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착한이웃'에서 읽을 글입니다.
농약을 쓰지 않고 땅의 본디 기운을 북돋아서
태평하고 게으르되 도리어 넓은 땅을 풍요로이 경작하는 '태평농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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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불어도 태평한 농사꾼" (이미현, 착한이웃 2005년 4월호)
아무리 천하태평인 농부라 해도 태풍 앞에서 까지 여유만만일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태풍이 불어도 무사태평인 농사군이 있다.
그는 바로 태평농법의 창시자인 이영문씨이다.
현재 그는 진주 인근에 있는 폐교를 매입하여,
종자개발과 농법과 관련된 여러가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모든 것은 흙속에 있다.
왜 그는 '태풍'이 불어도 '태평'한가?
경운한 땅, 부드러운 흙에 심은 씨는 깊게 뿌리 내리지 못하지만,
거친땅, 즉 경운하지 않은 땅, 거친 흙에 심은 씨는 깊게 뿌리 내린다.
이렇게 잘 자란 식물은 뿌리와 줄기의 길이가 같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 태풍이 불어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태평농법이다.
태평농법의 정식 명칭은 무경운 이모작 직파(無耕耘 二毛作 直播) 농법이다.
6월 중하순쯤에 밀과 보리를 베어내고, 그 자리(마른 농바닥)에 볍씨를 뿌린다.
그러 다음 보릿짚이나 밀집으로 덮는다.
물은 열흘이나 보름 각격으로 2~3일간만 대주면 된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벼를 수확한다.
수확하고 난 마른 논바닥에 그대로 보리 씨앗을 뿌리고,
벼수확하면서 생긴 짚을 덮어두면 보리가 알아서 잘 자란다.
여기에는 비료도, 농약도, 제초제도 필요 없고, 땅을 갈 필요가 없으니 인건비도 안든다.
이래서 농사가 되느냐고? 된다.
실제로 그는 30여 년간 경남 하동에서 3만 6천평의 땅을 태평농법으로 경작해왔고
일반 농법보다 더 많은 수확을 올리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답은 우리 흙 속에 있었다.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농법이나 농기계는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다.
이것이 소용되는 것은 일본의 화산재 토양이지, 우리 화강암토양은 아니다.
우리 흙에 맞는 농법을 써야만 병든 흙이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하고,
곡식이 제대로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태평농법이란 이름으로 농사를 지어온지 30여 년.
그를 알아주는 사람보다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손가락짓을 하고
반미친 사람 취급을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러나 이제 이영문씨는 조금도 외롭지 않다.
그와 뜻을 함께 하는 태평농이 400여 명에 이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아들이 그와 같은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농사일에서 손을 떼고 새로운 종자개발과 농법보급에 힘쓰고 있다.
농과대학을 졸업한 두 아들이 그를 이어 3만 6천평의 농사를 짓고 있다.
물론 두 아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옆에서 보니가 쉬워 보여서 그랬을 것"이라고 그는 말하지만,
두 아들의 선택은 태평농법에 대한 검증이다.
자라나서부터 지금가지 곁에서 그를 지켜봐 온 아들보다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검증자가 있을까?
이제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태평농법에 대해 자신할 수 있다.
중심은 과연 어디인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흙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하였는가?
원래 농기계 수리공이었던 그는 농기계 고장이 잦은 이유를 찾아 실험을 하던 중에
땅을 갈지 않은 땅에 심은 모가 훨씬 잘 자라고 수확량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그는 기계에서 농사로 눈을 돌렸고, 농법의 개발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의 시야는 농사에 머무르지 않았고 자연으로, 사람으로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불행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오만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알게 되었다.
살아 숨쉬는 흙, 여러 종류의 벌레, 날짐승, 들짐승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인간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하찮고도 하찮은 자연의 말초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계속 퇴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 이영문의 <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농사꾼 이야기> 17쪽에서
그렇다면 세상의 중심은 과연 어디인가?
여기에 대해 김영문씨는 "모두가 중심이면서 모두가 말초"라고 답하고 있다.
모든 말초가 각자 제 몫을 충실히 해 낼때 모두가 또한 중심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무당벌레도, 청개구리도 아는 이 사실을 인간만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연도, 인간도 아프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통찰은 자연의 소리에 직접 귀기울여 얻은 것이기에
철학자의 그것보다도 훨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갖는다.
이제 그는 다시 기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
기계문명을 거부할 수 없는 시대라면 기계와 자연이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그는 파종, 수확, 운반, 탈곡까지 할 수 있는 친환경적인 농기계를 특허출원하고 있으며,
대량 생산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자동차, 발전기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중심이 달라지면 자연을 해치기만 하던 기계도 자연과 사이좋게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커피나무를 도둑맞다.
태평농법이 널리 보급되면서 그는 여러모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우선 이 농법이 알려지면서 상업적으로 지장을 받은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기는 했지만, 비료나 제초제, 농약, 농기계 회사측에서 달가워했을리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유명세도 치러야 했더.
그가 자문을 해준 정부 연구기관에서 자신들의 연구, 개발한 농법인양 보고를 한 일이 있었다.
그가 개발한 종자를 도둑맞기도 하고, 심지어 그가 시험재배한 커피나무를 몰래 뿌리째 뽑아간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별로 화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태평농법이 널리 보급되어서 우리의 땅을 살리고
공해 없는 먹거리를 사람들이 먹을 수 있다면 좋겠단다.
그는 태평농법을 문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아무 대가 없이 농법을 전수해준다.
그가 개발한 종자도 주위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준다.
그뿐만 아니다. 소비자와 관련한 강의 요청이 들어오면 전국 어디라도 달려간다.
강의료가 얼마인지 묻지 않는다.
교통비를 계산하면 적자인때가 더 많고, 아예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는 소비자에게 당부한다. "눈으로 먹지 말라"고.
소비자가 제대로 알아야 생산자가 변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자연과 함께 살아서 자연의 무욕을 닮았는지, 그는 참 욕심이 없었다.
태평농법도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심으로 시작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지만,
욕심을 버리고 친환경, 친생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시작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자연의 마음으로 돌아가야만, 자연도 제 몫의 수확을 안겨주나 보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기쁠때가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재배한 농산물을 먹고 건강이 좋아졌다고 감사의 말을 전할 때라고 한다.
자신에게서 꼭 약을 가져간 것 처럼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간의수고로움을 다 잊는다고 했다.
문득 그가 치료한 것은 병든 흙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한 흙에서 건강한 먹거리가 나오고
건강한 먹거리가 건강한 사람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 시대 자연과 인간의 치료사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