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본래 삶의 터전을 기반으로 다양한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해 상부상조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사회가 변화되면서 산업화, 도시화, 자본화의 영향으로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관계 맺는 삶의 방식은 퇴화되고
필요에 따라 만났다 헤어지는 기능적인 만남이 관계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웃관계는 불필요해졌고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도 각 부분의 전문가들이 대신해 주게 되었으며
그렇게 사람들은 분절화, 파편화된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맞선전문업, 결혼전문업, 상조전문업, 이사대행업, 간병대행업, 잔치음식 대행업 등
예전에는 이웃의 품앗이로, 인정으로 해결하던 것이
지금은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에 게 적절한 비용만 지불하면 손쉽게 해결되고 있다.
인정이 돈으로 치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속성은,
그러한 철저히 독립적인 삶이 오히려 많은 사회적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경험하였고
결국 인정과 소통, 나눔과 애정이 없는 관계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지금의 사회구조가 가져온 안락함과 편리함과 같은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더욱 더 기술에 의존하게 되면서 공동체 의식을 잃어버린 채
사회적 고립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그렇게 분절화 되고 파편화 되어 고립된 개인이 의지할 곳은
국가시스템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개인이 누리던 주체적 삶의 상당 부분을 국가에 넘겨주면서
국가는 더 큰 권력을 쥐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전에는 공동체가 나눠 맡아 행하던 일을
이제는 국가시스템이 대신 해 주게 되었고 삶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국가에 기대하게 되었으며
그럴수록 우리의 삶은 의존적인 삶, 예속된 삶이 되어버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사회복지의 이상이 아니라
사람이 죽을 때까지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을 장악하고 지배하겠다는 것”일지 모른다는
천규석 선생님의 말씀처럼,
한 동네 아이를 돌보는 일, 옆집 어르신을 살피는 일조차
국가가 대신해 주는 사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국가 주도에 의한 복지시스템이 어떤 수준까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복지체제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진짜배기 복지는 공동체라는 틀 속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김종철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고 조정하기에 용이하게끔 개별화시키려고
“나쁜 사람들이 일부러 만들어 퍼뜨린 그 이른바 행복철학, 복지사회주의'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함석헌 선생님의 경계도 이 즈음 떠오른다.
오히려 복지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커질수록
공동체의 토대를 이루는 자발성에 근거한 이웃의 관심과 참여는 파괴되어 갈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사람살이의 마땅한 본질,
즉 관계 맺고 이웃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시도가 자연스레 주목받게 되었고
우리는 이것을 ‘공동체운동’이라 부른다.
즉 사회와 인간 삶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반성에서 시작한
‘인간의 본성회복 운동’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사회사업가의 지향과 일치점도 찾게된다.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 한다하여
복지예산을 줄이려는 신자유주의적 입장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더라도,
마땅함을 좇아 행하려 하는 사회사업가에게
향방을 정하기 위해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첫댓글 김세진 선생님 ^^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현재 상황에서 국가의 개입이 최소화 될 경우 사람과 사람의 자연스러운 관계로 문제가 해결되기 보다, 문제 해결을 위한 거대한 시장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갖게됩니다.(시장이 국가보다 강력하게 개인을 통제할 것도 같구요. 지금은 오히려 국가가 시장으로 자신의 권력을 넘기려고도 하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국가의 개입을 늘리되 단순히 개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주는 것이아니라, 공동체와 인간 본성을 회복하는 방향일 수는 없는지 하는 고민도 됩니다.
이승훈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예요. 복지순례 섭외 도움 주셨다는 이야기, 한덕연 선생님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카페에서 자주 뵈요~
소규모 마을 중심의 공동체를 지향한 간디는 '마을일꾼'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독립적'이고 '자급자족적'인 마을을 만드는데 앞정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국가에 의한 일방적ㆍ개별적인 복지가 아닌,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적 상호부조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고 살아가는 삶을 지향했습니다. 사회사업가의 역할 또한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에 의한 복지는 '돈'으로 수행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사람들을 예속화시킵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개인의 자주성은 소멸되어가지요..
국가에 의지하지 않는 삶을 위해 자급자족적인 삶이 필요하나, 이미 그러한 삶이 파괴되어버린 대도심 중심의 생활 속에서 그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 사회사업가는 돈이 아닌, 사람(관계) 중심의 사회사업을 통해 개인의 자주성을 살리고 자발성에 기초한 공동체를 만들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좀 더 지속가능하고, 근본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 요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두 분의 글을 통해 깊이 생각합니다. 함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대체로 국가의 속성은 사람들의 국가에 대한 의존성을 키워 그것으로 존재 정당성을 명확히 하려하고 또 강화합니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란 책을 읽으니 국가의 국민에 대한 지배,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지배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해 자세히 나와있었습니다. 군대의 존재, 군사력의 강화를 위해 쉼 없이 외부 위협을 강조합니다. 오직 군대만이 국민을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회복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나 같은 논리로 이해합니다. 국가가 아니면 그 누구도 돕는 사람이 없으니, 옆집 어르신을 살피는 일도 국가(정부)의 '독거노인생활관리사'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아이들과 관련된 끔찍한 사건이 계속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나 공동체성의 약함을 부끄러워하기 이전에 경찰의 무능함을 나무랍니다. 강한 경찰력이 해결책일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동네 어려운 이웃이 있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 나서기보다 그 사람을 살피지 않는 주민센터, 복지관에 먼저 항의합니다.
오늘자 한겨레 신문을 보니 가난한집 아이들이 범죄 무방비에 더 노출된다고 합니다. 경제적 빈부차가 '치안의 빈부차'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문에서도 경찰의 순찰 강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지역 공동체 차원의 환경정비가 절실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다세대 주택은 동네 사람들이 둘러앉아 쉬면서 마을을 살필 수 있는 작은 공공시설을 만드는 것이 범죄 예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놀랍지요. 마을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마을공동체가 살아나 마을의 탄력성(자연력)이 증가되면 약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뿐만 아니라 이런 흉악한 범죄도 예방할 수 있는 근본일지 모릅니다.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임병광 선생님 말씀처럼, 소규모 마을 중심의 공동체를 지향해 나가는 것이 (제게 지금은) 사람살이 마땅함으로 보입니다. 그런 마을을 이뤄가는 과정 속에서 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둘러 앉아 쉬면서 마을을 살필 수 있는 작은 공공시설-이를테면 평상같은거 말이지요?
일일드라마를 보면 거시에 큰 탁자가 있고, 식구들은 아침, 저녁으로 둘러 앉아 밥도 먹고 텔레비전도 보고 차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때로는 가족 모두가 모이기도 하고, 한둘이 앉아 있기도 하지만, 가족들의 만남의 장소-그 탁자가 그 가족의 유대성을 강화시키는 매개물인셈이지요.
마을에도 그런 자리가 있으면 좋겠네요. 할일없고 소문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른 눈으로 보면 지역공동체를 돌보는 역할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네요, 평상! 예전에 읽은 책 '이천동, 도시의 옛 고향'에서 오래된 동네 골목에 놓인 쇼파에 주목했습니다. 오가던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가고, 나눠먹는 공간이었던 동네 쇼파, 바로 평상. 지금은 CCTV가 대신합니다. 영미, 'CCTV 대신 평상을!'이란 캠페인 어때요? ^^
지난 여름 5기압록농활팀이 '달빛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을 했지요. 바로 마을(골목)평상을 사회사업적으로 해석하고 거들어 생동케하려는 시도였답니다. 달빛산책은 그해 겨울 4기농활팀이 진행 했던 '복지생태 마을조사'의 배움에서 나온 실천이었답니다.
이미 뜻있는 분들이 잘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나아가셨군요. 뒤늦게 깨달은 제게도 많이 알려주세요.
봉조리에 있는 당산나무도 생각나네요. 당산나무에 벌집이 있어서 조심하라고 하셨지요. 벌들을 쫓지도 않고, 아이들에게 거기 가지 말아라 하지도 않고, 서로 조심조심 지내는 게 좋았어요.
한겨레 기사처럼, 이런 일을 잘 도울 수 있는 국가의 개입이면 좋겠습니다. 이승훈 선생님의 생각과도 이 점에서 일치합니다.
('재개발'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는 공동체성, 도시계획, 마을의 물리적 구조 등 생각과 이야기가 꼬리를 뭅니다..)
소규모 마을 중심의 공동체, 새로울 것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속에도 있고, 혹은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도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 살려내고 그런 삶이 사람살이 마땅함임을 알려내는 것이 사회사업가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사업가 뿐이 아니라, 그저 자연인으로서도 그렇습니다. 제 스스로도 그렇게 살고 싶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옆집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친구와 자주 만나고, 아이들 서로 봐주고, 어려운 일 서로 부탁하고 들어주고.. / 이승훈 선생님 덕분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임병광선생님, 김세진 선생님 감사합니다.
논의가 흥미롭습니다. 얼마전 '농어촌에서 지속가능한 복지'라는 주제로 글을 쓰며 그동안 농촌복지에 대한 고민을 초록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농촌에서의 사회사업은 참 쉽습니다. ^^ 농촌은 열악해서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지원해야하고 돈들일이 참 많아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이러한 우리의 논의가 주류 사회복지의 화두가 되어지길 바랍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보여집니다. 우리가 사는 문명이 그러하고 사회복지는 그것의 산물이니까요. 마을, 공동체, 복지생태, 자연력, 공생, 지속가능한..... 모르긴 해도 우리의 이러한 사색의 끝은 '땅에 기대어 농사지으며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라 생각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수천년 지켜온 이들의 삶의 문명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사업적 이해와 노력이 시급히 필요한 부분입니다. 단순히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사라져가는 삶으로 지켜보기엔 실존하는 나눔과 보살핌의 시간이 짧고 바탕적 자산이 큽니다.
귀한 공부했습니다. 본문과 댓글 읽으니, 마땅함이 또렷해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