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은 본래 동호 종족으로 그들의 선조가 흉노에 의해 격파되자 선비산에 의지하여 자리잡았었다. 위나라 청룡(233~237) 연간에 부락의 추장 가비능이 점차 사납고 교만해지더니 유주자사 왕웅(王雄)에게 살해되자 그 무리들이 마침내 미약해져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으로 달아났다. 원위(元魏-북위) 때 이르러 스스로 거란이라 불렀다.
그 땅은 경사에서 곧장 동북방 5천 리 남짓에 있으며, 동쪽은 고려에 이르고 서쪽은 해(奚)이며 남쪽은 영주(營州)이고 북쪽은 말갈 및 실위로서, 냉형산(冷 山)에 가로막혀 있는 것을 스스로 견고하게 여긴다. 활로서 수렵하며 거처는 고정된 곳이 없다. 그들의 군장은 대하(大賀)씨이며 날랜 군사가 4만 명이 있고 여덟 부락로 나뉘어져 돌궐에 신하로 복속되어 사근(俟斤)이 되어 있다. 무릇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치를 때는 곧 모든 부락이 빠짐 없이 모이고, 수렵을 할 때는 부락마다 스스로 행한다. 해와 더불어 평화롭지 않으며 싸움에서 불리하면 번번히 선비산에 숨어들어 수비한다. 풍속은 돌궐과 대략 같다. 죽으면 묘를 쓰지 않고 말 수레에 주검을 실어 산으로 들어가서 나무의 꼭대기에 놓아둔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지만 부모가 죽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며, 또한 상복의 기간이 없다.
무덕(618~626) 연간에 그들의 큰 추장인 손오조가 말갈의 우두머리 돌지계와 더불어 함께 사람을 보내와서 예방하였으며, 간혹 군장으로서 작은 자들은 들어와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2년 뒤에 군장이 사자를 보내어 이름 있는 말과 많은 담비를 바쳤다. 정관(627~649) 2년에 마회가 와서 항복하였다.
돌궐의 힐리가한은 바깥 오랑캐들이 당나라와 힘을 합치지 못하게 하고자 양사도를 거란과 바꾸자고 요청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거란은 돌궐과 같은 무리가 아니며 지금 나에게 항복하였는데 어찌된 연고로 그들을 찾는가? 양사도는 당의 호적에 편성되어 있다가 우리의 주와 부락을 도적질함에 돌궐이 번번이 도움이 되어주었으니 우리의 장수가 그를 사로잡을 것이지 항복한 자와 바꿀 수는 없다.] 하였다.
다음해에 마회가 다시 들어와 예방하니 북과 깃발을 하사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항상 조공하였다. 제께서 고려를 정벌할 때 추장들을 모두 징발하여 해의 수령과 함께 군대를 따르게 하였다. 제께서 돌아오는 길에 영주를 지나며 그들의 우두머리 굴가와 노인들을 모두 불러 차등 있게 화려한 비단을 하사하고 굴가로 좌무위장군을 삼았다.
큰 추장인 욕흘주 곡거가 또 무리를 거느리고 귀순하니 곧 그의 부락으로 현주를 삼고 곡거를 임명하여 자사로 삼아 영주도독부에 예속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굴가가 부락을 모두 가지고 내지로 붙좇으니 이에 송막 도독부를 설치한 뒤에 굴가를 사시절 10주제군사·송막도독으로 삼고 무극남에 봉하여 이씨 성을 하사하였으며, 달계부를 초락주로 삼고 홀편부를 탄한주로 삼고, 독활부를 무봉주로 삼고, 분문주를 우릉주로 삼고 도편부를 일련주로 삼고 예해부를 도하주로 삼고, 추근부를 만단주로 삼고, 복부를 필려와 적산의 두 주로 삼고는 모두 송막부에 예속시키고 곧 욕흘주들을 그곳의 자사로 삼았다.
굴가가 죽자 해와 더불어 연이어 반역을 하니 행군총관 아사덕추빈 등이 송막도독 아복고를 잡아 동도(東都:낙양)에 바쳤다. 굴가에게 두 후손이 있었는데 고막리는 좌위장군·탄한주 자사가 되어 귀순군왕에 봉하여졌으며, 진충은 무위장군·송막도독이 되었다. 그리고 오조에게 만영이라는 후손이 있었는데 귀성주자사가 되었다.
영주도독 조문홰는 교만하고 허욕이 많아 수 차례 그의 휘하를 업신여기니 진충 등이 모두 원망하였다. 만영은 본디 시자로서 입조하였던 적이 있었기에 중국의 어려움과 쉬움을 알고 있어서 난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곧 함께 군사를 일으켜 문홰를 살해하고 영주를 도적질하여 반란하였다. 진충은 스스로 무상가한이라 부르고 만영을 장수로 삼아 사방으로 군사를 놓아 공략하여 향하는 곳마다 번번이 굴복시키고는 거듭 간섭하지 않았으며, 수만의 무리로서 망령되게 10만이라 말하며 숭주를 공격하여 토격부사 허흠적을 사로잡았다.
무후가 노하여 조서를 내려 응양장군 조인사, 금오대장군 장현우, 우무위장군 이다조, 사농소경 마인절 등 28명의 장군에게 그를 치게 하였으며, 양왕 무삼사를 유관도안무대사로 삼고 납언 요숙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만영의 칭호를 고쳐 만참이라 하고 진충을 진멸이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서협석 황장곡에서 싸움을 치렀는데, 왕의 군대가 거듭 패하고 현우와 인절 등이 모두 포로가 되어 사로잡혔다. 진격하여 평주(平州)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패했다는 글이 전달되어 알려지자 무후가 이에 우무위대장군 건안왕 무유의로 청변도대총관을 삼아 거란을 치게 하였으며, 천하의 노복 가운데 용기가 있는 자를 모집하여 관가에서 그 주인에게 값을 치르게 하고 모두 징발하여 오랑캐를 치게 하였다. 만영이 말의 입에 재갈을 하고 야음을 틈타 단주(檀州)를 습격하니 청변도부총관 장구절이 결사대 수백 명을 모집하여 들이쳐 싸우자 만영이 패하여 산으로 달아났다. 얼마지 않아 진충이 죽자 돌궐의 묵철이 그 부락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만영이 흩어졌던 군사를 거두어 다시 떨치고 일어나서 별장 낙무정과 하아소 등으로 하여금 기주(冀州)로 들어가게 하여 자사 육보적을 살해하고 수천 명을 약탈하였다.
무후가 진충이 죽었음을 듣고 다시 조서를 내려 하관상서 왕효걸과 우림위장군 소굉휘로 하여금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거란을 토벌하게 하니, 동협석에서 싸워 군대가 패하고 효걸은 그곳에서 죽었다. 만영이 이미 승세를 굳히고 마침내 유주를 도륙하였다. 유의가 장수를 보내어 그를 토벌하여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이겨내지 못하였다.
이에 우금오위대장군 하내군왕 무의종을 명하여 신병도대총관으로 삼고, 우숙정대어사대부 누사덕을 청변도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위대장군 사타충의를 청변중도전군총관으로 삼아 군사 20만으로 적을 치게 하였다. 만영은 날래기가 월등하여 북을 울리며 남으로 내려가 영주(瀛州)에 예속된 현들을 해치고 제멋대로 하는 등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그러자 신병도총관 양현기가 해의 군대를 거느리고 그의 후미를 엄습하니 거란이 크게 패하였으며, 하아소를 노획하고 별장 이해고와 낙무정을 항복시키고 거두어 들인 병장기가 산더미 같았다.
만영이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다 흩어졌던 대오를 다시 합쳐 해와 공박하였는데 해가 사면에서 공격하니 이에 크게 무너지고 만영은 떨어져 나와 달아났다. 장구절이 세 곳에 매복을 하고 그의 동정을 엿보았는데 만영이 곤궁하여지자 집안에서 부리던 노복과 더불어 말을 가벼이 하고 노하( +路河)의 동쪽으로 달아나더니 몹시 피곤하여 수풀 아래 누워 있으니 노복이 그의 머리를 베었으며, 장구절이 그것을 동도에 전하자 나머지 무리들이 허물어졌다.유의가 개선하여 돌아오자 무후가 기뻐하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를 고쳐 신공(神功)이라고 하였다.
거란이 능히 자립하지 못하고 마침내 돌궐에 붙좇았다. 구시 원년(700)에 조서를 내려 좌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우무위장군 낙무정으로 하여금 거란을 토벌하게 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오랑캐의 뛰어난 장수로서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고 수 차례 관군을 곤공하게 하였던 자들인데 이때에 이르러 공적이 있게 되었다.
개원(713~741) 2년에 진충의 사촌동생 도독 실활이 돌궐 묵철의 정치가 쇠퇴하자 부락을 거느리고 힐리발이건철과 더불어 와서 귀순하니 현종이 단서(丹書)와 철권(鐵券)을 하사하였다. 2년 뒤(716)에 해의 우두머리 이대포와 더불어 모두 들어오니 조서를 내려 다시 송막부를 설치하고 실활을 도독으로 삼아 송막군왕에 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을 제수하였으며, 그대로 그 부에 정석군을 설치하여 실활로 경략대사로 사은 뒤 거느리고 있던 여덟 부락에서 우두머리를 모두 발탁하여 자사로 삼았다. 조서를 재려 장군 설태로 압번낙사로 삼아 군대를 감독하고 진압하여 위무하게 하였다. 제께서 도평왕의 이손 양원사의 여식을 영락공주로 삼아 실활에게 시집보냈다. 다음 해에 실활이 죽자 특진에 추증하였으며, 제께서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그의 아우 중랑장 사고로 하여금 피봉된 관작과 다스리던 곳을 답습하여 있게 하였다. 다음 해(717)에 사고가 공주와 더불어와서 예방하니 연회를 베풀고 물품을 하사하기를 후하게 하였다.
가돌우라는 자가 있어 정석군의 부사가 되었는데, 굳세고 용감하여 군중의 신임을 얻으니 사고가 그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가돌우가 도리어 사고를 공격하니 사고가 영주(營州)로 달아났다. 도독 허흠담이 주의 장졸 5백 명으로 해의 군장인 이대포의 군사를 합쳐 함께 가돌우를 공격하엿으나 승리하지 못하였으며, 사고와 이대포가 모두 죽자 흠담이 두려워하여 군대를 옮겨 유관(楡關)으로 들어갔다.
가돌우가 사고의 사촌동생 울우를 받을어 군주로 삼고 사자를 보내 사죄하니 조서를 내려 울우를 임명하여 송막군왕으로 삼고 가돌우는 사면하여 주었다. 울우가 들어와 예방하자 솔갱령에 제수하고 종실출신의 여인 모용을 연군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가돌우 역시 들어와 예방하자 좌우림위장군으로 발탁하엿다. 울우가 죽고 아우 토우가 자리를 이었는데, 가돌우와 틈이 생겨 능히 그 휘하를 안정시키지 못하더니 공주를 데리고 달아나오자 요양군왕에 봉하고 숙위하여 머무르게 하였다.
가돌우가 진충의 아우 소고를 받들어 무리를 통솔하니 조서를 내려 왕위의 답습을 허락하였다. 천자께서 봉선을 행하자 소고가 여러 오랑태의 우두머리와 더불어 모두 천자가 머무른 곳을 좇았다. 다음 해(718)에 좌우림위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광화군으로 옮겨 왕으로서 다스리게 하고 종실 출신의 여인 진을 동화공주로 삼아 소고에게 시집보냈으며 조서를 내려 그 부락의 추장 1백여 명에게 관직을 주니 소고가 아들을 들여보내 시위하게 하였다.
가돌우가 다시 들어오니 재상 이원굉이 예의로서 대하지 않자 불만에 찬 모습으로 돌아갔다. 장열이 이르기를 [저놈은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단지 이익이 되는 것만 향한다. 더욱이 지금은 나라를 지탱하고 있으며 아랫백성들이 붙좇고 잇는 것이며, 예의를 가장하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이다.] 했다. 3년 후(721)에 가돌우가 소고를 살해하고 굴열을 세워 왕으로 삼으며 해를 위협하여 함께 돌궐에 투항하니 공주는 평로군(平盧軍)으로 달아났다.
조서를 내려 유주장사·지범양절도사 조함장으로 하여금 그를 치게 하고 중서사인 배관과 급사중 설품을 파견하여 건장한 병사들을 크게 모집하게 하였으며, 충왕 준을 임명하여 하북도행군원수로 삼고 어사대부 이조은과 경조윤 배주선으로 그를 보좌하게 한 뒤 장수 정백헌·장문엄·송지제·이동몽·조만공·곽영걸 등 여덟 총관의 군사로 거란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또한 충왕에게 하동도제군원수를 겸하게 하였으나 왕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부상서신안군왕 의로 지절하북도행군부원수를 삼아 함장과 더불어 변방을 나서서 오랑캐를 체포하게 하니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가돌우는 달아나고 해의 무리들은 항복하니 왕이 두 오랑캐의 포로의 수급으로 모든 사당에 고하였다.
다음해(722)에 가돌우가 변경을 도적질하자, 유주장사 설초옥과 부총관 곽영걸·오극근·오지의·나수충 등이 1만 명의 기병과 해를 거느리고 그를 공격하여 도산 아래에서 싸웠다. 가돌우가 돌궐의 군사로 쳐들어오니 해가 두려움에 두 마음을 품고 그 물리들이 험한 곳으로 달아났으며, 지의와 수충이 패하고 영걸과 극근은 그곳에서 죽었고 살해된 당의 군사가 1만여 명이 되었다.
제께서는 장수규를 발탁하여 유주장사로 삼고 그를 다스려 공략하게 하였다. 장수규는 원래 뛰어난 장수이기에 가돌우가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신하로 복속할 것이라 청하고는 점차 서북쪽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돌궐에 의지하였따. 그들의 벼슬아치인 이과절이 가돌우와 더불어 안으로 평화롭지 못하자 장수규가 빈객인 왕히를 보내어 은밀히 그를 맞이할 것이라 하고는, 군사로 가돌우를 에워싸니 이과절이 곧 밤을 틈타 가돌우와 굴열 및 그의 도당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스스로 귀순하여 왔다. 수규가 이과절로 하여금 그 부락을 통솔하게 하고 가돌우 등의 수급을 함에 담아 동도에 전했다. 이과절을 임명하여 북평군왕으로 삼고 송막도독에 제수하였다. 가돌우의 잔당들이 과절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그의 집안을 도륙하였는데, 그 중 한 아들인 나건이 안동으로 달아나오자 좌효위장군의 관직을 수여하였다. 25년(737)에 장수규가 거란을 토벌하여 다시 그들을 격파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지금부터 전공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게 하였다.
천보(742~756) 4년에 거란의 큰 추장인 이회수가 항복하자 송막도독에 임명하여 숭순왕에 봉하고 종실 출신의 여인 독고를 정락 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내었다. 이해에 공주를 살해하고 반란하자 범양절도사 안녹산이 그를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다시 그 추장 해락을 봉하여 공인왕으로 삼고 송막도독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안녹산이 바야흐로 총애를 받자 표를 올려 거란을 토벌하는 것으로 황제의 뜻에 붙좇으려 한다고 하였다. 유주(幽州)와 운중(雲中) 및 평로(平盧)와 하동(河東)의 군사 10여 만을 일으키고 해를 길잡이로 삼아 황수(潢水)의 남쪽에서 크게 싸웠으나 안녹산이 패하여 죽은 자가 수천 명이었으며, 이로부터 안녹산은 서로 더불어 침략하는 등 해결을 보지 못하다가 그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거란이 개원과 천보(742~756) 연간에 사신으로 에방하고 공물을 바친 것이 무려 스무차례였다. 에전의 일로서 범양 절도로 해와 거란의 사절을 단속하였었는데, 지덕(756~758)으로부터 그 후로는 번국들이 제멋대로 날뛰던 것이 진정되고 스스로 안정되더니 막아지키고 동정을 살피며 더욱 삼갔기에 변방에는 변고가 생기지 않았으며, 해와 거란 역시 들어와 노략질 하는 것이 드물게 되었고 해마다 추장과 호족 수십 명을 가려 장안으로 들어와 조회하면 매번 불러들여 접견하고 질서 있게 물품을 하사하였으며, 그들이 휘하에 거느리고 왔던 수백 명은 모두 유주에 머무르게 하였다.
지덕과 보응(762~763) 때 다시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으며, 대력(766~779) 연간에 열 세차례 정언(785~805) 연간에 세 차례, 원화(806~820)연간에 일곱차례, 긜고 대화(827~835)와 개성(836~840) 사이에 무릇 네 차례엿었으나, 천자께서 그들이 밖으로 회골(回 )에 붙좇은 것을 미워하여 다시는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관작을 수여하지 않았다.
회창(841~846) 2년에 회골이 격파되자 거란의 추장 굴수가 비로소 다시 내지로 붙좇기에 우누히장군·수우무위장군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유주절도사 장중무가 회골에게 주었던 예전의 인장을 바꾸어 당의 새로운 인장을 하사하였는데 [봉국거란지인]으로 되어 있다.
함통(860~874)연간에 그 왕 습이지가 다시 사자를 보내 들어와 예방하더니 그 부락이 점차 강해졌다. 습이지가 죽자 친족인 흠덕이 자리를 이었다. 광계(885~888) 대 바야흐로 천하의 도적이 들고 일어나서 북쪽의 강역에도 변고가 많아지니 이에 해와 실위(室偉)를 노략질하였으며, 소소한 부락의 종족들이 모두 그에게 복속되자 유주(幽州)와 계주( 州)로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유인공이 군대를 모두 동원하여 적성산을 넘어 그를 토벌하며 해마다 변방 아래의 초원에 불을 놓아 그들로 하여금 머무러 목축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말이 많이 죽게 되자 거란이 이에 회맹을 구걸하여 좋은 말을 바치고 방목지를 구하기에 유인공이 이를 허락하였다. 다시 약속을 깨뜨리고 들어와 노략질을 하였는데, 유수광이 평주(平州)를 지키고 있자니 거란이 1만의 기병으로 쳐들어옴에, 유수광이 거짓으로 그들과 화친하여 들녘에 장막을 설치하고 음식을 갖추어 놓았다가 복병을 일으켜 그 대장을 사로잡았다. 오랑캐의 무리들이 대단히 슬퍼하며 말 5천 필을 바치고 속죄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며, 흠덕이 많은 뇌물을 보내며 빌기에 이에 더불어 강화를 맺으니 10년 동안 감히 변경에 근접하지 않았다.
해 역시 동호(東胡)종족으로 흉노에 의해 격파되자 오환산에 의지하여 머물렀다. 하의 조조가 그의 장수 답돈을 참수하였는데, 아마도 그의 후손일 것이다. 원위(元魏) 때 스스로를 고진해(庫眞奚)라고 부르며 선비의 옛 땅에 머무르니 경사에서 곧장 동북쪽 4천 리이다. 그 땅은 동북쪽에 거란과 접해있고 서쪽은 돌궐이며, 남쪽은 백랑하(白狼河)이고, 북쪽은 습( )이다.
돌궐과 더불어 같은 풍속이니, 물과 풀을 쫓아 목축하고 모전으로 지은 오두막에 기거하며 수레를 둥글게 둘러 놓고 진영으로 삼는다. 그 군장은 항상 5백 명으로 하여금 무기를 지니고 본영(牙中)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부락은 산과 계곡에 흩어져 있으며, 조세를 거두어들이지 않고 활로 수렵하여 재물을 장만하며, 검은 기장을 많이 심고 수확해서는 산 아래에 땅을 파서 만든 광에 저장한다. 나무를 잘라 절구를 만들며 질그릇 솥에 죽을 끓이고 찬물을 섞어 먹는다. 전투를 좋아하며 군사로는 다섯 부가 있는데 부마다 한 명의 사근이 다스린다.
그 나라의 서쪽은 대락박(大洛泊)에 맞닿아있으며 회흘(回紇)의 본영과는 3천 리의 거리에 있고 토호진수(土護眞水)에 많이 의존하여 있다. 그곳의 말은 산을 잘 오르며 양은 검다. 한 여름에는 반드시 냉형산(冷 山) 으로 옮겨 의지하여 머무르는데 그 산은 규주에서 곧장 서북쪽에 잇다. 수나라 때 이르러 비로소 고진을 떼어버리고 단지 해라고 일컬었다.
무덕(618~626) 연간에 고개도가 그들의 군사를 빌려 다시 유주(幽州)를 노략질하자 장사 왕선이 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태종 정관(627~649) 3년에 비로소 와서 예방하였으며 17년동안 무릇 네 차례 조공했다. 제께서 고려를 정벌하자 그들의 큰 추장인 소지가 전장을 좇으며 공로가 있었다. 몇 년 되지 않아 그들의 우두머리 가도자가 내지로 붙좇으니 제께서는 요락도독부를 설치하고 가도자를 임명하여 사지절 6주제군사·요락도독으로 삼아 누번현공에 봉하고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
아회부를 약수주로 삼고, 처화부를 기려주로 삼고, 오실부를 낙괴주로 삼고, 도계부를 태로주로 삼고, 원사절부를 갈야주로 삼고는 각각의 추장인 욕흘주를 자사로 삼아 요락부에 예속시켰다. 다시 동이도호부를 영주(營州)에 설치하고 송막과 요락의 땅을 겸하여 통솔하게 하고 동이교위를 두었다.
현경(656~661) 연간에 가도자가 죽자 해가 마침내 반란하였다. 5년(660)에 정양도독 아사덕추빈과 좌무위장군 연타제진 및 거연주도독 이함주 냉형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 다음해에 조서를 내려 상서우승 최여경에게 부절을 지니고 정양 등의 세 도독을 통솔하여 그를 토벌하게 하니, 해가 두려워 항복을 구걸하기에 그 왕 필제의 머리를 베었다.
만세통천(696~697) 중에 거란이 배반하자 해 역시 반란을 일으키고 돌궐과 더불어 서로간에 안팎이 되었기에 양번(兩蕃)이라 불렀다. 연화(712) 원년에 좌우림위대장군 유주도독 손전과 좌효위 장군 이해락 및 좌무위장군 주이제로 군사 12만을 거느리고 삼군으로 나뉘어 그들의 부락을 습격하였는데 냉형에 진영을 설치하였던 전위군 이해락이 해의 추장 이대포와 싸워 불리하였다. 손전이 두려워 군대를 거두고 이대포에게 거짓으로 이르기를 [나는 조칙을 받들과 와서 너희를 위무하려 하였는데 해락이 통제를 위반하여 번번히 싸움하니, 이것은 천자의 뜻이 아니기에 이제 그를 참수하여 두루 돌릴 것이다.] 하니 이대포가 이르기를 [진실로 우리를 위무하려 하였다면 하사한 물품이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손전이 군중의 비단 및 도포와 띠 등을 내어 그에게 주자 이대포가 사례하고 손전에게 청하여 군사를 돌리게 하엿더니 군대가 일제히 벗어나며 앞을 다투어 대오가 없으므로 이대포의 군사가 이를 뒤쫓다가 마침내 크게 패퇴시키니 수만 명이 죽고 다쳤으며, 손전과 주이제는 포로로 사로잡혀 묵철에게 송치되어 그곳에서 해를 입었다.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변고가 많았기에 그를 토벌할 겨를이 없었다.
현종 개원(713~741) 2년에 오소회락을 사신으로 보내 항복을 비니, 요락군왕에 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요락도독의 관작을 수여하였다. 조서를 내려 종실 출신의 여인 신을 고안공주로 삼아 이대포에게 시집보냈다. 다음 해(715)에 직접 조정에 들어와 결혼하였다. 비로소 영주(營州)도독부를 부활시키고 우령장군 이제를 파견하여 부절을 지니고 호송하게 하였다. 이대포는 후에 거란의 가돌우와 싸우다 죽었다. 아우 노소가 그 부락을 이끌며 왕의 자리를 답습하였다. 조서를 내려 보색군경략대사를 겸하게 하였다.
아관 색묵갈이 반란을 꾀하자 공주가 술자리를 베풀고 그를 유인하여 살해하니 제께서 그 고을 어여삐 여겨 공주에게 물품 수만을 하사하였다. 마침 그의 어미와 더불어 서로 간에 고자질 하는 등 허물이 있자 성안공주의 여식 위를 동광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3년 후(718)에 노소를 봉성군왕에 봉하고 우우림위장군의 관작을 수여하였으며, 그들의 수령을 무려 2백 명 발탁하여 모두에게 낭장의 직위를 주었다.
얼마 있다 거란의 가돌우가 반란을 일으키고 해의 무리를 위협하여 함께 돌궐을 붙좇자 노소가 능히 제아하지 못하고 유관(楡關)으로 달아나니 공주는 평로(平盧)로 달아나왔다. 유주장사 조함장이 청이군을 일으켜 그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그 무리들이 점차 스스로 귀순하여 왔다. 다음해 신안왕 의가 그들의 추장 이시쇄고 등 부락의 유목민 5천 가구를 항복시키니, 그 땅읠 귀의주로 삼고 그대로 이시쇄고를 왕으로 다스리게 하여 우우림군대장군·본주도독에 임명하였으며, 비단 10만을 하사하고 그의 부락을 유주의 곁에 두도록 하였다.
이시쇄고가 죽자 아들 연총이 자리를 잇고는 거란과 더불어 또 반란을 하였으나 유주의 장수규에 의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연총이 항복하자 다시 요락도독·회신왕에 임명하고 종실 출신의 여인 양으로 의방공주를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연총이 공주를 살해하고 다시 반란하자 조서를 내려 다른 추장인 파고를 세워 소신왕·요락도독으로 삼아 그 부락을 안정시키게 하였다.
안록산이 범양에 절도사로 있으면서 변방의 공로를 속여 수 차례 적과 더불어 전멸할 때까지 싸움을 벌였다 하고 포로를 한껏 구밈질 하여 바쳤다. 그들의 군주인 이일월을 주살하고 포로한 자 가운데 날래고 건장한 자를 끌어들여 운남에서 수자리를 서게 하였다. 제의 시대가 다할 때까지 무릇 여덟 차례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으며, 지덕(756~758)과 대력(766~779) 사이에는 열 두차례 였다.
정원(785~805) 4년에 실위와 더불어 진무를 공격했다. 7년 후에 유주(幽州)에서 그들의 무리 6만을 살해하였다. 덕종 때 두 차례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다. 원화(806~820) 원년에 군주 매락이 직접 들어와 예방하니 검교사공·귀성군왕에 임명하였다. 부락의 추장 색저를 좌위위장군·단계주유변병마사로 삼고 몰욕고를 평주유변병마사로 삼으며 모두에게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은밀히 회골 및 실위의 군사와 결탁하여 서성과 진무를 침범했다. 대략 헌종 시기에 네 차례 예방하고 조공을 바쳤다.
대화(827~835) 4년에 다시 변방을 도적질하자 노룡 이재의가 그를 격파하여 대장 2백여 명을 사로잡고 그들의 장수 여갈을 포박하여 와서 바치니, 문조이 관과 때를 하사하고 우효위장군에 제수하였다. 5년 뒤에 대수령 익사랑이 와서 에방하였다. 대중(847~860) 원년에 북부의 여러 산에 있던 해들이 모두 반란하자 노룡 장중무가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고 유목민의 부락 20만여 호를 불살랐으며, 그들의 자사 이하 면이 3백 명 및 양과 소 7만 두를 포획하고 수레 5백 승을 끌고 와서 경사에 바쳤다. 함통(860~874) 9년에 그들의 왕 돌동소가 대도독 살갈을 사신으로 보내와서 예방하였다.
그후로 거란이 바야흐로 강성해지니 해가 감히 필적하지 못하고 모든 무락을 데리고 복속하였다. 오랑캐의 정치가 가혹하여 해가 이를 원망하더니 그들의 추장 거제가 별도의 부락을 이끌고 내지로 붙좇으며 규주( 州)의 북쪽 산에 의지하여 거처 , 마침내 동쪽의 해와 서쪽의 해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실위는 거란의 별종으로 동호의 북쪽 변방에 있으니 아마도 정령의 후예일 것이다. 땅은 황룡의 북쪽에 자리하고 노월하의 곁에 있으니 경사에서 곧장 동북쪽 7천 리이며, 동쪽은 흑수말갈이고 서쪽은 돌궐이며, 남쪽은 거란이고 북쪽은 바다에 접해있다.
그 나라는 군자잉 없이 단지 큰 추장이 있어 모두 막하돌이라 부르는데 그 부락을 관할하여 돌궐에 붙좇는다. 작은 곳은 1천 호이고 큰 곳은 수천 호이며, 하천과 게곡에 연하여 흩어져 물과 풀을 좇아 거처하며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 매번 수렵하게 되면 곧 서로 불러 모이게 하고 일을 마치면 돌아가는데 서로 복속이나 제재하지 않는 까닭에 비록 용맹하여 굳세어 전투를 즐긴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능히 강국이 되지 못하였다.
나무를 깎아 쟁기를 만들어 사람이 끌어 경작을 하니 밭의 수확이 매우 적다. 그곳의 기후는 추운 날이 많으며 여름이면 안개와 비가 많고 겨울에는 서리와 싸라기눈이 많다. 그들의 풍속에 부유한 사람은 오색 구슬을 목에 늘어뜨리며, 시집가고 장가들게 되면 곧 남자가 먼저 여자의 집에서 3년 동안 고용을 산 뒤에 재산을 나누어 부인과 함께 싣고서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돌아온다. 남편이 죽으면 재가하지 않는다.
매 부락 공동으로 큰 시렁을 얽어서 만들어 놓고 사람이 죽으면 주검을 그위에 놓아두는데 상복의 기간은 3년이다. 그 땅에는 금과 쇠가 적어 고려에서 가져다 쓴다. 병기로 뿔활과 호시가 있으며 사 람들은 활쏘기에 매우 뛰어나다.
매번 무더운 여름이면 서쪽으로 특발과 차대 등 두 산에 의지하여 거처한다. 산에는 초목과 조수가 많고 날아다니는 모기에 괴롭힘을 당하기에 나무 위에 집을 짓고 거처하여 그 해를 피한다. 우두머리가 죽으면 자제가 대를 이으며 자제가 없으면 뛰어난 인물을 추대하여 자리를 잇게 한다. 소수레를 끌며 타고다니고 거친 대자리로 집을 만들며, 물을 건너고자 하면 땔나무를 묶어 뗏목을 만들거나 혹은 가죽으로 배를 만든다. 말은 모두 풀로 된 언치를 얹고 밧줄로 굴레와 고삐를 한다. 거처하는 곳으로는 혹은 가죽으로 집을 덮어 가린 것이거나 혹은 굽은 나무에 거친 대자리를 덧씌운 것이며, 옮길 때는 수레에 실어서 이동한다. 그곳의 가축은 양은 없고 말은 적으며 소가 있으나 사용하지 않으며, 큰 돼지가 있어 그것을 먹고 그 가죽을 무두질하여 옷을 만드는데 마치 깔개와 같다. 그들의 언어는 말갈의 언어이다.
부락은 무릇 20개 남짓으로 나뉘어져 있다. 영서부·산북부·황두부 등이 강한 부락이며, 대여자부·소여자부·파와부·눌북부·낙단부 등은 모두 유성의 동북에 자리하고 있는데 가까운 것은 3천 리이고 먼 것은 6천 리 남짓이다.
가장 서쪽에는 오소고부가 있는데 회흘과 접하며 구륜박의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구륜박에서 동쪽으로 이색몰부가 잇으며 조금 동족으로는 색갈지부가 있으니 가장 강한 부락으로서 연지하(燕支河)라고도 불리는 철하( 河)의 남쪽에 거처하고 있으며, 더욱 동쪽에는 화해부와 오라호부 그리고 나례부와 영서부 등이 있고 곧장 북쪽은 눌비지부라고 한다. 북쪽에는 큰 산이 있으며 산의 바깥을 대실위라 일컫는데 실건하(室建河)에 연해있다. 하천은 구륜박으로부터 나와서 비스듬히 동쪽으로 흐르는데 하천의 남쪽에느 몽와부가 있고 그 북쪽은 낙탄부이며, 물줄기는 동쪽의 나하(那河)와 합쳐지고 그 북쪽에는 동실위가 있으니 아마도 오환 가운데 동남쪽으로 처져 있다가 낙후된 나머지 무리일 것이다.
정관(627~649) 5년에 처음으로 들어와 많은 담비를 바치고 후에 다시 들어와 예방하였다. 장수(692~694) 2년에 반란하자 장군 이다조가 그들을 쳐서 평정하였다. 경룡(707~710) 초에 다시 예방하여 공무을 바치며 청하여 돌궐을 토벌하는데 돕고자 하였다. 개원(713~741)과 천보(742~756) 사이에 무릇 열 차례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으며, 대력(766~779) 연간에는 열한 차례였다.
정원(785~805) 4년에 해와 더불어 함께 진무를 노략질하였는데, 절도사 당조신이 막 교외에서 천자의 사자를 마중하다가 놀라서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달아나자. 실위가 조서를 지닌 사자를 사로잡고는 크게 살육하고 약탈하여 돌아갔다. 다음 해(789)에 사자가 와서 사죄하였다. 대화(827~835) 연간에 세 차례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으며, 대중 (847~860) 연간에 한 차례 오고, 함통(860~874) 연간에는 큰 추장 달열이 해와 더불어 모두 사신을 보내 겨앗에 이르렀으나 뒷일들은 명백한 것이 아니고 없어지기도 하여 역사를 적는 관리가 전하지 못하였다.
흑수말갈은 숙신의 땅에 기거하며 읍루라고도 일컫는데 원위(元魏)때는 물길이라 일컬었다. 경사에서 곧장 동북쪽 6천리로서 동쪽은 바다에 연해있고 서쪽은 돌궐에 속하며, 남쪽은 고려이고 북쪽은 실위이다. 수십개의 부락으로 떨어져 있으며 추장들이 각기 스스로 통치한다.
그들 가운데 알려진 것은 속말부라 하여 가장 남쪽에 거처하는데,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불리는 태백산(太白山)에 닿아 있고 고려와 접해있으며 속말수(粟末水)에 의지하여 기거하고 있으니 그 물줄기는 서쪽의 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의 타루하로 들어가며, 족므 동북쪽은 골돌부라 하며, 또 그 다음으로 안거골부라 하며, 더욱 동쪽은 불열부라 하며 거골의 서북쪽을 흑수부라 하며, 속말의 동쪽을 백산부라 한다. 부락사이는 먼 곳이 3.4 백리이고, 가까운 곳은 2백 리이다.
백산은 본디 고려에 신하의 예로서 복속되었는데 천자의 군대가 평양을 탈취하자 그 무리들이 당으로 많이 들어왔으며, 골돌과 안거골 등은 모두 분산되어 점차로 미약해져 들리는 바 없게 되었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뿔뿔이 발해로 들어갔다.
오직 흑수만이 온전하게 강성하여져 16부락으로 나뉘어져 남과 북으로 일컬어지게 되니 아마도 그들 중에 가장 북방에 거처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 사람들은 굳세고 건장하며 보병전에 뛰어나기에 항상 다른 부락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습속에 머리카락을 땋고 멧돼지의 이발을 꿰고 꿩의 꼬리를 끼워 관을 장식하여 스스로 모든 부락과 차이나게 한다. 인내심이 있는 굳센 성격에 활로 하는 수렵에 뛰어나며 또한 근심하고 슬퍼하는 일이 없으며, 건장한 자를 귀하게 여기며 노약자를 천하게 여긴다. 거처는 집이나 오두막이 없이 산과 물을 등지고 땅에 구덩이를 판 뒤 그 위에 나무로 들보를 치고 흙으로 덮은 것으로서 마치 무덤과 같은 형태이다. 여름에는 나와서 물과 풀을 쫓아다니고 겨울에는 들어가 거처한다. 오줌으로 얼굴을 씻는데 이적 가운데 가장 더럽다.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하는데 겉널이나 속널이 없으며 타던 말을 죽여 제사를 지낸다.
그들의 추장을 대막불만돌이라 하며 대대로 자리를 이어 우두머리가 된다. 글자가 없다. 그들의 화살은 돌로 촉을 만들며 길이가 2촌이니 아마도 호목화살에 돌촉을 쓰던 것에서 남겨진 관습일 것이다. 가축은 돼지가 많으며 소와 양은 없다. 수레와 말이 있고 쟁기를 나란히 연결하여 밭을 경작하며 수레는 걸으면서 민다. 조와 보리가 있다. 그 땅에는 초서와 흰토끼 및 흰 매가 있다. 소금의 샘이 있는데 증기가 올라오는 것이 매우 얿어서 소금기가 나무의 꼭대기에 서린다.
무덕(618~626) 5년에 우두머리 아고랑이 처음으로 들어왔다. 태종 정관(627~649) 2년에 신하로서 붙좇으며 공물을 바치는데 늘 변함이 없기에 그 땅을 연주로 삼았다. 제께서 고려를 정벌하자 그들 북쪽의 부란이 반란하여 고려와 합쳐졌다. 고혜진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안시를 지원할 때 매번의 싸움에서 말갈이 항상 앞장을 섰다. 제께서 안시를 격파하여 고혜진을 사로잡고 말갈의 군사 3천여 명을 거두어들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었다.
개원(713~741) 10년에 그 추장 예속리계가 와서 에방하니 현종이 곧 발리주자사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안동도호 설태가 요청하여 흑수부를 설치하고 부락의 우두머리로 도도고가 자사를 삼았다. 조정에서는 장사를 두어 그들을 감독하고 흑수부의 도독에게 이씨 서을 하사하여 이름을 헌성이라 하였으며, 운위장군령흑수경락사로 삼아 유주도독에 예속시켰다. 제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예방하고 공물을 바친 것이 열 다섯 차례였다. 대력 연간에 무릇 일곱 차례였으며 정원(785~805) 연간에 한 차례 들어왔고 원화(806~820) 연간에 두 차례 들어왔다.
초기에 흑수의 서북쪽에 또 사모부가 있었으며 더욱 북쪽으로 10일을 가면 군리부이고 동북쪽으로 10일을 가면 굴열부인데 또한 굴설이라고도 하며, 조금 동남쪽으로 10일을 가면 막예개부이고, 또 불열과 우루 및 월희와 철리 등의 부락이었다.
그 땅은 남쪽으로 발해에 닿아 있고 북쪽과 동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서쪽은 실위에 닿아 있으니 남북의 길이가 2천리이고 동서가 1천리이다. 불열과 철리 및 우루와 월희는 때때로 중국과 교통하였으나 군리와 굴설 및 막예개 등은 스스로 왕래하지 못하였다. 지금 존재하며 경사를 예방한 자들은 좌측 아래에 덧붙여 기록한다.
불열은 역시 대불열이라 일컫는데 개원(713~741)과 천보(742~756) 사이에 여덟 차례 들어와 고래의 눈깔과 초서 및 흰토끼 가죽을 바쳤으며, 철리는 개원(713~741) 연간에 여섯 차례 들어왔으며, 월희는 일곱 차례 들어오고 정권(785~805) 연간에 한 차례 들어왔으며 우루는 정관(627~649) 연간에 두 차례 들어오고 정원785~805) 연간에 한 차례 들어왔다. 후에 발해가 번성하자 말갈이 모두 그에게 복속되어 다시는 왕과 더불어 모이지 않았다.
발해는 본디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자인데, 성은 대씨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읍루의 동모산에 의지하여 자리하니 땅은 영주(營州)에서 곧장 동쪽으로 2천 리이며, 남쪽은 신라와 나란히 니하(泥河)를 경계로 삼고 있으며 동쪽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은 거란이다. 성곽을 쌓아 거처하니 고려의 잔존 세력이 점차 귀순하였다.
만세통천 중에 거란의 진충이 영주도독 조홰를 살해하고 반란하자 사리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려의 나머지 종족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쪽에 의지하여 거처하며 오루하의 험준함에 힘입어 나무로 벽을 쌓아 스스로 엄히 수비하였다.
무후가 걸사비우를 봉하여 허국공으로 삼고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 삼아 그들의 죄를 사면하여 주었다. 걸사비우가 며을 받지 않자 후께서 조서를 내려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에게 그를 쳐서 머리를 베었다. 이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그 아들 조영이 피폐한 나머지를 이끌고 도망하자 이해고가 바짝 뒤따랐으며, 천문령을 넘을 때 조영이 고려와 말갈의 군사로 이해고에게 저항하니 이해고가 패하여 돌아왔다. 그러자 거란이 돌궐에 복속되었기에 천자의 군대가 길이 끊겨 토벌하지 못하였다.
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아우른 뒤 황량하고 먼 곳인 점을 믿고 이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이라 일컬으며 사신을 보내 돌궐과 교류하였으니, 땅이 사방 5천리에 가구수가 10여 만이고 날랜 군사가 수만 명이었으며 자못 문자를 알고 있으며 부여와 옥저 및 변한과 조선 등의 바다 북쪽의 여러 나라들을 모두 거두어들였다.
중종 때 시어사 장행급을 사신으로 보내어 위무하니 조영이 아들을 보내어 들어와 시위하게 하였다. 예종 선천(712~713) 연간에 사신을 파견하고 조영을 임명하여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을 삼고 다스리던 곳을 홀한주로 삼아 홀한주도독으로서 다스리게 하였으니 이로부터 비로소 말갈이라는 호칭을 떼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불렀다.
현종 개원(713~741) 7년에 조영이 죽자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고왕이라 시호하엿다. 아들 무예가 즉위하여 땅을 크게 넓히자 동북의 여러 이족들이 두려워 그에게 신하로 붙좇았으며 사사로이 개원하여 인안이라고 하였다. 제께서 전책을 하사하여 왕위와 아울러 다스리던 곳을 답습하게 하였다.
얼마지 않아 흑수말갈의 사자가 들어와 예방하자 제께서 그 땅으로 흑수주를 세우고 장사를 두어 그곳으로 나가 통솔하게 하였다. 무예가 그의 휘하를 부러 모의하여 이르기를 [흑수가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어 당과 왕래하였으며 다른 때에 돌궐에게 토둔을 청할 때도 모두 먼저 우리에게 아뢰더니 지금 당나라의 관리됨을 청하면서 나에게 아뢰지 않으니 이는 필시 당나라와 더불어 앞뒤에서 우리를 공격하려 함일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아우 문예와 장인 임아상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흑수를 치게 하였다. 문예가 일찍이 경사에 질자로 와 있었기에 이익되는 것과 해악이 되는 것을 알고는 무예에게 이르기를 [흑수가 벼슬을 청하였는데 우리가 그를 공격하면 이는 당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은 큰 나라로서 병사가 우리의 1만배나 되니 그들과 더불어 원한을 맺으면 우리는 장차 망할 것입니다. 예전 고려가 번성할 적에는 군사가 30만으로 당나라에 저항하여 적이 되었는데 가히 굳세다고 일컬었지만 당나라 군사가 한차례 도래하자 땅을 쓴 듯이 다 없어졌습니다. 지금 우리의 군중은 고려와 비교하여 삼분의 일이니 왕께서 이를 어기시려 함은 불가합니다.] 하였으나 무예가 따르지 않았다.
군사가 국경에 이르자 또 글로써 간곡히 간언하였다. 무예가 노하여 종형인 일하를 보내 장수의 직위를 대신하게 하고 문예를 소환하여 장차 그를 죽이려 하였다. 문예가 두려워하여 지름길로 스스로 귀순하니 조서를 내려 좌효위장군의 관작을 수여하였다. 무예가 사신으로 하여금 문예의 죄악을 드러내고 그를 주살할 것을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그를 안서에 거처하게 하고는 좋게 답하여 이르기를 [문예는 궁핍하여 와서 나에게 귀순하였으니 마땅히 살해할 수 없으며, 이미 그를 험악한 땅으로 내어보냈소 하고는 아울러 사자는 머물러 두어 보내지 않고 따로 조서를 내려 홍로소경 이도수와 원복으로 하여금 뜻을 전하여 깨우치도록하였다. 무예가 이를 알고 글을 올려 배척하여 말하기를 [페하께서는 마땅히 망령된 것을 천하에 드러내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며 반드시 문예를 죽이려 하였다. 제께서 이도수와 원복이 나라의 일을 누설하여 말한 것에 노하여 모두 좌천시키고 거짓으로 문에를 배척하고는 이로 답하였다.
10년 뒤 무예가 대장 장문휴를 보내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를 공격하니 제께서 문예를 급히 보내 유주의 군사를 징발하여 그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태복경 김사란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독려하여 그들의 남쪽을 공격하게 하였다. 마침 크게 춥고 눈의 깊이가 10자나 되어 얼어서 죽은 사졸이 반수를 넘었기에 공이 없이 돌아왔다. 무예는 그 아우를 원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객을 모집하여 동도로 들어가 길에서 틈을 엿보아 찌르게 하였는데 문예가 이에 대항하여 죽지는 않았다. 하남에서 자객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
무예가 죽자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무왕이라 시호하엿다. 아들 흠무가 즉위하여 대흥이라 연호를 고쳐으며 조서를 내려 왕의 작위와 다스리던 곳을 답습하게 하니 흠무가 이에 그 나라 안을 크게 사면하였다. 천보(742~756) 말에 흠무가 상경으로 옮겨가니 예전의 도성에서 곧장 3백 리의 거리로서 홀한하의 동쪽이다. 제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에방하고 공물을 바친 것이 스물 아홉 차례였다. 보응(762~763) 원년에 조서로서 발해를 나라로 삼고 흠무를 그곳의 왕으로 삼으며, 검교태위로 관작을 높여주었다. 대력(766~779) 연간에 스물다섯차례 왔으며, 일본의 무녀 11명을 바치며 들어와 예방하였다. 정원(785`805) 연간에 동남쪽의 동경으로 옮겼다. 흠무가 죽자 사사로이 문왕이라 시호하였다. 아들 굉임이 일찍 죽었기에 친족의 아우인 원의가 즉위하였는데 한 해동안 의심하고 가혹하게 하기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살해하고 굉임의 아들 화여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다시 상경으로 돌아가서 여호를 중흥이라 고쳤다. 죽으니 성왕이라 시호하였다.
흠무의 작은 아들인 숭린이 즉위하고 연호를 정력이라 고치니 조서를 내려 우효위대장군에 제수하고 왕위를 있게 하였다. 건중과 정원(785~805) 사이에 무릇 네 차례 들어왔다. 죽으니 강왕이라 시호했다.
아들 원유가 즉위하고 연호를 영덕이라 고쳤다. 죽으니 정왕이라 시호하였다. 아우 언의가 즉위하여 연호를 주작이라 고쳤으며 또한 왕위를 답습함을 예전과 같이 하게 하였다. 죽으니 희왕이라 시호하였다.
아우 명충이 즉위하여 연호를 태시라 고쳤으며 즉위한 지 한해 만에 죽으니 간왕이라 시호하였다.
종부인 인수가 즉위하여 연호를 건흥이라 고쳤으며, 그의 4대조 야발은 조영의 아우이다. 인수는 자못 능히 바다 북쪽의 여러 부락들을 토벌하고 국토를 크게 개척하는 고덕이 있음에 조서를 내려 검교사공의 관작을 수여하고 왕위를 답습하게 하였다. 원화(806~820) 연간에 무릇 16차례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으며 장경(821~824) 연간에 네 차례 그리고 보력(825~827) 연간에 무릇 두 차례였다. 대화(827~835) 4년에 인수가 죽으니 선왕이라 시호하였다.
아들 신덕이 일찍 죽었기에 손자 이진이 즉위하여 연호를 함화라 고쳤다. 다음해(831)에 조서를 내려 관작을 세습하게 하였다. 문종의 시대가 다할 때까지 들어와 예방한 것이 열 두차례였으며 회창(841~846) 연간에 무릇 네 차례였다.
처음에 그들의 왕이 수 차례 여러 학생들을 보내 경사의 태학을 찾아들어 고금의 제도를 익히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해동의 성국이 되었으니 그 땅에는 5개의 경(京)이 있고 15개의 부(府)가 있으며 62개의 주(州)가 있다.
숙신의 옛 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아 용천부라 하고 용(龍)·호(湖)·발(渤) 등 세 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 남쪽을 중경(中京)으로 삼고 현덕부라 하고는 노(盧)·현(顯)·철(鐵)·탕(湯)·영(榮)·흥(興) 등의 여섯 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예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고 요원부 또는 책성부라 하고는 경(慶)·염(鹽)·목(穆)·하(賀) 등의 네 주를 거느리게 하였으며 옥저의 옛 땅으로 남경을 삼고 남해부라 하고는 옥(沃)·정(睛)·초(椒) 등의 세 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고려의 옛 땅으로 서경을 삼고는 압록부라 하고 신(神)·환(桓)·풍(豊)·정(正) 등의 네 주를 거느리게 하였으며 장령부라 하고 하(瑕)·하(河) 등의 두 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부여의 옛 땅으로 부여부를 삼고 항상 굳센 병사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어하게 하고는 부(扶)·선(仙) 등의 두 주를 거느리게 하였으며 막힐부를 막( )·고(高) 등의 두 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읍루의 옛 땅으로 정리부를 삼고 정(定)·반(潘) 등의 두 주를 거느리게 하였으며 안변부로 안(安)·경(瓊) 등의 두 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솔빈의 옛 땅으로 솔빈부를 삼고 화(華)·익(益)·건(建) 등의 세 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불열의 옛 땅으로 동평부를 삼고 이(伊)·몽(蒙)·타( )·흑(黑)·비(比) 등의 다섯 주를 거느리게 했다. 철리의 옛 땅으로 철리부를 삼고 광(廣)·분(汾)·포(浦)·해(海)·의(義)·귀(歸) 등의 여섯 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월희의 옛 땅으로 회원부를 삼고 달(達)·월(越)·회(懷)·기(紀)·부(富)·미(美)·복(福)·야(邪)·지(芝) 등의 아홉 주를 거느리게 했으며, 안원부로 영·미·모·상 등의 네 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또 영·동·속 세 주로 독주주를 삼았다. 속주는 그 땅이 속말강 가까이 있는데 아마도 일컫는 바 속말주 일 것이다. 용원의 동남쪽은 바다에 연해 있는데 일본으로 가는 길이다. 남해는 신라로 가는 길이다. 압록은 조공을 바치는 길이다. 장령은 영주로 가는 길이다. 부여는 거란으로 가는 길이다.
풍속에 가독부 또는 성왕, 또는 기하라고 한다. 그의 명령을 교라 한다. 와의 부친을 노왕이라 하고 모친을 태비라 하며 아내를 귀비라 하며 맏아들을 부왕이라 하고 모든 아들들을 왕자라고 한다.
관청으로는 선조성이 있어 좌상·좌평장사·시중·좌상시·간의 등이 그곳에 자리한다. 중대성이 있어 우상·우평장사·내사·조고사인 등이 그곳에 자리한다. 정당성이 있어 대내상 한 사람이 있는데 좌상과 우상의 위에 자리하며, 좌사정과 우사정이 각기 한 명이 있는데 좌평장사좌와 우평장사의 아래에 자리하니 그 자리는 복야에 비견되며 좌윤과 우윤은 이승에 비견된다.
좌육사로는 충부·인부·의부에 각기 경이 한 명씩 있어 사정의 아래에 자리하며, 그 지사로 작부·창부·선부 등이 있고 부에는 낭중과 원외가 있다. 우육사로 지부·예부·신부 등이 있고 그 지사로는 융부·계부·수부 등이 있으며 경과 낭중은 좌육사에 준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육관에 비견된다.
중정대가 있어 대중정이 한 명으로 어사대부에 비견되며 사정의 아래에 자리하고 소정이 한 명이다. 또 전중시와 종속시가 있으며 그곳에 대령이 있다. 문적원에는 감이 있다. 영과 감은 모두 적다. 태상·사빈·대농시가 있으며 시에는 경이 있다. 사장·사선시가 있으며 시에는 영과 승이 있다. 주자감에는 감장이 있다. 항백국에는 상시 등의 관직이 있다. 무관의 인원으로 좌우맹분·웅위·비위 등이 있으며 남좌우위와 북좌우위에 각기 대장군 한명와 장군 한 명이 있다. 대저 법도는 이와 같이 중국의 제도와 비슷하다.
품을 질이라 하는데 삼질 이상은 자줏빛 복색에 상아홀과 금고기를 지닌다. 오질 이상은 붉은 복색에 상아홀과 은고기를 지닌다. 육질과 칠질은 엍고 붉은 의복이며, 팔질은 녹색 의복으로 모두 나무홀을 지닌다.
풍속에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는태백산의 토끼, 남해의 곤포, 책성의 된장,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의 배, 옥주의 솜, 용주의 명주, 위성의 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 등이다. 과실로는 구도의 오얏과 낙유의 배가 있다. 나머지 풍속은 고려 및 걱란과 대략 같다. 유주절도부와 더불어 서로 예방하고 문안하며, 영주와 평주를 따라 경사와의 거리가 대략 8천 리의 먼 거리이다. 후에 조공이 이르렀는지의 여부는 사가가 전하지 않으니 반란하였는지 붙좇았는지 고찰할 수 없다.
당나라의 덕은 크고도 크기에 하늘이 덮고 있는 산봉우리까지 모두 신하로 붙좇으며 복속되어 왔고 바다가 닿는 안팎으로 주와 현이 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마침내 천자를 존중하여 이르기를 [천가한]이라 하였다. 삼왕 이래로 이보다 더한 적은 없었다. 황량한 구석지의 군장에 이르기까지 당의 새서와 깃발을 기다리고서야 능히 나라를 이루었으니, 하나라도 복종하지 않게되면 그대로 번번이 평정되고 속박되니, 그러한 까닭에 만이들이 갖은 보물을 지니고 서로 발꿈치를 뒤밟으며 조정에 이르렀다. 성하던 불길이 다하여 쇠퇴하고 그 재난이 안으로 들어오니 천보(742~756) 연간 후에는 구석진 화하의 땅은 상처나고 격파되어 왕이 관리하는 수자리는 북으로 황하를 넘지 못하고 서쪽으로 진주(秦州)와 빈주( 州)에서 그치니, 점차 허물어지기 1백년 만에 망하기에 이르므로 되돌아보아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까닭에 말하였다. 남을 다스린 것으로 나를 다스릴 수 있음은 오직 성인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고려는 본디 부여의 별종이다. 그 땅은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남조긍로 역시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며 서북쪽은 요수를 건너 영주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접한다. 그 나라의 임금은 평양성에 거처하는데 또한 장안성이라 일컬으니 곧 한의 낙랑군으로 경사에서 5천여리 떨어져 있으며 산을 따라 굴곡을 이루며 외성을 쌓았고 남쪽은 패수에 잇닿아 있으며, 그 왼편으로 왕이 궁궐을 지어 놓았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어 별도의 도읍이라 부른다.
물줄기는 대요와 소요가 있으니 대요는 말갈의 서남쪽 산에 발원하여 남쪽으로 안시성을 지나가며, 소요는 요산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역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양수라는 물줄기가 있어 변방 바깥에서 발원하고 서쪽으로 흘러 그것과 합쳐진다. 말갈의 백산에서 발원한 마자수가 있어 그 색깔이 마치 오리의 머리와 같다 하여 압록수라 부르는데, 국내성의 서쪽을 지나 염난수와 합쳐지고 또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으며 큰 배로 사람을 건네니, 그로 인해 그것을 믿고 해자로 여긴다.
관직은 무릇 12등급으로 대대로가 있으니 혹은 토졸이라 하며 울절이 있으니 호적과 문서를 주관하는 자이며, 태대사자가 있으며, 백의두대형이 있으니 백의라 하는 것은 선인을 a라하는 거승로 국정을 거머쥐고 3년에 한 번씩 교체하되 직분을 잘 수행하면 바꾸지 않으나 무릇 교대하는 날에 복종치 않으면 서로 공격하는데 왕은 궁문을 닫고 수비하엿다가 승리하는 자에게 정권을 잡도록 맡기며(대대로가 있으니 혹은 토졸이라 하여 국정을 거머쥐고 한 번씩 교체하되 직분을 잘 수행하면 바꾸지 않으나 무릇 교대하는 날에 복종치 않으면 서로 공격하는데 왕은 궁문을 닫고 수비하였다가 승리하는 자에게 정권을 잡도록 맡기며~ 백의두대형이 있으니 백의라 하는 것은 선인을 말하는 것은 선인을 말하는 것이며) 대사자가 있으며, 대형이 있으며 상위사자가 있으며 제형이 있으며 소사자가 있으며 과절이 있으며 선인이 있으니 고추대가가 있다.
그들의 주와 현은 60개다. 큰 성에는 녹살 한 명을 두는데 도독에 비견되며, 나머지 성에는 도사라고도 부르는 처려근지를 두는데 자사에 비견된다. 참좌가 있어서 일을 나누어 감당한다. 대모달이 있으니 위장군에 비견되며 말객은 중랑장에 비견된다.
왕은 다섯 가지 채색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희고 앏은 비단으로 관을 만들며, 가죽띠에 모두 금테를 두른다. 대신은 푸른 얇은 비단의 관을 쓰고 그 다음은 진붉은 얇은 비단의 관을 쓰는데 귀 양편으로 새깃을 꽂고 금테와 은테를 섞어 두르며 적삼에는 대나무 흠통으로 소매를 넣고, 입구가 큰 바지에 무두질한 흰 가죽으로 띠를 만들며, 누런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는다. 서민들은 거친 베로 지은 옷을 입고 고깔을 쓴다.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 장식을 두른다.
풍속에 바둑과 투호 및 축국을 즐긴다. 식생활에는 변·두묘·보·궤·뇌·세 등의 제기를 사용한다.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거처하며 풀과 지붕을 이는데 오직 왕궁과 관청 및 절은 기아를 사용한다. 가난한 백성들은 한 겨울이면 기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불을 지펴 온기를 취한다.
다스림에 있어서 엄한 형벌로 아랫백성을 바로 잡는 까닭에 법을 범하는 일이 적다. 반역자는 모여 횟불로 몸을 불사르고는 머리를 베며 그 집안은 관가에서 몰수한다. 적에게 항복하거나 전쟁에서 패하거나 또는 사람을 죽이거나 협박하는 자는 머리를 베며, 도적질한 자는 열 배로 배상하게 하고, 소나 말을 죽인자는 노비로 삼으니 그러한 까닭에 길어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
시집가고 장가들 때는 폐물을 사용하지 않으며 받는 자가 있으면 부끄럽게 여긴다. 부모의 상복은 3년을 입으며 형제는 한 달이 지나면 벗는다. 풍속에 함부로 지은 사당이 많으며 영성 및 해와 기자 및 가한 등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도읍의 왼편에 신수라 일컫는 큰 동굴이 있어 매년 10월이면 왕을 비롯한 모두가 스스로 제사를 지낸다. 사람들은 학문을 좋아하며 궁벽한 마을에서 땔나무를 팔아 연명하는 집에 이르기까지 서로 삼가 힘쓰며 네거리곁이면 어디에나 위엄을 갖춘 집을 지어 국당이라 부르고 미혼의 자제들이 무리를 지어 거처하며 경을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힌다.
무덕(618~626) 초에 두 차례 사신을 보내 들어와 예방하였다. 고조가 글을 보내 화목에 힘쓸 것과 고려 사람으로 중국에 잇는 자들을 호송할 것을 약속하며 중국인으로 고려에 있는 자들을 타일러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건무가 망명하거나 귀순한 벼슬아치들을 모두 찾아내니 무려 1만 명이나 되었다. 3년 후에 사자를 파견하여 상주국·요동군왕·고려왕에 임명하였다. 도사에게 명하여 형상과 법전을 가져가서 그들을 위해 노자를 강의하게 하자 건무가 크게 기뻐하여 나라 사람드을 거느리고 함께 들으니 하루에도 수천 명이나 되었다.
제께서 좌우에 이르기를 [명분과 실리는 모름지기 서로 부합되어야 한다. 고려가 비록 수나라에 신하로 붙좇게 해야만 하는가? 짐이 인민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힘씀에 있어 어찌하여 하필이면 그들을 신하로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하였더니 배구와 온언박이 간언하기를 [요동은 본디 기자의 나라이며 위와 진 때는 내지로 피봉되었기에 신하로서 붙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이 이적에 대해서는 마치 늘어선 별들 가운데 태양과 같으니 스스로 낮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므로 그만 두었다.
다음해 신라와 백제가 글을 d로려 말하기를 건무가 길을 폐쇄하여 사신을 들어가 예방하지 못하고 있으며 게다가 수 차례 침입을 받았다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산기시랑 주자사에게 부절을 지니고 가서 화해하도록 유시하게 하였더니 건무가 사죄하며 두 나라와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고자 하였다.
태종이 돌궐의 힐리를 사로잡자 건무가 사자를 보내 하례하고 아울러 봉역도를 올렸다. 제께서 조서를 내려 광주사마 장손사로하여금 가서 수나라 사졸들의 전장의 주검들을 뭍어주게 하고 고려가 세운 경관을 허물게 하였다. 건무가 두려워하여 천리 길에 장성을 쌓으니 동북으로 부여에 머리를 대고 서남쪽은 바다까지 이어졌다.
얼마 뒤 태자 환권을 보내 들어와서 예방하고 토산물을 바치니 제께서 후하게 물품을 하사하고 조서를 내려 사자 진대덕에게 부절을 지니고 가서 노고에 답하게 하며 아울러 틈을 관찰하게 하였다. 진대덕이 그 나라에 들어가서 벼슬아치에게 후하게 물건을 보내주고 그들의 자세하고 상세한 것들을 모두 얻게 되었다. 중화의 사람으로 흘러와 객으로 머무르는 자들을 보고 친척의 존망을 알려주니 사람마다 눈물을 흐렸으며 그러한 까닭에 가는 곳마다 남녀들이 길을 끼고 관망하였다. 건무가 성대히 군사를 펼치고 사자를 대면했다.
진대덕이 돌아와 아뢰자 제께서 기뻐하였다. 대덕이 또 여쭙기를 [고창이 섬멸되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대대로가 세 번이나 관사로 찾아와 더욱 예절을 돈독히 하였습니다.] 하였다. 제께서 이르기를 [고려의 땅은 겨우 네게의 군이라 우리가 병졸 수만 명을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면 모든 성들이 반드시 구원할 것이니 우리가 수군으로 동래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한다면 극히 쉬울 것이다. 그러나 천하가 이제 겨우 평화로우니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자 할 따름이다.] 하였다.
개소문이란 자가 있어 혹은 개금이라 부르는데 성은 천씨로서 스스로 물 속에서 태어났다 하여 군중을 현혹시켰다. 성격은 잔인하고 난폭하였다. 부친이 동부대인·대대로로 있다가 죽으니 개소문이 당연히 자리를 이으려 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여 자리에 오맂 못하게 하였더니 머리를 조아려 군중에게 사죄하고 직책 맡기를 청하며 옳지 dskg은 일이 있으면 비록 면직되어도 후회가 없을 것이라 하자 군중이 그를 애석히 여겨 마침내 자리를 잇게 되었다. 잔악하고 흉악 무도하여 모든 대신들이 건무와 더불어 의논하고 그를 주살할려 했는데 개소문이 알아차리고 모든 부를 소집하여 크게 군사를 검열한다 하고는 음식을 차려 놓고 대신들을 청하여 와서 보게 하더니 손님들이 도착하자 모두 주살하여 무릇 1백여 명이 되었으며 궁으로 달려들어가 건무를 살해하고 그 주검을 잔인하게 찢어 도랑에 던져 넣었다. 다시 건무 아우의 아들인 장을 세워 왕으로 삼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나라를 전횡하니 마치 당나라의 병부상서·중서령의 직책과 같았다.
빼어난 용모와 훌륭한 구렛나루 수염을 하고 있었으며 관과 의복은 모두 금으로 장식을 하고 다섯 자루의 검을 차고 있으니 좌우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땅에 엎드리게 하여 그를 밟고 말에 올랐다. 출입할 때는 군사를 도열시키고 길게 소리쳐 통행을 금지시키니 길 가던 사람들이 두려워 숨으며, 심지어 구덩이나 계곡으로 몸을 던졌다.
제께서 건무가 아랫 사람에게 살해되었음을 듣고 측은히 여겨 사자를 파견하여 부절을 지니고 조문하게 하였는데 어떤 이가 제에게 권하여 그를 포벌해야 한다고 하였더니 제께서 상중이므로 정벌하지 않고자 하였다. 이에 장을 임명하여 요동군왕·고려왕으로 삼았다. 제께서 이르기를 [개소문은 임금을 살해하고 나라를 어지럽혔으니 짐이 그를 잡아들여 바꾸고자 할 뿐, 백성들을 수고스럽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어찌하면 좋은가? 하니 사공 방현령이 이르기를 [폐하의 사졸들은 용감하고도 그 힘에 남음이 있으니 병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일컫는바 - 무자는 싸움과 그침을 합한 것 - 이라는 것입니다.] 하였으며 사도 장손무기가 이르기를 [고려에서 어려움을 한 차례도 아뢰어 오지 않았으니 마땅히 글을 하사하여 그들을 편안히 위로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숨겨주고 그들의 존재를 어루만져 주면 저들은 당연히 명에 복종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제께서 이르기를 [좋은 생각이다.] 하였다.
마침 신라가 사자를 보내 글을 올려 여쭙기를 [고려와 백제가 나란히 화친하였으니 장차 저희가 토벌당할 것 같습니다. 삼가 천자의 명에 따르고자 합니다.] 하였다. 제께서 묻기를 [어찌하면 면할 수 있겠는가?] 하니 사자가 이르기를 [모든 책략을 다해보았으니 오로지 폐하께서 불쌍히 여기십시오!] 하였다. 제께서 이르기를 [내가 한 무리의 군사로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들어가면 너희 나라가 토벌을 당하는 일이 한 해 늦추어질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책략이다. 내가 진 붉은 군장과 붉은 기치 수천을 너희 나라에게 하사하고 저들이 토벌하여 이를 때 그것을 진 중에 세우면 두 나라 군사가 보고 나의 군대가 왔다고 말하며 필시 달아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책략이다. 백제가 바다를 믿고 전쟁의 장비를 준비하고 있지 않으니 내가 수군 수만 명으로 그들을 습격할 것이며, 또한 너희 나라가 여자 임금인 까닭에 이웃이 업신여기는 것이니 내가 종실의 사람으로 군주를 삼아 다스리게 하고 안정되기를 기다려 곧 스스로 수비하게 하는 것이 세 번째 책략이다. 사자는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하였더니 사자가 능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농승 상리현장을 파견하여 새서로서 고려를 꾸짖고 또한 공격하지 말도록 하엿다. 사신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개소문이 이미 신라의 두 성을 쳐서 빼앗았기에 상리현장이 황제의 교지를 일러주었더니 답하여 이르기를 [예전 수나라의 침략을 당했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고 우리의 땅 5백 리를 탈취하여 갔으니, 이제 땅을 모두 돌려주지 않으면 군사행통을 그치지 않을 것이오] 하므로 현장이 이르기를 [지나간 일을 어찌 족히 논할 것이오? 요동은 예전에 중국의 군현이었으나 천자 또한 가지려 하지 않고 있는데 고려가 어찌 조서를 위반하려 하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와서 아뢰자 제께서 이르기를 [막리지는 임금을 살해하고 아랫사람을 가혹하게 부리기를 마치 덫을 놓고 함정에 빠뜨리듯 하여 원망과 고통이 길에 가득한데 내가 군대를 보내는 것에 명분이 없겠는가?] 하였다. 간의대부 저수량이 이르기를 [페하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 적을 이기는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지만 만에 하나 만족을 얻지 못하면 더욱이 다시 군사를 부릴 것인즉 다시 군사를 부린다면 그때의 안위는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고 하자 병부상서 이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번 설연타가 변경을 도적질하자 폐하께서 추격하려 하였으나 위징이 간절히 간언하여 그만두었습니다. 그때 만약 그를 공격하였더라면 말 한 마리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후에 다시 배반하여 소요를 일으키니 이제 와서 한이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제께서 이르기를 [진실로 그렇다. 단지 만에 하나 실패할 것이라는 염려로 일을 그르친다면 후에 누가 나를 위하여 책략을 꽤할 것인가?] 하였다.
신라가 수 차례 원조를 청하므로 오의 선박 5백 처긍로 군량을 수송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 영주도독 장검 등에게 유주와 영주의 군사 및 거란과 해 및 말갈 등을 일으켜 나아가 토벌하게 하였다. 마침 요수에 홍수가 나서 군대가 돌아왔다. 막리지가 두려워 하여 사자를 보내 금을 바쳤으나 제께서 받지 않았다. 사자가 또 여쭙기를 [막리지께서 관리 50명을 보내 들어와 숙위하고자 합니다.] 하니 제께서 노하여 사자를 문책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건무에게 벼슬하고서도 절개를 지켜 죽음으로 의리를 지키지 않았으며, 또한 반역자를 위하여 책략을 도모하였으니 용서할 수 없다] 하고는 모두 하옥시켰다.
그리하여 제께서 몸소 그를 토벌하고자 장안의 늙은이들을 불러 위로하여 이르기를 [요동은 예전에 중국의 땅이었으며 막리지가 그의 군주를 해쳤으니 짐이 장차 몸소 나아가 그를 다스려 공략하고자 하는 까닭에 노인네들과 약조를 하노니, 아들과 손자들이 나를 따라 나서면 내가 능히 그들을 어루만져 위무할 것이므로 애써 근심하지 말 것이다.] 하고는 베와 곡식을 후히 하사하였다.
군신들이 모두 제에게 권하여 출행하지 못하게 하자 제께서 이르기를 [나는 그것을 알고 있음이니, 근본을 없애고 말단을 가지며, 높은 것을 바라고 낮은 것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놓아두고 먼 곳으로 가는 것 등 이 세 가지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 고려를 정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또 대신들을 살육하는 등 전횡을 하고 있기에 온 나라사람들이 목을 늘이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생각건대 밝은 도량이 아닐 뿐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북쪽으로 영주에 곡식을 수송하게 하고 동쪽은 옛 대인성에 곡식을 쌓아두었다.
제께서 낙양에 행차하여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는 상하와 좌난당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으며 염인덕·유영행·장문간·방효태·정명진 등을 총관으로 삼아 강·오·경·낙에서 모집한 군사 4만과 오의 선박 5백 척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강하왕 도종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으며, 장사귀·장검집실사력·계필하력·아사나미사·강덕본·국지성·오흑달 등을 행군총관으로 삼아 그에게 예속시켜 기병 6만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게 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짐이 지나는 곳은 진영을 따로 꾸미지 말 것이며, 음식은 풍성하고 진기하게 하지 말 것이며, 물줄기 가운데 건널 만한 곳에는 다리를 놓지 말 것이며, 지나가는 곳이 주현에서 가깝지 않으면 학생이나 노인들이 마중 나오지 못하게 하라. 짐이 예전에 창을 들어 난을 평정할 적에는 한 달을 채울 정도도 비축된 것이 없었으나 오히려 위세로서 향하는 곳마다 바람에 휩쓸리는 풀과도 같았다. 지금은 다행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다만 양식을 운반하는 것으로 수고스러울까 염려되는 까닭에 소와 양을 몰아 그것으로 군사를 먹이고자 한다. 더욱이 짐에게는 반드시 승리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으니 큰 우리가 작은 저들을 치는 것이요, 천명을 따르는 우리로서 천명을 거스르는 저들을 토벌하는 것이요, 안정된 우리로서 저들의 혼란한 기회를 타는 것이요, 편안한 우리로서 피곤한 저들을 대적하는 것이오, 기뻐 복종하는 우리로서 불평을 품고 미워하는 저들과 맞서는 것이니 어찌 극복하지 못하리라 근심할 것인가?] 하였다. 또 걸나과 해, 및 신라와 백제의 모든 군장의 군사를 모이게 하였다.
정관 19년(645) 2월에 제께서 낙양으로부터 정주로 옮겨 머무르며 좌우에게 이르기를 [지금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으나 오직 요동만이 복종하여 좇지 않으며 자리를 이은 왕이 군사와 병마의 강성함만을 믿고 신하와 도모하여 정벌을 유도하고 있으니 혼란은 바야흐로 시작되었기에 짐이 스스로 그들을 쟁취하여 후세의 우환으로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였다. 제께서 성문에 앉아 지나가는 군사를 일일이 어루만져 위안하고 병든 자는 친히 살피고 주현에 칙서를 내려 치료하게 하니 사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장손무기가 아뢰기를 [하늘 아래 귀천이 없이 모두 붙좇는데 궁실의 관리가 단지 10명이라면 천하가 황제의 지위를 가벼이 여길 것입니다.] 하니 제께서 이르기를 [사졸로서 요수를 건넌 것이 10만으로 모두 집을 떠나 있다. 짐은 10명을 따르게 하는 것을 오히려 많다고 겸연쩍게 여기니 공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 하였다. 제께서 몸에 활집을 지니고 안장에 두 개의 전통을 매어 두었다. 4월에 이적이 요수를 건너자 고려가 모두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하였다. 제께서 크게 사졸을 먹이고 유주의 남쪽에 장막을 치고 장소무기에게 조서를 내려 군대의 맹세를 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게 하였다.
이적이 개모성을 공격하여 빼앗아 2만 가구와 식량 10만 석을 획득하고 그 땅을 개주로 삼았다. 정명진이 사비성을 공격하여 밤 중에 그 서쪽으로 들어가 성을 무너뜨리고 8천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압록의 위쪽으로 군사를 보냈다. 이적이 마침내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제께서 요택에 머무르며 조서를 내려 노천에 흩어진 수나라 전사들의 백골들을 묻어 주게 하엿다.
고려에서 신성과 국내셩의 기병 4만을 내어 요동을 구원하였다. 도종이 장군예를 거느리고 맞서 싸웠는데 군예가 퇴각하였다. 도종이 기마병으로 그곳에 달려가자 오랑캐의 군사들이 물러나 피하기에 그들의 다리를 탈취하고 흩어졌던 사졸들을 모아 높은 곳에 올라서 관망하니 고려의 진영에 틈이 보이기에 급하게 공격하여 격파하고 1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으며, 군예는 주살하여 두루 알려 보이게 하였다.
제께서 요수를 건너고는 다리를 치워 사졸들의 마음을 굳혔다. 마수산에 진영을 설치한 뒤 몸소 성 아래에 도달하여 사졸들이 해자를 메우고 있는 것을 보고는 메고 가던 흙덩이를 나누어 무거운 것을 말 위에 실으니 군신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다투어 흙덩이를 끼고 앞서갔다.
성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으며 그 사당에는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도 전연 때 하늘에서 내려 준 것이라고 말했다. 바야흐로 포위되어 급박해지자 아름다운 여인을 꾸며 신에게 아내로 들이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였으니 성은 반드시 온전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적이 투석 수레를 열지어 놓고 큰 돌을 날려 3백 보를 넘기니 맞는 곳은 번번이 허물어졌으며 오랑캐들이 나무를 쌓아 누각을 세우고 굵은 줄로 그물을 엮어도 능히 막을 수가 없었다. 충돌 수레로 성가퀴의 집을 부딪혀 부쉈다. 이때 백제에서 검붉은 칠을 한 쇠갑옷을 바치고 또한 검은 쇠를 산의 형상으로 하여 다섯 가지 무늬를 넣은 갑옷으로 사졸들을 입혀 종군하였다. 제께서 이적과 더불어 회합하니 갑옷의 광채가 햇빛과도 같이 빛났다. 마침 남풍이 몰아치자 사졸들이 불을 놓아 서남쪽을 불사르니 불길이 성 안으로 번져 가옥이 거의 타버리고 불길에 죽은 자가 1만여 명이 되었다. 군사의 무리가 성가퀴에 오르자 오랑캐등이 방패를 덮어쓰고 저항하기에 사졸들이 긴 창을 들어 그들을 찌르고 성 위로 빗발같이 돌을 날리니 성이 마침내 무너졌으며 날랜 군사 1만 명과 4만 가구, 그리고 식량 50만석을 노획하였다. 그 땅을 요주로 삼았다.
애초에 제께서 태자가 있는 곳으로부터 행재소까지 이어서 빠짐없이 봉화대를 설치하고 요동을 굴복시키면 봉화를 올리기로 약속하였는데 이날 불을 놓아 요새 안으로 전하게 하였다.
진격하여 백애성을 공격하니 그 성은 산을 등지고 물가에 있어서 매우 험난하였다. 제께서북쪽의 외곽에 이르니 오랑캐의 추장 손벌음이 은밀히 항복을 구걸하여 성안에서 능히 뜻을 하나로 하지 못한다 하기에 제께서 깃발을 하사하며 이르기를 [만약 항복하려면 성가퀴에 세워 신호로 삼아라] 하였다. 머지않아 깃발이 들려지니 성의 사람들은 모두 당나라가 오른 것이라 여기고 이내 항복하였다.
애초에 손벌음이 (투항을 약속하였다가) 도중에 후회하자 제께서 노하여 언약하기를 (성을 함락시키고 난 뒤) 오랑캐들을 모든 장수에게 준다고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적이 이르기를 [사졸들이 분발하여 앞장서는 것은 노획을 탐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을 거의 빼앗을 대인데 항복을 허락하여 사졸들의 마음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제께서 이르기를 [장군의 말은 옳다. 그러나 군사들을 풀어 놓아 살육하게 하고 사람들의 처자를 노략질 하는 것은 짐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장구의 휘하에서 공이 있는 자는 짐이 곳간의 물품으로 그들에게 상을 줄것이니 바라건대 장군은 이 한 성의 죄를 면해주도록 하라] 하였다.
노획한 남녀가 무릇 1만 명이요, 군사가 2천 명이었다. 그 땅을 암주로 삼고 손벌음을 임명해서 자사로 삼았다. 막리지가 가시성 사람 7백 명으로 개모성에 수자리를 서게 하였는데 이적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스스로 충성을 바칠 것을 청하니 제께서 이르기를 [그러나 가시에 집을 두고 나를 위해 싸운다면 장차 모두 살육을 당할 것이다. 한 집안을 멸망시키며 한 사람의 힘을 구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고 하며 양곡을 주어 그들을 놓아주었다.
안시성에 진영을 머물렀다. 그러자 고려의 북부녹살 고연수와 남부녹살 고혜진이 군사와 말갈의 무리 15만을 이끌고 와서 원조하였다. 제께서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 군사를 통제하고 안시와 연결하여 벽을 쌓아 높은 산에 의지하여 성안의 식랴을 먹으며 말갈을 놓아 나의 소와 말을 공략한다면 그들을 공격하여도 굴복시킬 수 없으니 이것이 (그들로서) 가장 훌륭한 책략일 것이다. 성의 군사를 뽑아 밤 중에 떠나간다면 중간 책략일 것이다. 나와 더불어 싸움을 하게 되면 곧 사로잡힐 것이다.] 하였다.
대대로가 고연수에게 계책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듣기로 중국이 어지럽자 영웅 호걸들이 나란히 떨치고 일어났으나 진왕의 신비한 무예 앞에는 적으로서 견고히 맞서는 자가 없었으며, 싸움에서 앞으로 나와 대항하는 자가 없었기에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고 남면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그러자 북적과 서융이 신하로 붙좇지 않음이 없었다 하더이다. 이제 그 땅의 인재를 쓸어모아 왔기에 지모 있는 신하와 명망 있는 장수가 모두 있으니, 그 날랜 기세는 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제 만약 군사를 주둔하여 두고 여러 날을 끌면서 은밀히 기습병을 보내 그들의 양식로를 끊으면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양식이 다할 것이니 그들은 싸우고자 하여도 싸우지 못할 것이며 돌아가고자 하면 곧 길이 없을 것이므로 이렇게 하면 가히 승리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고연수가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끌어 안시와 40리 거리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제께서 이르기를 [오랑캐들이 나의 책략 가운데 떨어졌다.] 하였다. 좌위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명하여 돌궐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를 시험하게 하였더니 오랑캐들은 항상 말갈의 날랜 군사를 앞세우고 있었으며 아사나사이의 군사는 접전하여 패하여 달아났다. 고연수가 이르기를 [당도 손쉬운 상대일 뿐이다.] 하고 30리를 나아가 산기슭에 의리지하여 진을 쳤다. 제께서 연수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나는 단지 권력을 가진 신하가 그 군주를 그릇되게 살해하였다기에 와서 죄를 묻고자 할 뿐이니 곧 교전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니 연수가 그럴 것이라 여기고 갑옷을 어루만지며 기다렸다.
제께서 밤중에 모든 장수들을 부른 뒤 이적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1만 5천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 진을 치고서 적을 막아서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은 정예 군사 1만 명으로 오랑캐 뒤쪽의 좁은 계곡에서 나오게 하였으며 제께서는 기병 4천 명으로 깃발을 누이고 오랑캐들의 북쪽 산 위로 향하여 모든 군대에게 명령을 내려 이르기를 [북소리를 들으면 군사를 내보내라] 하고 조당에 휘장을 설치하여 이르기를 [내일 정오에 이곳에서 오랑캐의 항복을 받으리라] 하였다. 그날 밤에 유성이 고연수의 진영으로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오랑캐들이 이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곧 싸움을 하였다. 제께서 장손무기의 군중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명을 내려 북과 뿔을 불게 하니 군사들의 깃발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며, 그러자 오랑캐들이 두렵고 곤혹스러워하며 군사를 나누어 이를 막으려 하였으나 군중은 이미 시끌시끌하였다. 이적이 창을 지닌 보병으로 그들을 쳐서 패퇴시키고 장손무기는 그 후미로 올라 들었으며 제께서 산으로 내려 치달으니 오랑캐들이 쿠게 혼란하여 2만 급의 머리를 베었다. 고연수가 나머지 무리들을 거두어 산을 등지고 스스로 지키니 장소무기와 이적이 함께 그를 에워싸고 하천의 교량을 치워 돌아갈 길을 끊어 놓았다.
제께서 고삐를 당기며 오랑캐의 영루를 바라보고 이르기를 [고려가 나라의 힘을 기울여 왔으나 단숨에 격파하였으니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다.] 하고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며 하늘에 감사하엿다. 고연수 등이 형세가 곤궁한 것을 헤아리고 곧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여 원문에 들어와 무릎으로 기어와서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명을 청하였다. 제께서 이르기를 [나중에라도 감히 천자와 더불어 싸울 것인가?] 하니 송구하여 땀을 흘리며 대답하지 못하였다. 제게서 추장 3천 5백 명을 가려내어 모두에게 관직을 주고 내지로 옮길 것을 허락하였으며, 나머지 무리 3만 명은 놓아 돌려보내고 말갈의 3천여 명은 주살하였으니, 노획한 말과 소가 10만 두이며 밝은 빛을 내는 갑옷이 1만 벌이었다.
고려에서 놀라 혼란을 일으키며 후황과 은 등의 두 성은 스스로 군사를 빼 달아나니 수백 리에 인가의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태자에게 역마를 보내 알리고 아울러 모든 신하들에게 글을 하사하여 이르기를 [짐이 몸소 행하니 이와 같은데 어떠한가?] 하였다. 그리하여 행차하였던 산을 이름하여 주필산이라 하고 적진을 격파한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으며 공적을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고연수를 임명하여 홍려경으로 삼고 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척후를 나섰던 기병이 염탐하던 사람을 노획하여 들이자 제께서 그의 포박을 풀어 주니 스스로 말하기를 굶은지 사흘이 되었다 하기에 명을 내려 그를 먹이게 하고 신발을 하사하여 보내며 이르기를 [돌아가서 막리지에게 이르기를 만약 군대의 동정이 필요하거든 내가 있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도 좋다고 하여라] 하였다.
제께서 매번 진영에 해자와 보루를 만들어 놓지 않고 경계하여 척후할 뿐이었으며, 사졸들이 식량을 운반할 때는 비록 한 명의 기병으로 호위하더라도 오랑캐들이 감히 노략질하지 못하였다.
제께서 이적과 더불어 공격할 것을 의논하여 제께서 이르기를 [내가 듣기로 안시는 지세가 험하고 무리들은 굳세어 막리지도 공격하여 능히 굴복시키지 못하였기에 성을 그들에게 주었다 한다. 건안은 험준함을 믿고 있으며 곡식은 많으나 사졸이 적으니 만약 군사를 내어 뜻하지 않을 때 그들을 공격하면 서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건안을 얻으면 안시는 나의 뱃속에 있게 될 것이다.] 하였더니 이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식량이 요동에 쌓여 잇는데 서쪽으로 건안을 공격하면 적이 장차 우리의 귀로를 막을 것이니 먼저 안시를 공격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하여 제께서 [좋다] 하고는 마침내 공격하였으나 능히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책략을 아뢰기를 [오골성의 녹살은 이미 늙었으니 아침에 공격하면 저녁에 가히 굴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오골을 빼앗으면 곧 평양도 탈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더니 여러 신하들 역시 장량의 군대가 사성에 있으니 그를 불러들이면 하루 저녁에 도착할 것이며 만약 오골을 탈취하면 압록을 건너 그들의 심장부를 핍박할 것이므로 좋은 계책이라 하였다. 장손무기가 이르기를[ 천자께서 군사를 움직임에 요행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안시의 무리 10만을 우리 뒤에 두는 것은 먼저 그들을 격파하고 이에 남쪽으로 말을 몰아감으로써 형세에 만전을 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기에 이에 그만두었다.
성 안에서 황제의 깃발과 휘장을 보고는 번번히 성가퀴에 올라 큰 소리로 지껄이니 제께서 노하자 이적이 그들을 격파하는 날에 남자들은 모두 주살할 것을 청하였다. 오랑캐들이 듣고 죽음으로 싸웠다. 강하왕 도종이 겉성을 쌓아 동남쪽을 공격하니 오랑캐들이 성가퀴를 더욱 높이 올려 수비하였다. 이적이 그 서쪽을 공격하여 충돌 수레가 허물어 버리면 (성 안에서는) 그에 따라 번번이 목책을 꿰어 누각을 만들었다.
제께서 성안에 개와 돼지의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르기를 [포위한 지 오래되어도 굴뚝에서 연기소리가 나지 않았었다. 이제 닭과 돼지가 우는 것은 반드시 그것을 잡아 사졸에게 베풀어 먹이는 것이니 오랑캐들이 밤중에 성을 나올 것이다.] 하고 조서를 내려 군사를 엄중히 하게 하였다. 한밤중에 오랑캐 수백 명이 줄에 매달려 내려오므로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도종이 나무의 줄기로 흙을 싸서 쌓으니 겉 성이 이뤄져 지척간으로 성에 임박하므로 과의도위 부복에로 지키게 하고 점차 높여서 성을 밀어젖히니 성이 장차 무너지려 하였는데 부복애가 관할하던 곳을 사사로이 떠나자 오랑캐 군사들이 스스로 성을 허물고 나와 점거하고 구덩이를 파서 끊어버리고는 불을 쌓고 방패를 둘러 견고하게 지켜다. 제께서 노하여 부복애를 참수하고 모든 장수들에게 칙서를 내려 그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사흘이 되도록 이겨내지 못하였다.
조서를 내려 군대를 돌리며 요주와 개주 사람들을 빼내 돌아갔다. 군사들이 성 아래를 지나가자 성 안에서 숨을 죽이고 깃발을 누이며 추장이 성에 올라 두 번 절을 하였는데 제께서 그들이 견고하게 수비한 것을 가상히 여겨 명주 1백 필을 하사하였다. 요주의 곡식이 아직 10만 섬이나 되어 사졸들이 가져가도 다 없어지지 않았다.
제께서 발착수에 이르자 진창에 막혀 80리 길에 수레와 기병이 왕래하지 못하였다. 장소무기와 양사도 등이 1만 명을 고 잡목을 베어 길을 다지고 수레를 이어 교량을 만드니 제께서도 나무 섶을 말 위엥 지고 노역을 도왔다. 10월에 군사들이 모두 건너는데 눈이 매우 많이 내리자 조서를 내려 횃불을 들고 모두 건너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처음 출행할 때는 군사 10만에 말이 1만 필이었는데 돌아가기에 이르러 죽은 자 역시 수백 명이었다. 조서를 내려 전사자의 해골을 모아 유성에서 장사지내며 희생을 크게 갖추어 제사 지냄에 제께서 임하여 곡을 하니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제께서 모두 통솔하고 말을 재촉하여 임유관으로 들어가니 황태자가 길 왼편에서 맞아 주었다. 애초에 제께서 태자와 이별할 때 거친 베옷의 도포를 입고 이르기를 [너를 다시 보기 기다렸다가 갈아입으리라] 하였는데 도포를 두 해가 지나도록 바꿔 입지 않으니 심지어 구멍이 뚫어졌다. 여러 신하들이 청하여 옷을 갈아입으로 하였는데 제께서 이르기를 [사졸들이 모두 헤어진 옷을 입고 있는데 내가 새로 옷을 입 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이때 이르러 태자가 깨끗한 옷을 올리자 이에 갈아입었다.
요동에서 항복한 포로 1만 4천 명은 마땅히 몰수하여 노비로 삼고자 하여 앞서 유주에 모아두었다가 장차 나누어 사졸들에게 포상하려 하였었다. 제께서 아비와 아들,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떨어져 갈라진다 하여 벼슬아치에게 조서를 내려 베와 비단으로 그들의 속값을 치르게 하고 원래대로 백성이 되게 하였더니 열지어 절을 하고 환호하며 춤추어 사흘 동안 그치지 않았다. 고연수는 항복하였다가 근심으로 죽었고 오직 고혜진 만이 장안에 도착했다.
다음해(646) 봄에 장이 사자를 보내 토산물을 올리고 사죄하였으며 두 명의 미인을 제께서 칙서를 내려 그들을 돌려보내게 하며 사자에게 이르기를 [여색이란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나 그들이 친척을 떠나와서 상심하고 있는 것을 가엾게 여겨 내가 취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애초에 군대를 돌릴 때 제께서 활과 의복을 개소문에게 하사하였더니 이를 받고도 사자를 보내와 사례하지 않기에 조서를 내려 조공을 내다 버리게 하였다.
또 이듬해(647) 3월에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 우진달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여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며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과 우둔위대장군 정인태로 그를 보좌하게 하여 영주도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성도로부터 나아가게 하엿다.
남소와 목저에 진영을 머무르며 오랑캐 군사들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그들의 바깥 성을 불살랐다. 7월에 우진달 등이 석성을 탈취하고 나아가 적리성을 공격하고 수천 명의 머리를 베고는 모두 돌아왔다. 장이 아들인 막리지 고임무를 보내어 예방하고 사죄하였다.
22년(648)에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위장군 배행방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여 바닷길로 들어가게 하였다. 부장 고신감이 오랑캐와 더불어 갈산에서 싸워 오랑캐들을 무너뜨렸으며, 오랑캐들이 어둠을 타고 우리의 배를 습격하였으나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그들을 격파하였다. 설만철이 압록을 건너 박작성에 주둔하고 40리 길에 진영을 펼치며 머물렀다. 오랑캐들이 두려워 모두 읍락을 버리고 달아났다. 대추 소부손이 저항하여 싸웠으나 만철이 그를 공격하여 머리를 베고 마침내 성을 포위하여 그들의 구원병 3만을 깨뜨리고 돌아왔다.
제께서는 장손무기와 더불어 계책을 논의하여 이르기를 [고려는 나의 군대가 들어가는 것을 곤혹스러워하여 집집마다 어지럽게 달아나고 밭에서는 때가 되어도 곡식을 거두지 못하고 있으나 개소문은 성을 쌓으며 성가퀴를 높이고 있기 때문에 아랫 백성은 굶주리고 엎어져 죽은 자가 봇도랑과 골짜기에 버려지고 있는 등 그 피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년에 30만의 무리로 공이 대총관이 되면 일거에 멸할 수 잇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검남에 조서를 내려 선박을 대량으로 건조하게 하엿으며 촉 사람들이 재물을 강남으로 운반하기를 원하기에 계책을 세워 직접 배를 만들게 하였더니 배 한척에 합사비단 1천 2백필을 거두어 들이자 파와 촉 지방에서 크게 소요가 이어나 공주와 미주 및 아주 등 세 주의 요가 모두 반란을 일으키기에 농서와 협내의 군사 2만명을 동원하여 그들을 평정시켰다.
비로소 제께서 오랑캐를 다스릴 것을 결심하고 조서를 내려 섬주 자사 손복가와 내주자사 이도유로 하여금 삼산포와 오호도에 식량과 병기를 비축하게 하고 월주도독으로 하여금 대형선박과 우방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게 하였다. 마침내 제께서 돌아가시니 이에 모두 그만두게 되었다. 장이 사자를 보내 위문하였다.
영휘(650~655) 5년에 장이 말갈 군사로 거란을 공격하여 신성에서 싸웠는데 바람이 크게 불어 화살이 모두 돌아와 맞자 거란에 의해 승기가 잡혀 크게 패하였다. 거란이 들에 불을 놓고 다시 싸우자 사람들이 죽고 서로 발로 밟는 등 주검이 쌓여 무덤을 이루었다. 사자를 보내 큰 승리를 아뢰자 고종이 포백에 전승의 글을 써서 조정에 내다 걸었다.
6년(655)에 신라가 고려와 말갈이 36성을 탈취해갔다고 호소하여 오직 천자께서 가없게 여겨 구원해주기를 바랐다. 조서를 내려 영주도독 정명진과 좌위중랑장 소정방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신성에 이르러 고려의 군사를 패퇴시키고 바깥 성과 황폐한 마음을 불지르고는 물러나 돌아왔다.
현경(656~661) 3년에 다시 정명진을 파견하여 설인귀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능히 극복하지 못 하였다. 2년(660) 후에 천자께서 이미 백제를 평정하자 이에 좌효위 대장군 계필하력과 우무위대장군 소정방 및 좌효위 장군 유백영 등으로 모든 장수를 거느리고 패강과 요동 및 평양도로 나서서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용삭 원년(661~663) 원년에 크게 군사를 모집하고 모든 장수를 임명하여 배치하고 천자께서 몸소 행차하려 하니 울주자사 이군구가 건의하여 말하기를 [고려는 작고도 추악한 무리인데 어찌 중국의 온 힘을 기울여 그를 도모하려 하십니까? 만약 고려를 멸망시키고 나면 반드시 군사를 파견하여 지켜야 할 것인데 군사를 적게 파견하면 위엄이 떨쳐지지 않을 것이고 많이 파견하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이니 그로서 천하는 지키는 일로 피로할 jt입니다. 신이 아뢰는 것은 그를 정벌하는 것은 정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며 그를 멸하는 것은 멸하지 않는 것만 못하는 것입니다.] 히였으며 또한 마침 무후의 심한 반발도 있기에 제께서 그만두었다.
8월에 소정방이 오랑캐를 패강에서 격파하고 마읍산을 탈취하였으며 마침내 평양을 포위하였다. 다음해(662) 방효태가 영남의 군사로 사수에 보루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개소문이 이를 공격해오자 모든 군대가 함몰되었으며 소정방은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건봉(666~668) 원년에 장이 아들 남복을 보내 천자를 쫓아 태산에서의 봉선에 참가하게 하였으며, 돌아가니 개소문이 죽고 아들 남생이 대를 이어 막리지가 되어 있었는데 아우 남건 및 남산과 서로 불평을 품고 미워하고 있었다. 남생이 국내성을 점거하고 아들 헌성을 보내 들어와 예방하고 구원을 바랬으며 개소문의 아우 정토 역시 땅을 데어가지고 와서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계필하력으로 요동도안무대사를 삼고 좌금오위장군 방동선과 영주도독 고품으로 행군총관을 삼고 좌무위장군 설인귀와 좌감문장군 이근행으로 후군을 삼아 나아가게 하였다.
9월에 방동선이 고려의 군사를 격파하자 남생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힘을 모았다. 조서를 내려 남생을 임명하여 특진·요동대도독겸 평양도 안무대사를 삼고 현도군공에 봉하였다. 또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겸 안무대사로 삼고 계필하력 및 방동선과 더불어 병력을 아우르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독고경운은 압록도로 쫓게 하고 곽대봉은 적리도로 쫓게 하고 유인원은 필열도로 쫓게 하고 김대문은 해곡도로 쫓게 하여 모두들 행군총관으로 삼고 이적에게는 절도사를 제수하였으며 연주와 조주의 군량을 요동에 날라다 쌓게 하였다.
다음해(667) 정월 이적이 길을 따라 신성에 진영을 자리하고 모든 장수와 모여 계책을 논의하여 이르기를 [신성은 적의 서북 변경의 요충이니 먼저 도모하지 않고는 나머지 성을 쉽게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서남쪽 산에 보루를 마련하고 성으로 임박하여 드니 성안의 사람들이 수비하던 추장을 묶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이적이 나아가 16개의 성을 쳐서 빼앗았다. 곽대봉은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였다.
3년(668) 2월에 이적이 설인귀를 거느리고 부여성을 쳐서 빼앗으니 기타 30개 성이 모두 귀순하여 성의껏 섬겼다. 방동선과 고품이 신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남건이 군사를 보내 그르 습격하하기에 설인귀가 고품을 구원하여 금산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고려가 북을치고 나아가는 것이 매우 기운차고 빨랐다. 설인귀가 측면에서 공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5만여 급의 머리를 베었으며 남소와 목저·창암 등 세 성을 쳐서 빼앗고는 군사를 이끌고 땅을 공략하여 들어가 이적과 더불어 힘을 합쳤다.
시어사 가언충이 군사작전 관계로 (요동에서) 돌아오자 제께서 군대의 정황이 어떤지 물으니 대답하여 이르기를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 선제께서 죄를 추궁하였으나 뜻한 바를 얻지 못한 까닭은 오랑캐에게 틈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속언에 이르기를 [군대의 일에 중매꾼이 없으면 중도에 돌아오게 된다.] 하였습니다. 지금은 남생의 형제가 서로 다투고 얽혀져 우리를 위해 길을 안내하니 오랑캐의 사정과 거짓됨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으며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사졸들은 힘을 다하고 있기에 신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고려비기에 이르기를 [900년을 못 미쳐 여든 살의 장수가 있어 그를 멸할 것이다.] 라 하였으니 고씨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가 있었으니 지금에 9백년이요 이적은 나이가 여든입니다. 오랑캐들은 계속하여 굶주리며 사람들이 서로 노략질하여 팔며 지진이 일어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안으로 들어가며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는 등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과 당황에 휩싸여 있으니 이번 걸음을 두 번 거듭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남건이 군사 5만으로 부여를 습격하니 이적이 살하수 위에서 그를 격파하여 5천 급의 머리를 베고 3만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그에 해당하는 병기 및 소와 말 등을 노획하였다. 나아가 대행성을 쳐서 빼앗았다. 유인원이 이적과 더불어 합류하고자 하였으나 시기를 놓쳤기에 불러들여 마땅히 주살해야 하였지만 사면하여 요주로 유배를 보내었다. 계필하력이 이적의 군대와 압록에서 만나 욕이성을 쳐서 빼앗고 모든 군대로 평양을 에워쌌다.
9월에 장이 남산을 보내 수령 1백 명을 거느리고 흰 깃발을 세워 항복하며 또한 들어와 예방할 것을 청하니 이적이 예절로서 맞아들였다. 그러나 남건이 여전히 굳게 수비하며 나와 싸웠으나 수 차례 패배하자 대장인 승려 신성이 첩자를 보내 내응할 것을 약속하였다. 5일에 모든 문이 열려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들어가 문에 불을 지르나 엄청난 불길이 사방에서 치솟으니 남건이 궁색하고 황급하여 자신을 찔렀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장과 남건 등을 사로잡고 무릇 5부의 176성에 69만 호를 거둬들였다. 조서를 내려 이적에게 오는 길에 소릉에 포로를 바치며 승전을 아뢰게 하고 개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12월에 제께서 함원전에서 이적을 불러들여 접견하고 조정에서 포로들의 죄상을 일일이 밝혀 문책하였다. 장은 평소에 위협받고 억눌림 당하였다 하여 사면하여 사평태상백을 삼고 남산은 사재소경으로 삼았으며 남건은 검주로 추방하고 백제왕 부여융은 영외로 추방하였으며 헌성은 사위경으로 삼고 신성은 은청광록대부로 삼고 남생은 우위대장군으로 삼고 계필하력은 행좌위대장군으로 삼고 이적은 태자태사를 겸하게 하고 설인귀는 위위대장군으로 삼았다.
그 땅을 나누어 9개 도독부와 42개 주 및 1백 개의 현으로 만들었다.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우두머리와 부호 가운데 공이 있는 자들을 발탁하여 도독과 자사 및 영에 제수하고 중국의 관리와 더 불어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설인귀를 도호로 삼아 군사를 총괄하여 그곳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해에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 고려를 평정한 것을 하늘에 감사하였다.
총장(668~670) 2년에 고려의 백성 3만 가구를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대장 검모잠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하여 자의 외손 안순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조서를 내려 고품에게 동주도로 쫓게 하고 이근행에게 연산도로 좇게 하여 함께 행군총관으로 삼아 그들을 토벌하게 하고 사평태상백 양방을 파견하여 달아난 잔당들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순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로 달아났다. 고품이 도호부를 옮겨 요동주에서 다스리고 반란한 군사를 안시에서 격파하였으며 또 천산에서 그들을 패퇴시키고 신라의 원병 2천 명을 사로잡았다. 이근행이 발로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다시 싸워 사로잡고 머리를 밴 것이 1만 명을 헤아렸다. 그리하여 평양은 병들고 피폐해져 능히 주둔하지 못하자 함께 어울려 신라로 달아나니 무릇 4년 만에 평정되었다.
처음에 이근행이 아내 유씨를 머무르게 하여 벌노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오랑캐들이 그곳을 공격하자 유씨가 갑옷을 입고 군사를 다스려 수비하니 적들이 물러났다. 제께서 그를 가상히 여겨 연군부인에 봉하였다.
의봉(676~679) 2년에 장을 요동도독에 제수하고 조선군왕에 보앟여 요동으로 돌아가 남아 잇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도록 하였으며 앞서 내지의 주현에 나누어 붙어 살게 하였던 자들을 모두 원래대로 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 장이 말갈과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였는데 사전에 드러나자 불러들여 공주로 추방하였으며 그의 사람들은 하남과 농우에 나뉘어 거처하게 하고 빈약하고 가난한 자들은 안동에 머무르게 하였다.
장이 영순(682~683) 초에 죽자 위위경이 추증하여 힐리의 묘 왼편에 장례를치르고 그 무덤으로 가는 길에 비석을 세웠다. 옛 성들은 가끔 신라에 편입되었으며 남아있던 사람들은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 달아나니 이로써 고씨 군장은 모두 끊어졌다. 수공(685~688) 연간에 장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성력(698~700) 초에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작위를 오리고 충성국왕으로 고쳐 봉하고는 그로 하여금 안동의 옛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다음해에 장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았으나 후에 점차 스스로 나라를 이루었다. 원화(806~820) 말에 이르러 사자를 보 내 악공을 바쳤다고 한다.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경사에서 동쪽으로 6천리 남짓한 바닷가 양지쪽에 위치해 있다. 서쪽은 월주, 남쪽은 왜, 북쪽은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 동쪽은 신라다. 왕은 동, 서 2개 성에 거처한다. 관직으로는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내신좌평, 재정을 관장하는 내두좌평, 예를 주관하는 내법좌평, 위병을 관리하는 위사좌평, 형벌을 주관하는 조정좌평, 외병을 장악하는 병관좌평이 있다. 나라에는 6방을 두어 1방이 10군을 통솔한다. 나라의 큰 성 8이 있는데 사씨, 연씨, 협씨, 해씨, 정씨, 국씨, 목씨, 백씨다.
백제의 법은 반역한 자는 목을 베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사람을 죽인 자는 세명의 노비를 보내어 속죄케 한다.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하면 그 물건의 세 배로 갚게 하고, 종신토록 가두어 둔다. 풍속은 고구려와 같다. 세곳의 섬에서 황칠이 나는데, 6월에 나무에 구멍을 뚫어 진을 모으면 색이 금빛이 난다. 왕은 소매가 큰 자주색 도포에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흰 가죽띠에 까만 가죽신을 신으며, 오나관에 금꽃으로 장식한다. 여러 신하들은 붉은 색의 옷을 입고 모자는 은꽃으로 장식한다. 서민에게는 자주색이나 붉은색의 옷이 금지된다. 서적이 많으며, 년, 월을 기록하는 것은 중국인들과 같다.
무덕 4년(621년)에 왕 부여장(무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과하마를 바쳤다. 이로부터 조공을 자주 바쳐 오니, 고조는 그를 책봉하여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삼았다. 5년 뒤에 명광개를 바치고, 또 고구려가 조공의 길을 막는다고 호소하였다. 태종 정관(627-649)초에 사신을 보내어 두 나라 사이의 원한을 풀게 했다. 또 신라와 대대로 원수가 되어 자주 서로 침공하였다. 태종은 옥쇄를 찍은 문서를 내어 “신라는 짐의 번신이며 왕의 이웃나라이오, 들으니 두 나라가 자주 침공한다 하는 지라, 짐이 이미 고구려와 신라에 조서를 내려 서로 화목하게 할 것을 당부하였으니, 왕은 부디 지난날의 원한을 잊어버리고 짐의 본의를 알아 주오.”라고 하였다.
부여장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그러나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회에 참석하고, 철갑과 독수리 방패를 바치니, 태종은 그들을 융숭히 대접하고 비단 3천을 주었다. 정관 15년(641년)에 장이 죽으니, 사자가 소복을 하고 와서, “군의 외신인 백제왕 부여장이 졸하였습니다.”라는 표문을 올렸다. 태종이 현무문에서 슬프다는 의식을 하고, 광록대부를 추증하고 조의 물품을 후하게 주었다. 사부랑중 정문표에게 명하여 그의 아들 의자를 책봉하여 주국(종2품)으로 삼고,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의자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깊으니, 당시에 해동증자라 불렸다. 이듬해에 고구려와 서로 화친하여 신라를 쳐서 40여성을 탈취하고, 군사를 보내어 수비하였다. 또 당항성을 탈취하여 신라의 조공 길을 막고자 했다. 신라가 다급함을 알려오자, 태종은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조서를 주어 화해하라고 설득하였다. 태종이 새로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틈을 타 신라의 7성을 탈취했다. 얼마 후 10성을 빼앗고, 그로 인해 조공을 하지 않았다.
고종이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왔다. 고종은 의자왕에게 조서를 내려 “해동의 세 나라가 개국한 지가 오래며, 지형이 본래 개이빨의 형세처럼 들쭉날쭉 서로 닿아 있소. 근래에 와서 국경을 다투고 침공하여 편안한 해가 없더니, 이제는 신라의 높은 성과 요해처의 군사기지를 모두 왕이 병탄하였소. 신라왕은 자신이 곤궁하게 됨을 나에게 알리고, 왕이 그 땅을 돌려 줄 것을 원하였소. 옛날 제환공이 일개 제후였지만 오히려 망하여 가는 나라를 보존하여 주었소. 하물며 짐은 만방의 주인인데, 그들의 위태함을 구제해 주지 않을 수 있겠소. 왕은 병탄한 성을 마땅히 돌려주어야 하며, 신라도 사로잡아간 포로를 왕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오. 조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왕과 대결할 것이오. 짐은 거란 제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수를 건너서 깊이 침입할 것이니, 왕은 잘 생각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영휘 6년(655년)에 신라가 백제, 고구려, 말갈이 북쪽 국경의 30성을 빼앗아 갔다고 호소하여 왔다. 현경 5년(660년)에 이에 조서하여 좌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 좌무위장군 풍사귀, 좌효위장군 방효태를 거느리게 하고, 신라병을 출동시켜 백제를 치게 하였다. 당의 군대는 성산에서 바다를 건넜다. 백제는 웅진강 입구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소정방의 군대가 공격하자, 백제가 크게 패했다. 왕의 군대는 다시 조수를 타고 진도성(부여성)에 30리 가까이 진군하여 주둔했다. 백제가 모든 무리를 다 동원하여 방어를 하였으나, 또 쳐부수어 1만여급의 머리를 베고 그 성을 탈취했다. 의자가 태자 융과 함께 북쪽 변방으로 도망치니, 정방이 이를 포위했다.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라 무리를 거느리고 수비를 굳게 하자, 의자의 손자 문사는 “아직 왕과 태자께서 건재하여 있는데 숙부께서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만약 당병이 포위를 풀고 물러간다면 우리 부자는 어찌될 것인가”라 하고 측근들과 함께 밧줄을 타고 성을 나왔다. 백성들이 모두 따라 나서자, 태는 제지하지 못했다. 소정방이 군사에게 명하여 성가퀴로 뛰어 올라 깃발을 꽂게 하니, 태가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소정방은 의자, 융, 소왕 효연 및 추장 58명을 사로잡아 경사(장안)로 보내고, 그 나라 5부, 37군, 200성, 76만호를 평정하였다. 이에 땅을 다시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연, 덕안의 5도독부를 설치하여 추장을 뽑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 유인원으로 하여금 백제성을 지키게 하고, 좌위낭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9월에 소정방이 포로를 이끌고 알현하니, 조서를 내려 죽이지 말고 놓아주라고 했다. 의자가 병으로 죽자, 위위경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곡하는 것을 허락했다. 손호, 진숙보의 묘 왼쪽에 장사하라고 명하고, 융에게는 사가경을 제수했다.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가서 죽으니, 유인궤로 대신하게 했다.
부여장의 조카 복신은 일찍이 군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때에 승 도침과 함께 주류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왜국에서 옛 왕자 부여품을 맞아다 왕으로 삼으니, 서부가 다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유인원을 포위하였다. 용삭 원년(661년)에 유인궤가 신라병을 동원시켜 구원을 가게 하니, 도침은 웅진강에다 두 개의 성벽을 세웠다. 인궤가 신라병과 함께 양쪽에서 공격하니, 백제병은 성벽 안으로 쫓겨 들어가는데, 앞을 다투어 다리를 건너다가 빠져 죽은 자가 1만 명에 달했다. 신라병은 돌아갔다.
도침은 임존성을 보루로 삼아 스스로 영군장군이라 일컫고, 복신은 상잠장군이라 일컬으며 인궤에게 고하기를, “당이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를 쳐부수면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죽인 다음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준다고 들었소. 우리가 죽음을 당할 바에야 싸우다 죽으려 하지 않겠소.” 하였다. 이에 인궤는 사자를 시켜 답장을 보냈다. 도침은 매우 거만하게 사자를 외관에 머무르게 하고 업신여기는 말투로 “사자의 벼슬이 낮구나. 나는 일국의 대장이니만큼 예의상 만나 볼 수가 없다.” 하고 그냥 돌려보냈다. 인궤는 군사가 적으므로 군사를 쉬게 하여 훈련을 쌓고, 신라병과 연합해 쳐부술 것을 청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병을 병합하니, 부여풍도 제지하지 못했다.
용삭 2년(662년) 7월에 인원 등이 웅진에서 백제군을 무찌르고 지나성을 탈취한 다음, 밤에 진현성으로 육박하여 날이 밝을 무렵에 안으로 쳐들어가서 머리 8백급을 베니, 신라의 군량수송로가 비로소 열렸다. 인원이 증원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 우위위장군 손인사를 웅진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제병 7천명을 징발하여 보냈다. 복신은 국권을 장악하고 부여풍을 죽일 것을 꾀하였다. 풍은 친히 심복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베고, 고구려 및 왜와 연합하였다.
인원은 제병을 증원받고 나서 사기가 진작되었다. 이에 신라왕 김법민과 함께 보병, 기병을 이끌고, 유인궤로 하여금 수군을 거느리고 가게 하여 웅진강에서 동시에 진군하여 주류성으로 육박하였다. 풍의 무리는 백강 어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을 사면에서 공격하여 다 이기고, 4백 척의 배를 불사르니, 풍은 도망쳐 자취를 감추었다. 거짓 왕자 부여충승과 부여충지가 남은 군사와 왜인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니, 다른 여러 성들이 모두 따라 항복하였다. 이에 인원은 군대를 정비하여 돌아오고, 인궤는 뒤에 남아서 대신 수비하였다.
고종은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아가서 신라와 묵은 감정을 풀고 백제 유민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인덕 2년(665년)에 부여융이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백마를 잡아 놓고 맹약하였다. 맹서는 인궤가 작성하였다. “지난날 백제의 선왕이 역리와 순리의 이치를 돌아보지 않아 이웃과 우호가 돈독하지 못하였고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였으며, 고구려, 왜와 함께 신라에 침입하여 성읍을 쳐부수고 도륙하였다. 천자께서 백성이 아무 이유 없이 고통 받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으라고 명하였으나, 선왕은 지세가 험하고 도로가 먼 곳만 믿어 조명을 멸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께서 이에 분노하여 이들을 쳐서 평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망하는 것을 일으켜 주고 끊어지는 것을 이어주는 것이 왕자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전 태자 융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이다.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동맹의 나라가 되어서 지난날의 원한을 잊어버리고 다시 우호를 다져라. 천자의 명을 공손히 받들어 영원한 번신이 될지어다.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이 이 맹서에 친히 임하였으니, 신의를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동원한다면, 신명이 이를 보고 온갖 재앙을 내려 자손이 번창 하지 못하여 사직을 지킬 자가 없게 할 것이니, 세세영원토록 삼가 저버림이 없으라. 이에 금서철계를 만들어 신라의 종묘에 간직하였다.
인원 등이 돌아 오자, 융은 백제의 유민들을 분산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역시 경사로 돌아 왔다. 의봉 년간(677-678)에 대방군왕으로 승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무렵 신라가 강성하자, 융은 감히 옛 백제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의탁하고 있다가 죽었다.(682년) 측천무후때 또 그의 손자 부여경으로 왕위를 계승케 하였으나, 이때 그 땅은 이미 신라, 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어,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신라는 변한의 후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자리하여 가로가 1천리이고 세로가 3천리이며 동쪽은 장인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이며 서쪽은 백제에고 남쪽은 바다에 연하며 북쪽은 고려이다.
왕은 금성에 거처하고 둘레가 8리가 되는 곳으로 호위하는 군사가 3천명이다. 성을 가리켜 침모라라 하며 내지에 이는 고을을 훼평이라 하고 외지에 있는 것을 읍 륵이라 한다. 훼평은 6개 있으며 읍륵은 52개가 있다.
조복은 흰 것을 으뜸으로 여기며 산신에게 제사지내기를 좋아한다. 8월 보름이면 관리와 벼슬아치에게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하사하며 활쏘기를 한다. 관직을 삼을 대는 친족을 높이 여기는데 그 친족의 명칭에도 제 1골이니 제 2골이니 하여 스스로 구별한다. 형제의 여식과 고모 및 이모와 사촌 자매 등에게 모두 장가들어 아내로 삼는다. 왕족이 제 1골이고 아내 역시 그 친족으로 서 아들을 낳으면 모두 제 1골이 된며, 제 2골의 여자에게는 장가들지 않으며 비록 장가들더라도 항상 첩실로 삼는다.
관직에는 재상·시중·사농경·태부령 등 무릇 17등급이 있으며 제 2골로 관직을 맡긴다.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무리와 더불어 의논하는데 '화백'이라 부르며 한 사람이라도 의견이 다르면 곧 시행되지 않는다.
재상의 집에는 녹봉이 끊이지 않고 하인이 3천 명이나 되며 갑옷과 무기 침 소와 말과 돼지 등 또한 그만큼 된다. 바다 가운데의 산에 가축을 방목하여 먹고자 하면 활로 쏘아 잡는다. 양곡을 다른 사람에게 이자놓고 모두 갚지 않으면 고용하여 노비로 삼는다.
왕의 성은 김씨이고 지위가 높은 이들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들은 성씨가 없이 이름만 있다. 식기에는 버드나무로 만든 잔과 구리로 만든 것, 그리고 질그릇 등이 있다. 정월 초하룻날에 서로 하례하며 이날은 해와 달의 신에게 절을 올린다.
남자는 베옷에 바지를 입는다. 부인들은 긴 저고리를 입으며 사람을 보면 반드시 무릎을 꿇는데 곧 손으로 땅을 짚는 것을 공손한 것으로 여긴다. 화장을 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모발을 이용하여 머리에 두르고 구슬과 채색 비단으로 장식한다.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끊어 팔고 검은 두건을 머리에 쓴다. 저잣거리에는 모두 부녀자들이 서로 물품을 교환하고 장사한다. 겨울이면 집안에 부엌을 짓고 여름이면 얼음 위에 음식을 놓아둔다. 가축에는 양이 없으며 당나귀와 노새가 적고 말이 많다. 말은 비록 키와 몸집이 크나 잘 달리지 못한다.
장인은 사람의 형태에 키는 석장으로 톱니 이빨에 갈고리 손톱을 하고 검은 털이 몸을 덮고 있으며 음식은 익혀 먹지 않고 짐승을 물어 잡거나 혹은 사람을 때려잡아 먹으며 부인을 얻으면 그저 의복이나 짓게 한다. 그 나라는 산이 수십 리에 이어져 있으며 협곡이 있어 궐문이라 불리는 쇠문으로 굳게 닫혀 있으니 신라는 항상 궁수 수천 명을 주둔하여 그곳을 지킨다.
정관(627~649) 5년에 여자 악사 두명을 바쳤다. 태종이 이르기를 [근자에 임읍에서 앵무새를 바쳤는데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하며 돌아가기를 바라쓴데 항차 사람에게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며 사자에게 당부하여 돌아가게 하였다.
이 해에 진평이 죽고 아들이 없으니 여식 선덕을 세워 왕으로 삼고 대신인 을제가 국정을잡았다. 조서를 내려 진평을 좌광록대부로 추증하고 부의로 물품 2백 단을 하사하였다. 9년(635)에 사자를 파견하고 선덕을 책봉하여 부친의 봉빅을 답습케 하였으며 나라 사람들은 성조황고라 불렀다.
17년(643)에 고려와 백제의 공격을 받자 사자가 와서 군대를 요청하였느데 마침 제께서도 몸소 고렬르 정벌하고자 하였기에 조서를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오랑캐의 세력이 나눠지도록 하게 하였더니 선덕이 군사 5만명으로 고려의 남쪽 마을로 들어가 수구성을 쳐서 빼앗고는 아뢰어 왔다.
21년(647)에 선덕이 죽자 광록대부에 추증하고 누이 진덕으로 왕위를 답습하게 하였다. 다음해(648)에 아들 문왕과 아우 이찬의 아들인 춘추를 보내와서 예방하니 문왕을 임명하여 좌무위장군을 삼고 춘추를 특진으로 삼았다. 관복 등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르고자 청하기에 궁중의 진귀한 의복을 내려 하사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국학에서 공자의 제사와 강론을 관람하게 하였으며 제께서 편찬한 진서를 하사하였다. 돌아갈 것을 아뢰자 칙서를 내려 삼품 이상은 교외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고종 영휘(650~655) 원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격파한 뒤 춘추의 아들 법민을 보내 들어와 예방하였다. 진덕이 비단을 자아서 그곳에 송을 지어 바치니 이르기를 [위대한 당나라가 왕업을 창건하매, 황제의 높은 포부 장하기도 하여라. 전쟁을 그치매 군사들은 시름 높고 문교에 힘을 써서 대대로 이을세라. 하늘을 대신한 은혜도 장할시고, 만물을 다스려서 저마다 빛을 낸다. 끝없는 어진 덕은 해와 달과 조화되어 시운을 어루만져 태평세월 지향하네 깃발은 어찌 그리 빛나게 나부끼며 군악 소리 유달리도 우렁차게 들리누나. 황제 명령 거역하는 외방의 오랑캐는 한 칼에 멸망하여 천벌을 받으리라. 밝고 어두운 데 없이 순박한 풍속이요, 먼 곳 가까운 곳 없이 저마다 축하로다. 사철은 옥촉처럼 서로 조화되고 해와 달과 별들은 만방을 두루 돈다. 산신령은 어진 재상 점지해 주시고, 황제는 충량한 신하들을 신임한다. 삼황과 오제가 같은 덕을 이룬지라 어화 우리 당나라에 길이 비추리로다] 하였다. 제께서 그 뜻을 어여비 여기고 법민을 태부경으로 발탁하였다.
5년(654)에 진덕이 죽자 제께서 그를 위해 애도식을 거행하여 개부의동삼사에 추증하고 채색 비단 3백 단을 하사하였으며 태상승 장문수에게 명하여 부절을 지니고 조문하게 하고는 춘추로 왕위를 답습하게 하였다.
다음해(655) 백제와 고려 및 말갈이 함께 공격하여 그들의 성 30개를 탈취하였다. 사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기에 제게서 명을 내려 소정방에게 그를 토벌하게 하며 춘추를 우이도 행군총관에 삼으니 마침내 백제를 평정하였다. 용삭(661~663) 원녀에 죽으니 법민이 왕위를 답습하였다. 그 나라를 계림주대도독으로 삼고 법민에게 도독을 제수하였다.
함형(670~674) 5년에 고려에서 반란한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땅을 공략하여 그곳을 수비하자 제께서 노하여 조서를 내리고 관작을 삭탈하였으며 그의 아우임 우효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 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경사로부터 귀국시켰다.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으로 그를 보좌하여 군사를 일으켜 총력으로 토벌하게 하였다.
상원(674~676) 2년 2월에 유인궤가 그들의 무리를 칠중성에서 격파하고 말갈의 군사로 바다를 건너 남쪽의 경계를 공략하니 머리를 베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조서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고 매초성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세 번의 싸움에서 오랑캐들이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법민이 사신을 보내 들어와 예방하고 사죄하며 공물을 바쳐 선처를 바랐으며 인문 또한 돌아와 왕의 작위를 사양하니 조서를 내려 법민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백제의 땅을 많이 차지하게 되어 마침내 고려의 남쪽 경계에 닿게 되었다. 상·양·강·웅·전·무·한·삭·명 등의 9주를 설치하고 주에는 도독을 두어 10개 혹은 20개 군을 통치하였으며 군에는 태수가 있고 현에는 소수가 있다.
개요(681~682) 원년에 죽으니 아들 정명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사자를 보내어 예방하고 당의 이름과 이름난 문장을 빌리고자 하니 무후가 길흉례와 아울러 이름난 문장 50편을 하사하였다. 죽으니 아들 이홍이 왕위를 이었다. 죽으니 아우 흥광이 왕위를 이었다.
현종 개원(713~741) 연간에 수 차례 들어와 예방하고 과하마 및 조하주와 어아주, 그리고 바다표범의 가죽을 바쳤다. 또 두 여인을 바치니 제께서 이르기를 [여인들은 모두 왕의 고모의 자매이니 본래의 풍속에 어긋나는 것이며 그들 친척과 떨어져 잇게 하는 것이니 짐이 차마 머물러 두게 할 수 없다] 하며 후하에 물품을 하사하여 그들을 돌려보냈다. 또 자제를 보내어 태학에 들어와 경술을 배웠다. 제께서 간간이 흥광에게 상서로운 무늬를 수놓은 비단과 오색 비단 및 자주빛 무늬수의 도포 그리고 금·은으로 된 정교한 기물 등을 하사하였으며 홍광 역시 이구마와 황금 및 아름다운 모발 등의 여러 물품을 바쳤다. 일찍이 발해 말갈이 등주를 노략질하자 흥광이 그들을 쳐서 내쫓으니 제께서 흥광을 영해군대사로 관작을 올리고 그로 하여금 말갈을 공격하게 하였다.
25년(737)에 죽으니 제게서 이를 매우 슬퍼하여 태자태보로 추증하고 명을 내려 형숙으로 하여금 홍려소경의 직분으로 조문하게 하고 아들 승경으로 왕위를 잇게 하며 형숙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 불리어지며 시경과 서경을 잘 알고 있다. 경은 유학이 도타우니 부절을 지니고 가서 마땅히 경전의 올바른 뜻을 널리 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대국의 번성함을 알게 하라.] 하였다. 또 그 나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 하여 조서를 내려 부의 병조참군 양계웅을 부관으로 거느리게 하였다. 그 나라의 바둑 고수들이 모두 그의 아랫수라 하여 금·은 보석을 후하게 사자에게 보내주었다. 머지 않아 그 아내 박씨를 책봉하여 비로 삼았다. 승경이 죽으니 조서를 내려 사자로 하여금 조문하게 하고 그 아우 헌영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제게서 촉 지방에 있었는데 사신을 보내 강을 거슬러 올라와 성도에 도착하여 정월에 예방하였다.
대력(766~779) 초에 현영이 죽으니 아들 건운이 즉위하였으나 겨우 머리를 나누어 땋은 어린아이이므로 김은거를 들여보내 명을 기다렸다. 조서를 내려 창부랑중 귀송경으로 하여금 가서 조문하게 하고 감찰어사 육정과 고음으로 보좌하게 하고 그를 책봉하여 관작을 수여하였으며 아울러 모친 김씨를 태비로 삼았다. 마침 그들의 재상이 권력을 다투며 서로 공격하여 나라가 크게 혼란하다가 3년 만에 안정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해 예방하여 조공을 바쳤다.
건중(780~783) 4년에 죽으니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재상 김량상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정원(785~805) 원년에 호부랑중 개훈을 파견하여 부절을 지니고 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이 해에 죽으니 양상의 사촌동생 경신을 세워 왕위를 답습하게 하였다.
14년(798)에 죽으니 아들이 없어 적소인 준옹을 세웠다. 다음해(799)에 사봉랑중 위단으로 하여금 책봉의 칙서를 지니게 하여 파견하였으나 도착하기 전에 준웅이 죽으니 단은 돌아왔다. 아들 중흥이 자리에 오르니 영정 원년에 조서를 내려 병부랑중 원계방으로 하여금 책봉의 칙서로서 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3년 후(792)에 사자 김력기가 들어와 사례하며 더불어 이르기를 [지난해에 옛 군주인 준옹을 책봉하여 왕으로 삼고 그 어미 신씨를 태비로 삼으며 아내 숙씨를 비로삼으려 하셨으나 준옹이 불행하여 책봉의 칙서가 지금 성중에 머물러 있으니 신이 청하건데 되돌려 제수하여 주십시오 하였으며 또 그들의 재상된 자로서 김언승과 김중공 그리고 왕의 아우인 소금첨명 등이 문극을 하고자 청하니 조서를 내려 모두 허락하였다. 무릇 두 차례 조공하였다.
7년에 죽으니 언승이 즉위하고 와서 상중임을 아뢰기에 명을 내려 직방원외랑 최정으로 하여금 조문하게 하고 아울러 새로운 왕을 명하였으며 그 아내 정씨를 비로 삼았다. 장경(821~824)과 보력(825~827) 연간에 재차 사자를 보내와서 예방하고 머무르며 숙위하였다. 언승이 죽으니 아들 경휘가 즉위하였다.
대화(827~835) 5년에 태자인 좌유덕 원적으로 하여금 가서 칙서로서 책봉하고 조문하기를 의례대로 하였다. 개성(836~840) 초에 아들 의종을 보내와 사례하고 머물러 숙위하기를 원하니 그 청을 들어주었으며 다음 해에 돌려보냈다. 5년(840)에 홍려시에 적을 둔 질자와 햇수를 채운 자 등 1백 5명을 모두 둘려보냈다.
장보고와 정년이란 자가 있어 모두 전투에 뛰어나고 창을 쓰는 기술이 교묘하였다. 정년은 또한 바다에 잠개질이 능하여 50리 길을 달음박질 하고도 숨을 몰아 쉬지 않는 등 그 용감하고 건장함을 겨루면 장보고가 미치지 못하였다. 정년은 보고를 형이라 불렀으나 보고는 나이를 핑계하여 그리고 정년은 재주를 핑계하여 항상 서로에게 지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 그 나라로부터 와서 무령군의 소장이 되었다.
후에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가서 그들의 왕을 알현하고 이르기를 [중국에 두루 걸쳐 신라 사람들이 노비가 되고 있으니 원하건데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들을 노략질하여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청해는 바닷길의 요추지이다. 왕이 보고와 더불어 1만 명의 사람으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대화(827~835)로부터 그 이후로 바다에서 신라 사람을 파는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장보고는 이미 그 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얻었으나 정년은 굶주림과 추위 속에 연수에서 식객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수주 풍원규에게 이르기를 [나는 동쪽으로 돌아가 장보고에게 밥을 빌어먹을까 하오] 하니 풍원규가 이르기를 [만약 보고에게 저버림을 당하면 어찌할 것인가? 그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면 어찌하겠는가?] 하기에 정년이 이르기를 [굶주리고 얼어서 죽는 것은 싸우다 흔쾌히 죽는 것만 못한데 하물며 고향에서 죽는 것임에야!] 하고는 정년이 마침내 떠나갔다.
도착을 하여 보고를 만나니 잔치를 베풀고 지극히 환대하였다. 잔치가 미쳐 끝나지 않았을 때 대신이 왕을 살해하여 나라가 어지러워 군주가 없다는 소식이 들렸다. 보고가 군사 천 명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고 정년을 의지하여 이르기를 [그대가 아니면 능히 이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 하였다. 정년이 그 나라에 이르러 반역자를 주살하고 왕을 세움으로서 보답하였다. 왕이 마침내 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을 대신 청해를 지키게 하여다. 회창(841~846) 후에 조공이 다시 이르지 않았다.
논평하여 말한다. 두목이 일컫기를 [안사순이 삭방절도사로 있을 때 곽분양과 이임회가 함께 아문의 도장으로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능히 사귀지 못하여 비록 같은 솥에 밥을 먹으면서도 항상 서로를 흘겨보며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곽분양이 안사순을 대신하여 되자 이임회가 도망가려 했으나 계획을 결행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조서가 내려와 이임회로 하여금 곽부냥ㅇ의 군사 반을 나누어 동쪽으로 조나라와 위나라로 출정하게 하니 이임회가 들어와 청하여 이르기를 [이 한 몸이 죽는 것은 진실로 달게 받겠으니 처자들만은 면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니 곽분양이 총총 걸음으로 뛰어 내려와 손을 이끌고 당사응로 오르며 이르기를 [지금은 나라가 어지러워 주상께서 피난을 다니시기에 이르렀으니 공이 아니면 능히 동쪽을 정벌할 수 없을 것인데 어찌 사사로이 원망하던 때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헤어질 때 이르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충정과 의리를 권하였으니 커다란 도적을 모두 평정한 것은 실로 두 인물의 힘이었다. 마음이 번치 않을 것을 알고서 그 마음을 짐작하기는 어려운 것이요, 원망하여 성을 내게 되면 반드시 견해가 짧아지게 되는데도 상대의 그 재목을 알아 준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마음이 변치 않을 것임을 알게되고 그의 자격이 쓸 만한 것을 안 뒤에야 마음에 의심을 두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며 평소에 감정이 쌓여있으면 그의 마음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원망하여 성을 내게 되면 반드시 견해가 짧아지게 되는데도 상대의 그 재목 됨을 알아준다는 것으 더욱 어려운 것이다.) 이는 장보고와 곽분양의 현명함이 동등한 것이다. 정년이 장보고에게 투항하며 반드시 [저는 귀인이고 나는 천민으로 내가 굴복하고 낮추어 나가면 마땅히 예전의 원망으로 나를 살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여겼다. 장보고는 과연 살해하지 않았으니 이는 인지상정이다. 장보고가 정년을 임명한 것은 그 일이 개인에게서 나온 것이며 정년이 또한 춥고 굶주리고 있었기에 쉽게 감동이 되었던 것이다. 곽분양과 이임회는 평생 겨루어 대립하고 있었으나 이임회에 대한 명령은 천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장보고에게 견준다면 곽분양이 뛰어나다 이는 곳 성현들이 의심하여 망설이는 성공과 패배의 갈림길이다. 세상에 칭하기를 주공과 소공은 백대에 걸친 스승이라고 하지만 주공이 어린 임금을 보좌하였을 때 소공은 그를 의심하였으니 주공과 같은 성인과 소공과 같은 현인도 젊었을 때는 문왕을 섬기고 늙어서 무와을 보좌하여 능히 천하를 평정하려 하였건만 주공의 마음을 소공 또한 알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아무리 인의의 마음을 지니고 있더라도 총명함을 바탕하지 않는다면 비록 소공이라 할지라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 아랫사람들이야] 하였다. 오호라, 어진 이는 사사로운 원한으로 서로를 해치지 않고 나라 일의 근심을 앞세우니 진나라에는기해가 있고 당나라에는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으니 누가 이국에 사람이 없다고 말할 것인가?
일본은 예전의 왜노이다. 경사에서 1만 4천리 떨어져 있으며 신라에서 곧장 동남쪽의 바다 가운데에서 섬에 의지하여 거처하니 동서가 걸어서 다섯 달 거리이고 남북이 걸어서 석달 거리이다. 나라에는 성곽이 없어 나무를 연결 지어 촌락의 목책으로 삼으며 풀로 지붕을 이어 집을 짓는다.
좌우에 작은 섬이 50개 남짓 있는데 모두 스스로 나라라고 이름하여 그에게 신하로서 붙좇는다. 본솔 한 사람을 두어 모든 부를 점검하여 살핀다. 그의 풍토에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으며 문자가 있고 불법을 숭상한다. 관직은 열두 등급이 있다.
왕의 성씨는 아매씨로서 스스로 말하기를 천어중주라 불리는 첫군주로부터 언염에 이르기까지 무릇 32세대라 하는데 모두 '존'을 칭호로 삼으며 축자성에 거처한다. 언염의 아들 신무가 즉위하자 [천황]이라 고쳐 칭호를 삼고 대화주로 옮겨서 다스렸다.
그 다음을 수정이라 하며 다음을 안녕, 의덕, 효소, 천안, 효령, 효원, 개화, 숭신, 수인, 경행, 성무, 중애라 한다. 중애가 죽자 개화의 증손녀 신공이 왕이 되었다. 다음을 응신, 인덕, 이중, 반정, 윤공, 안강, 웅략, 청령, 현종, 인현, 무열, 계체, 안한, 선화, 흠명이다. 흠명 1년이 바로 양 승성(552~555) 원년이다. 다음은 해달이다. 다음은 용명으로 또한 일다리사비라고 하는데 바로 수 개황(581~600) 말기로서 처음으로 중국과 더불어 왕래하였다. 다음이 숭준이다. 숭준이 죽자 흠명의 손녀 웅고가 즉위하였다. 다음이 서명이고 다음이 황극이다.
그 풍속에 상투를 틀고 관과 띠가 없이 맨발로 다니며 한 폭의 수건으로 뒤를 가리고 지위가 노은 자는 비단을 머리에 쓰며 부인들은 순색의 치마와 긴 허리의 저고리를 입으며 뒤쪽으로 머리를 묶는다. 양제 때 이르러 그 백성에게 비단 실로 만든 관을 하사하니 금과 옥으로 장식을 하였으며 무늬있는 베로 옷을 해입고 좌우에 길이 8촌의 은꽃을 착용함에 많고 적음으로 귀천을 나타내었다.
태종 정관(627~649) 5년에 사자를 들여보내 예방하니 제께서 그들이 먼 곳으로부터 온 것을 긍휼히 여기고 벼슬아치에게 조서를 보내 해마다의 조공에 구애받지 말도록 하였다. 신주자사 고인표를 보내 가서 일러 깨우치게 하였더니 왕과 더불어 예절에 관해 다투다가 올바르게 처리하지 못하여 천자의 며을 펼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얼마 후에 다시 신라의 사자를 좇아 글을 올렸다.
영휘(650~655) 초에 그들의 왕 효덕이 즉위하자 연호를 고쳐 백치라 하고 크기가 한 말 가량 되는 호박과 다섯 되들이 마노를 바쳤다. 이때에 신라가 고려와 백제에게 침략당하자 고종이 새서를 하사하여 영으로 군사를 내어 신라를 원조하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효덕이 죽고 그 아들 천풍재가 즉위하였다. 죽으니 아들 천지가 즉위하였다. 다음해에 사자가 하이의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예방하였다. 하이 역시 바다 가운데 섬에 거처하는데 그 사자는 수염의 길이가 4척 남짓이고 머리에는 화살을 귀엣고리로 하고 있었으며, 사람에게 박을 머리에 이고 수십 보 밖에 서 있게 하고는 화살을 쏘아 명중시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천지가 죽으니 아들 천무가 즉위하였다. 죽으니 아들 총지가 즉위하였다. 함형(670~674) 원년에 사신을 보내 고려를 평정한 것을 하례 하였다. 후에 점차 하나라의 소리를 익히더니 왜라는 이름을 싫어하게 되어 일본이라 고쳐 불렀다. 사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그 나라는 해가 솟아오르는 곳에 가까운 까닭에 이름한 것이라고 하였다. 혹은 이르기를 일본은 작은 나라로서 왜에 의해 병탄된 까닭에 그 호칭을 모방한 것이라 하였다. 사자가 정성스럽지 않기에 의심이 되었다. 또 망령되게 과장하기를 그 나라의 도읍은 사방 수천리로서 남쪽과 서쪽이 바다에 닿고 동쪽과 북쪽은 큰 산을 경계로 이루고 있으며 그 바깥은 모인이라 하였다.
장안 (701~704) 원녀에 그들의 왕 문무가 즉위하자 연호를 고쳐 태보라 하고 조신진인 속전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조신인인이란 당의 상서와 같은 것이다. 진덕관을 쓰고 정수리에는 화려한 꼿이 네 갈래에 있었으며 자색 도포에 비단 띠를 하고 있었다. 진인은 학문을 조항하고 글짓기에 능했으며 거동에 조용한 자태가 있었다. 무후가 인덕전에서 그에게 잔치를 베풀고 사선경에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문무가 죽으니 아들 아용이 즉위하였다. 죽으니 아들 성무가 즉위하고 연호를 고쳐 백귀라 하였다. 개원(713741) 초에 속전이 다시 예방하여 여러 선비들을 따르며 경전을 전수받기를 청하기에 조서를 내려 사문조교 조현묵으로 홍려시에서 스승이 되게 하니 큰 폭의 베를 감사의 예물로 바쳤으며 상으로 받은 물품을 모두 서책으로 바꾸어 돌아갔다. 그의 부조신 중만이 중화를 사모하여 돌아가려 하지 않고 성영을 바꾸어 조형이라 하고 좌보궐을 역임했으며 의장 교우를 가지며 지식을 많이 갖추어 얼마 후에 돌아갔다.
성무가 죽으니 여식 효명이 즉위하여 연호를 천평승보라 고쳤다. 천보(742~756) 12 년에 조형이 다시 들어와 예방하니 상원(760~762) 연간에 좌산기상시·안남도호로 발탁하였다. 신라가 바닷길을 막아서자 다시 명주와 월주를 지나 조공하였다.
효명이 죽으니 대취가 즉위하였다. 죽으니 성무의 여식 고야희로 왕을 삼았다. 죽으니 백백이 즉위하였다. 건중(780~783) 원년에 사자 진인홍능이 토산물을 바쳐다. 진인은 아마도 관직에 연유하여 성씨를 삼은 것일 것이다. 홍능은 글씨를 잘 썼기에 글을 쓴 종이가 마치 명주와도 같이 윤택이 났으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였다.
정원(785~805) 말에 환무라는 왕이 사자를 보내 예방하엿다. 그들의 학자 귤면세와 승려 공해가 머물러 학업을 익히기를 원하였으며 20여 년이 지나 사자 고계진인이 와서 귤면세와 함께 돌아가기를 청하자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다음으로 낙락이 즉위하고 다으으로 차아가 즉위하였으며 부화가 즉위하였고 다음으로 인명이 즉위하였다. 인명의 즉위는 곧 개성(836~840) 4년으로 다시 들어와 조공하였다. 다음은 둔덕이며 다음은 처오하이며 다응ㅁ은 양성이다. 다으은 광효이니 바로 광계(885~888) 원녀이다.
유귀는 경사에서 1만 5천리 떨어져 있고 흑수말갈에서 곧장 동북쪽으로 작은 바다의 북쪽에 있으며 삼면이 모두 바다에 막혀있고 그 북쪽은 끝 닿는 곳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작은 섬에 의지하여 흩어져 거처하며 습지와 못이 많고 바닷고기와 소금의 혜택이 있다. 땅은 일찍 추워지고 서리와 눈이 많으며 넓이가 6촌에 길이 7척인 나무를 사용하여 그 위쪽을 끈으로 매어 얼음 위를 걸어가고 짐승을 쫓는다. 그 땅에는 개가 많아서 그 가죽으로 갖옷을 만든다.
풍속에 머리를 늘어뜨리며 곡식은 가라지와 흡사하나 그보다 작고 채소나 풀열매 및 별다른 곡류가 없다. 날랜 군사가 1만 명이다. 남쪽은 막예 말갈과 인접하며 동남쪽으로 바닷길을 15일 항해하여 가면 닿는다. 정관(627~649) 14년에 그들의 왕이 아들 가야여막초피를 보내 세 번의 통역을 거쳐 들어와 예방하니 기도위에 제수하여 보냈다.
용삭(661~663) 초에 담라가 있어 그 왕 유리도라가 사신을 보내 들어와 예방하였는데, 그 나라는 신라의 무주 남쪽 섬에 자리하며 풍속은 질박하고도 촌스럽고 큰 돼지 가죽을 옷으로 입으며 여름에는 가죽으로 만든 집에 거처하고 겨울에는 굴을 파서 집을 만든다. 그 땅에는 오곡이 나고 밭갈이에 소를 사용할 줄 모르며 쇠이빨로 된 고무래로 땅을 간다 처음에는 백제에 복속되었으며 인덕(664~665) 연간에 추장이 들어와 예방하고 황제를 좇아 태산에까지 이르렀고 후에는 신라를 붙좇았다.
개원(713~741) 11년에 또 달말루와 달구 등 두 부락의 수령들이 조공하였다. 달말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로서 고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혹은 타루하라고 하는 물줄기가 동북쪽으로 흘러 흑수에 유입된다 하였다. 달구는 실위의 종족으로 나하의 남쪽, 동말하의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황두실위와 접하며 동북쪽으로는 달말루에 이른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