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비각기(雞林碑閣記)
옛 신라국 월성 아름다운 숲속에 비각이 우뚝 솟아 있는데 사방팔면이 우아하고 아름답기가 이를 데 없다. 그 안에 석자 크기의 작은 빗돌이 세워져 있다. 빗돌에는 전자체로 “계림김씨가 탄생한 유허지”라고 새겨져 있다. 이곳은 계림이고 비각 북쪽에는 예부터 한 표석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계림김씨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에 접하여 사적을 찾는 이들에게는 금궤 위에서 닭이 울던 곳을 상상해 볼만한 일이다.
아! 천지간에 영롱한 정기가 어려 형상을 이룬 것이 태초에 사람이 생기는 길이라 하였건만 이같이 닭이 곁에서 홰를 치며 울어 사람에게 알린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닭은 축시에 우는데 축시는 곧 동이 틀 때다.
박씨와 석씨가 114년을 다스렸지만 아직 순박하고 미개함이 남아 있었는데, 김씨가 나라를 이어받아 38왕에 문물이 점차 갖추어짐으로써 동방의 나라가 이때로부터 밝아진 것이다. 어쩌면 하늘이 진인을 내려 보내 사람들을 개화시키고자 미리 신령스런 닭을 통해 그 상서로움을 알린 것이 아니었을까?
김씨는 알지로 시조를 삼는데 알지는 탈해 을축년에 탄강했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을축으로부터 성조(순조) 임술년(1828) 간에는 소슬한 옛 자취가 어제인 듯 완연함에도 김씨로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우러러보며 공경하면서 주나라의 평림(주나라 시조 후직)과 한나라의 대택(한나라 시조 유방) 같이 백성을 살리는 땅이며 왕조를 흥하게 하는 터전의 자취가 소멸될까 염려하여 의논 끝에 재물을 모아 빗돌을 세워 연유를 기록하니 그 감회 더욱 깊도다.
우리 대왕대비(정순왕후)는 여인이지만 요순과 같이 주렴을 내리고 정사를 듣고 보살펴 억만년 종사를 굳히셨다. 신성한 분의 손으로 을축년에 나시어 몇 년 지나면 회갑을 맞게 되시는데 위로 따져보면 시조의 생년도 30년 을축이다. 금궤의 상서를 알린 것이 을축년이니 동국에 정숙한 기운이 이 터에 모여 있다가 종종 효험을 나타냄이 이와 같을진대 김씨들이 표석을 세우고 찬미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고, 앞서지도 뒤지지도 않고 오늘에서야 그 일을 하니 하늘과 사람의 뜻이 함께 한 때문이 아닌가?
그 비명을 지은이는 순상공 남철(南轍)이요, 그 명을 글로 쓴 이는 부윤 최헌중(崔獻重)이요, 전자로 편액을 쓴 이는 성손 단양군수 김희주(金熙周)요, 명과 글을 청한 이는 전참봉 성걸(成杰)이었다. 성걸이 이르되 “비석에 각이 없으면 비바람에 마멸될 염려가 있다.”하여 참봉 창적(昌迪)과 전참봉 택려(宅礪)와 사인 영규(永奎)가 힘을 모아 임술년 10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준공하였으니 모두가 조상을 빛내는 데 독실한 사람들이다.
이는 모두 적어둘 만한 일이다.
생원 최남복(崔南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