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조명 │ 공광규
<시인이 뽑은 대표작 5편>
소주병 외 4편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별국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히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애장터
입을 꾹 다문 아버지는
죽은 동생을 가마니에 둘둘 말아
앞산 돌밭에 가 당신의 가슴을 아주 눌러놓고 오고
실성한 어머니는 며칠 밤낮을
구욱구욱 울며 마을 논밭을 맨발로 쏘다녔다
비가 오는 날마다
누군가 밖에서 구욱구욱 젖을 구걸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누구유!” 하며 방문을 열어젖혔는데
그 때마다 산비둘기 몇 마리가
뭐라고 뭐라고
젖은 마당에 상형문자를 찍어놓고 돌밭으로 날아갔다
어머니가 그걸 읽고 돌밭으로 가면
도라지꽃이 물방울을 매달고 서럽게 피어 있었다.
놀란 강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 천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 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담장을 허물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 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시인의 최근 신작시 5편>
어떤 시위 외 4편
종이를 주는 대로 받아먹던 전송기계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전원을 껐다가 켜도
도대체 종이를 받아먹지 않는다
사무기기 수리소에 전화를 해놓고
덮개를 열어보니
관상용 사철나무 잎 한 개가
로울러 사이에 끼어있다
청소아줌마가 나무를 옮기면서
푸른 잎 하나를 떨어뜨리고 갔나보다
아니
석유 냄새 나는 문장만 보내지 말고
푸른 잎도 한 장쯤 보내라는
전송기계의 침묵시위일지도 모른다
겨울제
시골집 뒤꼍 대숲에 눈 내리는 겨울 저녁에는
평생 순하게 살다가 가신 어머니가 오신다
목백합나무 가로수 가지를 밟고 측백나무 울타리를 넘어
정원의 마른 꽃나무에 눈발로 오신다
소의 잔등을 쓰다듬듯 자동차를 순하게 만져주시고
꼭 잠근 유리창을 가끔 두드리시다가
병들 무렵의 늙은 어머니처럼
힘없이 방충망에 걸터앉아서 방안을 궁금해 하시다가
머리가 하얘져가는 아들에게 부드럽고 순하게 늙어가라며
한 말씀 하시고는 공중으로 떠나신다
행운
네잎토끼풀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토끼풀밭을 짓밟고 있다
토끼가 잘 먹는 풀이어서 이름이 토끼풀이고
꽃말이 행복이라는데 네잎토끼풀은 행운이라는데
나는 지금까지
수십 평의 토끼풀밭을 짓밟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네잎토끼풀을
행운은 따본 적이 없다
이젠 네잎토끼풀 따위에 관심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행운은 나폴레옹처럼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연히 발 밑에 있는 네잎토끼풀잎을 따는 순간에
머리 위로 총알이 지나가는 것처럼
돌연변이처럼
마누라 분리수거
딸과 싸우고 집을 나간 아내가
며칠째 전화도 안 받고 소식이 없다
절벽에라도 뛰어 내렸는가 새서방하고 살림을 차렸는가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뜬눈으로 밤을 샌 아침
주택관리소 아침 방송이
분리수거하는 날이라고 시끄럽다
밀린 폐지와 비닐봉지와 깡통과 페트병과
초파리가 들끓는 썩어가는 음식쓰레기를 들고 나가버리는데
경비원은 요즘 아내가 안 보인다며 안부를 묻는다
재활용품 수거 그물망이 철봉에 나란히 매달려
이름표를 달고 있는데
비닐 페트병 플라스틱 요구르트 소주맥주병 잡병 고철 스치로플 순서다
경비원은 내 서투른 분리수거를 거들면서
비닐은 저기 잡병은 여기 플라스틱은 저기 그건 스치로폴이니 저기라며
핀잔을 하다가 은근히 명령조로 옮겨 간다
경비원의 말투가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집 나간 아내에게 부아가 치밀어 경비원에게 한마디 던졌다
“마누라 분리수거 마대자루나 만들어 놓으슈!”
들꽃교정
서산여고 교정 정원에는
문학작품 속에 나오는 들꽃과 나무가 팔십여 종이라는데
교실에서 화장실로 강당으로 도서실로 들락거리는
여학생들 얼굴도 모두 들꽃이다
그러니 문학강연을 듣겠다고 강당에 모인 전교생 수백 명이
환한 꽃밭이다
강당에 모인 들꽃과 정원에 있는 들꽃을 합하면
이 학교를 다니고 있거나 졸업한 학생 수와 똑같을 거라는 생각이다
나는 서광꽃 국화 코스모스 맨드라미 소나무… 여기까지 부르다가 이름이 막히는데
들꽃 이름도 못 외우는 불성실한 시인이다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이 좋아서 국어교육을 전공했다는 교장선생님께 여쭈니
봉숭아와 분꽃도 있고
옛날 어머니들이 잎을 갈아서 얼굴에 발랐다는 붓꽃무더기도 있다고 한다
교정을 나오는데 종아리가 예쁘고
모가지가 코스모스처럼 간들간들하던 이 학교 출신 시인도 생각나고
들꽃을 좋아해서 결혼하기 전에 프로포즈 했던
이곳 출신이라는 서울의 사찰음식점 여주인도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