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키여행기 [ 32 ]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 성 소피아 성당
2014. 9. 9 제 8 일차 터키에서의 마지막 여정 2
오전에 돌마바흐체 궁전 관람을 마치고 갈라타 다리를 건너 구 시가지로 건너온 후
셀람(SELAM)이라는 기념품 삽에 들러 각자 필요한 기념품을 구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12:19분,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술탄 아흐메트 광장에 도착한다.
터키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오스만 제국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불루 모스크’와
비잔틴 제국의 영화를 상징하는 ‘성 소피아 성당’이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지금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번 터키여행에서의 마지막이자 하이라이트인
'성 소피아 성당'을 관광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성 소피아 성당’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 건축물은
실제 터키에서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라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불루 모스크 전경▲
아야 소피아 박물관(The Aya Sofiya Museum)
'성소피아 성당'의 원래 이름은 그리스어로 ‘하기아 소피아(Hagia Sofia)’였는데,
이를 터키 식으로 발음하면 ‘아야 소피아(Aya Sofia)다.
소피아(Sophia)란 지혜를 뜻하므로 모두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갖고 있다.
537년 성당으로 지어진 이래 916년 동안은 기독교 대성당이었으며,
오스만 제국 시대에서 478년간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되어 오다가
1934년 박물관으로 개조된 후,
1935년부터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1520년 스페인에 '세비야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성당으로
그 규모를 자랑했으며, 1626년에 완공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무려 1,089년 앞선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 때문에 몇몇 역사학자들이 중세의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간주한다는데,
당시의 건축 기술로 볼 때 이처럼 거대한 건물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세계 불가사의의 중 하나로 인정한다고
해도 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사실 이 건물이 지어진 이후 천년이 되도록 그에 필적할 만한
다른 건물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의 역사
오늘날의 '성 소피아 성당'은 그동안 같은 자리에 지어진 세 번째 건물이다.
첫 번째는 AD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324년~337년)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 30년이 지난 360년 2월 15일 대제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재위337년~361년)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지붕이 목조로 된 바실리카(Basilica)양식의 건물이었다.
원래 이 교회는 ‘메가 에클레시아(Megae Ecclesia)’ 즉 위대한 교회(Great Church)라
불렸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박해하여 추방할 때 수도에서 일어난 폭동
으로 404년에 불타 없어졌다.
이를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408년~450년)'가 415년에 대리석 바실리카 양식으로
새로 지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성당도 532년 1월,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527년~565년)'때
히포드롬에서 일어난 니카(Nika)의 폭동에 의해 완전히 불타버렸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는 거의 제위를 빼앗길 번 하였는데, 당시 인기 있던 전차 경주의
두 팀을 응원하던 청색당과 녹색당의 폭동이 반란으로 확대되어 군중들이 황궁에까지
몰려들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려 하였다.
이 때 여걸(女傑)인 테오도라 황후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황제는 황제 답게 떳떳
하게 죽어야 합니다."라고 격려하여 황제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벨리사리우스 등의
장군들을 불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결국 무려 3만 여명의 반란 관련자들을 대량 학살하는 것으로 폭동을 진압한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의 자존심을 걸고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고자 지난 화재로
없어진 성당보다 더 크고, 화재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성당을 지으라고 그해
2월 명령했다.
당시 유명한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안테미오스’와 기하학자인 ‘이시도루스’에게
설계를 맡겼으며, 황금 90톤을 들여 현재 모습의 대성당을 짓게 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매우 부지런한 황제였는데 이 공사에도 엄청나게 빠듯한
기한을 주고 건축가들을 독촉했다.
그리고 성당이 건축되는 동안, 황제는 제국의 모든 속주에 성당을 건축하기위해
필요한 기둥, 기둥머리, 색상 석재, 대리석 등 모든 재료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낼 것을 명령하는 문서를 보냈다.
현재 '성 소피아 성당'에 설치된 녹색 기둥은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붉은 기둥은 레바논의 아폴로 신전에서 이 때 가져온 것이다.
그 결과 532년 2월부터 시작된 건축은 백여 명의 감독 밑에서 1만 명 이상의 인력이
작업한 끝에 5년 11개월이라고 하는 짧은 시간에 당시까지 사상 유례가 없는 광대한
규모의 대성당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드디어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나스가 집전한 하기아 소피아의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참고로 서기 537년이라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로
신라(新羅)는 법흥왕(法興王) 24년,
고구려(高句麗)는 안원왕(安原王) 7년,
백제(百濟)는 성왕(聖王) 15년이 되는 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러한 교회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동방 정교회'로 부터
성인의 칭호와 함께 ‘대제’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어 후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로
불리게 되었으며, 성 소피아 성당은 완공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발생한 기록적인
지진으로 558년에 한 차례 돔이 붕괴되고 이미 사망한 건축설계자들을 대신하여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젊은 이시도로스가 공사를 맡아 다시 돔을 세우는 등 수차례의
지진과 화재와 십자군의 파괴를 거쳤지만 그때마다 재 보수하면서 916년을 이어왔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의 소재지로서 '동방정교회' 제일의 격식을 자랑
하며, 비잔틴 제국의 역대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정치적·종교적 의례가
거행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453년 5월 29일 정복왕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이끌던 오스만 제국에게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면서 성당으로서 임무를 끝냈다.
이 때 술탄 메흐메트 2세는 “그리스도교가 믿는 하나님은 없고, 오직 알라만 존재한다.”
고 외치면서 영토 확장 목적의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성당을 몰수하고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랍(Mihrab)을 성당 안에 새로 세웠으며,
술탄 바예지드 2세(재위1481~1512)와 셀림 2세(재위1512~1520) 때에 이르러
건물 주변에 이슬람교 사원의 특징인 미나렛(첨탑) 네 개를 증축했다.
이후부터 이 성당은 아야소피아 자미(Ayasofya Camii)로 불리게 되었으며
톱카프 궁전(Topkapi Saray) 바로 옆에 위치하여 술탄이 매주 예배에 참석하게 되고,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스크가 됐다
다시 470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 오스만 투르크제국도 무너지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에 의해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자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각국은 성 소피아 성당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터키 정부는 성 소피아를 인류 모두의 공동 유산인 '아야소피아 박물관'으로 지정
하고, 박물관 안에서는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는 일절 금지시켰다.
'성 소피아 성당'이 '아야 소피아 모스크' 되었다가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바뀌게
된 유구한 역사 이야기다.
‘성 소피아 성당’은 눈으로 직접 봐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세계 최고의 걸작 건축물 1위로 선정했을 만큼
불가사의한 기하학적 구조로 지어졌다는데 그것은 당시 건축가가 아닌
수학자들의 머리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그 마지막 코스로 바로 이 '성 소피아 성당'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 관광
12:27분, 가이드로부터 무선 수신기를 배급 받고 드디어 성당 안으로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선다.
잠시 후 소지품 검사대를 거쳐서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두 개의 회랑이 나온다. 외랑(外廊)과 내랑(內㾿)이다.
성당은 서쪽에서 동쪽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본당으로 들어가려면 일단
이 외랑(外廊)과 내랑(內㾿)을 거쳐 가야 한다.
외랑의 천장과 벽은 화산재로 만든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야 소피아의 역사를 알려주는 안내판 등이 걸려 있다.
외랑(外廊) 모습▲
외랑에서 본당까지의 출입문은 2중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외랑을 지나 곧 바로 내랑으로 들어간다.
내랑(內㾿)은 외랑(外廊)에서 첫 번째 출입문을 통해 들어가면 만나는 곳으로
영어로는 나르텍스(Narthex)라고 하며, 성당 정면 입구와 본당 사이에 만들어
놓은 복도처럼 좁고 긴 현관을 말한다.
본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세례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회개하러 온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장소였다.
외랑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첫 번째 출입문과 내랑 일부, 그리고 두 번째 출입문
사이로 본당 내부가 보인다. 두 번째 출입문 상부에는 벽화가 있다. ▲
이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두 번째 출입문 앞에 이르면 문이 모두 9개가 있는데,
9개의 문 중 양쪽 끝 3개씩 6개의 문은 일반인이 드나드는 문이고, 중앙의 큰 문은
황제만 드나들었던 '황제의 문'이다.
그리고 ‘황제의 문’ 옆의 조금 낮은 2개의 문은 고위 관직자, 사제, 대신들이 사용하는
문이었다.
사진에서 맨 우측 큰 문이 ‘황제의 문’이다.▲
‘황제의 문’ 위쪽을 보면 모자이크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가운데 의자에 앉아계신 예수의 양쪽 옆으로 둥근 원이 그려져 있으며,
오른쪽 원에는 띠를 든 천사 가브리엘, 왼쪽 원에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예수의 오른쪽 발아래에는 '레오 6세(재위886년~912년)'황제가 무릎을 꿇고 재혼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하며, 예수의 왼손에 들린 책의 글귀는 그리스어로
"너에게 평화를, 나는 세상의 빛 이다"라는 문구라고 한다.
9세기 말~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아니라 경사진 길로 빙빙 돌면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이는 당시 미사에 참석하는 테오도라 황후와 귀부인들이 가마를 타고 올라가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매우 높아서 일반 건물 4~5층 정도 올라가는 느낌이다.
2층 갤러리(Gallery)
2층 갤러리는 본래 여성들이 예배를 보는 장소이자 종교회의 때 사용하던 곳이다.
갤러리란 건축물에서 벽을 따라 그 길이만큼 만든 좁은 발코니, 또는 플랫폼을 말하는데
화랑(畵廊)을 뜻하는 '아트 갤러리'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2층 서쪽 갤러리에 도착하여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사람이 자그마하게 보인다.
높이가 실감이 난다.
성당 내부
성당 내부는 오랜 세월을 말하듯 내부는 낡고 색이 바랐지만 정말 웅장하다.
부분적인 보수의 흔적에도 원형의 완벽함은 시대를 초월해 생생한 감동으로 전해진다.
다만 한쪽을 보수를 위한 철제 구조물이 흉물스럽게 공존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성 소피아 성당'은 서쪽에서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방향으로 뻗어 있다. ▲
2층 서쪽 갤러리에서 내려다 본 성당내부의 중앙 홀 전경.▲
웹 사이트에서 빌려온 본래 성당내부의 중앙 홀 전경 사진. 현재의 건축 기술로도
기둥하나 없이 짓기가 쉽지 않는데 1,477년 전에 지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건물 8개의 기둥들에는 ‘컬리그래프’라고 하는 아랍 문자가 새겨진 커다란 서예 원판들이
걸려 있어 한때 이곳이 모스크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원판들은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은 술탄 압뒬메지트 1세 때 추가된 것들이다.
직경은 7.5m이고 8개의 원판이 있는데 각각 알라와 무함마드 ,그리고 4명의 정통 칼리프와
무함마드의 손자인 하산과 후세인의 이름을 써놓은 것이다.
1849년에 유명한 서예가인 ‘무스타파 이제트 에펜디‘가 쓴 것으로
현재 이 원판은 이슬람에서 가장 큰 서예 원판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이동하며 남쪽 갤러리부터 구경하기로 한다.
갤러리 중간에 대리석 문이 나온다. '천국의 문'으로 불리는데, 예전 종교회의 장소로
가는 문으로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재위1143년~1180년)'가 1166년 종교회의를
소집했을 때 만들어졌다.
천국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비잔틴 미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모자이크 벽화가
나타난다. ‘데에시스 모자이크 벽화‘다.
데이시스(Deësis) 모자이크 벽화
'데에시스'란 라틴어로 간청, 기원을 뜻하는 단어로,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을 묘사한
작품이다. 1261년에 제작되었다.
그런데 이 벽화에서 특이한 것은 예수님의 눈동자가 좌우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보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 벽화는 회칠을 벋기는 과정에서 상당부분이 훼손되었다.
그림 하단 우측에 조그맣게 원본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
'데이시스 모자이크 벽화'하단 우측에 있는 원본을 그린 그림 사진. ▲
이어서 데이시스 모자이크 벽화가 있는 2층 회랑 중간에서 바라보는 반대편 내부를
사진에 담아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연채광이 충분하다.▼
'데이시스 모자이크 벽화'있는 곳에서 이동하여 2층 갤러리 끝에 이르면
두 개의 모자이크화가 있다. '조에 여제 모자이크’와 ‘콤네노스 모자이크'다.
조에 여제의 모자이크 벽화
조에 여제 모자이크 ▲
조에 여제(재위1028~1050)와 남편인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쿠스(재위1042~1055)'가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11세기에 제작되었다.
여제 조에는 세 번 결혼했는데 처음 이 모자이크에는 그의 첫 남편인 로마누스 3세가
그려져 있었으나 결혼할 때마다 모자이크에서 남편의 얼굴과 머리 위에 쓰인 문구를
바꾸었다고 한다. 72세로 죽은 조에의 얼굴만이 젊은 시절 얼굴 모습 그대로이다.
모자이크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여제(女帝)조에가
왼쪽에 그녀의 세 번째 남편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쿠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남편인 황제는 돈 주머니를 조에 여제는 봉납 명세서를 들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왼손에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은 축복을 내리는 듯 손짓을 하면서
두 눈은 황후 쪽에 쏠려 있는 듯 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무척 이채롭다.
예수님도 본능적으로 남자라는 것을 암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잔틴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女帝) 조에
조에 여제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후(1028-1050)였으며 1042년에는
여동생 테오도라와 함께 잠시 동안이지만 비잔틴 제국의 여제였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8세는 아들이 없었고 딸이 세 명 있었는데
조에는 그중 가장 예쁘고 유일하게 결혼에 문제가 없는 딸이었다.
1028년 아버지가 죽자 조에가 상속권자가 되어 후사를 결정하게 되었는데
로마누스와 결혼하여 그를 황제로 삼았으며,
황후가 된 조에는 자신의 동생 테오도라를 수녀원으로 유폐시켰다.
이 때 황제에 오른 로마누스 3세(재위1028년~1034년)는 결혼할 당시부터 이미
고령이었고 두 사람 사이에 자식도 없었기에 조에는
젊고 잘생긴 미카일과바람을 피우고 그를 애인으로 삼았다.
로마누스 3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조에는 미카일을 즉시 남편으로 받아들이
고 새로운 황제로 만들었다. 이가 ‘미카일 4세(재위1034년~1041년)’다.
그러나 ‘미카일 4세’의 큰 형이자 권력자인 환관 요한네스는 조에를 무력화 시키
고 소외시켰다.
조에는 그러한 요한네스에 맞서 몇 차례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041년 ‘미카일 4세’마저 병으로 죽자 조에는 양자로 삼았던 미카일4세의 조카인
‘미카일 칼라파테스’를 황제로 삼게 했다.
그런데 뒤이어 제위에 오른 ‘미카일 5세(재위1041년~1042년)’도 또 다시 조에를
박해하고 추방시켰다. 이것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의 반발을 가져왔고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결국 ‘미카일 5세’는 4개월 만에 폐위 당한다.
시민들은 적법한 통치권이 있는 조에를 다시 복권하라고 요구하고 조에는 1042년
다시 수도로 돌아와 자신이 추방했던 동생 테오도라와 공동으로 여제가 되었다.
그러나 조에는 2개월도 채 지나기 전에 또다시 남편을 찾았고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 모노마쿠스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고 그를 황제로 세운 후 다시 황후가
되었다. 이가 지금 모자이크 속의 ‘콘스탄티누스9세 모노마쿠스’ 황제다.
조에는 1050년 황후로 죽었는데 황제로는 2개월 남짓, 황후로는 21년 정도 누린 셈이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황제보다 아내인 황후로 살기를 원했던 것 같다.
콤네노스 모자이크 벽화
콤네노스 모자이크 ▲
'요한네스 2세 콤네누스' 또는 콤네노스(재위1118~1143)'로 불리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이레네 황후(1088~1134)', 그리고 우측 측면에 그려져 있는 황태자 알렉시오스 콤네노스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짙은 청색 옷차림의 성모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한
모자이크로 1122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12세기 비잔틴의 그림이다.
'요한네스 2세 콤네누스'부부는 굉장히 독실한 신자였다고 하는데 이 그림도
'조에 여제의 모자이크'처럼 ‘콤네노스 황제’는 돈 주머니를 ‘이레네 황후’는
봉납 명세서를 들고 있다.
그때 당시 기독교를 국교로서 최고 예우를 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그림 속의 요하네스 2세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영광을 이끈 유능한 황제였는데
애석하게도 사냥하다가 일찍 죽었다.
이 황제를 마지막으로 제국의 운명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콤네노스 모자이크'를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성당 2층 갤러리에 있는 벽화 감상을
종료한다. 정해진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감상한 모자이크로 된 아름다운 이 기독교 성화들은 이슬람 모스크로
바뀌는 과정에서 모두 회칠로 뒤덮여져 있던 것을 1930년대 미국인 학자들에 의해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면서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난 것들이다.
그러나 이슬람 문양 제거에 이슬람권의 반발도 커서 회칠 제거 및 모자이크 복원 작업이
80년 넘게 중단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이번에는 동쪽 난간에서 반대편 쪽 내부를 사진에 담아본 후
북쪽 갤러리로 이동 한다. 북쪽 갤러리도 그 폭이 상당히 넓다.
2층 동쪽 난간에서 바라본 성당 내부 ▲
성당 북쪽 갤러리에서 ▲
성당 북쪽 갤러리에서 ▲
북쪽 갤러리를 끝으로 2층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계단을 통해
다시 1층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시간이 별로 없는 듯 가이드가 재촉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성당에서 유명한 한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소원의 기둥’이라고도 하는 '땀 흘리는 기둥'이 있는 곳이다.
땀 흘리는 기둥(Weeping Column)
'땀 흘리는 기둥'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편에 있다.
기둥을 보호하기 위해 동판을 씌우고 구멍을 뚫어 놓았다.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 돌리며 소원을 빌면 엄지손가락이 촉촉해지면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기둥 앞에는 소원을 빌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돌려 보고 있지만 한 바퀴 돌리는 것이 생각처럼
결코 쉽지 않은데, 요령은 엄지손가락을 구멍에 넣고 네 손가락은 아래를 향하게 한 다음
빙 돌리면 한 바퀴 돌릴 수 있다고 한다.
그나마 나는 시간이 없기에 시도조차 못한다.
‘꽃보다 누나’라는 프로에서 여배우 이미연이 애를 쓰던 모습이 생각난다.
1층 본당
2층에서 내려온 우리는 드디어 엄청나게 거대한 중앙 돔과 이를 떠받치는 반원형 돔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1층 본당에서의 성 소피아 성당 모습과 대면한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성 소피아 성당은 이같은 돔 형식으로 만들어진 첫 번째 건축물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섯 개의 돔 건축 중의 하나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특히 중앙 돔은 길이가 동서로 31m, 남북으로 33m이고,
정점까지의 높이는 56.6m다. 무려 15층 건물의 높이에 해당된다.
중앙 돔 주변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는데 이 창으로 빛이 들어와 실내를 밝혀 준다.
당시에는 유리가 없었으므로 대리석 판을 얇게 자른 투조판(透彫板)을 사용하여
창을 만들었다고 한다.
미흐랍(Mihrab)과 민바르(minbar)
1층 중앙 홀 안 쪽 부분에는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에 이곳에 설치한
금색으로 장식된 '미흐랍(Mihrab)'이 있다.
미흐랍이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성지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 팬 곳'을 말하는데,
본래 성당의 제단(Apse)이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 방향을 향하여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중앙이 아니라 메카 방향으로 약간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설치되어 있다.
미흐랍의 오른쪽에는 계단 형식의 설교대가 있다. 이를 ‘민바르(minbar)’라고 부른다.
금요일 합동예배 전에 ‘이맘(Imām)’이라고불리는 성직자가 이 민바르에 올라가 설교를
한다
옴파로스(Omphalion)
중앙 홀의 바닥에는 여러 색의 대리석으로 만든 동그란 무늬의 자리가 있다.
바로 옴파로스다.
옴파로스는 '세상의 중심' 또는 '배꼽'이라는 뜻으로 비잔틴이 로마를 대신하여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이 대관식을 열었던 자리다.
아름다운 형태의 색색의 대리석은 비잔틴 제국 모든 지역에서 운반한 것으로,
흰색, 노란색, 붉은색, 녹색등의 대리석을 원형으로 만들어 장식했다.
큰 원 주변의 12개의 원은 예수의 열두 제자를 상징한다.
중앙 홀은 거대한 돔을 받치는 단 한 개의 기둥도 없지만
가장 자리로 모두 107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본당에 40개, 위층 갤러리에 67개가 있다.
성당은 1500년 가까이 견딘 대리석 기둥과 은은한 샹들리에의 웅장함과 섬세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세계문화유산 성 소피아 성당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 위대한 건축물과 작별하기 위해 내랑을 통해 남쪽 출구로
걸어 간다.
내랑을 통해 남쪽 출구로 나가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
남쪽 출구 문 외벽 위에 새겨져 있는 두 명의 황제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담긴 모자이크다.
남쪽 출구 모자이크 벽화
이 모자이크 벽화는 우측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좌측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아야 소피아를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는 무릎에 앉힌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으며,
아기 예수는 왼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13:10분, 약 40분이 지난 시간, 우리는 성 소피아성당 밖으로 나온다.
터키에서 그리고 이스탄불에서의 관광이 모두 끝나는 순간이다.
관광은 끝났지만 무언지 모를 아쉬움이 길게 남는다.
우리는 이제 터키에서의 마지막 점심식사를 한 후 공항으로 이동해야 한다.
터키와의 작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