릉호(陵號)
신라시대에는 릉호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某대왕릉으로 불려졌으며 고려때부터 태조릉을 顯陵 공민왕릉을 玄陵이라고 하는 등 릉호가 시작되어 조선에 이른것이며 경순대왕릉은 신라의 임금이지만 고려때 승하하셨기 때문에 경주가 아닌 장단에 릉을 모시고 릉호를 湍陵이라 한다. 문헌에 나타난 것은 英祖御製 단릉축문에 있다.
湍陵祝文(御製)
維歲次丁卯正月二十五日 朝鮮國王某謹遺臣長湍府使沈鳳徵昭告于
유세차정묘정월이십오일 조선국왕모근유신장단부사심봉징소고우
新羅敬順王之陵新羅立國金櫝寶籙王丁末運天命將革生靈塗炭封壃日蹙
신라경순왕지릉신라입국금독보록왕정말운천명장혁생령도탄봉강일축
量時度力南面無樂香車寶馬挈歸圖籍弊履千乘爲麗三恪興廢有時人不用力
량시도력남면무락향차보마설귀도적폐리천승위려삼각흥폐유시인불용력
維以安民王心惻怛維海攸施厥報靡忒不億其孫慶膺沙麓有廟東川享祀
유이안민왕심측달유해유시궐보마특불억기손경응사록유묘동천향사
無斁大東千載王靈爀赫臨湍-坯王禮是式間經兵燹人莫能識理有顯
무두대동천재왕령혁혁임단-배왕예시식간경병선인막능식리유현
晦今而乃得可徵可信幽誌顯刻爰命守土載新封築有感矛衷伻官奠爵
회금이내득가징가신유지현각원명수토재신봉축유감모충팽관전작
謹以牲腥庶品陳式尙饗
근이생성서품식진상향
知製敎 李德重 製進
지제교 이덕중 제진
維歲次 丁卯 正月二十五日
조선국왕 모(某)는 삼가 신(臣) 장단부사 심봉징(沈鳳徵)을 보내어 신라 경순대왕 릉전(陵前)에 고(告)하나이다.
신라가 나라를 세운 것은 금독(金櫝)의 보록(寶籙)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왕께서 말운(末運)을 당하여 천명(天命)이 장차 개혁할 시기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봉강(封疆)은 날로 축소되니 시기를 살펴보고 역량을 헤아려 보건데 남면(南面)하여 임금하는 것이 즐겁지 아니하였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로 국가의 문서를 가지고 고려에 귀의(歸依)하여 천승(千乘)의 왕위를 헌식짝처럼 버리고 려조(麗朝)의 삼각(三恪)이 되셨다. 흥성하고 폐망함이 때가 있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며 오직 바다같은 넓은 도량으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보응(報應)이 어긋나지 아니하여 그 후손이 억(億)분이 아니로다. 경사로운 일은 사록(沙麓)처럼 많았고 묘우(廟宇)는 동천(東川)에 있으니 제사를 모심이 어긋나지 아니하여 대동(大東)에 천년(千年)을 이어왔도다.
왕의 정령(精靈)이 혁혁하게 빛나서 단릉의 묘소에 임하였으며 왕의 제례로 공경하게 제사를 모셨으나 중간에 병란을 당하여 사람들이 능히 알지 못하였도다.
이치는 나타나고 막힐때가 있으니 이제야 왕릉으로 확실하게 밝혀졌으며 가히 증거가 될만한 문적(文籍)은 묻혀있는 지석(誌石)과 확연하게 나타난 현각(顯刻)이로다. 이에 이 땅을 지키는 고을 부사(府使)에 명하여 곧 새로 봉축(封築)을 쌓았도다.
나의 충심(衷心)에 감동하는 바가 있어 관리를 보내어 술잔을 올리고 삼가 생성(牲腥)과 서품(庶品)으로 공경을 다하여 제향(祭享)을 올리오니 존영(尊靈)은 상향하옵소서.
지제교 이덕중 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