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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공 휘 알지 탄강계림 유허비명(大輔公諱閼智誕降雞林遺墟碑銘)
신라(新羅)에 사기(史記)가 없다하나 사기(史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역사를 읽지 않는 까닭이다. 신라가 박(朴), 석(昔), 김(金) 삼성(三姓)이 나라를 세운 것이 천년(千年)이 되었고 계림(雞林)은 알지(閼智)가 탄생(誕生)한 땅이니 지금 영남(嶺南)지방(地方)인 경주부(慶州府)에 속한다. 세상에서 김(金)으로 성(姓)을 삼은 사람은 모두 다 알지(閼智)로 시조(始祖)를 삼는데, 나라 동쪽 사람이 지금까지 그 땅을 전하되 그 세대와 연혁이 역사책에 기재된 것은 혹 상세치 아니하나 이제 그 비문을 자료로 하여 대략 알게 된 것이다. 처음 탈해왕(脫解王) 시대에 시림(始林)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금궤를 얻어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왕(王) 거두어 양육(養育)하니 이름은 알지(閼智)라 하고 성은 김씨(金氏)라 하며, 그 수풀을 이름하여 계림(雞林)으로 고치었다. 7세손(七世孫) 미추(味鄒)에 이르러 조분왕(助賁王)의 사위가 되었는데 첨해왕(沾解王) 아들이 없어서 미추(味鄒)가 대를 이어 왕이 되어 이사금이라 칭호(稱號)하였다. 미추(味鄒)로부터 내물(奈勿)과 실성(實聖)을 지나 눌지(訥祗)에 이르러 이사금을 마립간(麻立干)으로 칭호(稱號)하고 백성을 가르치고 의복제도와 우차(牛車)의 사용법을 가르치었다. 눌지(訥祗)가 훙(薨)(왕 제후의 서거(逝去)를 말함)하고 아들인 자비(慈悲)가 마립간이 되었다. 자비(慈悲)가 죽고 아들 소지(炤智)가 마립간이 되어 시장(市場)을 개설(開設)하고 전방(지금의 상점)을 열어 사방(四方)의 물화(物貨)가 서로 통하게 하였다. 소지(炤智)가 죽고 아들 지증(智證)이 마립간이 되어 사람의 순장(殉葬)(죽은 사람을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을 따라 매장시킴)을 금하고 주(州).군(郡)에 명(命)하여 농사(農事)를 권장(勸奬)하고 비로소 소를 사용하여 전답(田畓)을 갈게 하고 국호(國號)를 신라(新羅)로 정(定)하고 방어(方語)인 이사금, 마립간(麻立干)을 고치어 왕(王)이라 호칭하게 하였고, 상복(喪服)을 제정하였다.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지증(智證)이라 하니 시법(諡法)(사후에 정하는 호)이 이때부터 시행(施行) 되었다. 지증왕(智證王)의 아들 법흥왕(法興王)이 법률을 반포하고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고, 연호(年號)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진흥왕(眞興王)과 진지(眞智)를 지나 진평왕(眞平王)에 이르러 아들이 없어서 선덕(善德)여주(女主)가 왕위(王位)에 나아가 귀족(貴族)의 자제(子弟)를 당(唐)나라에 보내어 국학(國學) 세우기를 청하였다. 선덕(善德)여주(女主)가 죽고 진덕(眞德)여주(女主)가 즉위하니 진평왕(眞平王)의 모제(母弟:외숙)인 국반(菊半)의 딸이다. 처음으로 당(唐)나라의 제도를 모방하고 관복(官服)을 만들었고 사신(使臣)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백제(百濟)를 파(破)할 것을 보고(報告)하였으며, 왕이 스스로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비단문의로 짜서 당(唐) 고종(高宗)에게 드리니 칭찬하였으며 중국의 연호를 비로소 행하였다. 진덕(眞德)이 죽고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왕위에 나가니 진지왕(眞智王)의 손자(孫子)로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百濟)를 멸(滅)하였다. 무열왕(武烈王)이 죽고 아들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하여 부녀자(婦女子)에게 명령(命令)하여 중국(中國)의 의상(衣裳)(저고리 치마)를 입게 하고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高句麗)를 멸(滅)하였으며, 역법(曆法)(월력 또는 일력의 법)을 반포하고 모든 관인(官印)을 주조(鑄造)하였으며, 문무왕(文武王)이 죽고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하여 사신을 당나라에 들어보내 예전(禮典)과 사장(詞章)을 청하니 칙천황후(則天皇后)가 명령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와 문사(文詞)가 규칙(規則)에 합치(合致)되는 것 50여권을 부지런히 만들어서 주었다. 신문왕(神文王)으로부터 효소왕(孝昭王)을 지나 성덕왕(聖德王)에 이르러 비로소 누각(漏刻)(물시계)을 만들었고, 효성왕(孝成王)을 지나 경덕왕(景德王), 혜공왕(惠恭王)을 거쳐 선덕왕(宣德王)을 지나 원성왕(元聖王)에 이르러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글을 읽어야 벼슬을 할 수 있는 법)을 정하고, 원성왕(元聖王)으로부터 소성왕(昭聖王), 애장왕(哀莊王), 희강왕(僖康王), 민애왕(閔哀王), 신무왕(神武王), 문성왕(文聖王), 헌안왕(憲安王),경문왕(景文王),헌강왕(憲康王),정강왕(定康王), 진성왕(眞聖王), 효공왕(孝恭王)을 지나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고려(高麗)에 넘겨주는데, 왕자(王子)가 불가(不可)하다 하니 왕(王)이 이르시기를 "과인(寡人:내가)이 외롭고 위태하여 지탱할 수 없으니 죄 없는 백성을 비참하게 죽게 함을 내 차마 못하리라"하시고, 시낭(侍郎) 김봉휴(金封休)를 고려(高麗)에 보내서 글을 올리어, 신(臣)이라고 칭하여 국조(나라의 지위) 드디어 끊어지니 김씨가 38세(三十八世)로 626년이다. 대개 박씨, 석씨를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후 나라를 누림이 가장 길었으니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이로부터 차차 일어났고, 신라로부터 비로소 당나라와 서로 우호국이 됨에 중국(中國)의 사관(史官)의 법(法)이 마련함이 이미 오래 되었으나 동국(東國:우리나라)이 떨어지고 고루하여 사적은 많으나 문장(文章)이 없어서 전하지 못한 것이 많더니 고려(高麗)의 김부식(金富軾)이 신라사(新羅史)를 편찬하는데, 그 글이 대략 갖추었으되 학자(學者)가 동사(東史)를 전문적(專門的)으로 다루지 않았고, 또는 그 판본(板本)이 오래되어 훼손(毁損)되었으므로 세상에 남아 잇는 것이 얼마 없으니 군자(君子)가 매우 두려워하던 바, 공철(公轍)이 경상감사로 영남(嶺南)을 안찰(按察)할 때에 참봉(叅奉) 김성걸(金成杰)이 경주(慶州)에 와서 계림(雞林)의 기적(紀績)의 글을 청하니 잘하는 일이로다. 근본(根本)을 추앙함을 멀리하니 땅은 진실로 전해 졌으되 일이 땅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어찌 글을 쓰지 않으리오! 공자(孔子)께서 주(周)나라에서 탄생(誕生)하시었으되, 구(丘:나)는 은(殷)나라 사람이라하여 스스로 미자(微子)의 자손(子孫)이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하(夏)나라의 예(禮)는 내가 잘 말하겠으나 기(杞 : 주나라 시대의 국명, 하나라 우왕의 자손의 영토는 현금의 기현:杞縣)나라는 족히 고증(考證)을 하지 못하며 은나라의 예는 능히 말할 수 있으나 송(미자가 세운 나라로써 하남성 남구현)나라는 족히 고증(考證)치 못하는 것은 문헌(文獻)이 부족한 때문이다."라 하셨으니 이제 김씨(金氏)가 사방(四方)에 흩어져 사는 것이 무려 천백(千百)집이 되나 모두 신라(新羅)로 조상(祖上)을 삼으니, 공자의 은나라와 다른 것이 없다. 어찌 하은(夏殷)의 예(禮)가 기송(杞宋)의 문헌의 고증(考證)이 못되는 것만을 탓할까? 뒤에 이 비문(碑文)을 잘 읽으면서 거의 사기(史記)에 빠진 것을 보충(補充) 함이 있으리라. 명(銘)에 이르기를 울창한 저 계림(雞林)은 왕업(王業)을 일으킨 터전이로다. 누가 감히 존경하지 않을까? 나의 이 명문(銘文)을! 병서 순묘 계해 이월 입(幷序 純廟 癸亥 二月 立)
가의대부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대순찰사대구도호부사 규장각직제학지제교남공철 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