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君子 水墨의 發展과정
사군자 중에서 대나무 그림이 먼저 출현하는데, 그 기원을 唐代라고 하나, 본격적으로 그려진 것은 北宋의 문동(文同, 1019∼1079)과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이후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미 시경(詩經)에서 군왕의 높은 덕망에 비유되어 칭송된 바 있으며, 대숲을 은거지로 자적했던 竹林七賢이나 대나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한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王徽之)의 이야기를 통해 군자의 동반자로 입지를 굳혔다.
한국적 묵죽도의 화풍은 이정(李霆, 1541∼1622)에 이르러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그림은 탄탄한 구성과 꼿꼿한 필력을 바탕으로, 형사(形寫)와 사의(寫意)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매화도 대나무 그림과 비슷한 시기에 선승(禪僧) 중인(仲仁)이 그리기 시작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양무구(揚无咎, 1097∼1169)가 본격적으로 매화를 주재로 그리기 시작하여 묵매(墨梅)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매화는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선비의 절개와 불굴의 정신을 뜻하게 되었다. 특히 북송 때의 시인 임포(林逋)가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 삼아 평생 은거한 이후 그 상징성이 더욱 유행하여 선비들이 그림 소재로 즐겼다. 19세기에는 매화그림의 대가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여 매화병풍을 둘러치고 매화 벼루에 매화 먹을 갈아 매화시를 쓰고 매화차를 마셨다고 한다.
난초와 국화는 대나무와 매화보다는 한참 후에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南宋의 조맹견(趙孟堅, 1199∼1267경)이 묵란을 잘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난초가 군자의 상징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元初 정사초(鄭思肖, 1239∼1310)부터였다. 난초는 예로부터 아름다움과 향기가 귀하게 여겨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시에서는 충절의 대명사로 등장하고 공자는 군자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묵란도는 난초 그림과 서예의 관련성을 더욱 강조한 김정희(金正喜) 이후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말기 난초그림의 쌍벽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각각 물기 많은 춘란(春蘭)과 난 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내는 건란(乾蘭)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사군자의 중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이 바로 난인데, 난을 그린다 하지 않고 친다라고 했다. 이 말은 한 번에 난의 잎을 쳐 올리지 않으면 난의 잎을 표현하는데 자연스럽지 못하고 화선지에 번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국화는 가장 늦게 유행하였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 또는 묵선(墨禪)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에게 그림을 배워 묵국도(墨菊圖)가 그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심사정은 부드럽고 밝은 화훼초충도(花卉草蟲圖)의 분위기를 내는 담채화를 즐겨 그렸다. 김홍도는 담백한 필치의 수묵화 외에도 계절감이 느껴지는 자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국화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 하였다.
이전 댓글 1개
추사가 문자향 서권기를 말했습니다.
권내와 서내가 있기는 있는 거 같습니다.
꼭 재현 그림 같습니다.
낙관을 보면 마치 얼마 전에 그린 것 같습니다.
추사의 문자향, 서권기는 공자의 繪畵後素와 비숫한 말이라 하네. 본질이 있는 연후에 꾸밈이 있다.
위정철 아재님 감사합니다.
워낙 심오한 뜻이라 풀이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화제 판독 및 도서 판독
棘荊斬去君子獨全
(극형참거군자독전)
까시를 베어내니 군자가 홀로 온전하네.
板橋君則欲之世不爲然
(판교군즉욕지세불위연)
판교 군이 그렇게 하고자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네.
南阜續題(남부속제)
남부가 이어 화제하다.
도서: 秋史詩畵(추사시화)
詩秋
畵史
사군자의 기원과 더불어 발전과정이 다채롭고 재미가 있습니다 특히 난의 모습이 풍성하고 담백합니다
위이환 님
판독까지 감사합니다
의미를 되새겨 보겠습니다
야운!
자네 눈은 3,0인가. 그걸 판독해내니 참 대단하네. 빈 말이 아니네. 그런데 추사가 말한 판교군은 누굴 지칭하는가.
위정철 아재님.
판독은 도서부터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인터넷을 빌렸습니다.
판교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누굴 지칭하는 거 같습니다.
시에 까시가 나오는 걸 보면 제주도 유배시절에 본 시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추사가 위리안치를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판교는 아마도 육지를 왔다갔다하는 사람으로 뵈이는데요. 그렇다면 우선 이상적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정판교로 잘 알려진 중국의 서화가
중국 청대(淸代)의 문인.
자(字) 극유(克柔), 호(號) 판교(板橋). 장쑤성[江蘇省] 싱화[興化] 출생. 시·서·화 모두 특색 있는 작풍을 보이며, 그림에서는 양저우팔괴[楊州八怪]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736년 진사에 급제하였고, 이어 한림(翰林)에 들어가 산둥성[山東省]의 판현[范縣]과 웨이현[弟縣]의 지사를 역임하였다. 웨이현 지사로 있던 1746년의 대기근 때 관의 곡창을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하였는데, 1753년 기근구제에 대하여 고관에게 거역하였다 하여 면직된 다음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왔으며 그후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의 시는 체제에 구애받음이 없었고, 글씨는 고주광초(古譜狂草)를 잘 썼다. 행해(行楷)에 전예(篆隸)를 섞었는데, 그 사이에 화법도 넣어서 해방적인 독자적 서풍을 창시하였다. 팔분(八分)에 대하여 그의 서체를 육분반서(六分半書)라 평하는 사람도 있다. 화훼목석(花卉木石)을 잘 그렸으며, 특히 뛰어난 것은 난(蘭)·죽(竹)으로서 상쾌한 느낌이 있는 작품이 많다. 〈묵죽도병풍(墨竹圖屛風)〉 〈회소자서어축(懷素自敍語軸)〉 따위의 작품과《판교시초(板橋詩褻)》《도정(道情)》들의 시문집이 있다.
위이환여기서 君은 어추로 보아 수하를 지칭한 것처럼 보여 지내만 좀 시간을 갖고 연구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