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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시인의 체험적 시론___
풀과 나무와 들꽃과 시
최근 신문에서 한국사회에 정신적 고통이 만연하여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의 보고서가 발표되었다는 보도를 접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알코올 남용, 도박, 인터넷 중독, 학교폭력 등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군 이슈를 열거하며 한국사회에 정신적 고통이 만연하다는 진단을 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의 연구자에 따르면 정신적 고통은 고용 등 다른 사회 경제적 현안에 영향을 많이 받으며, 또 정신건강 문제는 단순히 의료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사회 전반의 정신적 고통을 해소하려면 모든 부문의 전반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나는 최근 주말에 시인들이 만든 숲힐링 학교에 숲 공부를 하러 다녔다. 자연과 멀어진 현대 문명의 삶에서 고통을 받는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숲과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는 꽃과 나무와 곤충을 공부하고 있다. 물론 내 시에는 오래 전부터 풀과 나무와 꽃들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야 『논어』를 읽어가면서 초목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논어』 「양화」 편에 “시를 읽으면 날짐승과 길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다”(多識於鳥獸草木之名)는 말을 좋아하고 식물도감을 여러 개 구하여 보면서 공부하였다.
시를 잘 읽는 것도 그렇지만 잘 쓰려면 이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을 『논어』를 읽어가면서 눈치 챈 것이다. 실제로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천천히 식물도감을 넘기면서 시상을 구상하기도 한다. 이제는 공자가 편집한 『시경』을 식물도감과 함께 읽어가고 있다.
이번 가을에 발표하는 시들 가운데 「행운」이라는 시는 숲힐링 학교에서 식물도감을 넘기다가 얻은 것이다. 토끼풀의 꽃말이 행복이라는 것도, 네잎토끼풀잎은 행운이라는 것도,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우연히 발 밑의 네잎토끼풀을 따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총알이 그 위로 날아가서 살아나는 행운을 얻었다는 것도 식물도감에서 얻은 정보이다. 식물도감에서 얻은 기초 정보와 네잎토끼풀잎을 찾던 경험을 가공하여 시를 만들었지만, 행운은 이렇게 “돌연변이처럼” 오는 거라는 생각이다.
또 한편의 시 「어떤 시위」는 사무실에서 체험한 것을 형상화 한 것이다. 어느 날 서류를 보내려고 팩스기계 앞에 갔더니, 기계 위에 파란 사철나무 잎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청소아줌마가 청소를 하려고 나무를 옮기다가 떨어뜨린 것이었다. 나뭇잎을 치우고 서류를 보내려고 종이 삽입구에 끼웠지만 기계가 반응을 하지 않았다. 덮개를 열어보니 거기에 파란 잎 하나가 더 있었다. 그 순간에 생각해낸 것이 이 시다. 팩스기계가 삽입구에 종이 대신 사철나무 푸른 잎을 물고 종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혹시 누군가에게 푸른 나뭇잎을 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잉크냄새가 나는 딱딱한 문장만 보내지 말고 푸른 식물성의 문장이나 마음도 보내라는 나름대로의 시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또 한편의 시 「들꽃 교정」은 최근 서산여고에 문학 강연을 갔다가 얻은 것이다. 시에 나오는 내용대로 국어교육을 전공했다는 교장 선생님이 교정에 문학작품에 나오는 꽃과 나무를 팔십 여종이나 심었다고 한다. 나는 교정에 무더기로 피어있는 가을 들꽃을 둘러보며 사진기에 담았다. 그리고 강연을 마치고 올라와 시를 한편 써서 감사의 뜻으로 보내드렸다.
공광규 시인을 주목한다___유종인
생활을 둘러싼 옵션들
유종인
1. 가능한 선택들
모든 선택은 여지餘地를 갖는다. 아니 단언이 아닌, 이렇게 바꿔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선택은 모종의 억압으로부터 등돌리려 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그 선택이 일정 시간과 공간의 삶을 누렸을 때 여전히 자유로운 입지에 있는가? 라고 물어볼 때, 우리는 다시 처음의, 애초의 선택에 대한 입장을 반추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최선最善의 선택과 최고最高의 결과가 양립되지 않거나 그 둘 사이에 균열의 시간이 이어질 때 우리는 어떤 방편을, 혹은 어떤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애초의 태도와 취지를 좀더 바꾸거나 전향적으로 그 자신의 선택에 따른 신념이나 도그마dogma를 확장하거나 해체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여지는 그럴 때 다시 생긴다. 수정되고 고쳐질 수 있는 선택은 그런 의미에서 소소한 자유이며 삶의 가만한 수행이 아닐 수 없다. 절대의 신神은 생활 속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절대라는 말은 어쩌면 지상이 아닌 천상의 것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유연하다, 아니 유연해지고 싶은 우연偶然들과 필연必然들의 숲에 들어와 있지 않은가.
종이를 주는 대로 받아먹던 전송기계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전원을 껐다가 켜도/ 도대체 종이를 받아먹지 않는다// 사무기기 수리소에 전화를 해놓고/ 덮개를 열어보니// 관상용 사철나무 잎 한 개가/ 로울러 사이에 끼어있다// 청소아줌마가 나무를 옮기면서/ 푸른 잎 하나를 떨어뜨리고 갔나보다// 아니/ 석유 냄새 나는 문장만 보내지 말고// 푸른 잎도 한 장쯤 보내라는/ 전송기계의 침묵시위일지도 모른다
──「어떤 시위」 전문
전송기기의 고장은 “덮개를 열어보니” 명확해졌다. “관상용 사철나무 잎 한 개”가 “로울러 사이에 끼어 있”음으로 막혀버린 이 사태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 선후를 가릴 요량도 없이 팩시밀리에 낀 나뭇잎 한 장은 불편과 방해의 대상에서 점차 가만한 응시의 대상으로 옮아가기 시작한다. 기기機器의 가능한 기능적 운용 너머의 것을 보기 시작하는 화자의 눈길은 사물의 현실적 운용 너머의 것에 눈독을 들인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에의 선택이 그것이다. 전송기기를 통해 “푸른 잎도 한 장쯤 보내보라는” 그 불가능한 가능성에의 선택이 그것이다. 왜 시인은 그런 불가능성에 이끌리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관상용 사철나무 잎 한 개”를 바라보는 것일까. 이럴 때 실제와 상상, 즉 구체의 현실과 상상의 기원祈願이 갈리기 시작한다. 전송기기는 그 실체적 기능성을 포함하여 또 다른 상상의 기능을 증여 받게 되는 것이다. 즉 화자가 생각하는, 사물의 꿈 곧 꿈의 사물로 넘나드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 평의 토끼풀밭을 짓밟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네잎토끼풀을/ 행운은 따본 적이 없다// 이젠 네잎토끼풀 따위에 관심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행운은 나폴레옹처럼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연히 발 밑에 있는 네잎토끼풀잎을 따는 순간에/ 머리 위로 총알이 지나가는 것처럼// 돌연변이처럼
──「행운」 부분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행복과 행운은 어떻게 가를 수 있을까. 예를 들면, 로또복권을 사면서 당첨됐을 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갖는 상상의 기쁨은 가상의 행복에 속할 수 있을 것이고, 천재일우로 정말 복권이 당첨됐을 때를 행운이라 편의적으로 가를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모든 기대와 가능성의 확률은 늘 우리들의 바람을 배반하기 일쑤다. 그래서 낙첨됐을 경우, 복권에서 발생했던 행복과 행운의 여러 구체적인 기대치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행복과 행운의 구별이 무의미한 무화無化의 상태로 돌아간다. 수포水泡다. 그렇다면 공광규는 이런 인간의 보편적 욕망과 지향에 대해 어떤 선택의 뉘앙스를 지니는 것일까. 여기에 토끼풀이라는 식물과 관련된 인간의 상징체계가 작동하는 사례를 들었다. 즉 같은 토끼풀 중에 보편의 세잎토끼풀은 꽃말이 ‘행복’이고 ‘네잎토끼풀은 행운’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운을 쫓아 “네잎토끼풀”을 찾는데 집중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행운’의 ‘네잎토끼풀’을 찾기 위해 꽃말이 ‘행복’인 보통의 “수십 평의 토끼풀밭을 짓밟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그런 의구심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내민다. 과연 행복은 행운에 비해 차순위로 밀릴 만큼 열등한 것인가, 하는 케케묵은 의구심이다. 과연 이 둘을 비교우위나 혹은 절대 우위의 천칭天秤 위에 올려놓고 잴 수 있는가의 문제다. 아마 시인은 그런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네잎토끼풀을/ 행운은 따본 적이 없다”는 경험론을 통해 깨닫게 된다. 특별한 혹은 특정한 행운에의 집착 때문에 사멸돼 버리는 보편적인 행복의 문제를 말이다. 그런 일구어나가는 행복에의 추구의 종요로움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그래서 화자는 “행운은 나폴레옹처럼 오는 것이”라는 나름의 진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즉 우리의 욕망의 선택이 우리가 애초에 추구했던 바를 배반하게 된다는 전언에 가닿게 된다. 즉 행운은 행복과 결별하며 이뤄내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행복의 일상적 실천을 통해 찾아드는 우연이자 필연인 것이다. 그렇기에 “네잎토끼풀”의 꽃말이 행운이기 이전에 그 생물학적 실체는 “돌연변이”라는 사실로 귀결하게 만든다. 앞서 전송기기에 사철나무 푸른 잎 한 장을 전송하려는 것이 사물의 꿈이며 존재의 확장이라면, 여기서 행운이라는 상징체계에 물들인 네잎토끼풀은 실상 돌연변이라는 사물의 몸이며 존재의 실상, 그 자각인 것이다. 사물에의 어떤 기호가 사실은 선택을 통해 어떻게 이뤄지고 그것이 상징체계의 과신으로 인해 어떻게 현실을 왜곡되는가를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다. 선택의 불가피성보다 선택의 불필요성이 대두되는 부분인 셈이다.
2. 선택되어진 가능성들
우리는 이미 생활의 과정 속에서 선택되어진 것을 마주칠 때가 있다. 그것은 가만한 것이기도 하고 불뚝 솟구치는 갑작스런 것이기도 하다. 가만한 정적의 시간 속에서 바라봐야 보일 수도 있고 한바탕 소동처럼 들이닥치는 대면對面이나 충돌 같은 것일 때도 있다. 생활은 일상이기도 하고 파란이기도 하니까.
시골집 뒤꼍 대숲에 눈 내리는 겨울 저녁에는/ 평생 순하게 살다가 가신 어머니가 오신다// 목백합나무 가로수 가지를 밟고 측백나무 울타리를 넘어/ 정원의 마른 꽃나무에 눈발로 오신다// 소의 잔등을 쓰다듬듯 자동차를 순하게 만져주시고/ 꼭 잠근 유리창을 가끔 두드리시다가// 병들 무렵의 늙은 어머니처럼/힘없이 방충망에 걸터앉아서 방안을 궁금해 하시다가// 머리가 하얘져가는 아들에게 부드럽고 순하게 늙어가라며/ 한 말씀 하시고는 공중으로 떠나신다
─궑 린餠店─�전문
화자에게 아니 모든 인간에게 어머니는 경험적 대상이기도 하고 선험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경험의 세계는 그 자식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머니를 보여주지만, 선험적인 세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어머니가 무한히 확장된 존재의 이미지로 부활하게 된다. “평생 순하게 살다가 가신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시”는 그 내력은 죽음으로 갈라놓을 수 없는 선택된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현시하는 대목이다. 그런 어머니는 생전과 사후가 동일한 마음의 몸짓을 보여준다. “눈발로 오신다”거나 “자동차를 순하게 만져주시”거나 “꼭 잠근 유리창을 가끔 두드리시”기도 한다. 또 “방충망에 걸터앉아서 방안을 궁금해” 하시기도 한다. 그것은 결국 ‘“한 말씀”으로 귀결되는 사랑의 정령으로서의 눈발의 이미지로 두드러진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선택되어진 존재들이 벌이는 무한한 자애慈愛의 자장을 드러낸다. 자발적인 선택은 아닐지라도 선택되어진 육친의 관계는 더 원천적인 삶의 풍경들로 우리를 감싼다.
딸과 싸우고 집을 나간 아내가/ 며칠 째 전화도 안 받고 소식이 없다/ 절벽에라도 뛰어 내렸는가 새서방하고 살림을 차렸는가// (…중략…) // 경비원은 내 서투른 분리수거를 거들면서/ 비닐은 저기 잡병은 여기 플라스틱은 저기 그건 스치로폴이니 저기라며/ 핀잔을 하다가 은근히 명령조로 옮겨 간다// 경비원의 말투가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집 나간 아내에게 부아가 치밀어 경비원에게 한마디 던졌다/ “마누리 분리수거 마대자루나 만들어 놓으슈!”
──「마누라 분리수거」 부분
생활은 앞서 지고지순한 어머니의 사랑만을 계승하는 곳은 아닌가 보다. 출렁거리고 남실대고 때론 엎어지기도 하고 다지 잦혀지기도 한다. 따스한 고요가 머무는가 하면 뜨거운 법랑 냄비가 거실 바닥에 코를 박고 뒤집어지기도 한다. 아내는 그렇게 딸과 싸우고 집을 나갔다. 남편은 민망하고 어딘가 어이가 없는 마음의 씁쓸함을 지울 길이 없었을 것이다. 딸이 생기기 전, 부부가 탄생하기까지, 남녀는 천생연분天生緣分에 마음을 오래 기댔을 것이다. 그러면서 선택의 불가피성과 그 종요로움에 마음을 비볐을 것이다. 오로지 서로의 품에 안기기를 바랐을 것이다.
사랑의 순도가 낮아지거나 이물질이 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사랑은 생활이라는 또 다른 선택 앞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선택일 수 있지만 생활은 거기에 따르는 필수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시작하는 모든 부부생활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의 자발적인 선택이 아득해지고 무언가 선택된 듯한 일상의 분위기에 종종 함몰되기 일쑤일 게다. 그런 화자의 속내를 대변하는 것이, 재활용품 ‘분리 수거’라는 대안代案이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상의 선택과 그 차용借用에의 바람을 통해 생활은 파고波高의 정점에서 은근한 농담과 너스레를 보여준다. 악담이지만 농담이라서 너무 심각하지만은 않다. 농담이지만 결코 진담이 없을 수가 없어서 의뭉스럽다. 선택의 결과와 그 지속이 일평생이라고 할 때, 우리는 자발적 선택은 마치 선택된 조건처럼 우리의 일상을 둘러쌀 때가 있다. 그러나 예스yes 아니면 노no만으로 선택의 결과를 혹은 그 지난한 과정을 단숨에 정리할 수는 없다. 애초에 우리는 파란이나 파경을 예상했지만 결코 사랑의 파기를 예상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서산여고 교정 정원에는/ 문학작품 속에 나오는 들꽃과 나무가 팔십여 종이라는데// 교실에서 화장실로 강당으로 도서실로 들락거리는/ 여학생들 얼굴도 모두 들꽃이다// 그러니 문학강연을 듣겠다고 강당에 모인 전교생 수백 명이/ 환한 꽃밭이다// 강당에 모인 들꽃과 정원에 있는 들꽃을 합하면/ 이 학교를 다니고 있거나 졸업한 학생 수와 똑같을 거라는 생각이다// 나는 서광꽃 국화 코스모스 맨드라미 소나무… 여기까지 부르다가 이름이 막히는데/ 들꽃 이름도 못 외우는 불성실한 시인이다//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이 좋아서 국어교육을 전공했다는 교장선생님께 여쭈니/ 봉숭아와 분꽃도 있고/ 옛날 어머니들이 잎을 갈아서 얼굴에 발랐다는 붓꽃무더기도 있다고 한다// 교정을 나오는데 종아리가 예쁘고/ 모가지가 코스모스처럼 간들간들하던 이 학교 출신 시인도 생각나고// 들꽃을 좋아해서 결혼하기 전에 프로포즈 했던/ 이곳 출신이라는 서울의 사찰음식점 여주인도 생각난다
──「들꽃 교정」 전문
어느 날 화자는 “문학강연을 듣겠다고 강당에 모인 전교생 수백 명이/ 환한 꽃밭”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발견은 선택에 앞서 우리들을 단순한 세속적 분별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선택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기에 이른다. 생물학적인 꽃들로부터 사람 꽃으로 옮아가는 화자의 능숙한 시선이야말로 “서산여고 교정”뿐 아니라 세상을 꽃밭으로 물들여가는 마음바탕으로 오롯해진다. 범박하게 우리는 무수한 선택 앞에 놓여있고 그 선택을 통해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일 때가 있다. 그러나 한 번 선택한 것들은 고정불변의 어떤 결과나 책무만을 짐지우는 것은 아니다. 그 선택 자체가 품고 있는 여러 가능성들은 시 속에서처럼 다양한 가능성으로 번져간다. 그것은 다른 말로 상상이며 자유이고 가변적인 존재의 여백 같은 것일 수가 있다. 우리는 선택하면서 동시에 선택되어지는 이중의 상황 속에서도 가만한 설렘을 느낄 수가 있다.
생활을 둘러싼 공광규의 다양한 에피소드는 이렇듯 선택 속에 낳아지는 권리의 잉여opion들로 우리를 얽어매기도 하고 또 그걸 통해 모종의 자유를 구가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멀리서 오는 바람이 꼭 밝은 대낮만을 스쳐오지는 않았듯이 우리가 선택한 것들이 어두운 그늘을 드리울 때 다시 밝은 햇빛 속에서 눈빛을 반짝이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선택은 결과가 아니라 무수한 출발을 품고 있는 인생의 드넓은 교정이 아닌가.
유종인 / 1996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아껴 먹는 슬픔』 『교우록』 『수수밭 전별기』가 있고, 산문집 『염전』 『산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