다. 나중에 바로크 시기에 이르면 이런 크로노스의 형상은 낫을 들고 있는 해골의 모습으로 변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 크로노스의 반대편에서 애절한 표정으로 도망치고 있는 여인은 은폐이고 망각이다. 크로노스가 걷어치운 장막 너머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흉측하게 생긴 노파는 '질투'를 의미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브론치노의 그림은 훌륭하게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는 르네상스 계몽주의의 이념을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벤야민의 미학이 개입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벤야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브론치노의 그림은 섹슈얼리티도, 신화도 아닌, 근대 예술의 딜레마 자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근본적인 범주 전환이 발생한다.
장막이 걷힌 뒤에 나타나는 노파의 모습이 흉측한 것은 바로 그 모습이 '비밀'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바로 이런 '비밀' 또는 '아우라'야말로, 예술을 예술이게 만드는 조건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 비밀의 해체, 말하자면 브론치노의 그림이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그 해체의 과정은 근대 예술의 운명 자체이기도 했다. 이런 역설의 상황에 대해 벤야민이 내리는 처방이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계시는 계시이되, 종교적 계시가 아닌 불경한 계시, 또는 세속적 계시이다.
이상적 비너스의 육체를 '예술'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조건을 자본주의는 예술가에게 강제한다. 소비대중들은 더 이상 비너스를 여신으로 보지 않는다. 쿠르베가 인습적 금기를 깨고 여인의 음모를 그려넣은 것은 이런 상황을 똑바로 직시할 것을 당시 제도권 예술집단에 주문했던 상징적 행위였다. 이제 소비대중들은 예술을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거나 아니면 심지어 그 예술작품 속의 주인공으로 자신들을 변신시키려고 한다.
오늘날 서구 사회를 휩쓸고 있는 다이어트와 성형수술 열풍을 상기해보라. 이른바 스타 연예인들은 이런 완벽한 육체를 소유한 살아있는 그리스의 신상들이다. 벤야민이 주목했던 새로운 예술의 조건은 이런 시뮬라크르의 확대재생산 구조였다. 과연 벤야민이 말하는 세속적 계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벤야민은 이런 계시의 진원지를 일종의 '집단 무의식'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과연 이런 전제는 적절한 것일까? 자본주의의 상품화를 넘어서서 이런 내재장은 얼마나 '순수한' 영역을 확보할 수 있을까? 벤야민이 아직 살아 있다면, 이 질문에 대해 과연 어떤 대답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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