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가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1927)이 간행되기 전 약 10년 동안 아무런 논문이나 저서도 발표하지 않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결코 짧지 않은 기간에 하이데거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최근 간행되는 그의 마르부르크 대학 강의록들은(1923-1928)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능케 해준다. 단적으로 말해서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과 함께 당시 철학계에 멋지고 요란하게 데뷔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철학적 글쓰기나 특유의 열정적인 강의는 차치하고 그 전에 그가 수행한 현상학 공부 때문이었다. 물론 현상학이라는 표현 자체를 그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그 주요 원칙들과 이념들을 정립한 것도 아니지만, 하이데거와 그 밖의 다른 현상학자들 사이에는 그가 그 당시 벌써 현상학에 대한 비판과 극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는 엄연한 차이가 존립한다. 그러나 현상학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시도로부터 하이데거가 현상학 자체를 부정하고 버리려 했다는 사실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하이데거야말로 그 어떤 다른 현상학자 들보다 더 철저하게 현상학적 철학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무엇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인가? 도대체 현상학 혹은 현상학적 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본 논문은 우선 하이데거가 1920년대에 행한 일련의 강의들 가운데 특히 1925년 여름학기와 1927년 여름학기에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행한 강의를 중심으로 현상학에 대한 그의 이해를 추적해 봄과 아울러 현상학과 철학의 관계, 그리고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확인해 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1. 현상학의 출현
우선 우리의 물음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시간 강의 서두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자연과 역사의 현실성에 대한 근본물음은 곧 특정 존재영역의 사태에 대한 근본물음이다. 시간개념은 존재물음을 위한 실마리이다. 따라서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 시간현상에 대한 논구와 연결되어 있다. 시간현상에 대한 이러한 논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체계적 혹은 역사적을 의미하지 않고, 그것은 현상학적이다. (전집 20, 9이하. 필자강조) 여기서 체계적 혹은 역사적 이라는 비교적 우리에게 친근한 방법들과 구분되고 있는 현상학적 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의미하는가? 어떤 대상을 그게 자연이건 역사이건, 혹은 다른 것이건 현상학적 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도대체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이라는 말 아래에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하이데거는 그가 현상학 혹은 현상학적 이라는 말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간단한 정의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하이데거는 우선 현상학(적) 이라는 역사적 현상 자체를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강의를 현상학이 성립하게 된 철학사적 배경 설명으로부터 시작한다.
칸트 이후 맹위를 떨치던 독일 관념론의 영향력 쇠퇴는 주지 하다시피 그 반동세력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독일 관념론에 대한 반동세력의 핵심은 두 갈래로 나타난다. 하나는 실증주의로 무장한 개별 과학들의 등장이요 다른 하나는 개별 과학이 지니고 있는 권리를 인정하면서 철학의 고유한 학문성을 확보하려는 철학적 조류들의 등장이다. 이 새로운 철학적 흐름에 대한 하이데거의 태도는 비판적인데, 그 이유는 철학적 혁신에 대한 신칸트학파의 요구가 '물어지고 있는 문제에로의 근원적인 소급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미리 주어져 있는 철학, 즉 칸트 철학에로의 소급을 통해 이루어지기 (전집 20, 13) 때문이다. 예컨대 신칸트학파의 대표자 가운데 하나인 코헨에게 경험은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경험을 의미했다. 또한 이러한 의미의 경험과 인식의 구조는 그 주체의 의식에로의 소급을 통해서만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고 믿어졌다. '19 세기 말 학문적 철학은 그 갈래를 막론하고 철두 철미 의식을 주제로 삼았다. 이 학문적 철학은 [철학사상, 역주] 최초로 의식, 즉 사유실체를 철학의 근본주제로 설정한 데카르트와의 연계를 뚜렷하게 알고 있었다. (전집 20, 22f.)
의식의 지향성을 강조했던 후설의 스승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충실한 19세기 철학자였다. 브렌타노에게도 역시 철학의 학문성은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경험적 관점에서 본 심리학』(Psychologie vom empirischen Standpunkt, 1872)에서 브렌타노는 자연과학적, 심리학적 방법을 인간의 삶에 특히 인간의 마음(心)과 관련하여 대한 연구에 적용코자 한다. 그러나 '참된 철학적 방법은 자연과학의 방법과 다르지 않다 (Vera methodus philosophiae von alia est nisi scientiae naturalis)는 브렌타노의 주장은 이점을 하이데거는 강조한다 철학과 자연과학이 동일하다, 혹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그대로 철학에 적용할 수 있다는 식으로 오해 되어서는 안된다. 저 테제가 주장하는 바는 철학 역시 자연과학 처럼 연구를 진행시켜야 한다, 즉 철학적 개념을 사태 자체로부터 길어 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브렌타노의, 역주] 저 테제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철학에 그냥 끌어들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저 테제는 철학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배제해야 한다, (...) 자연과학이 자기 영역에서 연구를 진행시켜 나가듯이 철학도 그렇게 연구를 진행시켜 나가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다. (전집 20, 24) 따라서 의식, 체험 혹은 마음에 관한 학문(Wissenschaft vom Psychischen, 心理學)의 정립에 필요한 것은 마음에 대한 기존의 어떤 이론이 예컨대 어떤 특정 철학자의 특정한 심신이론 아니라, 마음이라는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자체이다. 그렇다면 브렌타노는 마음(心)의 본질을 어디에서 찾는가? 心的 현상의 특징을 브렌타노는 지향(intentio)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체험은 표상과 판단, 관심과 사랑 등 비록 그 지향의 방식과 방향은 상이하다 할지라도 항상 어떤 것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설은 원래 수학자였다. 수학자였던 후설이 수학을 떠나 철학을 하게 된 것은 '브렌타노가 후설에게 준 개인적인 인상 때문이었다. 즉 브렌타노가 보여 준 '물음과 관찰의 열정 (전집 20, 29)은 수학과 철학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후설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던 것이다. '교사이자 학자로서의 브렌타노로부터 받은 인상은 후설로 하여금 당시의 비생산적 철학 안에 내재해 있는 학문적 철학의 가능성에 눈 뜨게 하였다. (같은 곳) 수학자 출신 답게 후설이 처음에 매달렸던 철학적 문제는 수학의 대상, 즉 수 자체의 논리적 의미와 구조였다. 수(數)의 논리적 본질을 브렌타노의 기술 심리학적 방법을 동원해 탐구한 (교수자격청구논문) 후설은 그러나 곧장 사유와 대상 일반의 근본개념들, 논리학 자체의 가능조건과 대상을 물어 나간다. 10여년에 걸쳐 지속된 이 작업은 드디어 1900년, 『논리연구』(Logische Untersuchungen I, II)라는 제목을 단 두 권의 책으로 출간 되기에 이른다. 20세기의 서양 철학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현상학 혹은 현상학적 탐구는 바로 이 두 권의 책에서 비롯된다. '『논리연구』는 현상학의 기본서이다. (전집 20, 30)
현상학적 운동의 효시랄 수 있는 『논리연구』는 그렇다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이 책은 매우 건조한 책이다. 이 책에서 후설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대상 , 개념 , 진리 , 명제 , 사실 , 법칙 등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위한 근본개념들 자체의 의미이다. 하이데거가 특히 중요시 하는 것은 현상학과 인식론을 위한 연구 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논리연구』2권이다. 이 책의 비범함을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철학함의 방식과 전혀 다른 것은 이 책이 [사태 자체에로, 역주] 육박해 들어가서 [그 의미내용을] 파악 하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사태 자체를, 역주] 꿰뚫고 들어가며 탐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즉 이 책은 탐구대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 가고, 그것을 분명하고 명시적으로 눈 앞에 떠올리고 제어할 수 있는 지침을 준다. (...) 이 책에 담겨져 있는 요구에 비할 때 이 책의 영향은 최근 이십 년 동안 대 변혁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사소하고 비본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집 20, 32)
후설 현상학이 어떤 배경에서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 하이데거는 이제 그것의 구체적인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이 의미해명은 후설 현상학에 의해서 무엇이 발견 되었으며, 그렇게 발견된 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파악되어야 하겠는가 하는 물음과 대답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후설 현상학의 위대함은 세가지 발견에 놓여 있다. 지향성 , 범주적 직관 , 그리고 선험적인 것의 근원적인 의미 가 그것이다. 이들 위대한 발견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마친 하이데거는 현상학 전체를 그 근저에서 규정하고 있는 원리 내지 준칙 , 즉 '사태 자체로 (Zu den Sachen selbst, 전집 20, 104)의 의미를 묻는다.
일반적으로 모든 이론적 탐구에는 탐구가 그 안에서 진행되고 그 것을 향해 나아가는 사태의 영역은 물론이려니와 그 사태를 문제 삼는 관점과 방식이 속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사태 자체로 라는 현상학적 준칙이 주장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일견 평범할 뿐만 아니라 당연한 사실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준칙이 왜 일종의 전투 구호 로 둔갑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저 준칙에 담겨져 있는 두 가지 요구 사항 때문이다. '현상학적 준칙 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요구를 듣는다. 하나는 굳건한 토대 위에서 검증하는 자세로 탐구를 진행하라 는 것이고 (검증적 작업에의 요구), 다른 하나는, 후설이 자기의 철학함을 그렇게 이해 했듯이, 이 토대를 거듭 획득하고 확인하라 는 것이다. (토대발굴에의 요구) (전집 20, 104) 그렇다면 후설 현상학이 돌아 가라고 외치는 그 사태 자체 , 현상학적 탐구의 주제영역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후설 현상학이 전력을 기울여 탐구해 들어가는 영역은 바로 지향성 ,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 선험성에 있어서의 지향성 (전집 20, 106)의 영역이다. 후설 현상학은 결국 의식의 지향작용(noiesis)과 지향대상(noema)을 그 근원적 관계와 구조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 즉 가능한 한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에도 사로 잡히지 않고, 기술(記述, Deskription)하고 분석하는 데서 자기 본연의 임무를 찾는다. 현상학이 의식의 선험적 지향성에 대한 분석적 기술 내지 기술적 분석에 매진 하는 한 그것은 기술 심리학 (deskriptive Psychologie)이다. (전집 20, 108)
2. 현상 (Ph nomen)에 대한 학 (logos)으로서의 현상학
후설의 현상학이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탄생했고 무엇을 그 탐구 과제와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방법이 어떠했는지를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한 하이데거는 드디어 자기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 시작한다. 현상학 이라는 명칭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현상 과 학문 의 조합어이다. 신학이 신에 대한 학문, 식물학이 식물에 대한 학문, 동물학이 동물에 대한 학문, 사회학이 사회에 대한 학문이듯이 현상학은 현상에 대한 학문 (Wissenschaft von den Ph nomenen) 이다. 현상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현상학의 구체적인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우선 현상 이라는 말의 근원적인 의미부터 따져 들어간다.
현상 (Ph nomen)은 파이노메논 ()이라는 그리스 말에서 유래한다. 파이노메논 은 파이노 ()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파이노 는 밝게 하다 , 밝음 속에 세우다 를 의미한다. 다시 이 파이노 의 어간 파 ()는 빛 과 밝음 을 의미하는 포스 ()에서 나온다. 물론 이러한 어원 분석을 통해서 하이데거가 노리는 것은 현상 이라는 말의 의미를 명료화 하는 것이다. 현상의 의미는 파이노메논 , 즉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 (das, was sich selbst zeigt)으로 확인된다. (전집 20, 111) 이처럼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드러내 보여 주는 현상의 총체를 그리스인들은 타 온타( ), 즉 존재자 와 동일시 했다. 자기의 모습을 언제나 이미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 주고 있는 존재자가 없다면 가상 (Schein, Erscheinung)도 없다.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현상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가상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가상은 현상의 변형태에 지나지 않기에, 현상 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가상 도 없고 착각 도 없다. 현상(진리)은 가상(비진리)의 존재론적 가능조건인 것이다. 지시로서의 가상의 가능성은 본래적인 현상, 즉 자기 드러냄에 근거한다. (전집 20, 113)
현상학은 바로 이처럼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는 현상, 즉 존재자를 그 진리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학 (logos)이다. 이 때 학 , 즉 logos는 레게인 ()이라는 그리스에서 유래한다. 레게인 은 우선 ..에 대해 말하기 를 의미한다. 그러나 레게인 아무렇게나 기분 내키는 대로 내뱉는 말이 아니라 델로운 (), 즉 드러냄 (Offenbar machen) 말 속에서 말되어지는 존재자의 진상과 본질이 드러나도록 말하기 을 의미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방식의 말하기를 아포파이네스타이 (), 즉 어떤 것을 있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Sehen lassen)라는 의미의 로고스 아포판티코스 ( )라고 부르면서 그렇지 못한 모든 종류의 말하기와 구분했다. 현상학의 학 은 논리학이나 신학, 생물학의 학 에서 처럼 어떤 현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말에 담아 보여 주고 전달하기 위한 이론적 말하기 ( )를 의미한다. (전집 20, 116)
이상의 어원적 고찰을 거친 하이데거는 현상 에 대한 학 으로서의 현상학 의 의미를 비록 형식적이지만 다음과 같이 규정하기에 이른다. '현상학은 레게인 타 파이노메나 ( ) = 아포파이네스타이 타 파이노메나 ( ), 즉 스스로 드러나 있는 존재자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이다. (전집 20, 117) 이러한 의미의 현상학과 타 학문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를 하이데거는 탐구대상이 아니라 그것의 방법론적 개방성에서 찾는다. 현상학이라는 명칭은 신학, 생물학 등 다른 학문들의 명칭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 차이는 현상학이라는 명칭이 [현상학이라는] 학문의 탐구 대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고, 오직 이 점이 강조 되어야 한다 어떤 것이 어떻게 탐구 되어야 하는지 그 방식만을 말해 준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그것이 어떤 철학적 주제를 경험하고 파악하고 규정하는 방식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는 한, 일종의 방법론적 명칭이다. (전집 20, 117)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상학의 탐구 대상으로서의 현상 은 그 배후에 무엇인가가 숨어있는 그런 어떤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하이데거는 강조해 마지 않는다. 현상은 그 뒤에 어떤 것이 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현상과 관련하여 도대체 그 배후를 캐물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바로 그 자체로 [이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전집 20, 118) 물론 현상학적 의미의 현상이 그 배후에 어떤 다른 것을 전제하고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현상 자체의 은폐 가능성 마저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상학의 과제는 바로 우선 대개 은폐되어 있기 마련인 현상을 개시하는 데 존립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현상은 그냥 주어져 있지 않고, 비로소 주어져야 한다 고 강조한다. (전집 20, 118) 그렇기 때문에 현상학적 현상의 반대개념이자 현상학의 우선적인 탐구대상은 은폐되어있음 (Verdecktsein)이다. [현상학적인 의미로 파악된] 현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우선 대개 은폐되어 있거나 아니면 애매하게 규정되어 알려져 있다. (전집 20, 119) 이 현상의 은폐는 물론 위장, 왜곡, 착각, 오해 등 여러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현상학의 과제는 바로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은폐를 방법적으로 해체 (전집 20, 118)하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 줌으로써 현상은 그냥 주어져 있지 않고 비로소 주어져야 하기에 그것을 비로소 획득 (전집 20, 120) 하는 데 놓여 있다.
3. 현상학과 철학, 그리고 존재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 이해가 서로 엇갈리는 지점은 바로 현상학의 탐구 영역과 대상에 대한 다른 견해이다. 두 사람에게 모두 현상학의 탐구 대상은 현상 이지만 문제는 그 현상의 의미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스승에 대한 하이데거의 불만은 단적으로 말해서 후설의 현상은 의식현상 (과 그것의 지향성)이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상학이 탐구 영역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의식 이 아니라 그것의 지향체로서의 존재 이다. 다시 말해서 하이데거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현상 자체의 의미를 묻는 것, 즉 존재물음 이다. '현상학의 주제 영역으로서의 지향성에 대한 연구에는 지향적인 것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논의되지 않고 있다. ... 존재물음 자체가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전집 20, 157)
1927년 여름학기에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행해진 한 강의에서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하이데거는 자기의 고유한 현상학 이해를 더욱 구체적으로 개진한다. 1925년의 현상학 강의가 후설 현상학의 위대한 발견과 그 내용설명, 그리고 그것과의 비판적 대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면 1927년 강의에서는 현상학의 탐구 대상, 즉 존재 에 대한 물음이 주제로 등장한다. 현상학의 이념과 과제에 대한 형식적인 의미 규정이 아니라 현상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한 구체적인 철학함 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강의를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현상학이라고 불리우는 현대 철학의 한 조류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아니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현상학이 아니라, 현상학이 다루는 대상 자체이다. (...) 중요한 것은 철학에 대한 앎이 아니라 철학 할 수 있음이다. (Es geht nicht darum, Philosophie zu kennen, sondern philosophieren zu k nnen.) (전집 24, 1. 역자 강조)
그렇다면 철학할 수 있다는 것, 철학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적어도 이 당시의 하이데거에게 철학함 이란 인생관 내지 세계관의 수립과 전파와는 다른 것을 의미했다. 철학은 따라서 이른바 본질적으로 세계관철학 (Weltanschauungsphilosophie)이 아니라, 학문적 철학 이어야 한다.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학문적 철학 (die wissenschaftliche Philosophie) 정립을 위한 방법론이다. '(...) 현상학 이라는 표현은 학문적 철학 일반의 방법을 위한 제목이다. (전집 24, 3)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상학적 방법을 통한 학문적 철학의 수립은 어떻게 가능한가? 도대체 학문적 철학 이란 말로 하이데거는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철학은 도대체 어떤 학문 인 것이며, 철학이라는 이 학문의 고유한 성격, 즉 그것의 학문성 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결국 철학과 철학함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되는 이 물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적어도 이 강의, 즉 『현상학의 근본문제들』에서 철학의 본질은 세계관철학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학문 (Wissenschaft vom Sein), 즉 존재론 (Ontologie)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주장한다: 철학의 참되고 유일한 주제는 존재이다라고. (...) 이를 부정적으로 다시 말해서 철학은 존재자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학문, 즉 그리스적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존재론(Ontologie)이다. (전집 24, 15)
철학의 본질을 철저하게 학문적 즉 존재론적 으로 이해하던 당시의 하이데거에게 존재자에 대한 특정한 입장표명과 가치설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세계관정립과 전파에 골몰하던 세계관철학 이 비판의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하다. 이 당시 하이데거에게 세계관철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예 철학이 아니다. 그에게 세계관철학이라는 개념은 '나무로 만들어진 쇠 (ein h lzernes Eisen)라는 표현 만큼이나 잘못되고 무의미한 개념(Unbegriff)이다. (전집 24, 16) 물론 하이데거는 철학이 본질적으로 존재론이라는 그러므로 세계관 정립과 전파는 철학 본연의 과제영역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주장 을 나름대로 정당화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정당화 수단으로서 하이데거가 택하는 것은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존재물음 에 매달렸다는 사실의 증명이다. 이런 의도로 하이데거는 2500년 서양철학의 역사 전체를 존재론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퀴나스는 신학자이기 전에 탁월한 존재론자이며, 칸트 역시 인식론자가 아니라 존재론자이다. 그들 자신이 이 사실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하이데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하이데거 자신 만이 아니라 그에 앞선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이 한사코 매달렸던 존재 라는 현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존재 가 존재자 처럼 우리가 쉽게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어떤 것 도 아니라면 그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쯤해서 우리는 철학이 본질적으로 존재론이라 주장하는 하이데거가 우선 철학의 탐구대상, 즉 존재 라는 현상의 확보 에 주력하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존재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대한 아마도 가장 짧은 대답은 존재자가 아니다 일 것이다. 존재론적 차이 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 사태는 하이데거 철학을 근저에서부터 지탱시켜 주는 가장 기본적인 통찰 가운데 하나이다. 문제는 존재 즉 있음이라는 말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느냐이다. 실증적 연구 대상들만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있음, 즉 존재 자체는 없음이며, 따라서 무시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바로 이 존재를 이미 언급 했듯이 철학의 유일하고 참된 물음 대상이라고 본다. 왜? 하이데거에게 존재 는 그 어떤 존재자보다도 더 실재적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왜 존재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없기는 커녕 오히려 가장 큰 실재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는가? 왜 존재는 있지 않을 수 없는가? 철학은 다른 학문들과는 달리 존재자와 실증적인(positiv) 관계를 맺지 않는다 라는 전제를 우리는 정당화할 수 있는가? (.) 존재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있지 않다. 앞에서 열거한 것들 [자연, 역사, 신, 공간, 수 등등, 역자 주] 이외에 어떤 다른 존재자도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시 [존재자의 방식으로, 역주] 있는 (ist) 것은 아니지만,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주] 있는 (es gibt) 어떤 것, 앞으로 계속 규정되어 나가야 할 의미에서 어떤 다른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 어떤 것은 우리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접근해 들어가고 그것과 관계맺을 수 있기 위해서라도 있어야(mu ) 한다. 다시 말해서 [존재자의 방식으로, 역주] 있지 않은 이 어떤 것은 우리가 존재자라고 하는 것을 존재자로서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우선은 소박하고 비개념적으로나마 현실(Wirklichkeit)의 의미를 우리가 미리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현실적인 것(Wirkliches)은 우리에게 은폐된 채로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실재(Realit t)가 의미하는 바를 미리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실재적인 것(Reales)에로의 접근은 불가능할 것이다. (...) 현실적인 것에 대한 모든 경험에 앞서서 우리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 내지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존재자에 대한 경험에 우선한다. (...) 우리는 존재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전집 24, 13f.)
위의 긴 인용에서 분명하게 드러 나듯이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비록 존재자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존재자에 대한 모든 종류의 경험의 가능조건으로서 나름의 방식으로 있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철학이 만학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만물의 근거로서의 존재 자체의 의미와 진리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의 탐구 대상인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이 당시 하이데거는 존재가 거하는 이 장소 를 존재이해 라 불렀다. 존재는 다름 아닌 그 것에 대한 이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존재자에 대한 모든 관계맺음의 근저에 놓여 있는 존재에 대한 이해, 즉 존재이해 안에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전집 24, 21)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학문, 즉 존재론의 전개에 앞서 그것의 탐구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거기에 놓여 있는 장소로서의 이해 자체의 구조와 가능성이 먼저 물어져야 한다고 본다. 존재론에 앞서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에 대한 탐구를 하이데거는 사태에 걸맞게 기초존재론 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기초존재론의 탐구주제는 이미 언급 했듯이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장소로서의 존재이해 자체이다.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디로부터, 즉 미리 주어져 있는 어떤 지평으로부터 우리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인가? (전집 24, 21)
존재론의 가능조건으로서의 존재이해 자체의 근거, 즉 지평을 묻는 이 기초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뜻밖에도 시간 이다. 존재라고 하는 것의 이해가 가능해지는 지평은 시간이다. (전집 24, 22) 이로써 우리는 왜 하이데거가 오랜 기간의 침묵 끝에 내놓은 책의 이름이 『존재와 시간』인지 조금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와 시간 은 단순한 책 제목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 즉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철학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 그리고 시간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이 존재와 시간 이라는 문제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와 시간, 이 양자의 내밀한 유사성은 은폐되어 있다. 존재와 시간은 아직 문제로서 경험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존재, 시간: 그러나 존재와 시간? 존재와 시간을 묶고 있는 이 와 야말로 문제의 본래적인 핵심이다. (전집 31, 116)
나가는 말
궁극적으로 존재와 시간의 근원적 연관을 해명하려는 의도로 씌어진 『존재와 시간』에서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존재 현상 들에 대한 분석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 까닭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존재와 시간』을 저술할 당시의 하이데거에게 존재 자체 는 오직 그 것에 대한 이해 를 가지고 그 것의 의미를 문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즉 인간을 통해서만 탐구 가능한 것이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탁월함은 이성을 수단으로 하여 다른 존재자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능력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와의 그러한 모든 가능한 관계맺음에 앞서서 존재 를 이해한다는 사실 자체에 놓여 있다. 존재와의 근원적인 관계 (존재이해) 없이는 존재자와의 어떤 관계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이 능력 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론적 탁월함을 보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 이후에도 인간 (현존재)와 존재의 상호 공속성은 여전히 하이데거의 철학적 화두로 남는다.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이해 라 불리웠던 이 능력 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규정이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예컨대 마르부르크에서 행한 마지막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이 강의를 끝낸 하이데거는 정년을 맞은 후설의 후임 자리를 메꾸기 위해 모교인 프라이부르크로 금의환향한다 동일한 사태를 초월 이란 말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초월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인식론적 관계 (주체와 객체의 관계)나 신학적인 관계 (신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철두 철미 존재론적으로 , 즉 존재에로의 넘어섬으로 이해되어져 하는 관계이다. 그러길래 하이데거는 분명히 그의 스승의 위대한 발견을 염두에 두고서 다시 한번 이렇게 강조해 마지 않는 것이다. 초월의 문제는 지향성의 문제와 결코 같지 않다. 지향성은 존재적 초월로서 그 자체 오직 근원적 초월, 즉 세계-내-존재의 근거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 근원적 초월(Urtranszendenz)은 존재자에 대한 모든 지향적 관계를 가능케 한다. (전집 26,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