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대왕 사실(敬順大王事實)
후당 명종 천성 2년 정해(後唐明宗天成二年丁亥)에 왕(王)이 내형(內兄) 경애왕(景哀王)을 이어 섰다. 왕 청태 2년(王淸泰二年)에 견훤(甄萱)이 경성(京城)에 들어와 왕(王)을 옹립(擁立)하나 국세(國勢)가 벌써 기울었으므로 국토(國土)를 고려(高麗)에게 넘기려고 도모하니 태자(太子)가 간하되 듣지 않고 이르기를 "외롭고 위태(危殆)하기가 이러하니 지탱할 수 없는데 무죄(無罪)한 백성(百姓)으로 어육(魚肉)이 되게 함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한다" 하며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글을 올려 고려에 신라의 천년사직을 물려 줄 뜻을 청하여 ‘9년 을미11월(九年乙未十一月:935년)에 송도(松都)로 들어가니 고려(高麗)태조(太祖)가 들밖에 나가 영접(迎接) 위로(慰勞)하고 유화궁(柳花宮)에 관사(館舍)를 정하며 장녀 낙랑공주(長女樂浪公主)로 취처(娶妻)하게 하고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락낭왕정승위(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位)를 배(拜)하고 태자(太子)가 세급록일천석(歲給祿一千石)을 올리며 동갑제일구(東甲第一區)의 궁(宮)을 주고 또 신란궁(神鸞宮)을 創建하여 주었으며 신라(新羅)를 제(除)하고 경주(慶州)로 하여 인해 식읍(食邑)으로 주고 경종원년(景宗元年)에 또 상보(尙父)를 더하니 그 책고(冊誥)에 대략 이르기를 "대대로 계림(鷄林)에 살며 벼슬은 왕작(王爵)이었다. 기풍(氣風)은 영걸(英傑)이오. 문장(文章)은 재사(才士)로다 병법이 풍부하고 지모가 비상하도다"라고 하였고 호(號)를 더 하고 훈봉(勳封)도 여전(如前)하고 식읍(食邑)도 일만호(一萬戶)로 하였다.
대송태평흥국사년·고려경종삼년무인사월사일(大宋太平興國四年·高麗景宗三年戊寅四月四日)에 죽으니 시호(詩號)는 경순(敬順)이다.
장우(葬于) 장단부남팔리 성거산 계좌 정향원(長湍府南八里 聖居山 癸坐 丁向原)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