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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스등을 접해도 이민이란 단어가 그리 유행어가 아닌듯 싶다.
왜 일까? 한국도 이제는 먹고 살만하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내 놓아도 손색이 없어서 일까...
가끔 미국에서 듣는 한국 방송도 이제는 어느정도 안정감을 찾아 가는것 같다.
그 안정감이라는 것이 나의 정치 경제적 나의 프레임과 비슷해서 일까??
2006년은 내가 미국에 첫발을 디딘해다.
오늘은 2018년, 무려 12년을 무엇을 위해서 지냈는지 모르지만 한가지 숙제을 마무리 했다.
시민권 시험을 패스했다.
2004년 그 당시는 이민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로 다가오는 (나의 경우에) 해였던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에 관심이 많았고 그리고 사회적 이슈로도 이민은 좋은 기사 거리였는지 모른다.
1998-9년 IMF을 격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시련을 겪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그 당시 좋은 대형로펌에서 직원으로 일하면서 오히려 반사 이익을 누렸다.
많은 기업들이 망하고 합병하고 그런일로 로펌은 일이 넘쳐 났던 시기 였었다.
나의 로펌에서 했던 일중 하나가 변호사들 성과급을 정리하는 일이 있었다.
변호사들 성과급을 넉넉히 주고 직원들 성과급까지 챙길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또 어떤 사람들은 배을 두드릴 수 있는데,
그 시절 나는 그쪽에 관심은 없었다. 아마도 나는 피해자가 아니기 때문에 몰랐었을 거다.
아내가 둘째을 미국에 있는 친정에서 출산했다.
좋게보면 친정 엄마 곁에서 출산하고 싶은 아내의 순수한 생각이고,
삐딱하게 보면 원정출산을 감행한 것이다.
물론 아들을 임신한 사실을 알고 미국행을 결정했다.
그 당시는 원정출산이라는 것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 훨씬 전 이었다.
다행히 아내는 아들을 순산하고 아들은 우리 가족중에 처음으로 시민권자 되었다.
아내가 미국에서 귀국하고 아이들의 미국 나들이가 잦아 들었다.
친정이 미국에 있다는 이유도 한 몫했던것 같다.
큰 아이가 3살 4살 쯤 미국으로 놀러갔다 유치원을 미국에서 다니고
아내도 동행하고 졸지에 나는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아내가 미국으로 떠나고
회사을 퇴근하고 돌아오는 집은 항상 썰렁하다. 마음도 어디에 둘지 몰라 친구들을 찾지만
친구들도 바쁘다.
남는 시간을 죽이느라 골프샆에 가서 캘러웨이 비버타 드라이브채을 샀다.
그리고 아파트 앞에 위치한 골프 연습장에서 한 바구니에 5천원 했던 볼을
한번에 2 바구니을 쳐야 했다. 그때만 해도 30살 후반의 피끓는 청춘이었나 보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나쁜쪽으로 끓는 피을 분출하려 찾아나섰을 것이다.
우연히 다음 이 카페을 접했다.
그리고 시간나면 들어와서 이민 수기을 읽어봤다.
실패한 이민 수기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성공한 스토리만 여기에 Posting 된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나의 이민 성공수기가 머리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가보지도 않는 미국에 나는 벌써 몸도 마음도 가서있고, 곧 성공하리라 자기최면과 환상으로
머리속이 채워졌다.
여기 카페 활동을 시작했다. 아마도 2004년 아니면 5년 이었던것으로 생각한다.
명동근처 였던것 같은데 거기서 미국에서 오신 시민권자 나이가 꽤 드셨던 것으로 생각하는
그분을 모시고 강연회 같은것도 했었다.
여기 카페지기 (지금은 이주공사 사장님이 되셨는지) 님을 처음 봤다.
그리도 거기서 모인 사람들과 같이 모임도 만들었다.
이름은 하나*** 기억이 않난다.
모임인원은 대략 30명 정도 였던것 같다.
대부분 이주공사을 통하여 미국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 이었다.
닉네임이 준,화니,미래로,네잎클로버,파크로반,처음으로,제시,살아가기,분당푸우 등등 기억이 전부 나지 않는다.
이분들중에 아직도 몇분은 미국에서 연락을 가끔하는 분도 계시다.
물론 내가 아는 분들은 모두 우여곡절 끝에 영주권을 모두 받으셨고 잘 살고 계시다.
나는 이주공사을 통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의 오만은 이주공사라고 하는 회사의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영주권을 받는데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생각했었다.나중에 많이 후회했다.
그당시 이주공사의 대표 매뉴는 아시다 시피 닭공장,생선공장,청소 등등 이었다.
가격은 천차 만별이었지만 공정 가격이 2만에서 대체케이스는 5만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몇몇 분은 이주공사을 통하여 무난히 영주권을 취득했고,
몇몇 분은 이주공사의 논간에 속아서 무척 고생을 해야했다.
만일 미국 이민을 생각하신다면, 이주공사도 한 가지 방법 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꼬이는 인생은 있기 마련인가 보다.복불복 이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로펌에 합병바람이 불었다.
우리보다 더 큰 대형 로펌이 우리 로펌과 합병을 한단다.
물론 나에게 기회는 틀림없다. 모시던 상사는 퇴직을 하시고
실무진에서는 내가 가장 직급이 높았다.
모두들 좋은 기회라고 직원들이 말해줬다. 하지만 나는 큰 건수을 잡았다.
이번 기회에 회사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자!!! 내가 미국으로 가는 것에
가장 정당성을 부여 할 수 있는 건수가 생긴 것이다.
퇴직할 때 나는 마음이 무척 가벼웠는데, 나중에 미국에서 살 면서 가장 큰 후회을 한 것이
직장을 그만 둔 일이다.지금도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 중에 한가지다.
아마도 계속 다녔으며 몸 과 마음의 큰 상처없이 지금까지 살 수 있었을 텐데........
그 당시 큰 돈은 않되지만 소유하던 2채의 집을 정리했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은 먼저 미국으로 보내고 나는 집 정리을 끝내고
3개월 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생활
내 경우의 미국은 처가가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서,
느낌이 처가에 잠시 방문한 느낌이랄까
처가의 도움으로 아파트 얻고 셀폰 개통하고 이것저것 힘든것이 없이
주변을 정리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돈벌이에 나서기 시작했다.
처음에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영어가 않되니까 하루종일 눈치봐가며 감자튀김을 손님에게 주는 일이었다.
큰 소리로 감자튀김(한역).....외치는 일이 한국에서 회계을 전공하고
사무실에만 앉아있던 나에게 무척 힘들게 다가 왔다...아주 힘들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거저 먹는 일인데...
화장실 청소 부터 플로어 청소까지 나는 대한민국 육군만기 제대후 다시 군기가 바짝들어서
재입대을 방물케 열심히 했다. 물론 미국 매니저는 열심히 하는 나을 무척 흐뭇해 했던것 같다...
지금도 식당일을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는 못한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돈으로 그 샌드위치 가게을 인수 하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금전적으로는 좋은 가게는 아니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고 나의 방문 비자는 연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변호사을 만나서 비자을 연기하고, 그때 대략 500불 정도 소요됬던것 같다.
이민국에서 비자 연기 확인서을 기다리는데 피가 마르는 느낌었다.
태어나서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던 같다.
무사히 방문비자는 연기되었다. 6개월
미국에서 신분변경을 준비했다.
아내는 정규 대학에 입학해서 언어습득 과정에 공부을 하고
나는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면을 책임져야 했다.
다행이 신분변경은 무난히 진행됬고 F1을 받았다.
아내가 1년을 대학을 다녔는데 학비하고 보험하고 기타 비용하고
생활비 약간해서 1년동안 5만불 정도을 썼다.
그리고는 정신이 번쩍 트였다. 앞으로도 계속 매년 5만불의 학비을 감당해야 한다면
경제적으로 버틸수 없을것 같았다.
나는 내가 일을 법적으로 할 수있고 아내도 학교을 다니지 않아도 되는 H1b 비자을 위하여
스폰서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피츠버그 펜실베니아 시골 구석의 식당으로 H1b을 받아서 취직을 했다.이때 변호사 비용 1만불(신청비포함)
그리고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혹독한 육체적 일을 감당했다.
매일 12시간씩 중간에 15분 앉아서 점심먹고 일주일에 70시간 이상의 육체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받는 돈은 대략 세금 공제하고 2천5백불 가량됬었다.
훗날 이곳에서 일을 한 대가로 건강 하나는 자신했는데 몸에 이상이 생겨서
몇년후 나는 미국 병원에서 탈장 수술을 받았다.
주말에 가족이 있는 오하이오로 차로 3시간 걸리는 거리을 2년 반 동안 주말 부부 생활을 했다.
겨울에 동부는 눈이 많이 온다. 아주 많이 온다.
가끔은 눈 내리는 겨울 저녁 그리운 가족을 만나러 하이웨이을 달리면서 생각하는 것이
아마도 난 죽으면 눈에서 차가 미끄러 져서 죽을 것이다...생각을 했다
앞이 보이지도 않는 눈속을 자동차 70마일 크루즈을 걸어놓고 꾸벅꾸벅 졸면서
운전하면 서글퍼 지기도 했다. 지금의 일이 목숨을 걸만한 일인가....
운좋게 나는 한번 눈에 미끄러 지기는 했어도 큰 사고는 없었다.
2번의 영주권 신청을 했지만 L/C에서 Audit이 나와서 영주권 진행이 순탄치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 한 판단인지 모르겠다 여기 변호사을 마녀사냥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잘 되지 않았다..이 사이트 소개로 임** 변호사에게 나의 케이스을
의뢰했다. 물론 가격면에서는 비싸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도 참담했다. 지금도 참 밉다. 돈도 않돌려주고 성의도 없고......
이때 대략 1만불 정도 변호사 비용을 썻던것 같다.(H1b 트랜스퍼포함)
2번의 실패끝에 다시 미국의 고향겪인 가족이 사는 오하이오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2번째 H1b 트랜스퍼을 시도했다.
물론 트랜스퍼을 한 회사도 식당이었다. (내가 대단한 셰프 되는것에 관심도 없었는데..)
그리고 트랜스퍼을 한 후 다시 영주권 신청을 했다.
미워도 다시한번 임** 변호사(엘에이에 사무실이 있다)에게 한번 더 기회을 줬다.
하지만 이번에도 변호사 비용 2천불 보내고 진행은 감감 무소식이이다.
L/C에서 또 고배을 마셨다. 왜 나는 불운의 아이콘인지
렌덤 이라는 것이 왜 꼭 나을 선택하는지 모르겠다.
변호사가 자기 변호하려고 만든것이 랜덤 Audit 인가 보다.
2년반 동안 아무 생각없이 일만했다.
평일은 식당에서 주말에는 덴탈랩에서 일했다.
아마도 그해는 1년동안 하루 도 쉬는날 없이 일만했다.
나한테 너무 미안하다.주인 잘 못만나서 몸뚱아리가 무척 고생했다.
식당에서 주인의 횡포가 극에 달했다.
물론 영주권 진행도 진행이 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해야했다 이 지옥같은 식당을 빠져나가려면
E2 비자가 필요했다.
지인의 도움으로 돈을 마련해서 처남과 함께 중국집을 인수했다.
물론 E2 비자는 무난히 승인 받았다 변호사 비용 대략 1만불 소요
아내는 중국집에서 일하고 나는 덴탈랩 일을 찾아 나섰다.
영주권 스폰서을 찾아서 로드아일랜드(미국에서 제일 작은 주)에 있는 덴탈랩에
취직했다. 이때는 E2 임프로이 비자을 가지고 있어서 취직이 자유로워 졌다.
오전에는 덴탈랩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스시 기술이 있어서
미국 나이트 클럽에서 저녁에 일을 했다.
매일 밤마나 미국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나이트 클럽에서 밤문화을 같이 즐기면서
3개월을 보냈다. 스시바가 바쁘지 않아서 가끔 야외 스테이지에서 술 한잔하면서
나름데로 돈도 벌고 밤문화도 즐기고 했다.
로드아일랜드는 나이든 미국 노인들이 리타이어하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좋은 곳으로 기억에 남는다.
로드아일랜드 덴탈랩에서 영주권해 주기로 하고 일을 했는데 주인이 말을 바꿔서
보스톤으로 올라가서 새로운 덴탈랩으로 직장을 옮겼다.
새로운 덴탈랩 사장은 마음씨도 좋고 나에게 무척 잘해 주었던 사장님이다.
너무 고생을 많이해서 힘든사람 마음을 헤아릴줄 아는 분이었던것 같다.
하지만 이 덴탈랩도 주인이 바뀌는 바람에 영주권 진행은 할 수 없었다.
4개월의 보스톤 생활을 청산하고 뉴욕으로 향했다.
그때는 무서운것이 없었던것 같다.영어도 어느정도 할 수 있고
배짱도 생긴것 같았다.
뉴욕의 첫날 도착 새벽 3시에 나는 뉴욕 신고식을 혹독히 치뤘다.
분명 뒤에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경찰 경광등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운번면허증, 허가증을 요구했다.
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않했는데, 나에게 티켓을 2장을 주었다
합쳐서 9백불이다. 아 나에게 총이 있었으면 그 경찰관을 쏘고 싶었다.
나에게 주어진 페널티는 빨간불에서 턴을 해서 1장...턴할때 시그널을 미싱해서
1장 도합 2장이다...뉴욕은 이런곳이다.. 눈뜨고 코베가는 곳이다..
신고식을 치루고 예약한 하숙집으로 찾아갔다.
이곳에서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려서 지내게 되었다.
다음 내용은 시간관계상 2부에서 진행하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에 조심하세요.
첫댓글 너무나 생생한 미국생활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고생 많으셨어요~
한국에 계셨으면 더 편안한 생활을 하실뻔 한거 아닌가요???ㅎㅎ
경험담. 잘,읽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후회 하더군요.
괜히 와서 쌩고생 한다고...
이제라도 잘 되신 것 같아 다행 입니다.
임**변호ㅗ사 잘아 모시겠습니다. 보니 법 없이도 삶을 살분이네요. 다음이 기대가 되고 수업료는 내야 성장합니다.
죄송합니다.남일이라고 구만 꾸벅..2탄이 기대가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제서라도 자리가 잡힌 것 같네요. 건승 바랍니다.
생생하고 재미있네요. 고생도 많이 하셨고...
님에 비하면 저는 그냥 놀고먹는 미국생활입니다. 반성....
글쓰시는분에게 실례지만 그간 5억 에서 10억 정도 손실보신듯 합니다.
돈이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직업에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실수 있었을터
안타갑습니다. 앞으로 좋은일만 일어나도록 기원합니다.^^
잘극복하시고 지금안정적인 생활 하시기 까지 고생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