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혜전(崇惠殿)과
계림세묘(雞林世廟)의 약사(略史) 및 전훈(殿訓)
숭혜전(崇惠殿)은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및 제56대 경순왕(敬順王)의 향대제(享大祭)를 봉행하는 전(殿)이며, 경주시 황남동 216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6호이다.
이 전의 시원(始源)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경천순인(敬天順人)하신 덕의(德義)을 숭모하기 위해 신라 유민들이 자발적으로 경주의 반월성(半月城)에 건립한 사당에서 경순왕 영정을 모시고 고을의 아전이 삼반관속을 이끌고 매양 명절에 제향(祭享)을 올린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최초의 건립 년대에 관한 문헌상의 정확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1462년(壬午) 봄에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경주에 와서 경순왕 사당을 참배하고 남긴 유금오록(遊金鰲錄)에서 볼 때 경순왕 사당이 처음으로 건립된 것은 서기 1400년 전후로 추정된다.
이 사당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어, 그 뒤에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봉행해 왔다고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사실(史實)은 조선 인조 5년(1627년) 정묘(丁卯)에 후손 김시양(金時讓)이 경주부윤으로 도임하여 왕(王)의 사당을 배알하고 중건하기를 계청(啓請)하여, 본부의 유생 김성원(金聲遠) 등으로 더불어 경주부의 동쪽 5리쯤 되는 금학산 아래 동천촌(東川村)에 터를 잡고 사당을 옮겨 동천전(東川殿)으로 일신(一新)하게 중건되었다. 그리고 예조에서 차출된 참봉 1인이 향사(享祀)를 받들었고, 노비(奴婢)와 토전(土田)를 설치했으며, 제전(祭奠)은 관에서 담당하여 변두(籩豆) 각 칠기(七器)로 한정하였다. 동천전기문(東川殿記文)은 오천인 정규양(鄭葵陽)이 찬(撰)하였다.
그 후 1723년 경종(景宗) 3년 계묘(癸卯)에 본도 감사(監司) 조태억(趙泰億)이 순행하다가 왕의 사당을 배알(拜謁)하고 인하여 장계(狀啓)로서 청원(請願)하여 경순왕(敬順王) 전호(殿號)의 선액(宣額)을 받았다. 그래서 경순왕전에는 봉미(俸米)와 사숙(飼菽)을 일정하게 갖출 수 있게 되었고,또 유생 51명, 수호군 20명, 전졸 6명을 두었던 것이다.
정조(正祖) 18년 1794년 갑인(甲寅)에 정전(正殿) 바로 뒤에 사태가 일어나서 참봉 김건항(金健恒)이 궐문(闕門)에 호소하고 도신(道臣)이 장계(狀啓)하여 이건하라는 분부를 받게 되었다. 본도(本道) 감사(監司) 조진택(趙鎭宅)으로 하여금 지금의 황남동에 터를 잡아 계문(啓聞)하게 하였으며, 경주부윤 송전(宋銓)이 기일 내에 준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또 장수승(長水丞) 이명기(李命基)로 하여금 경순왕 화상(畵像)을 개모(改模)하게 하였다. 그 해 5월 18일에 시공하여 장마가 염려 되었지만 공사를 빨리 진행하여 석 달 만인 8월 10일에 정전(正殿)과 신문(神門) 및 동서재(東西齋:敬慕齋, 永育齋)를 포함하여 모두 낙성하게 되었다. 준공 사실이 나라에 보고되어 상(上)께서 축문과 향을 내렸으며 경순왕 화상 한 벌은 을람(乙覽) 후 다시 보내져서 8월 10일에 봉안하게 되었다.
황남전기문은 좌랑(佐郞) 남경희(南景羲)가 찬(撰) 하였고, 상량문(上樑文)은 부윤(府尹) 송전(宋銓)이 찬하였다.
특히 당시 중건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헌신한 후손은 참봉 김성걸(金成杰, 10,000전 喜捨), 전 참봉 김택려(金宅礪), 사인(士人) 김명건(金鳴健)・ 김창적(金昌迪)・김세련(金世鍊)과 읍교(邑校) 박경훈(朴慶勳) 등이다. 총 공사비는 108,006전이었으며 이 중에 성손이 43,000전을 기증하였다. 예조에서 분부를 내려 규식을 정하게 했고, 유생과 전졸은 각 90여명, 수호군 100여명과 양정 20명, 하전 60명 등 모두 360여명을 두었다. 참봉은 이조로부터 별달리 지벌과 문식이 있는 자를 택하여 차정하고 임기가 50삭이 차면 육품에 승진하였다. 또 가관 1명을 두어 참봉 유고시에 분향을 대행하게 하였다. 오늘날 참봉은 경모재(敬慕齋) 중(中)의 7인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사단법인 신라전릉보존회 평의회로부터 심사확정이 되면 경모재중의 천망을 받고 도임하여 임무를 수행한다. 도임 후에서류를 경주시 문화과에 제출하여 전릉(殿陵)참봉 모두는 경상북도 지사로부터 전릉 명예관리인의 임명장을 받는다.
1887년 고종 24년 정해에 정언 김만제(金萬濟)가 미추왕(味鄒王)과 경순왕(敬順王)을 병향(幷享)하는 일과 전호(殿號)를 소청(疏請)하였고, 판부사 김홍집(金弘集)이 경연(經筵)에서 문무왕(文武王)을 병향하는 일로서 주청(奏請)하여 윤허(允許)를 입었다. 이에 특히 본부부윤 김철희에게 분부하여 묘우 오가오간(五架五間)을 준공하였으며, 숭혜전(崇惠殿)의 선액(宣額)이 내려졌다. 매년 춘분일에 성손과 국인들이 세 왕을 봉향 대제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숭혜전 상량문은 후손인 자헌대부 겸 예문관제학(資憲大夫兼藝文舘提學) 김창희(金昌熙)가 찬(撰)하였다.
숭혜전(崇惠殿)의 개념과 교훈적 의미를 살펴보면, 숭(崇)은 ‘높을 숭’자이다. 숭(崇) 자는 뜻을 나타내는 뫼산(山 산봉우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종(宗)으로 이루어지며, 높고 큰 산이란 뜻이며, 음을 빌어 ‘존경하여 우러러보다’ 의 뜻으로 쓰인다. 혜(惠)는 ‘은혜 혜’자이며, 언행을 삼가하고 어진 마음을 베푸는 ‘은혜’를 뜻한다. 전(殿)은 ‘전각 전’자이다. 그 뜻은 전각, 궁궐. 큰 집. 절. 殿下. 後軍 등 여러 가지이다.
이상과 같은 자의(字意)에서 볼 때 숭혜전(崇惠殿)은 ‘조상을 높이 받들고 은혜를 우러러 보는 궁궐’이라 해석해 볼 수 있다.
경모재(敬慕齋)가 건립한 연대는 1794년이다. 경순왕전이 현재의 황남동으로 이건할 때 경모재와 영육제가 모두 동시에 건립되었다.
경모재(敬慕齋)의 개념과 교훈적 의미를 살펴보면, 경(敬)은 ‘생각이나 헤아림을 중단한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敬)이 수양의 수단으로 사용되게 된 철학적 배경에는 성선사상(性善思想)이 전제된다. 이것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착한 것이므로 마음이 처음 밖으로 나타날 때에는 남을 사랑하고 돕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때 생각이나 헤아림이 이기적(利己的)으로 작용하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치는 악한 마음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나 헤아림 자체를 중지시키면 악한 마음으로 변질되지 않기 때문에 착한 마음을 계속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경(敬)을 수양의 요체(要諦)로 하고 있으며, 본연의 착한 마음을 회복하여 성인(聖人)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모(慕)는 ‘그릴 모’이다. 이것의 뜻은 ①그리다. ②그리워하다. 사모하다. ③뒤를 따르다. ④생각하다. ⑤ 높이 우러러 받들어 본받다. ⑥탐하다. ⑦바라다 등과 같이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재(齋)는 ‘재계할 재’, ‘집 재’, ‘상복 자’란 음과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①재계하다(齋戒;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다. ②정진하다 ③공경하다 ④시주하다 ⑤집, 방 ⑥상복(上服: 위에 입는 옷) 등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은 자의(字意)가 내포한 뜻에서 볼 때 경모재(敬慕齋)는 이기심을 버리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조상을 우러러 그리워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계림세묘(雞林世廟)는 경순왕 후손인 전군수(前郡守) 김한은(金翰殷)이 보본회를 조직하여 여러 김씨와 상의하여 창건한 시조(始祖) 대보공(大輔公)을 모신 사당이다. 미추왕이 시조위를 태왕으로 추봉(追封)했기 때문에 왕의 예로 향사(享祀)를 봉행해 오고 있다.
추원보본지문(追遠報本之門)을 들어서면 조경문(肇慶門)이 남향으로 배치되어있고, 조경문을 지나면 계림세묘라는 사당이 있다.
두 개의 문호(門號)가 의미하는 것은 추원보본(追遠報本)과 조경(肇慶)이다. 추원보본은 조상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의미이고, 조경은 비로소 경주김씨가 시작되었다는 뜻과 경사스러움이 시작된다는 뜻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계림세묘를 수호하고 향사를 받드는 것은 숭혜전 참봉이 대행하고 있다.
이상에서 숭혜전과 계림세묘가 암시하는 조상(祖上)의 유훈(遺訓)은 숭혜(崇惠), 경모(敬慕), 영육(永育), 보본(報本)으로 요약해 볼 수 있고 이것이 숭혜전의 전훈(殿訓)이라 하겠다,.
숭혜전으로 선액한 것은 일성(一姓)에서 일왕(一王)을 배출하는 것도 어려운데 38왕이 배출된 것은 말할 수 없는 높은 은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성손들은 선왕의 높은 은혜를 항상 숭모하라는 것이다.
경모(敬慕)는 이기심을 버리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조상을 우러러 그리워하라는 것이며, 영육(永育)은 영원히 자손을 교육하여 우수한 인재로 길러야 한다는 의미라 하겠다.
그리고 보본(報本)은 낳아 길러준 어버이의 은혜에 항상 감사함을 지니고 보답하라는 의미이며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일생동안 잊지 않고 시행해야 할 제1차적 의무라 하겠다.
숭혜(崇惠), 경모(敬慕), 영육(永育), 보본(報本)은 대보공 후손들이 마땅히 명심하고 시행해야 할 이념적 덕목이라 하겠다. * 참고문헌 : 숭혜전지(崇惠殿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