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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대왕 신도비명(敬順大王神道碑銘)
東京之有 敬順殿古矣享祀以時儀文畢擧苐無撰刻可以壽傳傅 王之後孫再鳴持世次事蹟請銘于余余於慶州之金. 雖籍派分而鼻祖則一也何可以短拙辭謹序而銘焉序曰.
仁言孔彰 維其有德 厥後克昌 屹彼螭首 于廟之傍 作此銘詩 用昭無疆.
동경(慶州)에 경순왕의 전(殿)이 있은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제때에 향사를 모시고 모든 범절은 다 갖추어졌으나 다만 글을 각하여 오래도록 전할 비가 없었다. 왕의 후손 재명이 세계와 사적을 적어 가지고 나에게 명을 청하는지라. 나는 경주김씨와는 비록 관은 다르지만 시조는 같은 데 어떻게 글이 졸하다 하여 사양하겠는가? 삼가 서도 쓰고 명도 짓는 바이다. 서하여 가로되 왕이 휘는 부(傅)인데 신라 사람이다. 시조는 알지이니 탈해왕 9년 을축에 시림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금궤 속에서 아이 하나를 얻었다. 왕이 거두어 기르며 알지라 이름하고 김씨로 사성하였으니 이것이 득성의 유래이다. 2세는 세한이오, 3세는 아도요, 4세는 수류요, 5세는 욱보요, 6세는 구도요, 7세는 말구이니 미추의 아우이다. 미추가 첨해왕(석씨)를 이어 서니 김씨가 여기에서 나라를 갖게 되었다. 8세는 내물왕이요, 9세는 복호요, 10세는 습보로 아울러 갈문왕에 추봉되니 갈문왕이란 당시에 추존을 일컬음이다. 11세는 지증왕 원년 경진은 곧 제(중국 남북조시대)의 돈혼후 영원 2년에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처음으로 왕이라 칭하였으며 상제를 반포하고 순장(殉葬)을 금하였으니 지증은 그의 시호이다. 12세는 진종이요, 13세는 흠운이요, 14세는 마차요, 15세는 법선이니 현성왕으로 추숭되고 16세는 의관이니 신영왕으로 추숭되었으며 17세는 위문이니 흥평왕으로 추숭되었다. 18세는 효양이니 명덕왕으로 추숭되고 19세는 원성왕이니 처음으로 독서출신과를 두었다. 20세는 예영이요, 21세는 균정이니 성덕왕(成德王)으로 추숭되고 22세는 신무왕이요, 23세는 문성왕이요, 24세는 안(安)이요, 25세는 민공이요, 26세는 실홍이니 의흥왕으로 추숭되고, 27세는 효종이니 신흥왕으로 추숭되고 28세가 경순왕이시다. 대왕은 경애왕(박씨)을 이어 서니 이 해 정해는 곧 후당 명종 천성 2년이다. 9년이 지난 을미년에 천명이 이미 바뀌었음을 아시고 나라를 고려에 물려주니 왕자가 간하기를 "마땅히 충신 의사와 더불어 죽음으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그만 둘 일이옵니다." 하니 대왕이 이르시기를 "나는 무고한 백성들이 피흘리고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하고 글을 써서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양국을 하니 고려 태조가 손님의 예로 대하고 관광 순화 낙랑왕(觀光順化樂浪王)으로 봉하였으며 장녀인 신란공주를 아내로 맞게 하니 송나라 태종의 흥국 3년이요, 고려 경종 3년(무인, 서기 978년)에 훙서하시니 시호는 경순(敬順)이라 하였다. 능(陵)은 장단부 고랑진의 성거산 계좌(聖居山癸坐)에 있었는 데 여러 차례 병화를 겪다 보니 오랫동안 실전을 하였다가 영묘조(英廟朝) 무진에 이르러 지석을 얻어 나라에 알리니 개축을 특명하고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수졸 5인을 두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도의 인사들이 왕의 백성들에게 인혜로웠던 덕을 기리어 사당을 지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는 데 천계 정묘(인조 5년)에 사당을 동천촌으로 옮겼고 인조조에 김시양의 장청에 의하여 묘우를 새로 짓고 김씨 성을 가진 이로 참봉을 삼고 쌀을 내렸으며 노비와 전답을 두게 하였다. 현묘조에는 또 연신(筵臣)의 주청에 따라 '경순왕전'이라는 묘호를 내리고 유생과 수호군과 전졸을 두고 호세를 면제하여 주기를 숭인전, 숭의전, 숭덕전과 똑같은 예로 하였다. 선대왕(정조선황제) 갑인년에는 전(殿) 뒷산에 사태가 일어날 염려가 있어 도신(道臣)이 진계(陳啓)하여 이건공비(移建工費)를 특사하여 사당을 경주부 남쪽 수리되는 봉황대 앞으로 옮겼으니 곧 미추왕릉의 아래로 계림에서 백무 밖에 되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이미 제사를 지내 영령을 위로하고 또 영정을 새로 개모하여 예조에 명하여 유생과 전졸은 90여 인으로 수호군은 백여 인으로 하여 호세 5결 씩 면제하여 주도록 식례를 정하고 참봉은 이조에서 첩지를 내리게 하였으니 열성조의 숭보하는 의전이 비로소 크게 갖추어지게 하였다.
대개 삼한시대에는 국사가 갖추어져 있지 않고 문헌도 무진하니 왕의 9년 동안 재유(在宥: 무위로 다스림 곧 다스림)한 가로한 선정은 비록 훑어볼 수 없지만 그 왕자에게 답한 말씀은 정령하고 칙달하여 덕의가 넘쳐 있으니 촉주와 북지왕의 일과 견주어 보면 그 현우, 명암이 과연 어떠한가? 저 깎이고 평정에 다다르매 머리 숙이고 명을 청하였으나 그 후에 수신이 오히려 그 공덕을 낱낱이 들어 돌에 새겨 세웠는 데, 생각건대 경순왕은 오래된 서업을 이어 부강한 국력을 가졌으니 금탕은 험함을 믿을 만하고 병갑(군사의 무기)은 족히 적을 막아낼 만한 하였으나 다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천승을 버리기를 폐사처럼 하였으니 어느 사람보다 어짐이 큰 것이다. 후세에 평판하는 선비가 잘한 일이라고 찬양하는 사람이 많았음은 지당한 일이나 전사(全史: 완전한 사기)와 패승(작은 사기)이 없었으니 중간에 그런 것을 쓰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을까? 혹 있다가 실전되었는가? 하여간 슬픈 일이다. 왕의 묘정에 비를 세우기를 여러 사람이 청하여 선조에 이미 윤허를 받았으나 모든 준비가 덜 되어 이제야 비로소 각하기를 경영하니 바로 후손들의 보본하는 정성에서 이룩된 것으로 왕의 여운이 영해간에 애연(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양)히 덮혀 씌워짐을 볼 수 이을 것이다. 성하도다. 왕의 전비(前妃)는 박씨니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었고 후비 왕씨는 아들 다섯, 딸 하나를 두었으니 태자와 차자와 영분공자와 은열, 석, 건, 선, 추요 장녀는 이금서에게, 차녀는 황 경에게 출가하였다. 왕의 자손이 그 수효가 억도 넘지만 경주로 본을 한 집이 넷이 있으니 영분공자의 후손과 시중시랑공의 후손과 태사공의 후손과 판도판서공의 후손들이다. 명하여 가로되 계림의 오른쪽, 봉황대 남쪽에 영전이 그윽하니 단청도 빛나여라. 유상이 엄연하니 곤룡포에 수치마라 그 누구를 모시는가? 거룩하신 경순왕님 왕이 양국하실 적에 어진 말씀 나타났다. 그와 같이 후덕하심 그 후손이 창성하네. 우뚝 솟은 용의 머리 묘우 곁에 세웠도다. 이 명시를 지었으니 영원토록 빛내리라.
정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강릉 김제학 찬(撰)하고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 경연 성균관사 김노경 글쓰다.
경순대왕 신도비각 전경(2012년 이전모습)
경순대왕 신도비각 전경(2013년 이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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