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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자혜성
摩詞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感 是故 空中 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반갑습니다. 12월 27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이어서 오늘 반야심경
舍利子(사리자) 是諸法空相(시제법공상) 不生不滅(불생불멸) 不垢不淨(불구부정) 不增不感(부증불감)
이러한 부근을 할 차례입니다.
다시 위에서부터 다시 한번 집어보면은
摩詞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위대하고 수승하고 크고 높고 깊고 뭐라고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깨달음의 지혜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서 저 언덕에 으르는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심 되는 가르침, 핵심이 되는 가르침이다.
하는 그런 경전이고요.
觀自在菩薩(관자재보살)이 깊은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몸도 마음도 모두 다 텅 비어 공한 것으로 비추어보고 일체 모든 고통과 문제들을 해결하느니라.
사리자여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안이하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의 현상이니라. 受想行識(수상행식)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그랬습니다.
반야심경을 처음 공부할 때 서두에 대게 현상을 보고
현상을 본대로 설명하는 양상이 대게 3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첫째는 모든 것이 우리가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그대로 있는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설명하는 유의 가르침, 상의 가르침 이걸 이제 말씀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180도 전환을 해서 없음의 가르침, 空(공)의 가르침 이것은 억지소리가 아니라
전문가의 안목으로 모든 존재의 실상을 볼 때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없다 또는 공이다
이렇게 이제 이야기가 되는 거죠. 그냥 무턱대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을 그러한 시각으로 모든 존재를 본다.
우리의 몸 우리의 마음도 다 그렇게 본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참 누구나 다 경험하는 봐 이니까? 쉽죠.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있는 것, 상의 현상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또 이해하고 하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있다고 하는 일차적인 차원에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사고라든지 일체 기준이 있다고 하는 것에 중심을 두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그것을 180도 전환을 해서 空(공)하다고 하는 것 없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온 이야기가 물질현상, 그다음에 우리 마음의 여러 가지 모습들 감수 하는 것, 생각하는 것, 생각이 좀 더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것, 인식하는 것 이런 마음의 현상들도 그것을 그대로 설명하면 쉽죠.
말하자면 감수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가 설명하기로 하면 내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좋다, 나쁘다, 밉다, 곱다, 춥다, 따듯하다, 등등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이해하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대로 놓고 이해하고 설명하는 그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고 하면 이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런 한 현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부 空(공)하다고 물질적 현상은 모두 공하다 그래서 공한 것이 그대로 물질적 현상이다. 이는 참 정말 차원을 달리한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경지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안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으신 분의 시각은 또 분명이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것을 일러줘고
또 이런 한 시각은 인간의 고되라든지, 문제라든지, 일체 어려움이라든지 이러 것들을 시원스럽게 해결하는 가장 바람직한 해결방법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치가 그렇기도 하지만은 또 이런 이치를 가지고 인간의 고뇌라든지 일체 어떤 이유에서 오는 고통이든지, 일체 고통을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이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 모든 것은 그래요 이치대로 파악하면 문제해결이 제일 쉽죠.
우리가 이치대로 파악 못하고 이치대로 처방을 못하니까 해결한다고 하면서 꼬이고 계속 그렇습니다. 뭐 하는 사업이 그렇고요 인간관계가 그렇고 그렇습니다.
전부 이치대로 제대로 파악해서 해결하면 사실은 쉬운데....
여기서 이제 空(공)으로 모든 존재를 본다고 하는 이 사실은 참으로 보통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엄청나 과제고 큰 과제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존재의 실상이다 하는 데는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거죠.
舍利子(사리자) 是諸法空相(시제법공상) 不生不滅(불생불멸) 不垢不淨(불구부정) 不增不感(부증불감)
사리자야 또 한번 부르죠.
이 모든 법이 공한 모습은
諸法(제법) -모든 것, 여기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것이라고 하는 속에는 물질적 현상, 우리 육신의 문제라든지, 바깥에 있는 4대 문제라든지, 그다음에 우리 정신의 문제라든지 이런 모든 것이 제법입니다.
그것을 諸法(제법) 또는 모든 것, 모든 것이 空(공)하다 이거죠.
모든 것이 공한 모습에는 不生不滅(불생불멸) 不垢不淨(불구부정) 不增不感(부증불감)
이렇게 이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 불어나는 것도 아니고, 감소하는 것도 아니다 그랬어요.
왜 이제 이런 깨달은 분의 안목으로 진실을 말씀하는데 우리에게 왜 이렇게 잘 와 닿지 않은가?
솔직하게 가슴에 썩 쉽게 스며들지 않는가? 이것이 참 큰 화두이고 문제이고 과제입니다.
평생 般若心經(반야심경)을 얼마나 여러 번 외웁니까?
행사 때 마다, 법회에 가나, 어디가나 뭐 般若心經(반야심경)을 빼버리면 불교가 아무것도 되지 않는 다고 할 정도로 般若心經(반야심경)은 불교의 모든 행사 속에 들어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거죠.
깨달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모든 존재의 원점은 空(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공입니다. 공이니까 공이라고 보는 거죠.
우리 눈에는 그렇게 안보여서 쉽게 물론 이해가 되지 않겠죠.
그래서 늘 전문가의 안목 비전문가의 안목은 큰 차이가 있다.
모조품을 가지고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로 오해하고 집착하는 그런 예가 있는가 하면 정말 수억이 값으로 치면 수억이 되는 조선백자를 가지고 개밥그릇으로 사용하는 그런 경우도 있다. 이것이 전문가 눈과 비전문가의 안목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듯이 우리의 육신, 생명, 내가 수용하는 이 세상, 이모든 것을 보는 안목도 전문가의 안목이 있어요. 똑같은 인생으로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세상을 보고 인생을 보는데 있어서 전문가의 안목 있고 비전문가의 안목이 있습니다.
덮어놓고 살면 이건 뭐 전문가니 비전문가니 하는 말이 붙을 수 없을 정도로 엉터리의 눈을 가지고 있죠.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성인의 가르침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좀 관심을 가지고 좀 이해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만 있다 해도 그래도 어느 정도 세상과 인생을 보는데 대해서 좀 남다른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공부를 우리가 하는 거죠.
지금 설사 성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 하더라도 이해가 썩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니까
지금 내 자신에 대해 얼른 이해가 안 되죠.
그런데 반드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살다보면 우리가 스스로 저절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런 경우가 있죠.
먼저 간 사람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봅니다.
나는 지금 펄펄히 살아가지고 이렇게 온갖 옳다 그러다 시시비비 뭐 하고 있고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고 하니까 얼른 납득이 안가지만은,
먼전 간사람, 부모가 되었던지, 친척이 되었던지, 친구가 되었던지, 스승이 되었던지, 도반이 되었던지 가까이에서 여러 해를 함께 늘 이렇게 거의 뭐 같은 생활을 해오던 그런 경우의 사람이, 뭐 부모가 될 수도 있겠죠. 그런 사람이 먼저 갔다라고 했을 경우 그럼 그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보는 거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죠.
역사적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갑이라는 사람이 몇 십 년 전에 또는 몇 년 전에 이 세상에 살았는데, 그런 그 사람이 지금 우리가 제3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본다면 그 사람에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공이죠.
인생의 원점은 공이요, 존재의 원점은 공이요, 세상의 원점은 공이다.
원점에서 출발해서 원점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이거죠.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이 그겁니다. 그러니까 원점이란 뭐니까 공이죠.
공에서 출발해서 공으로 돌아갔죠.
사는 기간 동안 우리가 취생몽사(醉生夢死)하니까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해 어떤 온갖 집착을 하고, 집착하다 보니까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고 그렇긴 하지만은 그 역시 사실은 원점인 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죠.
물에서 물거품이 일어나 가지고 이런 물거품 저런 물거품을 일으키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한 물결 다시 출렁거려버리면 물거품이 전부 또 물로 돌아가 버립니다.
물거품이 일어나지 전에도 물이었고요.
어쩌다가 물거품이 출렁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생겨가지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한 물결 다시 쳐오면 다시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리는 그런 물거품,
그와 같이 우리 인생도 본래공이었고 물거품처럼 한생을 아등바등하다가 또 시간이 경과하면은 그야말로 원점인 공으로 돌아가는 거죠. 이런 것인데…….
내 입장에서 내 인생에다가 기준을 두고 생각을 하니까 이해가 안 되죠.
그러나 먼저 간사람 한 달 전에 갔던지 1년 전 갔던지, 10년 전에 갔던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지금생각해보면 뭐가 있습니까? 참~ 반야심경이야 말로 맞는 말이죠.
모든 것이 공이다. 그대로가 공이다.
지금 그렇게 비추어 보면 은 그것을 미루어서 내 자신을 이해해 보면 공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뭐 이제 얼른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 受想行識(수상행식)이 모두 空(공)이다.
뒤에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도 없다. 色聲香味觸法(색성미촉법)도 없다
모두 없다고 하는 이야기로 진행되는데,
도대체 空(공)이라고 하는 것이 얼른 납득이 안 간다 이거죠.
공이라고 하는 사실이 납득이 가면은 그런 문제 아무것도 아닙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五蘊(오온)에 대해서 설사 설명을 좀 잘못했다 한들, 공한 것을 가지고 설명을 잘못하고 잘하고 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한 것이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는 아무런 허물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소승제 입장에서, 유의 입장, 아함부의 입장, 상의 입장, 상교라고 하고 그러죠. 유교라고도 하는 그런 입장에서 만약에 오온에 대해 잘못 설명했다면 그것은 허물이 될 수 있고 또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을 설명을 잘못 했다면 그것도 또 허물이 될 수 있고,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틀리게 설명했다면 그것 역시 허물이 되지만은 반야심경에서는 그걸 설사 잘못 설명해도 하등의 허물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 없는 걸 가지고 애초에 없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을 가지고 이래 설명했든 저래 설명했든 그건 뭐 허물이 될 까닭이 없는 거죠.
우리가 반야심경을 그렇게 이해해야 되는 겁니다.
사실 반야심경은 없다는 입장을 주로 드러내는 것이지
뭐 수상행식, 안이비설신이, 팔정도, 십이인연, 사성제가 어떻다 그걸 아주 세세하게 이해하자고 하는 그런 단계가 아니거든요. 그것은 벌써 우리가 이야기된 뒤에 그런 상식을 버리기 위해서 반야심경공부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건 뭐 공부하는 사람의 수준이 어떻다 하는 것은 관계없이요.
반야심경의 가르침의 내용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空(공)이라고 하는 것, 없다고 하는 것, 이것이 참 이해가 잘되어야 되는데
지금 각자의 기준에다 맞추어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서 먼저 간사람 입장을 생각해본다 면은 이해가 되지요.
예를 들어서 갑이라는 사람이 1년 전에 우리 집에 어른으로 있었는데 돌아가셨다
그분 입장에서 자식이 어떻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분에게 지금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래요. 사십구제 법문을 할 때 돌아가신 영가님이시여 지금 그 입장에서 지금 돌아가신지 49일이 지났으니
지금쯤은 아마 모든 존재가 무상하다고 하는 사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것입니다.
현상이 무상하다는 것, 직접 경험하셨고 체험을 했으니까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그러니 더 뭐 이상 집착하고 시시비비하고 연연해하고 애착을 갖고 미련을 못 버리고 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얼른 이해를 못 하면은 앞서간 사람 입장이 한번 되어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죠.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없잖습니까. 무엇이 있습니까.
자식이 잘 났든, 못 났든, 세상이 바로 흘러가든, 잘못 흘러가든, 해가 뭐 무슨 365일 해가 늘 떠있던, 365일 해가 한번도 뜨지 않고 깜깜한 밤이 되었든, 돌아가신 분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일년 365일 해가 늘 떠있어도 아무문제가 없는 것이고, 365일 해가 한 번도 뜨지 않는 캄캄한 밤이라 한들 그것도 또한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이죠.
일년 365일이라는 말 자체도 벌써 거기에는 이미 그 사람에게는 모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色受想行識(색수상행식)이 공하다, 또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도 없다. 色聲香味觸法(색성미촉법)도 없다 라고 하는 것을 항상 내 기준에다 대고 이해하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먼저 간 사람의 입장이 한번 슬쩍 되어서 이해해본다 그렇겠구나.
먼저 간 사람의 입장이 머지않아 곧 내입장이 되거든요
그게 어디 먼저 간 사람입니까 바로 멀지 않아서 우리 각자의 입장이 또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이건 이제 억지로 空(공)의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방편으로 사실은 드리는 말씀이고
관자재보살의 지혜라 면은 뭐 굳이 먼저 간 사람의 입장을 빌어서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두고 공한 것으로 보는 거죠.
아주 건강하고 총명한 육신을 가지고 세상이 쩌렁쩌렁하게 설법을 하시면서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미촉법)이라고 이렇게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이해해보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하도 공이 이해가 안 되니까 우리에게 방편으로 이러한 방편을 들어서 이해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태어났다라고 하는 것이든지 돌아갔다라고 하는 것이든지
이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불생불멸(不生不滅) 아닙니까.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에요.
언젠가 태어났었고 그는 또 얼마 전에 죽었다
지금 계산해보면 그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닙니다.
그게 공상, 제법이 공한 모습, 모든 것이 공한 것, 그것이 말하자면 원점이고 본모습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거기에 더럽다 깨끗하다 이건들 거기에 어떻게 뭐 존재할 까닭이 있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설사 좀 깨끗했다 한들, 좀 더러워다 한들 지금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거기 뭐 추운지방에 사는 사람들 태어나서 한번도 목욕을 안 하고 살았다고 한들 태어나기 이전의 어떤 모습이나 태어나서 돌아가신 이후 어떤 모습을 생각해본다. 면은 그 사람이 일생동안 목욕을 하지 않고 살았던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왜냐하면 공이 존재의 원점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사람의 원점 그리고 본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不垢不淨(불구부정)이죠.
더럽느니 깨끗하다느니, 더럽다 깨끗하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가지고 괴로워하고 시시비비 하고 그럽니까.
生滅(생멸)
태어났느니 죽었느니 살았느니 죽었느니 하는 이 문제 가자고 얼마나 시시비비를 일으키고 분별을 일으키고 합니까.
不增不減(부증불감) 더하죠.
불었났다 감소되었다. 내주머니 돈이 불어났다 통장에 돈이 불어났다.
또 어떻게 해서 다 망했다. 없어졌다 감소되었다. 증감
우리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나 깨나 증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들에게 자식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들 돌아가신 분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려받은 재산을 자식이 다 털어 먹었다 한들 또 이미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의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죽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야말로 부증불감이죠. 그렇듯이 현재 그대로도 부증불감이죠.
그것을 이해해야 되는데 우리가, 현재 그대로 두고 부증불감을 이해하고, 불구부정을 이해하고 불생불명을 이해해야 됩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사리자를 불러놓고 모든 법이 공한모습에는 不生不滅(불생불멸)이고, 不垢不淨(불구부정)이고 不增不減(부증불감)이다.
뭐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들 번 것도 아니요. 손해를 보았다고 한들 본 것도 아니요, 그 원점인 공에서 늘 이야기를 하는 거죠.
모든 존재의 원점인 공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대로 몸에 느껴지고 눈에 보이는 그런 성인의 입장 깨달은 분의 입장에서는 이걸 도저히 떠나서는 말 안할 수가 없는 거죠.
이걸 어찌 눈 가리고 아웅 하듯이 이걸 버리고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관자재보살이나 사리자의 입장에 있어서는 도대체 이것을 이야기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거죠.
너무 역력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반야심경을 위시해서 금강경 600권이나 되는 반야부경전이 전부 이런 이치이다 이렇게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그렇거든요.
우리가 좀더 바람직한 안목으로 모든 것을 바르게 본다. 正見(정견)
바르게 보려면 이런 성인의 안목을 빌어서 내 안목으로 이렇게 만들어야 되는 거죠.
또 우리가 정진을 잘 해서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이것이 또 바로 내 살림살이 나의 경지 내 공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렇게 되어야 되지요.
그런 입방이 되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참 씩씩하고 용감하고 활기차고 툭 터지고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대해탈 대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大我(대아)라고 그러죠
大 큰대자 我 나아자
참으로 대아로서 인생을 살 수 있는 그런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그런 거죠.
없다는 소리만 할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진공에서 모유의 삶을 우리가 여기에서 누리자는 것이고 진공에서 묘유의 삶이 또는 대아의 삶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정말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는 거죠.
우리는 뭐 보살행을 하고 싶어도 뭐 보살행까지가 아니더라도 조금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연말연시에 좋은 일 하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요 그러나 선뜩 용기를 못 내는게 뭐니까 애착 때문이죠.
조그마하게 쪼그라들어서 살아가는 그런 작은 삶 작은 애착 때문에 큰 나로서 살지 못하고 텅빈나, 대자유, 대해탈의 나를 이해 못하기 때문에 자유롭고 해탈된 대아의 삶이 그게 안 되는 거죠.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의 공성을 모든 존재의 공성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정말 대아의 삶, 대해탈, 대자유의 삶이 그 순간 펼쳐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생멸의 문제든지 구정, 더럽고 깨끗함의 문제든지, 불어나고 감소하는 하는 그런 문제든지 이런 것들이 모든 존재의 원점인 공의 입장에서 보면 도대체가 있을 수가 없다하는 것입니다. 아닌 거죠. 아무것도 아닌 거죠.
불어나도 불어나는 것이 아니고, 감소해도 감소하는 것이 아니고, 더러워도 더러운 것이 아니고, 깨끗해도 깨끗한 것이 아니다, 생겨도 생기는 것이 아니고, 없어져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 입장에서는 쉽지가 않지만은 먼저 간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런대로 조금 이해가 되죠.
是故(시고) 空中無色(공중무색) 無受想行識(무수상행식)
是故(시고)로 그런 까닭에 空中(공중)에는 모든 것이 공한 가운데는 無色(무색) 無受想行識(무수상행식) 그러죠.
물질도 없다 색은 물질적인 모든 현상을 말하는데 우리 육신 사지로 된 육신으로부터 바깥4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地水火風(지수화풍) 그 4대까지도 없고, 공에는 그게 있을 수가 없죠.
다시 말해서 돌아가신 분에게 동서남북이 어디 있으며 지수화풍이 4대가 어디 있으며, 너나가 어디 있으며, 늙고 곱고 가 어디 있으며, 사랑과 미움이 어디 있으며, 귀하고 천한 것이 어디 있으며, 늙고 병든 것이 어디 있으며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어디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없어요.
살았을 때 죽음이 두렵고 죽음이 있는 것이지 죽은 사람에게는 죽음도 없습니다.
살았을 때 죽음이 있는 것에요. 죽은 뒤에는 죽음이 없어요.
생로병사 우비고뇌 그거 제일 걱정거리고 제일 문제죠. 그거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걸 살았을 때 그걸 이해하면 좀 좋겠습니까.
참 시원스럽게 당당하게 씩씩하게 아주 뭐 강력하게 내하고 싶은 대로 한껏 하면서 정말 뭐 좋은 일하고 싶으면 한껏 좋은 일하고, 보살행을 하려면 얼마나 큰 보살행을 하면서 자신의 어떤 생명을 자신의 의지로 한껏 연소시키면서 살 수 있겠죠.
정말 아주 그렇게 되어야 이제 좀 불법을 만난 보람이고 소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습니다. 공중에는 내4대, 외4대, 어떤 지수화풍, 동서남북, 미움도, 사랑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이 아무 모든 것이 없다. 마음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수상행식을 내가 그렇게 이해하기 쉬운데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지수화풍도 없고 동서남북도 없고 우리가 좋다 나쁘다 높다 낮다 빈부귀천 일체 것이 하나도 없죠.
수상행식도 없다. 그래서 나는 없다 입니다.
그래서 저는 반야심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글자 넉자로 번역이 가능하다. 나는 없다
나는 없다.
대게 한자로 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면은 말이 많아지는데 넉자로 번역이 가능해요
나는 없다 뿐입니다.
내가 없으면 다 없는 거지요 뭐 내가 있으니까 있는 거지, 내가 없으면 뭐가 있겠습니까.
나는 없다 나는 없다 반야심경 길어서 외우기가 힘들면 나는 없다, 나는 없다 그것만 외워도 상당히 마음이 편해집니다. 아주 편안해져요.
궁극적으로 나는 없으니까 사실, 이것 억지소리가 아니거든요.
이걸 이해가 안 되면 먼저 간 사람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라니까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 없는 사람에게 또 무엇이 있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복잡하고 시끄럽고 야단법석을 떠들 지구가 깨어진들 먼저 가버린 사람에게 그게 뭐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죠.
이런 이치를 담고 있는 반야심경 그것을 가장 쉽고 이해하기 간편하게 나는 없다
이렇게 이제 넉자에 담아 외워보면 가볍고 시원하고 아주 효험을 저는 사실 많이 봅니다.
나는 없다 해버리면...
이게 사실 없는 것이지 억지소리가 아니니까요 없다고 하는 근거야 뭐 얼마든지 그 동안 뭐 성인의 가르침에서 불교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들어왔잖습니까.
그리고 나는 없으니까 뭐라고 눈, 귀, 코, 혀, 몸, 뜻,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 다 없다 이거죠.
이거다 군더더기죠. 나는 없다 해버리면 끝나는데,
그 다음에 그것들의 대상인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 이것도 없다. 당연하죠.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가 있을 때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이 있죠.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이 있다는 것은 眼耳鼻舌身意(안의비설신의)가 있다는 뜻입니다.
상대적 것이니까. 그러니까 다 없는 거죠.
처음에 수상행식이 없다고 했을 때 저절로 따라오는 것인데 좀 더 구색을 갖추느라 부연설명을 하는 것뿐입니다.
오늘 반야심경 공부 空(공)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하면 좀 더 깊이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말씀드려 봤고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 色受想行識(색수상행식)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 이모든 것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없다 라고 하는 뜻이다. 이런 표현을 해서 반야심경 이해에 조금의 도움이 될까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반야심경 공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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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정리 : 자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