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어느 시기 보다 전 인류의 불안이 오늘날 더욱 크게 부각된다. 이러한 불안은 전 인류적인 것에서부터 각 개인의 극히 내면적인 것까지 상당히 다양하게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불안이 현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과 같이 불안에 관한 논의가 다양하게 나타난 때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현대의 학자들이 제시하는 불안의 원인도 그만큼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학자들은 인간의 소외를 통한 실존의 위기를 제시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는 이 글에서 현대인의 불안의 원인을 뉴튼 물리학과 아인슈타인 물리학, 그리고 토마스 쿤의 과학 철학을 통해 조망하고자 한다.
뉴튼 물리학은 보통 만유인력의 법칙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뉴튼 물리학의 의미를 확장시켜서, 뉴튼으로 대표되는, 갈릴레이 이후로부터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근대 물리학은 <뉴튼 물리학>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중세의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었던 신은 갈릴레이의 공격에 의해서 철저히 무너졌다. 실제로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그가 지구가 움직인다고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가 우주의 가장자리에 있는 보잘 것 없는 별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절대 진리라고 믿어지던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자 사람들은 불안해졌다. 그러나 그 불안은 곧 과학에 의해서 해소되었다. 이미 과학이라는 확실한 대안에 의해서 종교의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뉴튼 물리학은 과학에 의해서 절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과 세계는 아주 잘 정리되어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데카르트의 기하학 체계에 기초하여 아주 잘 짜여진 물리학적 체계를 구성한 뉴튼은 물리학은 실제로도 엄청난 과학적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고, 세상의 모든 진리를 곧 밝혀줄 수 있을 듯이 느껴졌다. 이러한 즈음에 태동한 실증주의와 과학비판 철학은 이러한 근대인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할 수 있었다. 뉴튼 물리학의 공고한 체계는 실험에 의한 검증에 의해서 더욱 더 확실하게 그들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막대한 자연과학의 발달과 산업의 발달은 인류에게 과학은 그들의 미래를 확실하게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는 아인슈타인 물리학이 대두되면서 차츰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공교롭게도 아인슈타인 물리학이 뉴튼 물리학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때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때이다. 과학에 의한 유토피아를 꿈꾸던 근대인들은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과학이라는 것이 인류의 파멸을 가져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때에 과학 자체 마저도 그것이 절대 진리를 깨우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즉, 점과 직선, 그리고 절대적인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던 기존의 뉴튼 물리학은 그것의 전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진리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 물리학의 주장인 것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뉴튼 물리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계를 뛰어넘은 데카르트 물리학과 데카르트의 연장성 이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뉴튼 물리학은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절대성에 기초하여 그의 모든 이론을 전개하고, 이에 따라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은 그러한 공간과 시간의 절대성을 모두 부인한다. 즉, 결코 왜곡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시간의 상대성과, 빛 마저도 똑바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공간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과학이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절대적인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그저 불가능한 일이 될 뿐이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 성립된 이후로부터 현대가 시작된다고 시대를 구분한다면, 현대인은 그 시작부터 불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베르그송은 그의 에세이를 통해서 시간이라는 것은 원래 양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이 충분한 타당성을 지니는 것이었으나, 공간과 시간의 불가지성으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현대인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베르그송의 노력은 일부 실존주의자들의 노력보다는 더 적극적인 면이 있긴 있었다. 실존주의자들은 이러한 불안에 직면해서 불안을 극복하기 보다는 그 불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을 하였다.
오랜동안의 과학의 붕괴와 전쟁에 의해서 과학에 대한 신뢰가 점차로 무너지고 있는 와중에서도 과학에 대한 신뢰 중의 일부, 즉 과학적 방법에 대한 신뢰는 계속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여기서 과학적 방법이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여 사실로 확인된 것만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방법에 대한 신뢰마저 무너뜨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의 출판이다. 여기서 쿤은 과학이라는 것은 어떤 패러다임을 만들어 놓고, 그것과 잘 부합되는 증거만을 열심히 모아나가는 작업이라고 역설함으로써 과학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즉 이전까지 엄정하게 수행된다고 생각되던 과학적 작업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그들이 몸담고 있는 패러다임을 옹호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인식이 문제가 되는가? 그건 바로 과학 자체의 반성에 의해서 과학에 대한 신뢰에 의문이 제기 되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중세때에는 과학이라는 것의 도전에 의해서 종교 또는 신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젠 과학 자체 내에서 과학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젠 대안이 없는 상태로 과학이라는 믿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과학에 대한 과학 내의 도전이 새로운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종교에 대한 반박은 또 다른 종교였다는, 과학은 종교의 또다른 형태였다는 식의 순환논리 속에 빠져들게 한다.
현대 물리학의 특징은 바로 혼돈이다. 그리고 그 혼돈 이론은 아주 잘 적용되고 발달되고 있다. 하지만 쿤에 의하면 그것 조차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현대인은 자신들이 믿고 의탁할 절대적인 것을 빼앗겼다. 일부 학자들에 의해. 현대인은 불안하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물리학을 위한 철학 : 순환 법칙
20세기 물리학은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지만, 동시에 많은 새로운 의문들을 남겼습니다. 빛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갖고 있고, 미시 세계의 물질 입자들도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어떻게 한 물체가 서로 다른 성질인 입자성과 파동성을 둘 다 가질 수 있을까? 이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중력을 전달하는 중력자(graviton)는 존재할까? 우주에 암흑 물질(dark matter)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존재일까? 우주 대폭발이 사실이었다면 그 힘은 어디에서 생겼을까?
물리학은 이런 의문들을 하나의 원리로 해결해 보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유도되는 기하학적인 장의 개념은 완성되지 못했고, 양자장 이론도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초끈 이론은 기본 개념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대해 볼만한 이론이 아직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전자기력과 약력을 하나로 묶는 이론과 실험이 일치하였다고 하여 현재의 역학 체계에서 통일장이론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입니다. 왜냐 하면, 현재의 역학 체계에 커다란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은 잘못된 철학을 갖고 있어 그 잘못을 찾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물리학은 철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입니다. 역사적으로 기존의 철학을 버리고 새로운 철학을 수용하는 것이 과학의 발전 과정입니다. 물리학은 실증이란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철학을 수용하기가 다른 학문에 비해 용이합니다. 물리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철학이 필요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빛을 에너지로만 보는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빛은 물질로부터 나오므로 질량과 에너지를 둘 다 갖고 있다." 이것이 물리학을 위한 새로운 철학인 '순환 법칙'의 출발점입니다.
순환 법칙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운동은 동일하다고 보는 포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거짓이면 쉽게 무너질 것이고, 참이면 물리학은 물론 다른 학문으로도 확장되어 발전할 것입니다. 이제 시작이지만 법칙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순환 법칙은 20세기 물리학이 해결하지 못한 의문들은 물론, 실험을 통해 검증된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환 법칙은 21세기 물리학이 짚고 넘어야 할 새로운 이론입니다.
문제는 기본 철학이 다르기 때문에 기존의 물리학 용어를 사용하여 순환 법칙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존의 개념에서는 질량과 에너지는 상호 전환되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들의 양이지만, 순환 법칙에서는 질량과 에너지는 상호 전환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공존체로서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지만, 오히려 더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용어로 설명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개념의 수정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1. 빛은 왜 이중성을 가질까?
1) 빛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교대로 반복한다.
입자성만 갖고 있는 빛이 있거나 파동성만 갖고 있는 빛이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입자와 파동이 동시에 언제나 함께 일정량으로 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빛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교대로 반복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2) 빛은 수축과 팽창을 교대로 반복한다.
한 물체가 입자성과 파동성을 교대로 반복한다는 것은 그 물체가 수축과 팽창을 교대로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빛은 수축할 때 작아지며 입자성을 갖게 되고, 팽창할 때 커지며 파동성을 갖게 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빛의 진동수는 빛이 수축과 팽창을 교대로 반복하는 횟수로 보아야 합니다.
3) 공간은 완전한 탄성을 갖고 있다.
빛은 팽창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팽창하는 자신을 수축시킬 수 있는 힘도 갖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팽창하는 빛을 수축시키는 힘은 빛의 팽창력에 대한 공간의 반작용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빛과 공간 사이에서 작용과 반작용이 교대로 반복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용과 반작용의 반복이 빛의 진동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빛이 공간 속에서 힘을 잃지 않고 오랫동안 빠르게 진동할 수 있다는 것은 공간이 빛으로부터 받은 힘을 멀리 전파시키지 않고 빛에게 완전히 돌려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공간이 완전한 탄성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절대 공간에 완전한 탄성이 있다는 철학을 수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주 공간은 상대 공간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주 공간에는 완정한 탄성을 갖고 있는 미확인 물질이 가득 차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가득 차지 않은 상태에서는 완전한 탄성이 생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미확인 물질은 어떤 존재이기에 완전한 탄성을 가질 수 있을까?
4) 공간은 씨(ssi)들로 가득 차 있다.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중력의 세기는 지표에 근접할수록 커지고 멀어질수록 작아지므로, 공간에 가득 차 있는 미확인 물질의 밀도는 지표에 근접할수록 커지고 멀어질수록 작아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간에 가득 차 있는 미확인 물질의 밀도가 변한다는 것은 '미확인 물질은 수축 팽창이 가능한 작은 시스템들의 집합'이라는 뜻입니다. 이 시스템을 '씨(ssi)'라고 이름할 때, 공간은 씨들로 가득 차 있고, 씨는 자연계에서 더 이상 붕괴되지 않는 가장 작은 시스템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5) 공간을 압축시키면 물체가 생긴다.
씨가 수축 팽창한다는 것은 씨와 일반 물질을 서로 다른 존재로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밀도에 차이가 있을 뿐, 동일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주 공간을 압축시키면 씨들이 압축되면서 물체가 생성되고, 물체가 붕괴되면 씨들이 나온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주 공간에 있는 모든 물체들은 씨들이 과포화 상태에서 생긴 결정체로 볼 수 있습니다.
6) 씨는 질량과 에너지를 갖고 있다.
우주 공간을 압축시키면 씨들이 압축되면서 물체가 생긴다는 것은 씨 속에 질량과 에너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씨들이 과포화 상태로 되면, 씨 속에 있는 에너지의 일부가 질량으로 전환되면서, 씨들이 서로 결합되며 새로운 시스템을 형성하기 때문에 물체가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축되었던 씨가 팽창하는 까닭은 씨 속에 있는 질량의 일부가 에너지로 전환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씨가 갖고 있는 질량과 에너지가 상호 전환됨으로써, 씨는 수축과 팽창을 교대로 반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축과 팽창을 교대로 반복하는 모든 존재는 질량과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도 질량과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씨가 질량과 에너지를 갖고 공간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질량과 에너지는 불리될 수 없는 공존체로서 질량이 있는 곳에 에너지가 있고 에너지가 있는 곳에 질량이 있다는 뜻입니다.
7) 씨는 열린계이면서도 단힌계의 기능을 갖고 있다.
태양계와 원자들이 열린계 이듯이 씨도 열린계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씨 속에서 질량과 에너지가 상호 전환된다는 것은 씨는 닫힌계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태양계와 원자들은 붕괴되어 씨로 될 수 있지만, 씨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가장 큰 힘에 의하여 물체가 붕괴될 때 형성되었으므로 더 이상 붕괴될 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씨는 절대 공간의 크기만큼 확대될 수 있기 때문에, 우주 공간은 팽창된 씨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는 열린계이면서도 단힌계의 기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팽창되어 우주 공간에 있는 씨를 편의상 '공간씨'라고 이름하겠습니다.
8) 씨는 우주의 기본 단위이다.
씨는 자연계에서 더 이상 붕괴될 수 없는 가장 작은 시스템으로서 물체의 기본 단위이자 우주의 기본 단위로 볼 수 있습니다. 물체 속에 수축되어 있던 씨들이 폭발하면 빛이 되고, 빛은 힘을 잃고 정지하면 공간씨로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9) 씨는 수축할 때 우회전하고, 팽창할 때 좌회전한다.
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씨의 회전성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순환 법칙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운동 법칙은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에, 실험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거시세계의 운동 법칙을 씨에 적용하여도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씨는 수축할 때 우회전하고 팽창할 때 좌회전한다." 이 확신은 도선을 흐르는 자유 전자의 좌회전성에 기초하여 얻어진 것이지만, 모든 시스템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전자․원자․은하계 등은 수축할 때 우회전하고 팽창할 때 좌회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확신에 잘못이 있다면, 순환 법칙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씨를 수축 팽창시키는 기본 힘들은 무엇일까
*현대 물리학의 발견
I. 의미
과거 300여 년간 서구문명은 뉴톤의 기계론적 결정론적 세계관과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물질문명을 발전시켜 왔고, 흔히 대중 요법으로 특징지어지는 서양의학도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명 등을 통하여 수많은 생명들을 구하면서 전 인류의 마음속에 그 위대성은 뿌리깊게 자리잡았다. 이 결과, 동양적 가치관, 동양사상, 동양의학 등은 경시되었고, 우리의 전래 사상과 가치 등은 미신 혹은 비과학적,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해 왔다. 옛부터 전해지던 현자들의 가르침과 구도자들의 체험 등도 재현성과 객관성을 요구하는 현대의 과학적 방법론 하에서 아무런 의미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서양 물질문명의 만연으로 인한 기계론적 이분법적 사고는 20세기 초부터 현대물리학에 의하여 의문이 제기되었고 이후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뉴톤-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사고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부분들이 질서정연하게 합쳐져서 전체를 이루고 있고 따라서 부분 부분에 대한 이해는 바로 전체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극대(極大)의 세계를 논하는 상대성 이론과 극미(極微)의 세계를 파헤치는 양자역학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의 논리와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기계론적, 결정론적 사고로는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동양의 현자들이 이미 수천년전 직관에 의하여 알아차린 것과 같이 주관과 객관, 부분과 전체, 존재와 비존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요지경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세계적인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과 신경생리학자 칼 프리브램 등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는 홀로그램 우주론에 따르면 우리가 인지하는 물질세계는 실재하지 않고 단지 우리 두뇌를 통하여 보여지는 홀로그램적 영상 즉 일종의 환영(maya)이라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발견에 의하여 촉발된 뉴톤,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에 대한 반성은 서구적 가치 전반에 걸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양(陽)적인 가치를 선호하고 융합보다는 자기주장, 종합보다는 분석, 협동보다는 경쟁, 직관적 지혜보다는 합리적 지식을 선호해 온 서구문명이 우리 인류를 과연 바르게 이끌어 왔는가? 물질주도의 사회발전을 위한다는 이름하에 인간의 이기심, 경쟁심만 자극하여 세계를 아귀다툼의 세상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만약, 우리가 인지하는 물질세계가 데이비드 봄, 프리브램 혹은 석가모니의 말씀처럼 공(空)이며 모두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이러한 세계를 만든 창조주의 의도는 무엇일까? 물질문명의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물질세계라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경험을 통하여 배우고 깨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성장시킬 수 있도록 창조주께서 하나의 가상 무대를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가상무대에서 영혼의 성장을 위한 수업을 제대로 받고 있는가? 아니면 그 가상무대를 진짜인줄 착각하고 이웃을 원수삼아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않는가? 이런 점에서 먼저 현대 물리학이 과연 무엇을 발견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II.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
1. 고전물리학에 대한 이해
(1) 고전물리학의 성립과 그 의미
O 17세기 뉴턴에 의하여 성립되었고 절대공간, 절대시간, 인과율(因果律), 질량적 물질 등 의 개념에 의하여 설명됨.
"뉴턴식 우주의 무대는 고전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3차원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언제 나 정지해 있고 변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이었다. 절대공간은 그 자체의 본성에 있어서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하며 정지의 상태를 계속한다. 물리 적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변화는 시간이라고 불리는 별개의 차원에 의하여 묘사되었는데, 그것 또한 물질적 세계와 아무런 관계없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로 일정 하게 흘러가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프리쵸프 카프라, p.69)"
○ 라플라스(P. S. Laplace)가 조수의 흐름, 유성, 위성, 혜성들의 운동들을 중력과 관련하 여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고전물리학은 그 절정기에 도달하였음.
○ 이러한 고전물리학의 융성은 "기계론적, 결정론적 사고"를 형성하게 됨.
- 부분의 집합이 전체라는 관점에서 한 부분 부분을 이해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고를 하게 됨.
-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을 기계적 합리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있으며 언젠가 인 간은 전지자(全知者)의 위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을 갖게 됨.
(2) 데카르트 및 칸트 철학과의 조화
○ 데카르트(Rene Descartes)의 철학 (2분법적 사고)
- 자연을 마음과 물질의 2개로 분할하고, 물질은 죽은 것으로 보고 물질세계는 하나 의 거대한 기계로서 제각기 다른 객체들이 조립된 군집으로 간주.
- 인간을 몸과 마음의 전체적인 유기체로서 보지 않고 '인간은 곧 마음이다' 라는
사고를 함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2. 현대 물리학의 발견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하이젠 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 (양자역학) 등으로 대변되며 전일적(全一的) 접근
(1) 상대성 원리
○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관찰자에 따라서 달라지고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게 공통되는 절대시간이란 없음.
○ 물체를 담고 있는 각각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 즉 절대공간은 존재하지 않음.
==>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즉, 공간과 시간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간 연속체를 형성한다. 따라서, 시간에 관한 언급 없이 공간을 이야기할 수 없고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시공간이라는 개념의 등장)
"만일 관찰자들이 관찰되는 사건에 대하여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그들은 그 사건들을 시간상으로 다르게 볼 것이다. . . .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정은 그 절대적 의미를 상실한다."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의 분리 불가능)
○ 질량이라는 것은 에너지의 한 형태에 불과함 (E=mc2)
(2) 양자론
○ "원자는 딱딱하고 견고한 입자들이 아니라 극도로 미세한 입자인 전자들이 전기력에 의해 원자핵에 묶여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광대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음.
(원자핵과 원자의 상대적 크기는 축구장과 야구공으로 비유될 수 있음. 즉 원자핵의 크기는 원자의 10만분의 1에 불과)
==> 우리 눈에 딱딱해 보이는 어떤 물질(예: 쇳덩어리)도 실제는 텅 빈 허공과 다름없다.
○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 입자인 미립자들의 세계는 전자들이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지 만 전자는 일정한 속도와 궤도로 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법칙 없이 여기저기에 서 나타난다 (하이젠 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 즉,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들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그 입자들을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 파악할 수 없고, 존재와 비 존재 사이의 천변만화하는 에너지의 일시적 형태 혹은 에너지 장의 변화과정으로만 파악될 수 있음.
"원자 이하 수준의 소립자들은 개별적인 실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으며, 여러 가지 관찰과 측정과정에서의 상호관련성 또는 상호관계로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 . . 양자론에서 우리는 어떠한 물질도 찾아 낼 수 없다 (카프라, 생명의 그물, p.50)"
==>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 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를 포함한다.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고리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루며, 어떤 대상물의 성질도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 객관적 존재의 문제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로 연결되고, 주관과 객관은 분리될 수 없음. 다시 말해서, 무엇이 있고 없고는 주관적으로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이고 "실제로 있다 혹은 없다"를 논할 수는 없다는 것임.
==> 삶과 죽음의 차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재하는가?
○ 양자장은 주어진 공간과 시간상의 특정 위치를 규정할 수 없다.
==> 양자의 "비국소성 (nonlocality)"
A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서로 에너지 교환없이 B라는 지역의 사건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
==> 전체가 상호관련성을 유지
"공간적 혹은 시간적으로 분리된 물체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
다시 말해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물체조차도 시공간의 제한을 초월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
"세상은 전체가 상호관련을 맺고 있으며 모든 것이 철저히 종속적이다. 세상은 각 부분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전체가 상호 관련성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 그 자체가 가장 근본적이며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상태 (물리학자 Victor Mansfield)"
○ 빛과 아원자의 입자와 파동의 양면성.
- 빛은 우리의 이해 영역을 벗어나 파장으로서의 특징과 입자로서의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 즉, 빛의 간섭현상은 빛이 파장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빛의 광전효과 는 빛이 입자라는 것을 의미함. 이는 빛이 어떻게 하여 아주 작은 지역에 국한된 실 체 즉 입자이면서 동시에 넓은 공간에 퍼져있는 파동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 함.
** 광전효과 (光電效果): 자외선의 빛을 어떤 물체의 표면에 쏘면 그 표면에서 전자를 쫓아내 버리는 효과로서 이는 빛이 입자 즉 광자(光子)라는 것을 의미함.
- 이러한 이중적 성질은 비단 빛뿐만 아니라 모든 아원자 입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한 때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감마선, 전파, X선 등이 파동에서 입자로 또 그 반대로 변신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것을 양자(quanta)라고 하며 많은 물리학 자들은 그것이 우주의 근본질료라고 생각함.
(3) 데이비드 봄 (David Bohm)의 홀로그램 우주론
○ 런던대학의 세계적인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스탠포드대학의 저 명한 신경생리학자 칼 프리브램(Karl Pribram) 등과 더불어 우리의 우주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시공을 초월한 어떠한 우주의 실재에서 투사되는 유령 같은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홀로그램 우주론을 주장함.
○ 많은 다양한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마이클 텔보트, "홀로그램우주" 참조) 양자역학과 관련된 다음의 두 가지의 발견들은 홀로그램 우주론을 뒷받침함.
가. 전자는 '크기가 없다' ('크기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라는 우리의 상식과 배치).
나. 양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이다.
- 우리의 일상 속의 감각적인 현실이 사실은 마치 홀로그램과도 같은 일종의 환영이 다. 그 이면에는 존재의 더 깊은 차원, 즉 광대하고 더 본질적인 차원의 현실이 존재하여 마치 홀로그램 필름이 홀로그램 입체상을 만들어내듯이 그것이 모든 사물과 물리적 세계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 이 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감추어진 (implicate) 혹은 접힌(enfolded)질서'이고 우리의 인식차원을 '드러난(explicate) 혹 은 펼쳐진(unfolded) 질서'라고 할 때, 우주의 모든 현상들의 나타남은 두 질서간의 무수한 접힘과 펼쳐짐의 결과이다.
- 우리가 허공 혹은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무한한 에너지로 충만한 에너지 의 대양이고, 물질은 공간의 일부분일 뿐이다. 우주는 이 에너지의 우주적 대양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우주는 광대한 에너지 대양 표면 위의 한 파문에 불과 하다. 이 파문은 비교적 자생적이어서 안정적으로 되풀이하여 재현되는, 다른 것으로부터 구분하여 인식할 수 있는 그림자를 현상계라는 3차원의 드러난 질서 속에 비추어낸다.
** 현대물리학이 고전물리학을 온전히 폐기시킨 것은 아님. 뉴턴적 기계론은 원자의 구성단위가 많은 물질과 광속에 비하여 매우 느린 속도의 세계에서는 아직도 유효함.
III. 동양사상으로 접근 (논리와 추론의 부 적절성)
- 원자의 세계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상의 논리와 언어가 원자와 이원자의 실체를 기술하는데 전적으로 부적절함을 깨달음.
1. 빛과 아원자 입자들의 이중적 성질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틀 안에서는 이해될 수 없음.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이 지성(知性)으로 분석될 때마다 그것은 불합리하거나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이점을 동양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인지해 왔지만 과학에서 는 최근에야 이 문제를 발견하였다." (프리쵸프 카프라, p. 64)
- 동양사상: 동방의 현자들은 실재가 일상언어를 초월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논리와 통상개념을 초월하는데 두려워하지 않았음.
힌두교: 신화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역설적인 면을 우회
불교와 도교: 역설적인 면을 오히려 강조
(예)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은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극단적인 난문(難文)
"우리는 수천 겁 이전에 헤어졌지만
우리는 잠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소.
우리는 하루종일 얼굴을 마주 대고 있지만
우리는 만난 적이 없소."
2. 양자의 다른 특징들
- 관측하는 동안에 관측자의 정신상태가 관측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의 분리성이 의심받게 됨.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재료는 의식이다 (Sir Arthur Eddington)"
- 양자장의 비 국소성(non-locality)
주어진 공간과 시간상의 특정 위치를 규정할 수 없다
○ 이상의 발견 즉 우주의 근본적 전일성(全一性)은 바로 동양적 세계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음. 즉,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 실재의 다양한 현현(顯現)이기 때문에 그들은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이라는 것. 궁극적 실재로서 힌두교에서는 범(梵, 브라만), 불교에서는 법신(法身) 그리고 도교에서는 도(道)를 이야기 함.
일상적 생활에서 우리는 이 만물의 통일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계를 개별적 사물들과 사건들로 나누는데, 이는 우리가 환상(maya)의 주술에 걸려있는 마음에서 생겨난 무명 (無明, avidya) 때문이라고 힌도교와 불교에서는 이야기함. 명상을 통하여 마음을 집중하고 가라앉혀 재조명하는 상태 즉 사마디(samadhi, 三昧)상태에서는 우주의 기본적 통일성을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침.
3. 홀로그램적 관점과 동양사상
○ 불교에서의 색(色)과 공(空)
색은 눈에 보이는 대상의 현실이고, 공은 감추어진 질서와 마찬가지로 우주 삼라만상의 탄생지이며, 그로부터 '무한한 흐름'이 나온다. 그러나 오직 공만이 실재다. 객관적 모든 형상은 환영이며 이 두 질서 사이의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하여 존재한다.
"色不異空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양심경)"
○ 힌두교
실재의 감추어진 차원을 브라만이라 부르는데, 브라만은 형상은 없지만 눈에 드러난 현상계의 모든 형상물의 근원이며 모든 형상들은 그로부터 비롯되어 나타나고 다시 그 속으로 숨어드는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다. 만물이 불가침의 전체성으로부터 펼쳐져 나오기 때문에 현상계 또한 이음매 없는 전체이고, '분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게 훼방하는 것이 마야(maya)이다.
** 이 글은 다음의 책들을 주로 참조하여 쓰여졌음.
1. 프리쵸프 카프라 (Fritjof Capra),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The Tao of Physics), 이성범, 김용정 옮김, 1989, 범양사
2. 프리쵸프 카프라 (Fritjof Capra), 생명의 그물 (The Web of Life), 김용정, 김동 광 옮김, 1998, 범양사
3. 마이클 텔보트 (Michael Talbot), 홀로그램우주 (Holographic Universe), 이균형옮 김, 1999, 정신세계사
4. 이경숙, 마음의 고향, 1999, 정신세계사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최근 우리들은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의 사유방법이 동양의 사유방법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양의 고전 물리학적 사고방법이나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방법은 인간과 자연, 물질과 정신, 주관과 객관을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로 전제하고 나 의 주관이 별개의 물질적 대상을 연구하고 인식하는 것으로 여겨 왔다. 사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나와 대상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는 보다 넓은 철학적 인식의 문제가 논의 돼야 하기 때문에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단지 현대 물리학이 바라보는 우주론이나 물질관이 동양의 종교나 철학과 사유방법에 있어서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물질과 공간은 상호의존적 통일체
먼저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허공이라는 공간적 장(場,field)과 공간에 존재하는 물질(에너지)과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장과 물질은 둘인가 하나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고도의 방정식이 요구되는 현대 물리학을 일상언어로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이 따르겠지만, 앞으로 논의될 이야기들은 현대 물리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우선 상대성 이론에서 물체와 공간은 더 이상 분리시킬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무거운 물체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나 장이 형성될 것이고, 이 장은 그 자체가 물체를 둘러싸는 공간의 만곡(curvature)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물체는 그것의 중력장과 분리될 수 없고, 중력장은 굽어진 공간과 분리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물질과 공간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상호 의존적인 하나의 통일체로 보게 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상대성이론으로부터 물체란 강하게 응축된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곧 물질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물질과 에너지를 질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질량과 에너지의 구분은 질적인 구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상당한 부분은 물질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상당히 적은 양이긴 하지만 그 입자를 둘러싸고 있는 장도 또한 에너지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물질은 에너지가 상당히 많이 모인 곳이고, 장은 에너지가 비교적 적게 모인 곳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물질과 장의 차이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양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물질과 장이 질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우리는 물질과 장이 명백하게 구분되는 표면을 생각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기장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중되는데 '도(道)의 물리학'(필자가 번역한 '현대 물학과 동양사상'-Tao of Physics,범양사 출간)의 저자인 카프라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양자 전기역학의 두드러진 새로운 특징은 두 개념의 결합에 있다. 즉 전자기장의 개념과 전자기파가 입자적 측면으로 나타나는 광자(photon)의 개념과의 조화가 그것이다. 또한 광자는 전자기파이고 이 파는 진동하는 장이기 때문에 광자는 전기장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 할 것이다. 따라서 '양자장'(quantum field)은 곧 양자 내지 입자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장인 것이다."
말하자면 전자와 같은 물질적인 입자도 중력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와일(Herman Weyle)이라는 물리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질에 관한 장이론에 따르면, 전자와 같은 물질의 입자는, 비교적 커다란 장 에너지가(매우 작은 공간에 응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당한 정도의 힘을 가진 전기장 속의 작은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나머지의 장과 명백히 부분될 수 없는 그런 에너지의 덩어리는 호수의 표면을 가로지르는 물결처럼 빈 공간을 퍼져 나간다. 따라서 전자를 이루는 실체가 언제나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즉 물과 물결이 구분될 수 없는 것처럼." 현대 물리학의 장 이론은 양자나 전자와 같은 아원자적(亞原子的)인 입자뿐만 아니라 이러한 입자들 사이의 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수정하게 했다. 장은 공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연속체(continuum)이고, 입자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연속적인 '알맹이 모양의'구조를 지닌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되는 두 개념은 결국 동일한 실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 하나의 실체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정 반대되는 두 개념은 언제나 역동적인 방법으로 일어난다. 즉 물질의 두 측면은 끊임없이 서로 다른 것(연속체와 불연속)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와 화동성은 서로 불리 될 수 없다
월터 티링은 현대 물리학서 장에 대한 이상의 진술들을 다음과 같이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현대 이론 물리학은 ... 물질의 본질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다른 맥락에서 생각하게 했다. 즉 현대 이론 물리학은 볼 수 있는 입자에서 숨겨진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장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물질이 현존한다는 것은 그 장소에서의 완전한 장의 상태를 흐트러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이론은 입자들이 한 알맹이의 분리된 물질이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우주 그물(cosmic web)속에서 상호연결(interconnections) 내지 기능적 형태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원자적인 세계에서의 입자들은 단지 매우 빨리 돌며 움직인다는 점에서 역동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입자들 자체가 하나의 과정들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의 존재와 그것의 활동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것들은 다만 동일한 시․공적(space-time)실체의 다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 물질적인 대상과 그것의 환경(時空) 사이의 상호 연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은 양자장 이론에서 근본적인 원리가 됐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관은 본래 동양의 세계관에서 더욱 근본적인 원리였다. 물론 동양 사상가들의 직관적인 세계관이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장)이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물리학자들이 양자 장이론을 통해서 아원자적인 세계를 설명하는 가운데 내재하는 상보적(相補的)인 세계관은 암묵리에 인간과 자연, 물질과 정신을 동일한 실체의 양면으로 보려는 동양의 직관적 세계관과 유사한 논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카프라는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다.
"장이라는 개념이 나옴으로 해서, 물리학자들은 다양한 장들을 모든 물리적 현상을 통합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하나의 장으로 통일시키려고 시도해 왔다. 특히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통일장을 탐구하는 데 그의 여생을 보냈다. 힌두교의 범(梵.Brahman), 불교의 법(法.Dhsrma Kaya), 도교의 도(道,Tao) 등은 아마도 물리학에서 연구하는 현상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현
상들의 근원적인 통일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상과 같은 물리학자들의 주장을 동양사상의 유기적인 역동적 세계상과 비교해 보기 위해서 간략하게 동양철학에 대해 살펴보자.
만물은 음과 양이 합한 기를 바탕으로 생성
이미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중국사상은 유교, 불교, 도교의 세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짧은 지면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충 성리학을 중심으로 노장사상 내지 불교와 연관시켜 요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노자는 그의 '도덕경'에서 "도(道)는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고, 이는 삼(三)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고 했다. 이것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무위지도(無爲之道)에서 만물이 생성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도는 자연 본래의 근원적인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도는 사람과 멀지 않은 것이니 사람이 도를 행한다 해도 사람을 멀리 하면 가히 도를 행한다 할 수 없다"고 해 도가 곧 인륜의 질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옛 중국의 철인들은 자연의 질서와 인륜의 질서를 모두 도라고 불렀던 것이다.
중국 철학에서 많이 거론되는 허(虛) 이(理) 기(氣) 성(性) 심(心)등과 같은 말들은 모두 도라는 말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중국의 성리학자 장횡거(張橫渠)는 태허(太虛)와 기로 우주를 설명했다. 즉 태허의 기가 모여서 만물이 되고 만물이 흩어져서 태허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 곧 기의 장이며 따라서 기가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을 알면 생성변화(神化)와 하늘의 법칙(性令)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기는 본래 허한 것이어서 형체가 없으며 안과 밖이 없다. 형체가 있는 삼라만상이나 형체가 없는 허공이나 모두 기의 이합집산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도가 일(氣)을 낳고, 일이 이(陰陽)를 낳고, 이가 삼(陰陽의 화합체)를 낳고 삼이 만물을 낳는다"는 것은 결국 '만물은 음과 양이 화합한 기를 바탕으로 해 생겨난 것'을 의미한다.
노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는 영구 불변한 도가 아니고, 이름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다운 실재의 이름이 아니며, 무 는 천지의 시초요, 유는 만물의 근원"이라고 했다. 여기서 무는 결코 허무주의적인 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무와 유는 한 근원에서 나온 것으로서 이름만 다를 뿐이고, 자연의 유현한 신비적 세계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의탁된 언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장횡거가 노자의 무를 비판하고 그의 허에다 태자를 붙여 태허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도 무가 허무의 무로 오해될 우려를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좀더 깊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성리대전' 정몽(正夢) 태화편(太和篇)에 보면 "태허가 있음으로써 천(天)이라는 이름이 있고, 기화(氣化)가 있음으로써 도라는 이름이 있고, 허와 기가 합함으로써 성(性)이라는 이름이 있으며, 성과 지각이 합함으로써 심(心)이라는 이름이 있다.(由太虛有天之名, 由氣化有道之名, 合虛與氣有性之名, 合性與知覺有心地名)"는 언명이 있는데, 여기서 태허가 천 도 성 심의 총체적 근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동양사상의 태허 태극 성 도 무 기 심 등은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음양의 관계는 별개의 둘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동양철학의 우주론과 인성론이 서양의 현대 물리학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통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몇 편의 논문을 오래 전에 발표한 바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논문들 가운데 몇군데를 추려서 지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사가인 조셉 니담은 '중국과학사'에서 "감촉할 수 있는 물질로 응축된 기(氣)는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단순한 개별적인 것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다른 대상들과 함께 서로 작용을 주고받는 개별적인 대상인 바 결국에는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 기본적인 힘의 율동적인 교체에 의존하는 파동이나 진동의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이것은 모든 만물이 동일한 유기적 상호 작용에 의해서 생성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역'의 첫머리에 "태극(太極)이 양의(兩儀, 즉 음양)을 낳는다"고 했는데, 노자의 경우는 도가 기를 통해 음양을 낳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음과 양은 음기(陰氣)와 양기(陽氣)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음양의 관계는 그것이 결코 별개의 둘이 아니고 음속에 양이 있고 양속에 음이 있으며 음이 극한에 달하면 양이 되고 양이 극한에 달하면 음이 되는 동일자의 양면성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
'태극도설'의 창시자인 주렴계(周濂溪)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 말하고 "태극이 동(動)하여 양을 낳고 정(靜)하여 음을 낳는다"고 했다. '주역'에는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해 음양의 상호작용이 곧 도라고 했다.
이상과 같은 중국사상의 세계관은 앞에서 설명한 현대 물리학의 세계상과 얼마나 유사성을 갖고 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의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의 성립에 큰 영향을 준 불교의 화엄사상(華嚴思想)을 이해함으로써 더욱 명백하게 설명될 수 있다.
첨단과학이론 초월하는 불교의 세계관
'화엄경'에 비로자나불(佛, Vairocana)이라는 일종의 법신불(法身佛)의 이름이 나온다. 이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본질을 의미하며 세계 모든 현상들은 바로 그 비로자나불의 화신(化身)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 법신불은 모든 현상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시시각각으로 유동, 변화하는 연기(緣起)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로자나불은 결코 어떤 고정적인 불변의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존재가 생겨나고 모든 현상들이 변화하는 한가운데서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원동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수억만의 사물들과 현상으로 변모하고 유동하는 산 생명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화엄경'에 여래성기(如來性起)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곧 비로자나 법신불과 관계 있는 말로서, 이 세계의 모든 생성 변화가 바로 이 여래, 즉 법신불의 성품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성기(性起)라 하는 것이다.
'화엄경'속에는 가느 곳마다 사물과 사물이 서로 대응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국토가 하나의 국토에 들어가고, 하나의 국토가 모든 국토에 들어간다(一切國土入一國土, 一國土入一切國土). 온 세계가 한 터럭 속에 들어가고 한 터럭이 온 세계에 들어가며, 일체중생의 몸이 한 몸 속에 들어가고 한 몸이 일체 중생의 몸 속에 들어가며, 말할 수 없는 겁(劫)이 한 순간의 생각에 들어가고 한 순간의 생각이 말할 수 없는 겁에 들어가며,...모든 부처님 법이 한 법에 들어가고 한 법이 모든 부처님 법에 들어가며 말할 수 없는 처소가 한 처소에 들어가고 한 처소가 말할 수 없는 처소에 들어가며,...모든 생각이 한 생각에 들어가고 한생각이 모든 생각에 들어가며, 모든 음성이 한 음성에 들어가고 한 음성이 모든 음성에 들어가며, 일체 삼세(一切三世)가 일세(一世)에 들어가고 일세가 일체 삼세에 들어가니라." 이러한 상호 관입의 사상은 오늘날 첨단과학의 기억소자(칩)나 분자 생물학에서 하나의 분자가 수십 만의 분자 내지 정보를 내포한다는 이론을 초월하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티끌 속에 온 세계가 다 들어가며 온 세계에 한 티끌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온 우주의 사사만물들이 서로 의존돼 상호관통하며 일종의 우주망을 짜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불교는 현상계를 공으로 묘사 하기도 한다. 현대 물리학의 아원자적 세계처럼, 불교에서 보는 현상계는 끊임없는 생명의 세계다. 무상(無常)한 세계에서는 어떤 영원한 동일성도 갖지 않는다. 이것은 특히 어떤 물질적 실체의 존재도 부정하고 각기 다른 연속적인 경험을 통해 아무 것도 상주(常住)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이른바 '제행무상 제법무아'(諸行無常 諸法無我)를 체득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종종 이 세계를 환상으로 비유하고 개별적인 것들을 파도와 물의 현상으로 비유한다. 즉 우리는 물이 위 아래로 출렁이는 것을 보면서 봉우리가 된 파도를 마치 물과 독립된 실체로 믿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불교와 과학의 물질관 비교
Ⅰ. 序論
과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전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 혹은 철학 이외의 학문의 총칭이나 자연과학'을 말한다. 즉 과학이란 인간의 눈에 비친 가장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을 발견하기 위한 지식 체계이며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이 종교의 진리와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현대는 과학의 시대라고 한다. 또한 기계문명의 시대라고도 한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행위에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피해도 주었다. 그러나 피해보다는 도움을 더 많이 주어 세상은 발전되어 왔다. 과학의 법칙들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문명의 발전의 속도가 느렸으나, 과학의 법칙들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생활은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갔다. 신을 믿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는 이제 신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의 역할도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즉 종교의 자리를 과학이 대신함으로써 종교는 한계에 이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종교의 역할이 과학에 뒤진다 하더라도 종교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려고 한다. 즉 과학의 발달이 결코 인간 정신을 침범하여 그것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의 사상은 현대의 서구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이 심상치 않게 들리며, 이는 과학이 불교 사상에 합치되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과학의 발달이 곧 기계문명의 발달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거의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등식 관계만을 가지고 본다면 전혀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즉 세상의 모든 법칙이 곧 기계문명에 의해 지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의 자연 환경을 본다면, 이미 기계문명에 의해 파괴된 것은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과학을 맹신하고 있는가? 많은 과학자는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사실 많은 사람들은 과학을 맹신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미리 겁부터 먹고 피하는 것과 같다. 이 논문에서는 과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에서 물질관에 중점을 둘 것이다. 그리고 역량이 된다면 세계관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현대 물리학에서 물질의 단위를 어느 정도로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불교에서 물질의 단위는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며 상호간의 단위를 비교함으로써 현대 과학과 불교의 진리(법칙)가 어느 정도 일치되는가에 중점을 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필자는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해서 비교해 갈 것이다. 단위를 비교하는 데 있어서 역량이 되는 한 서로의 크기를 비교하고 개념도 정리해 보고자 한다.
Ⅱ. 佛敎의 物質觀
1. 物質觀
불교에서는 몸을 나타내거나 어떤 물질을 나타낼 때 모두 사대(四大)로부터 출생하는 것이므로 사대는 물질의 바탕이 된다고 한다. 즉 《아비달마품유족론(阿臻達磨品類足論)》에서는 色云何 謂諸所有色 一切四大種 及四大種所造色 四大種者 謂地界水界火界風界 所造色者 謂眼根耳根鼻根舌根身根色聲香味 所觸一分2)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여기에 따르면 물질은 일체의 사대종(四大種)에 의하여 만들어지며, 사대종이란 것은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계(四界)로서 오근(五根)과 오경(五境)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물질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대의 성질을 설명하고 있는데,
라고 하여 지계(地界)는 견고한 성질을 말하며, 수계(水界)는 습기(濕氣)의 성질을 말하고, 화계(火界)는 온난한 성질을 말하며, 풍계(風界)는 경(詛) 등의 동성(動性)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물질에 사대의 성질이 있으면 물질 자체가 구성되지 못하고 분산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비바사론(臻婆沙論)》4)에서는 사대의 성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問:어떻게 이 사대종이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答:자상의 작업이 일체의 취집물 가운데서 모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견성의 취집 가운데 지계의 자상으로 나타남을 얻을 수 있으므로 그 의가 잘 이루어져 있게 된다. 이러한 물질의 취집 가운데서 만약 수계 없다고 한다면 금은석 등이 녹는 것을 못하고 또 금은석 등은 분산되어 버린다. 또 만약 화계가 없다고 한다면 석등이 서로 격돌할 때 불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며 물체가 능히 성숙하지 못하고 결국 부패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만약 풍계가 없으면 물질에 동요도 없게 되며 증장할 수 없게 된다.
습성의 취집 가운데 수계의 자상의나타남을 얻을 수 있으므로 그 의가 잘 이루어져 있게 된다. 이러한 습성의 집합으로 물질의 취집 가운데서 만약 지대가 없다고 한다면 엄하게 냉한할 때 얼음이 얼지 못하고 배 등이 뜨지 못하게 된다. 또 만약 화계가 없다고 한다. 면 따뜻한 기운이 없게 되며 물이 부패하고 만다. 그리고 습성의 취집 가운데 만약 풍계가 없으면 물질에 동요도 없게 되며 증장할 수 없게 된다.
난성의 취집 가운데 화계의 자상이 나타남을 얻을 수 있으므로 그 의가 잘 이루어져 있게 된다. 이러한 난성의 취집 가운데 만약 지계가 없으면 등촉등의 불꽃이 회전하지 못하게 되고 물체를 지속시킬 수 없다. 수계가 없다고 한다면 화류가 불가능하게 되고 화염이 취집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만약 풍계가 없으면 물질에 동요도 없게 되며 증장할 수 없게 된다.
물질의 동요가 취집한 가운데 풍계의 자상이 나타남을 얻을 수 있으므로 그 의가 잘 이루어져 있게 된다. 이러한 동요의 취집 가운데서 만약 지계가 없다고 한다면 담장을 접촉하는 장애를 절회하지 못하며 물체를 지속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수계가 없다고 한다면 냉풍도 없어지고 동집은 자연히 분산되어 버릴 것이다. 또 만약 화계가 없다고 한다면 난풍이 없어지고 동의 집합은 부패하고 말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각각의 대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이것은 각각의 사대에 해당되는 특징과 연관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대의 특성은 인과 연이 구별되지 않고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지․수․화․풍은 존재를 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성질이다. 그것이 하나라도 부족하게 되면 존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곧 공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또 《아비달마순정리론(阿臻達磨順正理論)》에 따르면, 모든 유정(有情)의 근본사(根本事) 가운데 사대종(四大種)은 수승(殊勝)한 작용이 있으며 이러한 작용에 의하여 식(識)과 공(空)과 함께 함을 건립하고 유정의 근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대(大)라고 이름한다. 또 광혹(?惑)한 우부(愚夫)의 사건 가운데서 이 사대가 가장 수승하기 때문에 대라고 이름하며 널리 일체 색법(色法)의 의지처(依止處, 所依)가 되기 때문에 대라 하고 광(廣)이라고도 한다.5)
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사대는 모든 유정의 근본사 가운데 수승한 작용이 있고, 이러한 작용에 의하여 유정의 근본이 되며, 일체 색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에 대(大)라고 한다는 것이다. 《비바사론》과 《구사론》 등에 의하면, 이러한 바탕에서 인연을 만나면 극미(極微)․미진(微塵)․동진(銅塵)․수진(水塵)․토모진(兎
毛塵)․양모진(羊毛塵)․우모진(牛毛塵)․향유진(向遊塵)․기( )․슬( )․광맥(禾廣麥)․지절(指節)․주( )․궁(弓)․구로사(俱盧舍)․유선나(踰繕那) 등 물질의 세계를 조성한다고 한다.
2. 物質의 單位
극미는 물질 가운데 최소 단위를 말하는 것으로, 《비바사론(臻婆沙論)》에 의하면 극미는 모든 물체 가운데서 가장 미세한 물체라는 뜻에서 미세색(微細色)이라고도 이름한다. 《비바사론》 권 제136에 나와 있는 예문을 보면, 극미(極微)는 가장 미세한 물질[色]이므로 가히 단절할 수도 없고 파괴할 수도 없으며 관아(貫芽)할 수도 없다. 그리고 가히 취사(取捨)하거나 승리(乘履)하며 박체(搏 )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극미(極微)는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모나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으며 바르지도 않고 바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높고 낮은 것도 아니며 더욱 미세하게 할 수도 없고 분석할 수도 없으며 가히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후상(嗅嘗)할 수 없고 마촉(摩觸)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극미를 가장 미세한 물질[細色]이라고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에 의하여 극미가 가장 작은 물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히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더 이상 분석할 수도 없는 물질을 극미라고 한다. 이에 대해 세친(世親)도 《구사론(俱舍論)》에서 논하건대, 모든 물질을 분석하면 하나의 작은 분자[一極微]에 이르나니, 그러므로 한 작은 분자가 물질의 가장 작은 것이 된다. 그와 같이 모든 이름과 시간을 분석하면 한 글자와 찰나에 이르나니 그것이 이름과 시간의 가장 작은 것이 된다. 한 글자의 이름은 구(북)라는 이름을 말함과 같다. 또 일찰나(一刹那)의 양은 뭇 인연으로 화합된 법이 그 자체를 얻는 순간이며 혹은 움직이는 법이 진행하고 있는 도수의 한 가장 작은 분자이다. 힘이 센 사람이 빨리 한번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이 육십오찰나가 된다고 하니, 그와 같은 것을 일찰나의 정도라고 말한다.7)
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극미(極微)와 관련시켜 찰나(刹那)라는 시간을 설명하고 있다. 시간은 법에 의하여 정해진다는 말과 같이 극소의 물질인 극미에 의하여 극단의 시간인 찰나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색법(色法)과 시간은 불가 분리한 것으로서 이에 준하여 생각하면 불교적인 시간론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8) 그리고 물질의 대소 단위를 나타내는 말은 《구사론》과 《비바사론》에 의하면,
라고 하여 설명하고 있다. 《구사론(俱舍論)》과 《대비바사론(大臻婆沙論)》의 설명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극미(極微)가 맨 처음이 되고 지절(指節)이 맨 나중이 되는데 뒤와 뒤의 모든 것이 칠 배로 증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일곱 개의 극미가 하나의 미량이 되며 미량의 일곱이 하나의 금진(金塵, 銅塵)이 되
며, 일곱의 금진이 하나의 수진(水塵)의 양이 되며, 그렇게 하여 일곱의 슬( )이 하나의 광맥(禾廣麥)이 되며 일곱의 광맥이 손가락 하나의 한마디가 된다. 그리고 스무네 개의 손마디는 일주(一 )가 되며 사주는 일궁이 된다. 또한 오백궁(五百弓)은 일구로사(一俱盧舍)가 되며, 팔구로사(八俱盧舍)는 일유선나(一踰繕那)가 된다.
1) 극미(極微)
극미는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더 이상 분쇄하거나 파괴할 수 없으며 버리거나 만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미는 눈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이며 만약 극미를 더 분쇄한다고 한다면 곧 공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 이와 같이 볼 때 극미는 공과 인접한 최소 단위를 말하며 이는 부처님과 보살의 혜안(慧眼)만이 관찰할 수 있는 단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비바사론》에서는 묘음 존자와 아비달마 논사들의 말을 싣고 있다. 즉 묘음 존자는 "극미는 마땅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혜안의 경계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아비달마 논사는 "극미는 마땅히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안과 천안으로는 능히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1)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두 가지 견해의 말은 결국 하나의 말로 풀이된다. 즉 육안과 천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지만 혜안으로는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체는 여러 인연이 집합한 것이기 때문에 변천하고 파괴되는 물체의 형상과는 달리 만약 극미가 파괴되면 공의 상태가 되어 버리고마는 물질 자체의 최소 단위이다. 그러나 극미가 존재할 때에는 7개의 극미가 취합하여 존재한다고 한다. 즉 어떤 일극미를 중심으로 사방상하의 육방에 6개의 극미가 위요(圍繞)하여 일단이 되어 있는 것이니, 이것을 육방 중심 칠극미라고 한다. 그렇다면 극미의 크기는 어느 정도가 될까? 매우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크기의 단위로 환산한다는 것이 근사치에 가까울지 모르겠지만 일주를 기준으로 환산해 보기로 하겠다. 즉 일주는 1척 8촌이라는 근거로 환산해 보면 쉬우리라 생각한다. 오늘날의 단위가 1척이 약 30cm 정도 되니까 그것을 기준으로 하면 일주는 약 54cm가 된다. 따라서 역으로 환산하면 극미의 값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불교학대사전》에서 제시한 일주가 18인치에 상당한다고 하는 설을 참고하여 역으로 계산을 해 보면 어떠한 차이가 나는가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개의 수치
를 가지고 계산을 해 보고 그 값들을 비교해 보기로 한다. 일주의 단위가 1척 8촌이기 때문에 그것을 역으로 환산하면 1.13 ×10-11m가 나오고, 일주가 18인치라는 설을 근거로 환산하면 9.63×10-12m가 나온다. 즉 이 양자는 그 값이 비슷한 거리에 있는 것이다.
2) 미진(微塵)
미진은 극미보다는 크지만 아직도 미세한 물질이므로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는 단위이다. 미진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은 일미량이며 미진은 극미보다 7배가 큰 물체이다. 눈으로는 볼 수도 없고 오직 천안이나 전륜성왕안 보살안으로만 볼 수 있는 미세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12) 그러나 청화 스님의 법어집 《원통불법의 요체》에는 이와는 상이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대일경소일(大日經疏一)과 구사론광기(俱舍論光記) 그리고 승론(勝論)을 인용하여 금진이 되어야만 비로소 천안과 전륜성왕안과 불과를 득한 보살안에만
견득될 수 있다고 하였다.13) 여기서도 각각의 설을 대입하면 7.965×10-11m와 6.74×10-11m가 나온다.
3) 동진(銅塵)
동진은 금진이라고도 칭하며 이는 미진보다 7배가 큰 물체이다. 이 금진(金塵)은 천안(天眼)과 윤왕안(輪王眼)과 불과(佛果)를 득한 보살안(菩薩眼)에만 견득(見得)할 수 있다. 금진 곧 일아뇩색(一阿 色)은 금중(金中)에서 왕래하여도 무장무애(無障無碍)하며 백사십의 사체공덕(事體功德)을 갖추고 있다. 또한 원상(圓常)하여 다시 생멸이 없고 공겁시(空劫時)에는 이산(離散)하여 공중에 부유(浮遊)하나 체법(體法)은 항유(恒有)하며 그 작용에 있어서 생멸 무상하다.14) 일주를 1척 8촌으로 환산한 값은 5.575×10-10m이며, 18인치로 환산한 값은 4.72×10-10m이다.
4) 수진(水塵)
수진은 금진보다 7배가 더 큰 물체를 말한다. 일주를 1척 8촌으로 환산한 값은 3.9×10-9m가 되고 18인치로 환산한 크기는 3.3×10-9m이다.
5) 토모진(兎毛塵)
토모진은 수진보다 7배가 더 큰 물체를 말한다. 역시 두 크기를 환산한 것은 2.73×10-8m와 2.31×10-8m로 나온다.
6) 양모진(羊毛塵)
양모진은 토모진보다 7배가 더 큰 물체를 말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물질의 크기는 1.91×10-7m와 1.61×10-7m로 나타난다.
7) 우모진(牛毛塵)
우모진은 양모진보다 7배가 더 큰 물체이다. 우모진의 크기는 일주를 1척 8촌으로 환산했을 때와 18인치로 환산했을 때의 차이가 거의 없다. 즉 1.33×10-6m와 1.13×10-6m로 나타나는 것이 약 0.2
의 차이가 생긴다.
8) 향유진(向遊塵)
향유진은 극유진이라고도 하며 극유진은 틈 사이로 날아다니는 먼지만큼의 크기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극유진은 문틈 사이로 햇빛이 들 때 그 햇빛 속에서 날아다니는 먼지만큼의 크기를 말한다. 이 먼지는 만약 햇살이 없어지면 육안으로 볼 수 없을 만한 크기의 물체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일광중(日光中)에 부유하는 미진이라는 뜻에서 일광진 (日光塵)이라고도 하며, 이는 우모진보다 7배가 더 큰 물체이다. 향
유진의 크기는9.37×10-6m와 7.93×10-6m이다.
9) 기
기는 더러운 옷 속에 화생하는 서캐 만한 물체를 뜻하며 이를 기량이라고도 한다. 오형근 교수는 부파불교의 물질과 시간론에서 이 물질부터 우리의 육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분량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이것의 크기는 약 0.06mm로서 머리카락의 굵기와 비슷하다. 그리고 이 기량은 우모진보다 7배가 더 큰 물체이다. 기의 크기는 6.559×10-5m와 5.55×10-5m이다.
10) 슬( )
서캐라는 알에서 출생한 이를 비유한 것으로서 이만한 물체를 슬량이라고 칭한다. 이 슬량은 기량보다 7배가 더 큰 물체를 뜻한다. 슬의 크기는 4.59×10-4m와 3.88×10-4m이다.
11) 광맥(禾廣麥)
광맥은 논과 밭에서 자라난 벼와 보리만큼 큰 물체를 말한다. 이 광맥의 분량도 위에서 말한 슬량보다 7배가 더 큰 물체를 뜻한다. 광맥의 크기는 3.214×10-3m와 2.72×10-3m이다.
12) 일지절(一指節)
일지절은 손가락의 세 마디 가운데 한 마디의 크기를 말한다. 이른바 한 마디의 분량은 광맥의 분량보다 7배가 더 큰 분량이라고 한다. 즉 일지절의 크기는 2.25cm가 된다. 광맥의 크기를 환산하면 2.25×10-2m와 1.905×10-2m이다.
13) 일주(一 )
《불교의 물질과 시간론》에서는 일주를 손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말하며 동시에 이 팔꿈치까지의 물량을 의미한다고 하며, 《불교학대사전》에서는 18인치에 상당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일주는 24개의 손마디 만한 길이를 뜻하며 따라서 일주는 24개의 손마디 길이만큼의 물체를 의미한다. 일궁의 길이에 대하여 역으로 환산하면 일주의 길이는 약 54cm가 된다. 1척을 30cm로 계산하여 m로 환산한 경우는 0.54m가 나오며, 18인치를 m로 환산한 경우는 0.4572m가 나온다.
14) 일궁(一弓)
구사론에 의하면 일궁은 4주를 이어 놓은 길이를 뜻하며 동시에 일궁 만한 물체를 말한다. 이는 일주가 1척 8촌이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를 합치면 7척 2촌 길이의 물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1척을 30cm로 할 경우에는 1척 8촌이면 약 54cm가 되고, 7척 2촌이면 약 2.16m가 된다. 그리고 인치를 환산한 경우는 1.8288m가 된다.
15) 구로사(俱盧舍)
구로사는 위에서 말한 활을 500개 이어 놓은 거리를 말하며 동시에 그 거리만큼의 둘레에 해당하는 물체를 뜻한다. 이는 일궁이 7척 2촌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500궁은 약 3,600척 가량의 둘레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궁이 270cm이기 때문에 500궁은 1080m이다. 그리고 인치로 환산하여 적용하면 914.4m가 된다.
16) 유선나(踰繕那)
유선나(踰繕那)는 유순(由旬)15)이라고도 표현하며 인도에서 거리를 표시할 때 흔히 쓰이는 말이다. 이 유순은 세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40리의 거리이고, 둘째는 50리의 거리이며, 셋째는 60리의 거리를 뜻한다. 그리고 《비바사론》과 《구사론》에 의하면 8구로사를 합한 길이를 1유순이라고 한다. 이들의 기록에 의하여 유순의 길이를 가히 짐작할 수 있으며, 여기서는 유순의 길이에 해당하는 둘레만한 물체를 뜻한다. 즉 8640m이다. 이것은 20리가 조금 넘는 거리이고 인치로 환산하면 7315.2m가 조금 못되는 거리이다. 따라서 이들을 종합하면 오늘날의 인치나 m 단위가 당시에 인도에서 사용하던 단위와 차이가 생기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당시에 사용하던 단위를 먼저 찾아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새롭게 단위 설정을 하는 것이 올바른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크기를 측정하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는 비사량의 세계로 사량의 세계로서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점이다.
Ⅲ. 科學의 物質觀
1500년 이전의 유럽의 지배적 세계관은 대부분의 다른 문명과 같이 유기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소형의 친밀한 집단에서 생활했으며 유기적 상관관계를 가지고 자연을 경험하고 있었다. 따라서 4대 문명의 발상지에서 시작된 기술적 발전은 어떤 과학적인 발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경험이나 어림짐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곧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이 상호 의존적이었으며, 개인적 필요는 집단의 필요에 종속되는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그것은 유럽 사회뿐만 아니라 여타의 다른 사회도 마찬가지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및 17세기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유기적이고 생명체적이며 정신적인 우주의 기본 개념은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대치되었으며, 이 기계론적 세계관이 현대의 지배적 사상이 된 것이다. 이 발전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및 뉴턴의 업적으로 결실된 물리학과 천문학의 혁명적 변화로 이룩되었다.16) 그리고 18세기와 19세기는 뉴턴의 역학에 의하여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였다. 뉴턴의 세계에 대한 수학적 체계는 실재(實在)의 참된 이론으로 급속히 정착되었으며, 과학자와 대중들로부터 열광을 받게 되었다. 또한 기체의 물리적 운동을 연구한 존 달톤(John Dalton)은 화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가설(atomic hypothesis)'을 창안하게 되었다. 그는 혼합기체의 성질을 원자의 기하학적이며 역학적 모델로 설명하고자 시도하였다. 19세기의 화학자들은 달톤의 가설을 이용하여 정확한 원자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이것이 20세기에 와서 물리학과 화학의 개념을 통일하는 길이 된 것이다.17) 현대의 과학의 발전은 우리들이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고 있다. 때로는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신비감을 가지고 지켜보게 한다. 이전까지 생소하게 들렸던 행동이나 말이 친근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과학이 밝혀낸 부분 중에서 불교와 관련이 있는 한 부분을 가지고 이 장을 쓰고자 한다. 현대 과학에서 밝혀낸 물질, 즉 분자와 원자 그리고 원자핵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1. 原子論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와 공 말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겨 원자가 물질의 보이지 않는 가장 작은 구성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는 원자는 균일하고, 단단하며 무게 있고, 압축되거나 파괴되지 않으며, 원자의 형태와 크기의 차이에 따라 물질의 다양한 성질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자는 물질뿐만 아니라 감각이나 인간의 영혼 같은 성질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원자는 각 원소의 각각의 특징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소의 미립자이다. 그리스어로 '쪼갤 수 없는' 이라는 뜻의 아토모스(atomos)에서 유래된 말로 특히 화학반응에 관계하는 화학 원소의 최소 단위에 사용된다. 19세기초에는 원자론이 화학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과학자들은 원자를 반지름이 10-10m 정도 되는 아주 작은 공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화학 이외의 방법으로 원자를 더욱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즉 원자는 더 작은 입자인 전자와 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핵은 다시 양으로 하는 양성자와 전하를 갖고 있지 않는 중성자로 되어 있다. 이 양성자와 중성자를 합해서 핵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원자 구성 입자는 2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하나는 우주의 기본 구성 요소로서의 역할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을 묶어 두는 4가지 기본힘, 즉 중력․전자기력․약력․강력을 전달하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이다.
원자 구성 입자들은 원자의 크기에 비하여 아주 적다. 즉 핵자의 크기는 10-15m정도이다. 그리고 이들 핵자의 주위는 전자가 둘러싸고 있다. 전자들은 전기적인 힘에 의해서 원자핵에 붙들어 매어져 있다. 원자핵은 양전기를 띠고 있으며, 음전기를 띤 전자들은 전기적인 힘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으며 원자핵 둘레를 돈다. 전자에서 원자핵까지의 평균 거리는 약 10-10m이다. 이 거리가 원자의 크기를 결정한다. 원자는 작은 태양계와 비슷하다. 가운데에 원자핵(태양)이 있고, 그 둘레를 전자들(행성)이 돈다.18)
그리고 원자핵은 두 가지 형태의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양전기를 띤 양성자와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라고 불리는 입자들이 그것이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둘 다 전자보다 1800배 정도 무겁다.19) 그리고 양성자는 원자의 특징을 결정한다. 각각의 양성자는 +1가의 양전하를 띠고 있으며 원자핵 속에 들어 있는 양성자의 수가 그 원자의 전기적 특성을 결정한다. 원자핵 속에 있는 중성자의 수는 0부터 140 이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접하는 원자들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수가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어떤 화학 원소의 원자핵 속에는 항상 똑같은 수의 양성자가 있지만 같은 원소라도 중성자의 수는 다를 수 있다.
또한 양성자와 중성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기본 입자가 아니라 좀더 작은 쿼크라고 하는 입자들로 이루어진 복합 입자이다. 즉 쿼크는 현재 물리학자들이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입자로서 내부 구조가 없고 더 작은 구성원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점입자로 소립자라고도 하며 전자와 전하를 띠지 않는 중성미자 역시 소립자로 알려져 있다.
1)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은 인도의 원자론과 마찬가지로 질료로써 변하지 않는 진짜 존재는 흙․물․불․공기라는 4원소설을 제시하였다. 엠페도클레스는 4원소설의 개념을 확립하였고, 그의 이론은 이오니아 자연학이 주장했던 3원소에 흙을 더한 것이었다. 엠페도클레스는 세계는 영원히 분리와 결합을 반복하는데, 이것이 4원소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대한 사고를 더욱 철저히 하여 기초적 토대를 분명히 한 사람이 데모크리토스였다. 그는 세계를 충만된 것과 공허한 것으로 나누었다. 이 충만된 것을 아톰(Atom)이라 부르며, 아톰의 의미는 더 이상 분해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의미로 근대의 원자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아톰은 여러 가지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그것의 배열정도와 방향에 의해 가지각색의 다양한 세계가 완성되고 또한 감각하고 있는 현상은 아톰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이 근대의 원자론에도 통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는 고대의 합리적 유물론의 제 1인자로 생각되어 왔다. 데모크리토스의 합리주의는 결코 자연을 단순한 물질로 보는 근대의 합리주의 그 자체가 아니며, 오히려 자연과 세계를 인간과 같은 원리를 가진 것으로 생각한 고대의 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신화적 자연관에서 탈피하여 최초로 자연을 이해하려 노력한 철학자는 이오니아 지방의 식민도시 출신의 무역상인 탈레스(B.C 624~546)였다. 그는 만물의 근본적인 요소, 즉 아르케는 물이라고 생각하였다.20) 그러나 그의 제자였던 아낙시만드로스(B.C 610~528 추정)는 아르케를 무한한 것이라고 하는 불특정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여기서 무한한 것을 세계의 아르케라고 생각한 것은, 어느 특정한 것이 아닌 일반적인 원리인 것이다. 그리고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인 아낙시메네스(B.C 585~528)는 이것을 더 확대시켜 공기가 짙어지면 바람이 되고, 바람이 짙어지면 구름이 되며, 구름이 더 짙어지면 물이 되고, 나중에는 흙과 돌이 된다고 하였다.21) 다시 말해 만물은 운동하는 물질인 공기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 공기는 신체로 들어와 기식을 이루는 영혼을 이루는 것이며, 이 생각을 바탕으로 세계와 우리는 하나라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아르케 추구의 열정은 피타고라스 학파와 엘레아 학파 등에 의해 추상적․형이상학적인 체계로 전개되었다.
피타고라스(B.C 571~497) 학파는 신이 기하학자이기 때문에 세계는 합리적이고 수학적이라고 여겼다,22) 자연을 연구하여 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는 수의 조화를 살피고 그 합리적 조화를 밝혀내어 만물의 근원을 규명하고자 했다. 원자론을 주장한 데모크리토스(B.C 460~350)는 물질은 궁극적이고 나눌 수 없는 동질이며 크기와 형태만이 다른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빈 공간에서 같은 속도로 운동하며 수적으로 무한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원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운동하고 만물은 필연적으로 창조, 소멸되나 그것은 원자의 결합과 분리라고 보았으며,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원자의 변화, 운동하는 장소로서
의 공허(빈 공간)라고 하고 이는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기원전 5세기 중엽 무렵 아테네는 지중해 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그리스를 중심으로 에게해 연안에서 일어났던 자연철학은 아테네 문화 속에 흡수되었다. 한편 아테네의 현인 플라톤(B.C 427~347)은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강하게 주장된 4원 소설을 발전시켜, 신이 우주의 근원인 4원소를 만들고 이를 기초로 해서 모든 물질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우주가 4원소에 의해 기하학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겼다.23) 그는 이전의 원자론이 우주의 생성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목적성이 없다고 본 반면에 우주의 생성과 일어나는 모든 일에 선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제자이며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집대성자인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4원소 외에 4개의 성질(온․냉․건․습)24)을 제시하였다. 즉 4개의 성질을 적극적 성질과 소극적 성질로 나누고 뜨거움과 차가움을 적극적인 성질로, 마름과 축축함을 소극적인 성질로 나누어 상호 변환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모든 것은 원소이거나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소란 다른 물체들이 그것으로 분해될 수 있고 잠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들 물체 속에 존재하고 있을 수 있지만 원소 그 자체는 여하한 더 간단한 물질이나 다른 종류로 분해될 수 없다."25)고 주장하였다. 또한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들이 모두 동일한 빠르기로 운동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형태와 크기가 다른 원자들이 빈 공간에서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시하였다.
2) 중세의 원자론
에피쿠로스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을 무게라는 개념을 원자에 도입하여 형태와 크기뿐만 아니라 무게도 원자의 근본 성질이라 설명하며 데모크리토스의 학설을 수정, 보완하였으며, 에피쿠로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루크레티우스는 원자의 운동을 소용돌이치는 원자의 궤도운동에서 원자가 이탈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여 원자의 숙명론적 운동에서 나름대로 벗어나고자 했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를 거치면서 원자론은 거듭 발전을 이루었으나 중세기에는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망각 속에 방치되었다.
원자론이 다시 부활된 것은 17~18세기의 가상디 이후 데카르트와 갈릴레이, 보일과 호이겐스 그리고 뉴턴 등에 의해서였고, 이 시기의 원자론은 역학적, 양적인 개념만을 가지게 된다. 그 후 라이프니치는 원자론을 관념적으로 해석하여 비물질적인 단자를 물질적인 원자 대신 대입시켰다. 이후 원자론은 돌턴의 원자량의 과학적 규명과 원소 주기체계가 발견됨으로써 진일보한 원자물리학적인 단계로 진입한다.
3) 근․현대의 원자론
근대적 원자론은 영국의 돌턴에 의해 1803년에 창안되어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26) 돌턴의 원자모형은 딱한 공모형인데 이 원자설로 화학반응시 질량보존의 법칙과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으며, 돌턴은 자신의 원자설을 바탕으로 배수비례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돌턴의 가설을 보면, 첫째 더 이상 쪼갤 수 없으며, 둘째는 같은 원소의 원자는 크기․모양․질량이 같으며, 셋째는 원자들은 새로 생기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넷째는 화합물은 서로 다른 원자가 정수비로 결합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돌턴의 가설 중 수정되어야 할 것은 원자는 더 작은 입자로 나눌 수 있으며, 같은 원자도 질량이 다른 것이 있다는 점이다. 원자에는 여러 종류가 존재하고 같은 종류의 원자는 모두 일정한 특성이 있고, 다른 종류의 원자는 특히 무게가 다르다는 결론을 얻는다.27) 영국인 톰슨은 음극선 연구의 결과로 전자의 발견을 발표하였다.
톰슨의 원자모형은 음극선 실험을 통하여 만들어졌는데 건포도가 든 푸딩 혹은 호박떡 모양이었다. 1903년에 톰슨은 음극선 실험을 통하여 전자를 발견하고 양전하 속에 양전하와 같은 수의 전자가 파묻혀 있는 입자로 정의했다. 원자에 포함된 전자의 질량과 전하량은 어떤 기체든지 상관없이 일정하고, 전자의 질량은 수소원자 질량의 1/1000보다 작다는 것이다. 그의 전자모형은 수소원자는 양전하를 띤 양성자들 사이에 음전하를 띤 전자가 박혀 있고28) 그 모양이 마치 호박떡과 같았기에 호박떡 모형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이 모형으로는 원자핵의 존재를 확인한 α입자 산란 실험을 설명할 수 없었다. 톰슨에 의해 밝혀진 전자는 크기가 너무 작아서 일반 현미경으로 보기가 힘들뿐 아니라 전자현미경으로도 보기가 힘들었는데 전자를 최초로 시각화한 사람은 영국의 윌슨이었다. 그는 안개상자를 만들어 전자의 궤적을 작은 상자에 응축된 수증기 속에서 사진으로 찍어 포착하였다. 1900년대 초기까지는 원자 내부의 알려진 입자라고는 전자밖에 없었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원자 속에서 전자의 가능한 배열 수를 생각해야 하는데 원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므로 전자로 인한 음전기를 보상할 만한 양전기가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러더퍼드였다. 러더퍼드는 α입자 산란 실험을 통해 핵을 발견하여 행성모양의 원자모형을 만들었는데,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의 내부를 조사하는데 알파입자를 사용하여 산란 실험을 실시하고 이 실험을 통해 톰슨의 원자모형을 부정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즉 원자의 양전기는 톰슨이 주장했던 것처럼 원자 내에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러더퍼드 모형의 특징으로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모두 원자핵으로 좁은 공간에 밀집되어 있으며 원자의 공간 대부분을 전자가 빠른 속도로 돌아다니며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이 모형의 문제점은 수소원자의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11년 러더퍼드는 양전하가 모인 것을 원자핵이라고 명명하고 원
자핵의 발견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핵의 크기도 추정하였는데 핵은 원자 크기의 1/10000 정도였다.
1919년 F. 러더퍼드는 가벼운 기체의 원자에 알파입자를 충돌시키는 실험을 하던 중 이 원자들이 충격을 받으면 수소의 원자핵으로 보이는 입자를 방출하는 것을 발견했다.
다음 해에 그는 수소원자의 원자핵이 기본 입자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 원자핵에다 첫째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인 프로톤(prot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같은 해에 그는 이외에도 전기적으로 중성인 입자가 존재할 수 있다. 는 생각을 발표했다. 이 입자인 중성자는 1932년 제임스 채드윅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수소 이외의 모든 원자의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를 포함하고 있다. 다만 수소 원자는 1개의 양성자로 된 원자핵과 1개의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29)
중성자는 전자에서도 밝혔듯이 수소 원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원자핵을 이루는 구성 입자이다. 이것은 전하를 갖고 있지 않으며, 질량은 전자의 약 1840배이다. 핵에 속해 있지 않는 자유 중성자는 `베타붕괴'라고 하는 방사성 붕괴를 한다. 붕괴를 하면 양성자 1개, 전자 1개, 반중성미자30)1개로 분리된다. 따라서 자유 중성자는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공적으로 생성시켜야만 한다. 이것은 전기적으로 중성자이기 때문에 원자 내의 전기장에 영향을 받지 않고 지나며 원자핵과 아주 드물게 충돌 반응을 일으키는 것으로만 물질과 작용하여 복사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자핵의 설에도 불구하고 다시 물질 구성의 기본적인 구성 입자로 쿼크를 들고 있다. 즉 양성자와 중성자가 원자핵을 이루는 것과 같이 양성자와 중성자 그 자체도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재의 이론에 따르면 쿼크는 질량을 가지고 있으며, 각 운동량의 양자역학적 기본단위의 1/2스핀31)을 갖는다.
쿼크는 궁극적인 기본 입자로 내부 구조가 없는 즉 더 작은 그 무엇으로 분리될 수 없는 입자이다. 쿼크는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다른 쿼크들과 결합하여 생긴다.32) 그러나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에서 전자는 핵 주위를 등속 원운동으로 회전하는데33) 등속 원운동은 가속운동이므로 끊임없이 전자기파를 복사하고 핵위로 떨어져 원자는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34) 그러나 원자는 순간적으로 붕괴되지 않고 그대로 있으므로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에 문제가 제기되어 새로운 모형으로 다듬어진 궤도모형이 보어에 의해 만들어졌다. 덴마크의 보어는 양전기를 띤 핵이 있으면 전자는 핵이 끌어당겨서 마치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돌 듯이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이런 운동을 하는 전자는 곧 전자기 복사선을 방출하면서 에너지를 잃고 원자핵으로 떨어져 붕괴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딜레마에 고민하고 있었다. 보어는 독일의 프랭크에 의해 제시된 불연속적 흑체복사 에너지 개념에 착안하여 특정한 상태에서 물질이 빛을 방사하지 않는 현상이나 전자가 순간적으로 핵위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35)
보어가 1913년에 발표한 모형은 궤도모형이며 수소원자의 스펙트럼 분석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전자가 원자핵 주위의 일정한 궤도만을 원 운동하는 모형으로 정의하였는데, 수소원자의 스펙트럼은 설명할 수 있었으나 전자수가 많은 스펙트럼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현대의 원자모형은 양자역학에 토대를 두고 만들어졌는데, 원자 내의 전자의 위치를 기술하고자 할 때,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입자의 속도와 위치를 정확히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러한 측정에는 반드시 불확실성이 내재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보여주었다. 특정 순간에 원자 내에서 전자의 위치를 알거나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단순히 확률로써만 표현되며 따라서 전자 확률 개념에 자주 쓰이는 개념이 전자구름인데 이것은 마치 핵 주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이를 점 밀도 그림으로 표시하면 구름모양의 흐릿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확률이 높은 곳에서 전하가 높고 전자밀도가 크다.
1964년에 미국의 머리 겔만은 모든 중간자가 1개의 쿼크와 1개의 반쿼크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중입자는 3개의 쿼크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간단한 구상을 모형으로 제시했다. 또한 각각 구별되는 향을 가진 3가지 종류의 쿼크들이 있다고 가정했다. 이 3가지 쿼크들은 현재 u(up), d(down), s(strange)로 흔히 표시되고 있다. 각각은 분수의 전자 전하를 가진다. 즉 전자의 전하보다 작다. u와 d쿼크는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보통 물질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s쿼크는 오메가 입자와 보통 물질에는 없는 극히 짧은 수명을 갖는 원자 구성 입자들이다. 쿼크들이 서로 가까이 있을 때 글루온에 의하여 전달되는 결합력은 약하다. 그리고 이들 쿼크는 양성자의 지름인 10-15m의 거리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런데 양성자에서 쿼크들을 떼어 내려고 하면 그 결합력은 강해진다. 따라서 한 쿼크가 가속 입자에 의해서 충격을 받은 후 옆의 쿼크들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면 글루온들은 쿼크의 운동으로부터 얻은 에너지를 이용해 더 많은 글루온을 만들어낸다. 이 현상은 상호 작용하는 물체들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따라서 더 약해지는 전자기력과는 대조된다.
2. 分子
분자는 물질이 그 성질을 보유할 수 있는 최소의 단위이다. 즉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하나의 단위로 작용할 수 있는 원자들의 결합체이며, 일정한 질량과 구조 그리고 원자 조성을 가진다. 이러한 분자는 매우 간단한 것도 있으며, 반대로 수천 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매우 복잡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산소와 수소 같은 것은 원자가 두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헬륨이나 네온 같은 기체는 한 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천연고무의 분자는 약 7만 5천 개의 탄소 원자와 약 12만 개의 수소 원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자의 길이는 각각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즉 물분자처럼 간단한 분자는 길이가 1억분의 3, 4cm밖에 안되지만, 고무의 분자는 길이가 그 수천 배나 된다고 한다. 분자는 수나 종류의 변화 없이 물리적 변화를 할 수도 있으나 화학반응을 통해 변형될 수도 있다. 분자의 총괄적인 화학작용은 분자를 이루는 원자들과 그들 사이의 화학결합의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전자가 둘 이상의 원자핵의 인력을 동시에 받아 생기는 결합은 원자핵 간거리를 가깝게 한다. 결합이 생기거나 끊어지는 모든 화학반응은 원자의 전자 구조상 변화로 설명될 수 있다.
Ⅳ. 佛敎와 科學의 物質觀 比較
위에서 불교와 과학의 물질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것은 단지 이론으로만 발전된 것이 아니고, 과학의 경우에는 실험에 의하여 확인된 것이다.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지만 극미는 원자와 크기를 비교할 때 거의 같다. 따라서 극미 자체를 원자론으로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과학에서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원자를 구성하는 새로운 물질 즉 원자핵을 발견했으며, 더 나아가 전자를 비롯한 양성자와 중성자를 발견했다. 양성자는 다시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극미는 극미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극미를 구성하고 있는 새로운 입자가 있다는 것이다.
극미는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더 이상 분쇄하거나 파괴할 수 없으며, 버리거나 만질 수도 없으며, 더 분쇄한다고 한다면 공이 되어 버린다고 하는 불교의 설이 이제 과학의 실험에 의하여 정면으로 도전 받고 있는 것이다. 다만 서구의 과학도 18세기 이전에는 원자설로서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물질의 형성에 대한 연구가 성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에서 물질의 가장 미세한 소립자인 광량자의 본질이 불교에서 물질의 근본으로 삼는 금진에 비유된다고 한다.36)
금진(金塵)의 구조는 우주의 본질인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심체(心體)에는 본래로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의 사성(四性)과 사상(四相)이 갖추어 있는데 그 사성과 사상이 화융(和融)하여 일극미(一極微)를 이루어 서로 분리할 수 없으므로 팔사구생(八事俱生)하여 수일불멸(隨一不滅)이라 칭한다. 이 극미(極微)를 사방상하(四方上下)의 육방과 중심의 칠미(七微)가 합성되어 처음으로 천안소견(天眼所見)의 아뇩색(阿 色)이 되는데 바로 금진이다. 이 금진은 천안(天眼)과 윤왕안(輪王眼)과 불과(佛果)를 득한 보살
안(菩薩眼)에만 견득할 수 있다. 금진 곧 일아뇩색은 금중에서 왕래하여도 무장무애(無障無碍)하며 백사십의 사체공덕(事體功德)을 갖추고 있다. 또한 원상하여 다시 생멸이 없고 공겁시(空劫時)에는 이산(離散)하여 공중에 부유하나 체법(體法)은 항유(恒有)하며 그 작용에 있어서 생멸 무상하다.37)
<태백경통一․俱舍論光記․勝論》
따라서 물질의 구성 자체를 견성 오도한 사람이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범부가 볼 수 있는가에 따라 구별하고 있다. 즉 성인의 눈에는 보이나 범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금진이며, 금진 이하의 과정은 색계와 무색계진으로서 범부들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위에서 불교의 물질의 단위와 과학에서 분자와 원자의 단위를 설정했다. 이로써 비교를 한다면 원통불법의 요체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는 상이한 점이 있다. 우선 금진을 원자핵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진은 원자핵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전자나 양성자와 중성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극미는 현대적인 용어로 쿼크에 비유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비유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즉 원자의 크기는 10-10m로, 1척을 30cm로 계산하여 극미의 크기인 1.13×-11m나 18인치를 일주로 하여 계산했을 때 9.63×10-12m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핵자의 크기는 10-15로 차이가 난다. 따라서 여기에 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어 확실한 1척의 기준이나 인치에 대한 기준이 제시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佛敎의 時間과 宇宙觀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는 많은 것은 항하사수와 같은 말이 있으며, 시간적으로 짧은 말은 찰나가 있다. 그리고 크다는 것은 삼천대천세계라는 말이 있다. 이는 경전에 자주 사용되는 말로 우리도 그러한 표현을 종종한다. 그러나 천체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구성된 천체의 크기나 모양새 혹은 생성에서 소멸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천체가 건설되는 과정과 생성에서 소멸에 이르는 과정을 경전에 근거하여 살펴보고 우주의 크기를 어느 정도로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라고 하였다. 즉 하나의 남김 없는 수(數) 곧 무여수(無餘數)가 일이 되며 일을 열한 것이 십이 되고 십을 열한 것이 백이 되며 운운하여 십대발라참(十大跋邏 )이 아승기야(阿僧企耶)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수 가운데 나머지 여덟은 잊었다고 하였다. 이는 구사론의 저자인 세친이 잊은 것인지 아니면 전해 오던 설이 끊긴 것인지 여기에서는 명확하지 않다. 여기에 따르면 현재 우리는 수의 단위에서 경 이상은 셀 수가 없다.
아승기야는 아승지(阿僧 )라고도 하는데, 모든 산수의 계산으로는 능히 세어 알 수 없으므로 삼무수겁(三無數劫)이라고 한다는 것은 현재의 우리의 식견으로도 짐작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냥 어마어마하게 큰 수 혹은 많은 수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시간의 단위로 가장 짧은 것을 찰나(刹那)라고 한다. 그리고 보다 긴 것은 달찰나( 刹那)와 납박(臘縛)이라고 하며, 이것이 모여 주야(晝夜)를 이룬다고 한다. 《구사론》에서 이러한 시간의 단위를 살펴보면,
라고 하고 있다. 즉 백이십찰나는 일달찰나(一?刹那)가 되며 육십달찰나는 일랍박(一臘縛)이 되고 삼십납박이 일모호율다(一牟呼栗多)가 된다. 그리고 삼십모호율다가 일주야(一晝夜)가 되기 때문에 현재의 하루 24시간으로 계산하면 찰나에 대한 시간의 단위도 계산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일주야는 24시간(86400초)이기 때문에 삼십모호율다는 86400초가 되며, 삼십납박이 일모호율다가 되기 때문에 2880초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일납박 즉 육십달찰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96초가 되며, 일달찰나는 0.4초가 된다. 그리고 일찰나는 0.013초가 된다. 이와 같이 짧은 시간의 단위는 눈 깜빡하는 것과 같다고 하나, 오히려 빠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시간의 단위로 긴 것은 겁(劫)이 있다. 앞에서도 천체의 설명에 겁이 사용되었지만 겁이란 것은 아주 긴 시간의 단위로 광겁(曠劫) 혹은 영겁(永劫)이라고도 한다. 《구사론》에 의하면 "이 주의 사람의 수명이 무량한 때를 지나서 주겁의 처음에 이르러서 수명이 점점 줄어들어 열 살에 이르는 동안을 이름하여 처음의 일주중겁이라 한다. 이 뒤의 18겁은 다 증감이 있다. 즉 10세에서 늘어나 8만세에 이르러, 다시 8만세로부터 줄어서 10세에 이르는데 이를 이름하여 제이중겁40)이라고 하며 이 뒤의 17중겁도 이와 같다. 일체의 겁증은 8만을 지남이 없고 일체의 겁감은 오직 10세가 그 끝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의 수명이 10세에서 백 년마다 한 살씩 늘어 8만 4천 세가 되는 기간을 일증겁이라 하며 한 번 줄었다가 늘어나는 기간을 일소겁이라 한다. 그리고 겁의 성질은 오온이라고 한다[劫性是何 謂唯五蘊].41)
김용정 박사는 《과학과 불교》에서 1소겁이란 2천 6백만 년에서 2천 년을 감한 수 즉 1천 5백 9십 9만 8천 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1중겁은 그 스무 배인 약 3억 2천만 년이라고 하며, 1대겁은 중겁을 네 개 합친 것으로서 이 우주의 시초로 종말의 길이를 삼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42)
2. 世界와 宇宙觀
경전에 많이 등장하는 세계에 대한 개념을 찾아보자. 먼저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무량수불의 크기에 대해서 살펴보면, 불신의 키는 육십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라고 한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키는 팔십만억 나유타 유순이며, 대세지보살의 크기는 관세음보살과 같다고 한다. 이러한 숫자를 어떻게 파악할 것이며, 수량으로 환산할 수는 있는지 의심스럽다. 다행히 시도를 해본 사람이 있어 그 크기를 현대적인 수치로 옮겨 적어 본다. 나유타란 천억 또는 만억을 뜻한다. 그런데 나유타 앞에 이미 만억이란 숫자가 나오고, 이것이 무한히 큰부처의 키를 나타내는 데 쓰이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만억의 뜻으로 사용할 것이며, 유순은 30리 혹은 40리에 해당하는 인도의 거리 단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많다는 뜻이므로 16km로 생각하고 계산하면, 80만억 나유타 유순은 80×만억×만억×16 =80×10,000×100,000,000×10,000×100,000,000×16km =1,280,000,000,000,000,000,000,000,000km =1.28×1027m가 된다.(우주 반지름의 9.1×10³m, 은하계 반지름의 2.7×109) 그런데 우주의 반지름은 150억 광년이다. 따라서 이것을 계산해 보면, 150억년×30만km
=15,000,000,000(년)×365(일)×24(시간)×60(분)×60(초)×300,000km =140,000,000,000,000,000,000,000km
=1.4×1023m이다. 그리고 은하계의 반지름은 5만 광년이므로, =50,000(년)×365(일)×24(시간)×60(분)×60(초)×300,000km =470,000,000,000,000,000 =4.7×10¹7이다.43)
우주는 성(成)․주(住)․괴(壞)․공(空)의 과정을 통하여 운전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천체가 이 우주에는 부지기수라고 하며 삼천대천세계라는 말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44) 《구사론(俱舍論)》 권11에 의하면 천 개의 사대주와 내지 범세 등을 합쳐서 일소천세계라고 하며, 일소천세계를 천배하여 일중천세계라 한다. 그리고 천 개의 중천세계를 모두 합쳐서 일대천세계라고 한다. 이들 세계는 함께 성립되고 함께 괴멸하게 된다.45)
그런데 앞서 유순이나 구로사와 같은 단위를 살펴보았지만, 소천세계나 중천세계 그리고 대천세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아가 삼천대천세계는 어느 정도의 크기를 말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천체가 건설되는 과정을 보면 중생들의 업력이 작용하게 된다고 한다. 즉 구사론에 보면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설해 놓았다.
기세간이 마련되었는데 풍륜이 가장 밑에 있으면서
그의 분량과 넓이는 무수하며 두께는 십육억 유선나이네
다음 그 위에는 수륜이 있는데 깊이가 십일억 이만 유선나로서
밑의 팔억 유선나는 물이고 나머지는 엉키어 금륜 이루었네
이 수륜과 금륜의 넓이와 지름은 십이억 삼천 사백반 유선나이며
주위는 그 수의 삼배가 되네.47)
그리고 논하기를 이 삼천대천세계는 이와 같이 건립되어 그 형체와 분량이 같지않다고 한다. 또한 모든 유정들의 증상하는 업력으로 말미암아 먼저 최하위에서 허공에 의지하여 풍륜이 생기하게 되는데, 금강으로도 분쇄할 수 없는 견고한 풍륜이 허공에 의지하여 생기며 그 풍륜의 넓이는 무수한 것이다. 이러한 문헌은 《대비바사론》과 《구사론》에서 보이고 있는 바, 그것을 비교해 보면,
이와 같이 유정들의 증상하는 업력으로 말미암아 큰 구름과 비를 일으켜서 먼저 건설된 풍륜 위에 쏟아 붓게 된다. 그리고 물방울은 마치 차축과 같이 생겼으며 그것이 적집되어 윤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를 수륜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 수륜이 응결되지 않았을 때에는 깊이가 십일억 이만 유선나의 양이 된다고 하였다.50)
그리고 천체가 생성 유지되고 소멸되어 없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경전에는 자세하게 설해 놓았다. 이는 구사론에서 자세하게 말해지고 있는데, 하나의 천체가 생성되는 기간을 성겁(成劫)이라 한다. 그러나 천체 자체도 하나의 물체이기 때문에 자체의 변화를 일으켜서 파괴하게 되는데 그 파괴되는 기간을 괴겁(壞劫)이라 하며, 파괴된 천체는 모습만 없어질 뿐이며 실은 무형의 성질로 남아 있게 되는데 그것이 공간에 남아 있는 기간을 공겁(空劫)이라 한다.
즉 성겁은 풍륜부터 생기기 시작하여 지옥까지 모두 생기는 것이며, 괴겁은 지옥까지 생기지 아니하고 바깥 세계가 모두 없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구사론의 설명은 모든 현상을 성(成)․주(住)․괴(壞)․공(空)의 관계, 즉 윤회의 흐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주의 생성(生成)에서 공(空)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알아보았다. 다음에는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무한히 크다. 따라서 그것을 숫자로 표현하고자 할 때는 몇십억이라는 말이 흔히 사용된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그런데 이러한 관계 외에도 삼천대천세계가 있다. 즉 《사론》에는, 논하건대 천의 사대주(四大洲)와 내지 천의 범천(梵天)을 통틀어 일소천(一小千)이라 하고, 천소천(千小千)을 일중천(一中千)세계라 하며 천중천계(千中千界)를 통틀어 일대천세계(一大千世界)라 한다. 이와 같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동일하게 이루어지고 동일하게 무너진다
라고 삼천대천세계의 크기를 설명하였다. 사대주란 것은 첫째는 남섬부주(南贍部洲)요, 둘째는 동승신주(東勝身洲)이며, 셋째는 서우화주(西牛貨洲)요, 넷째는 북구로주(北俱盧洲)이다. 이들의 모양과 크기를 말하면 남섬부주는 북쪽은 넓고 남쪽은 좁으며 삼면은 넓이가 같은데 그 모양은 수레와 같아서 남쪽만은 넓이가 삼유선나 반이 되고 삼면에는 각각 이천 유선나가 된다. 그리고 오직 이 주(洲) 가운데에 금강의 자리가 있어 위로는 땅끝까지 닿고 아래로는 금륜에까지 이른다53)고 한다. 그리고 동승신주는 동쪽은 좁고 서쪽은 넓으며 삼면의 양은 같고 모양은 반달과 같다. 동쪽은 삼백오십 유선나이고 나머지 삼면은 각각 이천 유선나이다. 그리고 서우화주는 모양이 둥근 달과 같고 지름은 이천오백 유선나이며, 둘레는 칠천반 유선나이다. 북구로주는 모양이 모난 자리(방좌)와 같고, 사면의 양은 같아서 사면이 모두 이천 유선나54)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크기로 삼천대천세계의 크기를 짐작하기란 매우 어렵다. 즉 이들 사주에는 또한 각기 이중주가 있으며 섬부주의 밑으로 이만 유선나를 지나면 아비지옥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내용들을 다 열거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대주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구사론에는 삼천대천세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삼천대천세계는 유정세간과 기세간이 있으며, 금륜(金輪)의 위에 구산(九山)이 있는데 묘고산(妙高山)이 그 가운데 있으며 나머지 여덟의 산은 묘고산을 둘러 있다. 그리고 이 산들의 가운데는 또한 여덟 바다가 있는데 전의 7바다에는 팔공덕수(八功德水)가 있으며 여덟 번째 바다 가운데는 사면으로 묘고산을 상대로 하여 사대주가 있다55)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크기를 말하고 있는데, 먼저 구산을 보면 중앙에는 묘고산(소미로)이 있으며 다음은 유건달라산이며 이사타라산과 갈지락가산 그리고 소달리사나산과 알습박갈라산과 비나담가산과 니민달라산이다. 이들의 크기는 물에 들어간 것이 똑같이 팔만 유선나이고 물 밖에 나온 것은 소미로산이 팔만 유선나이고 그 밖의 여덟 산은 반반으로 점차 낮아진다. 즉 처음의 유건달라산은 사만 유선나이고 최후의 철위산은 삼백십이반 유선나가 나왔다고 한다. 즉 물위에 나온 산의 크기는 유건달라산이 사만 유선나이고 이사타라산이 이만 유선나이며, 갈지락가산은 만 유선나이다. 그리고 소달리사나산은 오천 유선나이며 알습박갈라산은 이천오백 유선나이고 비나담가산은 천이백오십 유선나이다. 니민달라산은 육백이십오 유선나이며 철위산은 삼백십이반 유선나가 나왔다. 그리고 위의 칠산 밖으로 사대주가 있으며 철위산은 사대주 밖으로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삼천 대천세계의 크기를 상상하거나 표현한다는 것은 현재의 입장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Ⅵ. 結論
불교과 과학의 물질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우주관과 시간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앞으로 계속 연구해 볼일이지만, 지금까지 연구에 있어서 자료가 축적되지 못했으며, 경전적 근거를 명확하게 모두 제시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를 함에 있어 무엇보다 깊이 생각할 것은 오늘날 서구에서 각광받고 있다는 불교가 과학에, 특히 물리학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과학의 발전과 불교학의 발전에 있어서 상반되는 문제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불교학에만 치우쳐서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계속적으로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불교와 과학에서 물질을 보는 관점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물질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성(成)․주(住)․괴(壞)․공(空)을 되풀이하는데, 고대 그리스의 엠페도클레스는 4원소설을 제기하였다. 이는 불교의 4대설과 틀리지 않으며, F. 카프라는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 현대 물리학자는 물질이 수동적이고 비활성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 지속적인 무도와 진동 운동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며, 이 무도와 진동 운동의 율동적 모형은 분자, 원자 및 핵의 형태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초미시적 차원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원자핵의 연구에서 양자와 중성자의 속도가 광속도와 비슷한 고속도라는 결정적인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56)
나는 물질의 구성을 사대로 보는 불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즉 에너지(堅․濕․煖․動)와 물질(色:地․水․火․風)이라는 구성 요소는 어떠한 것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도 에너지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에너지는 모든 물체의 운동에 기본이 되며, 따라서 에너지가 없다면 물체는 상호 조합되거나 분산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견(堅)․난(煖)․습(濕)․동(動)이라는 사대의 성질은 다만 표현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우주의 반지름을 150억 광년으로 보고 있는 천체 물리학과 삼천대천세계를 설한 불교의 우주관에는 아직도 연구할 바가 많다. 여기에 대해 다시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리라 생각한다.
불교의 물질관이나 시간관 그리고 우주관에 대한 것은 비사량(非思量)의 세계이다. 따라서 그것을 수의 단위로 환산한다는 자체가 불설(佛說)에 어긋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즉 비사량의 세계를 알음알이로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처님의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는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미시세계(微視世界)의 찰나나 극미의 단위, 거시세계(巨視世界)의 유순(由旬)이나 겁(劫) 그리고 삼천대천세계는 사량분별(思量分別)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현대 과학에서는 그것을 수나 단위로 설명하기에 수의 단위로 설명을 해 보았을 뿐이다.
좁은 소견으로 《구사론》과 《비바사론》을 주요 교재로 하여 불교의 물질관에 대해서 나아가 시간과 우주관에 대해서 살펴보았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다만 여기에서 하나의 성과가 있다면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이나 불교의 물질관이 서로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사점으로 인하여 오늘날 서구의 과학계―특히 물리학계―가 불교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 물리학계의 이러한 관심을 단지 물리학계의 관심으로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불교계도 관심을 가지고 깊이 있는 연
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56) F. 카프라 저, 이성범․구윤서 옮김,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p.84.!
우주 속으로 달리는 입자들
물리학자들은 장이론(場理論)의 맥락에서 비슷한 유추를 사용한다. 즉 장이론에서 물질적 실체에 대한 환상은 운동하는 입자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 물리학에서 전자와 같은 물질 입자는 단지 일정한 정도의 힘을 가진 장 속에 하나의 전자장(電子場)의 파도의 봉우리가 생긴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에너지의 작은 봉우리는 마치 물결이 호수의 수면을 지나가듯이, 빈 공간(場)속을 진동하면서 퍼져 나간다. 따라서 우리가 전자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빈공간(즉 힘을 가진 전자장)의 파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현대의 소립자 물리학에서는 어떤 기본적인 실체적 원자나 입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비록 쿼크와 같은 실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복합입자를 의미한다. 질소원자에 알파선을 쬐면 그것이 산소원자와 수소원자로 변한다. 양성자가 중성자의 베타붕괴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하면 이 붕괴에서는 약한 상호작용과정에 의해 중성자가 전자와 반중성미자를 방출한다. 양성자와 중성와의 충돌에서 같은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중성의 중간자가 생성되는가 하면 두개의 중성자와 양중간자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성자나 중성자보다도 훨씬 질량이 큰 수십개의 수립자가 입자가속기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힘은 입자를 산란 생성 소멸 변환시키는 상호작용인 것이다.
쉽게 만하면 거의 광속으로 달리는 입자들은, 하이젠베르크가 하나의 입자운동이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 것처럼 상호작용하면서 이것이 저것으로 되고 저것이 이것으로 되는 과정적 실재들인 것이다. 이 점이 특히 불교의 사사무애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동양과 사양이 만나다.
장자는 그의 '제물론(齊勿論)'에서 "만물이 동일한 이(理,이치)에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고있다. 즉 그에 의하면 사물은 그 자체 속에 스스로 발생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사물 속에는 고유한 특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자연 또는 천연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때 시비(是非)가 구별되는 것은 달도(達道)에 이르지 못한 데 그 이유가 있으며, 도를 체득해 무심의 심경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사물간의 차별이나 대립은 사라지게 되며 만물은 제일(齊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진리는 하나라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며 중국사상과 불교는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유교나 불교 혹은 도교의 어느 것도 그 본원에 있어서는 동일한 유기적인 역동적 세계상으로 귀착하게 된다.
관자(官子)는 "천도(天道)는 공(空)하며 무형(無形)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중국철학에서는 공허하며 형체가 없으나 모든 현상들을 산출할 수 있는 도의 개념속에 현대 물리학의 장의 개념이 함축돼 있을 뿐만 아니라 기의 개념에서도 그것은 명백히 표시돼 있다. 이 용어는 중국 자연철학의 거의 대부분의 학파, 특히 송대의 성리학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학파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교 도교 불교의 종합을 꾀한 학파였다. 그리하여 동양적 견지에서는 현대 물리학의 견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 관련돼 있어서 그 중 어느 부분도 근본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어떤 부분의 속성들도 어떤 근본적인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부분들의 속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본다.(편집자주:이말은 좀 수정을 해야할것같다.) 그러므로 카프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양의 사상가의 세계관은 모든 현상들의 상호 관련성과 자체 조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물질의 근본적인 구성요소를 부인하는 것에서도 현대 물리학의 부츠스트랩 철학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불가분(不可分)의 전체이며 그 안에서 모든 현상들이 끊임 없이 변화하는 우주 안에는, 어떤 고정된 근본적인 실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동양사상에서는 일반적으로 물질의 '기본적 구성체'라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서양의 과학은 자연의 탐구에, 동양의 철학은 인간의 완성에 그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의 발달은 결국 자연과 인간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게 했고, 그로 말미암아 서양의 과학과 동양의 철학은 같은 사유선상에서 만나게 됐다.
오늘날의 현대물리학의 주요 이론들과 모델들은 동양의 종교나 철학의 유기적이며 통일적인 세계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려주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현대의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오염에 의한 위기적 상황은 더욱더 동양사상의 전체적인 통일적 세계관 내지 자체 조화하는 사상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21 C 물리학의 변화
물리학은 역사적으로 큰 변혁을 두 번씩이나 경험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17세기말에 있었던 뉴턴에 의한 역학 혁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20세기초에 있었던 상대론과 양자론으로 대표되는 현대 물리학의 등장이었다. 이 두 번의 변화는 단순히 물리학상의 변화가 아니라 자연과학 체계 전체를 바꾸어 놓은 커다란 변화였다.
20세기에 한껏 꽃을 피운 현대과학은 20세기 초에 등장한 현대 물리학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에 현대물리학의 근간이 되는 양자물리학이 어느 정도 완성된 모습을 갗춘 후에는 물리학 분야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20세기 후반에는 물리학이 정체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물리학이 20세기 후반에도 아무 일없이 정체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후반에는 특히 물질의 근원을 캐는 입자물리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활동이 전개되었다. 1960년대 제안된 쿼크이론이 소립자 단위에서의 물질의 구조와 상호작용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분야의 연구는 우주의 근원을 밝히는 문제와도 관계되어 있어 21세기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입자물리 분야에서의 이러한 변화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새로운 분야가 1970년대부터 시작된 혼돈과학이다. 뉴턴역학이 등장한 후에 자연과학은 자연의 여러 가지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해 냈다. 그러나 아직 자연에는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설명된 현상보다는 그렇지 못한 현상들이 더 많았다. 과학자들은 자연을 다루는 도구와 방법이 개발되고 개량되면 결국은 자연현상을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법칙을 이용하여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이나 혼돈성은 인간이 자연을 분석하는 능력의 문제이지 자연자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미국의 기상학자 로렌츠는 컴퓨터를 이용한 기상모델의 분석에서 자연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은 인간의 분석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의 하나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자연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과 혼돈성은 기본적으로 자연이 가지고 있는 비선형성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비선형성이란 어떤 원인이 두 배, 세 배가 될 때 그 결과 역시 두 배, 세 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의 제곱, 또는 세제곱, 또는 지수함수 형태로 변해 가는 것을 말한다. 자연현상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데 이 원인들과 결과의 관계가 비 선형적이기 때문에 어떤 원인이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수학적으로 분석해 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뉴욕의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다음 해 중국의 태풍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는 뜻의 나비효과라는 말로 잘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 현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혼돈현상(그동안 분석할 수 없어서 혼돈현상이라고 여기던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방법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혼돈과학에서는 복잡한 자연현상들을 분석하기 위해서 프랙탈 구조라는 새로운 기하학적 구조를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혼돈과학은 이러한 방법으로 종래의 방법으로 다룰 수 없었던 많은 현상을 분석해 내어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혼돈과학은 20세기 후반에 시작한 또 하나의 과학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혼돈과학은 아직 시작단계에 있다. 21세기에 혼돈과학은 물리학에서뿐만 아니라 화학과 생물학, 기하학, 기상학과 같은 과학 분야에서는 물론 사회현상, 경제현상을 분석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생명의 근원-물
1) 물의 극성 (Polar Nature)
물분자는 두 개의 수소 원자가 한 개의 산소원자에 공유 결합되어 있다. 산소원자 외각에 형성된 4개의 전자쌍 궤도 함수 중 2개가 2개의 수소와 공유한 것이다. 물분자는 상당한 극성을 띠는데, 이것은 물분자가 양전하와 음전하를 띤 부분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2개의 수소 원자가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분자 전체가 한쪽으로 치우친 모습을 하고 있다. 물의 극성과 치우쳐진 구조가 물의 독특한 성질을 결정해 준다.
메탄과 같은 사면체를 생각해 보았을 때, 물은 수소 원자 두 개가 두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인데, 어느 모서리를 차지하든 간에 분자는 결국 치우친 모양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산소의 중앙부와 두 개의 수소를 잇는 선이 이루는 각은 약 105°이다.
2) 물과 수소결합
수소결합을 물의 특이한 성질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수소결합은 약한 양전하와 음전하 사이의 전기적 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온결합이나 공유결합에서와 같은 전자의 이동이나 공유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전기적 인력은 극성 분자의 산소와 질소의 전자간에 존재한다. 물을 보면 전기적 인력은 하나의 물분자의 수소와 다른 물분자의 산소 사이에 생기게 되며, 이와 같이하여 두 개의 물분자는 서로 가까이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수소결합은 생물체에서 아주 흔하고, 고분자가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의 좋은 예는 DNA의 2중 나선구조이다. 길게 엉킨 두 개의 나선은 수많은 수소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사실상 수소결합의 약한 결합력 그 자체가 생물학적 반응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이온, 수화껍질 및 용매로서의 물
훌륭한 용매로서 물의 독특한 성질은 극성에 의한 것이다. 소금을 물에 녹이면 이온으로 해리된다는 것을 설명한 바 있지만 사실상 소금의 해리는 수화껍질을 형성하려는 물의 성질에 의하여 더욱 촉진된다. 수화껍질이란 용액 중에서 이온에 느슨하게 결합된 물분자가 이루는 층을 말한다. 예를 들어 물분자의 양전하 부분(수소)은 염소와 같은 음전하 이온을 향하여 배열하여 염소 이온 주위에 수화 껍질을 형성하게 된다. 수화껍질의 맨 안쪽 물분자는 음전하를 가진 산소 원자가 바깥쪽을 향하고, 이들이 다른 물분자의 양전하를 가진 수소 원자들을 끌어당기면서 동심원을 형성한다. 이 같은 현상이 나트륨과 같은 양이온을 중심으로도 형성되는데, 이 경우에는 물분자의 위치가 반대가 되어서 양전하 부분이 바깥쪽을 향하게 된다.
물은 전하를 가진 이온은 물론 극성 분자 주위에도 수화껍질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당류들은 약한 극성을 띠는 수산기를 갖고 있어서 물분자가 이것과 수소결합을 하여 수층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수화껍질 형성에 의하여 극성 당류 분자들은 분자들 자체끼리 덩어리를 이루지 않고 용액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4) 물과 비극성 분자
한 숟가락 정도의 물을 샐러드 기름이 들어 있는 병에 넣고 섞으면 물은 즉시 조그마한 방울을 이루다가 서로 합쳐진 후 기름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물 자체의 강한 상호 인력 때문 이다. 물은 수소결합을 형성하지 않는 비극성 물질과는 결합하지 않는다. 비극성 분자간에는 거의 인력이 작용하지 않으며, 위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물분자간의 상호 인력이 기름 분자를 밀어낼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즉, 물분자간의 상호 인력이 너무 강하므로 그러한 혼합된 시스템 내에서는 비극성 분자를 밀어내는 힘이 더욱 강해진다. 이와 같은 힘은 단백질과 세포막의 구조를 이루는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5) 물-이온화, pH, 산과 염기
비록 물은 공유결합 분자로 존재하나, 물방울 중 극히 적은 부분의 물은 가역적으로 수소 이온과 수산화 이온으로 해리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물분자가 쉴 새 없이 수소 결합을 파괴하고 이온을 형성하며 또한 이 이온들은 계속 재결합하여 다시 중성 분자를 형성함을 의미한다. 물 분자는 5억 5000만개의 분자당 한 분자 정도가 이온으로 해리된다.
순수한 물에서 수소 이온의 농도는 1×10 몰이며, 어떤 물질의 1몰은 그 물질의 분자량을 그램으로 환산한 값과 동일하다. 예를 들어 수소 이온 1몰은 1그램이며, 순수한 물의 수소 이온 농도는 1리터당 1×10 그램 정도이다. 순수한 물의 수산화 이온 농도도 수소 이온의 농도와 동일하다. 실제로 수소 이온은 전자가 없는 양성자에 해당하며, 이와 같은 수소이온은 다른 물분자와 결합하여 옥소늄 이온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수소 이온은 옥소늄 이온을 지칭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물분자의 해리와 결합은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2H2O → OH- + H3O+
위의 반응식은 대부분의 물이 물분자의 상태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기하기도 한다.
H2O → OH- + H+
어떤 물질은 물 속에서 상당한 양의 수소 이온을 내놓기도 하는데, 이러한 물질을 산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위산은 묽은 염산이며, 순수한 염산은 기체로서 물에 녹으면 H+와 cl- 의 이온으로 완전히 해리된다. 어떠한 산이 얼마나 강한가는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수소 이온의 농도에 달려 있다. 염산의 분자량은 36이므로 1몰의 염산은 36그램이고 1리터의 물에 36그램의 염산이 녹게 되면 리터당 1몰의 농도를 가진 염산 용액이 만들어진다. 실제로 염산은 완전히 이온화하므로 염소 이온과 수소 이온의 농도는 각각 1몰이 된다. 이 경우 수소 이온의 농도는 순수한 물의 천만 배에 해당하는 수소 이온을 갖게 된다.
산성 용액의 세기, 또는 산도를 표시하는 간단한 방법은 pH이다. 이 표시법은 용액의 수소 이온 농도를 표시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좀 신맛이 있는 레몬 주스의 수소 이온 농도가 0.01몰이라면, 이를 10 몰로 표시할 수 있으며, 이는 pH2에 해당한다. pH로 표시하면 순수한 물은 pH7이다. pH가 낮을수록 용액의 산도는 증가한다.
염기 또는 알칼리는 물에 용해시켰을 때 양성자를 수용하고 수산화이온을 내놓는 물질을 말한다. 수산화나트륨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강염기이며, 또 다른 염기인 암모니아는 수산화 이온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물로부터 양성자를 수용하여 암모늄 이온과 수산화 이온을 형성한다.
NH3 + H2O →NH4+ + OH-
용액은 산성, 알칼리성 또는 중성일 수 있으나 산성과 알칼리성의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으며, 이것은 수산화 이온과 수소 이온이 만나는 즉시 결합하여 물을 이루기 때문이다. 중성인 순수한 물의 수소 이온과 수산화 이온은 리터당 각각 10 몰이나 수소 이온의 농도가 위산과 같이 10 몰까지 증가하게 되면 수산화 이온의 몰 농도는 10 로 떨어진다. 용액 중의 수소 이온과 수산화 이온의 몰 농도 지수의 합은 언제나 -14가 된다. 약한 알칼리인 바닷물의 수산화이온 농도는 10 이며 수소 이온 농도는 10 이므로 (-6) + (-8) = -14의 지수합이 가능하고 바닷물의 pH는 8.0이 된다.
대부분의 생명 현상이 일어나는 화학적 환경의 pH는 6~8에 속한다. 예를 들어 사람의 혈액의 pH는 약 7.4이며 세포질의 pH는 대부분 중성 부근이다. 예외는 위액과 귤같이 신 과일의 즙 등이며 식물의 체액은 대개 pH 5~7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