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는 인도어이고, 영어로 donation, 우리말로는 기부이다.
세계기부지수라는 것이 있다.
영국의 자선지원재단(caf)와 미국의 겔럽이 함께 조사한 사람 돕기, 기부, 자원봉사 관련 지수이다.
여기서 미얀마가 3년 연속 1위, 미국이 2위이다.
그럼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75위다.
세계최빈국이라는 미얀마가 1위라는 것이 안 믿겨진다고?
그럼 당신이 시간이 난다면 미얀마 제2도시라는 만달레이를 가보라.
그곳에 가서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옥상에 올라가 거리를 내려다보라.
거리가 온통 붉은 물결로 넘실거릴 것이다.
그 시간은 미얀마 스님들의 탁발시간이다.
거리는 붉은 가사를 입은 미얀마 스님들로 가득 찬다.
만달레이 인구가 95만이라고 하는데, 가정으로 계산하면 40만 가구 정도 될 것이다.
만달레이는 미얀마에서 스님들의 가장 많이 사는 도시이다.
그 숫자는 아마도 10만은 되지 않을까?
내가 만달레이에서 미얀마 스님에게 물었더니 만달레이에 25만의 스님들이 산다고 하였다.
그것이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해서 10만은 되지 않을까 추정하는 것이다.
그럼 만달레이 40만 가구가 매일 일년 365일 아침마다 밥을 해서 10만의 스님들을 먹여살리는 것이다.
365일 하루도 불평하지 않고, 아침마다 밥을 해서 집밖에 나와 스님들이 탁발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탁발 나온 스님들의 발우에 음식을 올린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밥을 공양 올리는 것이 한 두번은 할 수 있지만 365일 그렇게 한다고?
미쳤군?
스님들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신도들이 돈을 주면 그 돈으로 쌀을 사다가 밥을 해먹으면 되지.
그게 무슨 짓인가?
남들 힘들게 고생시키고, 이것은 민폐 아닌가?
한국인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미얀마 스님들이 밥을 해먹지 않고 매일 탁발하는 것은 붓다께서 그렇게 계율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왜 붓다께서 음식을 해먹지 말고 오로지 탁발에 의지해서 살아가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문제는 넘어가고 여기서는 보시의 문제만을 다뤄보자.
미얀마인들은 그렇게 365일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음식을 만들어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린다.
그들이 진정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를 실천한다.
하지만 미얀마인들은 금강경을 모른다.
미얀마 불교에는 대승경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금강경에 나오는 무주상보시라는 단어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금강경을 끔찍히 사랑한다.
금강경을 사경하고 금강경 독송회를 만들어 공부하고, 천도제를 지낼 때도 영가들을 위해 금강경을 외운다.
무주상보시라는 단어를 외우면서 그 뜻을 헤아린다.
그러면서도 무주상보시는 실천하지 않는다.
힌국에는 기부문화가 없다.
한국은 기브엔테이크(give and take) 문화다.
주고 받는 것이 확실하다.
미얀마 절에는 행사가 없다.
일년에 딱 한 번 행사가 있는데 그것이 까띠나 행사다.
우기 안거를 마친 스님들에게 가사(옷) 공양을 올리는 행사이다.
절에서는 일체 돈을 벌기 위한 어떤 행위도 금지되어 있으므로 행사를 할 수 없다.
그 대신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보시(기부)를 하기 때문에 특별히 행사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는 절에서 행사를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있다.
그래서 초하루 기도, 백중기도, 100일 기도, 개산제, 다례제, 보살계 수계법회 등....끝없이 행사를 해야 한다.
돈을 받는 만큼 기도를 해주고 복을 빌어주고....뭔가를 해주어야 한다.
한국은 기브엔테이크 문화다.
그러면서도 무주상보시는 입으로 마음으로 달달 외우면서 뜻을 헤아린다.
금강경에 나오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무슨 뜻일까?
집착없이, 탐욕없이, 욕망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보시하라는 말일까?
생색을 내지 말고 보시하라는 말일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왼손은 모를지언정 마음은 알고 있다.
사실 무주상보시라는 말은 말이 안되는 관념이다.
여기서 상(相)이라는 단어는 빠알리어로 샨냐(sanna)이다.
샨냐는 지각, 인식, 즉 대상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올 때, 그것을 기억 속의 퍼즐을 맞추어서 무엇인지 지각 또는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식에 대한 반응으로 어떤 생각이나 행위를 한 후에는 다시 그것을 기억에 저장하는 것도 샨냐이다.
그러므로 무주상보시는 어떤 행위를 하던지 그것을 기억 속에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록을 남기지 않고 행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라한 밖에 없다.
아라한은 어떤 행위를 하던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아라한에게는 자취가 없어서 행위가 업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어떤 행위든지 마음속에 그것이 저장된다.
그 저장된 기록이 업이다.
그 기록에 따라 다음 생, 다다음 생에 그 업을 받는 것이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 보시를 하고 기부를 한다.
선행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보시를 하는데, 선행에 대한 기록이 없다면 보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산냐(상)에 기록이 안 되게 보시를 하라니?
산냐(상)에 기록을 하지 않고 보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도가 높은 것도 아니면서.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붓다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붓다는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현실적으로 말씀하신다.
중생이 실천할 수 없는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언어, 무주상보시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시를 하기 전에도 기뻐하라.
보시를 하는 도중에도 기뻐하라.
보시를 하고 나서도 기뻐하라.
세 때에 기쁨이 일어났다면, 이것은 가장 수승한 보시가 될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보시경, A6.37>
보시를 하면서 기쁨이 일어나 샨냐에 확실한 기록이 남긴다면그것이 세세생생 복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첫댓글 무념스님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