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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의 성 비오(Pius) 신부
San Pio da Pietrelcina (Francesco Forgione)
BLESSED PIO FORGIONE (Padre Pio)
CAPUCHIN PRIEST
Pietralcina, Benevento, 25 maggio 1887
신분: 신부 / 활동지역: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
활동연도: 1887-1968년
같은이름: 비우스, 피오, 피우스
오상의 성 비오(Pius) 신부
오상의 성 비오 신부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동부의 베네벤토(Benevento) 대교구에 속한 피에트렐치나에서 아버지 그라초 포르조네(Grazio Forgione)와 어머니 마리아 주셉파(Maria Giuseppa Forgione) 사이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 다음날인 26일 프란치스코(Franciscus)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매일미사에 참례하고 기도와 묵상을 즐겨하였다. 10살 때에 그는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부모에게 말하였고, 아버지는 아들의 신학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일하러 갔다.
12살 때 첫 고해와 첫영성체를 한 그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을의 사립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3년 1월 6일 16세의 어린 프란치스코 포르조네는 모르코네(Morcone)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같은 해 1월 22일 수련복과 함께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뒤 1907년 1월 27일에 종신 서원을 하였고, 1910년 8월 10일 23세의 나이로 베네벤토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품을 받은 후 1년 정도 지난 1911년 9월 7일 그의 두 손, 특히 왼손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18년까지 거의 매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오상(五傷, stigma)의 흔적이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15년 10월 10일부터였다. 그는 오상이 보이지 않도록 해 주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얼마 동안은 별 흔적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15년 11월 6일 군에 소집되어 1918년 수도원에 복귀하기까지 성 비오 신부는 1년 혹은 6개월의 병가를 여러 차례 받았으며, 1918년 3월 16일 기관지염 때문에 군복무 불능 판정을 받고 3월 18일 산조반니 로톤도(San Giovanni Rotondo)의 수도원에 복귀하였다.
성 비오 신부는 1918년 9월 20일 그의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오상이 찍힌 것을 알게 되었다. 오상은 처음에는 작은 상처에 지나지 않았으나 몇 달이 지나자 점점 커졌고, 그 후 그는 아물거나 덧나지도 않는 오상의 고통을 50년 동안 겪게 되었다. 그가 오상을 받았다는 소문은 급속히 퍼져 산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성 비오 신부는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1923년 6월 17일에 그는 수도원 내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되 외부인은 참례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고, 그에게 오는 편지의 답장도 금지 당하였다.
미사는 6월 2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봉헌하게 되었으나, 그 뒤 교회의 제재는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1931년 6월 9일에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집행이 정지되었고, 미사도 경당에서 복사 한 명과 봉헌하도록 제한되었다. 이틀 뒤 이 명령을 전해들은 성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순명하였다.
격리된 기간 동안 성 비오 신부는 미사집전과 기도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1933년 7월 1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25일부터 남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고, 5월 12일부터는 여자들에게도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다. 그는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한 애정으로 1947년 5월 19일에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라는 병원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 병원은 1956년 5월 5일에 완공되어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1960년 8월 10일 성 비오 신부의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축하식이 거행되었고, 1963년 1월 22일에는 수도복 착복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리고 1968년 9월 20일 그의 오상 5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성 비오 신부는 1968년 9월 22일 오전 5시에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인 23일 월요일 새벽 2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26일 지하성당에 안치되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충만한 성 비오 신부는 인간 구원을 위한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살았다. 그는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신자들을 영성적으로 지도하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였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거행에 충실했으며, 특히 미사성제를 통하여 그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영성적인 충만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곧 삶이었다. 그는 모든 의지를 신앙 안에서 세웠고 모든 행실을 신앙 안에서 행하였다. 그는 열성적으로 기도생활에 투신하며 많은 시간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보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앙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알 수 없는 뜻마저도 받아들이게 인도하였다.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하였다. 또한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비판과 오해를 풀어나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어가는 1971년 2월 20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는 카푸친회 장상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비오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비오 신부님이 얻은 명성을 보십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게 미사를 지내서 그렇습니다. 새벽부터 잠 중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고해를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쉽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성 비오 신부의 거룩함과 명성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1969년부터 그에 대한 시복시성이 절차가 시작되었다. 1982년 11월 29일 그는 교황청 시성성으로 부터 시복 추진에 대한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5월 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6월 16일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30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아서 '오상의 비오 신부'로 불리는 그는 또한 '파드레 비오'(Padre Pio)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를 존경하여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비오 신부님'이란 의미이다.
성 비오 사제는 1887년에 이탈리아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나,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한 뒤 191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으로 하느님을 섬겼으며, 1918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간직하며 살았다고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6월 16일에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1887-1968)
카푸친의 최근의 성인,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1887-1968)는 1903년에 카푸친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에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평생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던 비오가 1918년에 경당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 하는 동안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오상은 팔과 손과 옆구리에 기적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죄인들과 병자들을 사랑한 비오는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남은 일생을 보냈다. 매일 미사를 드리신 다음 수시간 동안 고해 성사를 죄인들에게 주고 하느님의 자비의 도구가 되었다.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육신의 건강에도 관심을 많이 쓴 성 비오는 산 죠바니 로톤도에서 이탈리아 남부의 가장 현대적인 병원을 세웠다. 널리 인기를 얻은 비오 형제는 항상 기도하는 가난한 형제로 남고 싶어했다. 그리고 1948년에 평화와 교황님의 지향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모임도 조직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형제적인 덕담과 영성 지도를 주었다.
기적과 거룩함, 인정과 유머감각에 가득찬 생활 끝에 비오 형제는 1968년에 죽음 자매를 만났고 2002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성인,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의 시성을 거행하셨다.
(카푸친 작은형제회홈에서)
수많은 기적적인 병치유가 이 수도사제의 간구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예언, 신비한 향내,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공중 부상 등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증언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눈동자가 없어 볼 수 없었던 소녀 젬마 양이 보게 된 것이라든지,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실명한 오른쪽 눈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조반니 사비노의 기적적 치유는 과학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세계 각처에서 수십만의 순례자들이, 어려운 여행에도 아랑곳없이 비오 신부님을 뵙고자 산조반니 로톤도를 찾아온 것은, 단지 기적을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실 수많은 순례자들은 근본적으로 영성적 동기 때문에 비오 신부님 주변에 모여들었다. 대부분 고해성사를 보고, 영적 지도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하기에 역대 교황님들도 큰 사랑으로 비오 신부님을 대하셨는데, 1921년 교황 베네딕토 15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은 돌아가시기 전부터 성인이셨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전한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우리 주님의 오상을 뚜렷이 잘 나타내신 분"이라고 했는데, 그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같은 증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반세기 동안, 비오 신부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다. 선종하기 직전인 1967년에는 만오천 명의 여자와 만 명의 남자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사실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며칠씩 차례를 기다려야 했고 참다운 회개와 통회가 선행되어야 했기에 적어도 편안하고 친절한 만남은 아니었다.
비오 신부님은 신중하지 않은 이에게는 엄격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을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대개는 몇 달 또는 며칠 뒤에 되돌아와 진정으로 뉘우치며 고해성사를 보았고, 그로 인하여 삶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이러한 영성 지도에서 그분의 모든 위대함이 드러나는데, 그는 독특한 지도 방법과 영혼들의 고뇌에 그 자신이 함께함으로써 삶을 변화시켰다.
다음의 말씀이 그 일면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인 생활이란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시작하여 1시간 반 정도 집전하는 미사는,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와 같아지려는 그의 영성의 절정이었다. 밤 1시부터 사람들은 성당 문이 열릴 때까지 서서 기도하며 기다린다. 멀리서 온 그들은 하룻밤을 설치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비오 신부님이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제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자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때문에 성당 문이 열리면 성당은 이내 신자들로 꽉 차고, 신부님의 열정 어린 미사는 때론 두 세 시간씩 계속되곤 하였다.
비오 신부님의 눈에는 자주 눈물이 고여있었고, "왜요?"라는 물음에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는 미사 드리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미사 때마다 양손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제대포에 떨어지곤 하였는데, 온몸으로 십자가의 제사를 재현하는 미사에 대한 그분의 열정은 다음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세상은 태양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미사 성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대 건너편에는 자주, 멀리서 온 순례자들이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아, 제가 하느님을 이렇게 늦게서야 알게 되다니." 하며 회개하곤 했다.
비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한 긴 소송은 1969년에 시작되어 1999년 5월 2일 시복식을 거쳐 2002년 6월 16일로 막을 내렸으나 그분의 사도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되었다.
나는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그리고 타종교인과 믿지 않는 이들이 비오 신부님을 통하여 열성을 회복하고 예수님을 이 시대에 새롭게 만나는 일이 확산되리라 믿는다.
"나는 이 세상에 있을 때보다 세상을 떠난 뒤에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하신 비오 신부님이 그 약속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시리라 믿는다. 성인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심으로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일치하심으로 이 땅의 더 많은 영혼들을 특히 북녘 땅의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나는 고통을 사랑합니다.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께 고통을 받을 수 있기를 간청했고, 그 고통에서 생겨나는 열매 때문에, 또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 때문에 고통을 열망합니다. 내 고통을 통하여 우리 형제들이 구원되고, 불쌍한 연옥영혼들의 고통이 단축될 것입니다."
- 경향잡지, 2002년 11월호에서 -
성 비오 신부는 고해성사 미사 봉사 기도로 유명
파드레 비오(Padre Pio 1887 ~1968)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베네벤토 대교구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파드레는 이탈리아어로 신부를 뜻하는 존칭이다. 비오는 그의 주보성인인 교황 성 비오 5세의 이탈리아어 이름으로 그가 수도회에 들어갈 때 새 주보성인의 이름으로 지은 수도명이다.
아버지 그라치오 포르지오네와 어머니 마리아 주세파 데 눈치오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난 다음날 세례를 받고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2살 때 견진성사를 받고 첫 영성체를 했다. 1903년 1월 6일 그는 모르코네에서 카푸친회에 입회했고 그곳에서 1월 22일 비오 수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10일 베네벤토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1916년까지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해 9월 산 조반니 로톤도로 간 그는 거기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비오 신부는 고해성사와 미사로 유명하다. 사회적인 봉사활동에 있어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집을 1956년 5월 5일 설립했다.
그는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말했다.
50년 이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비오 신부의 사목활동으로 그에게 받는 고해성사로 그와 나눈 상담으로 그리고 그의 위로로 의지할 바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오 신부는 언제나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받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1971년 2월 20일 비오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 교황 바오로 6세는 카푸친회 장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얻은 명성을 보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니요. 그는 겸손하게 바치는 미사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해소에 머물고 주님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몇 년 동안 그의 성덕과 기적들은 거의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카푸친회는 교회법에 따라서 비오 신부의 시복시성을 추진했다. 비오 신부는 이에 따라 1999년 5월 2일 시복됐고 지난 2월 28일 시성이 결정됐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23일]
오상의 비오 신부 시성식 장면
2002년 6월 16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비오 신부의 시성식 장면. 이날 시성식에는 약 30만명의 신자들이 몰려 들어 성황을 이뤘다.
비오 신부의 시성식이 거행된 2002년 6월 16일 그가 타계한 이탈리아 남부 산 조반니 로톤도 성당 앞에 신자들이 몰려있다. 비오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교황 다음으로 높은 존경을 받는 인물로 이날 시성식으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758번째 성인이 됐다.
비오 신부의 시성식이 거행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앙 발코니에 비오 신부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6일 이탈리아 카푸친회 출신의 복자 비오 신부의 시성식을 집전하기 위해 교황청 성 베드로 대광장에 들어서고 있다. 성 베드로 대성전의 정면에는 비오 신부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오상의 비오 신부 생존 비서 에르메린도 디 카푸아 신부
고통의 스승 비오 신부 알리고파
"성 비오 신부님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산 가장 가까운 성인이십니다. 한국교회에 성인을 널리 알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오상(五傷)의 성 비오(1887~1968, 이탈리아) 신부 생존 비서 중 한 명인 에르메린도 디 카푸아(76, 카푸친 작은 형제회) 신부는 "더 많은 한국 신자들에게 성인의 생애와 영성을 전하고 싶다"는 강한 희망을 드러냈다.
이탈리아 출신인 카푸아 신부는 성인이 선종할 때까지 3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영어권 신자들이 성인에게 보낸 편지를 번역하고 답장을 써주는 비서 역할을 했다. 19일 그의 방한은 서울대교구 이창진(답십리본당 주임) 신부가 이탈리아 성지순례 중에 카푸아 신부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특히 올해는 카푸친의 작은 형제회 한국 진출 25주년이 되는 해여서 의미가 남다르다.
카푸아 신부는 "비오 신부님은 상처 때문에 50년간 고통을 받았지만, 모두의 죄를 위해 기도하고 성사를 베푸신 분"이라며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고해소에서 신자들을 맞았고, 특별히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사를 베풀기도 했다"고 말했다.
"비오 신부님은 세상 모든 죄인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18년 9월 29일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에 손과 발, 가슴에 예수님과 같은 상처를 받으셨지요. 상처에는 늘 피고름이 나왔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그 상처는 신부님이 선종하고 나서야 사라졌습니다."
비오 신부가 살던 이탈리아 남부 산 지오반니 로톤도의 카푸친 수도원과 성당은 그 사건 이후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주목을 받았고, 각지의 신자들이 모여드는 순례지가 됐다. 순례자들은 성흔에 입을 맞추고 성인에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달라는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병든 이들이 많이 찾았으며, '고통에 대한 위안의 집'이라는 병원이 지어졌다.
"신부님은 자신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도 항상 주님께 은총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어요. 고통의 중요성을 가르친 고통의 스승이셨습니다."
3년간 성인과 함께 지냈으니 특별한 기억이 있었을 것 같다는 질문에 카푸아 신부는 "비오 신부님도 우리 일반 수사 형제들과 똑같은 분이셨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반적으로 성인이라면 특별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비오 성인도 기쁜 일에 기뻐하고 슬픈 일에 슬퍼하는 수많은 카푸친 작은 형제회 신부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카푸아 신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젊은 사제 시절 비오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봤고, 성인이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것을 계기로 산 지오반니 로톤도에 폴란드 신자들이 많이 찾아온다"며 "순교자와 성인에 대한 공경이 남다른 한국신자들이 비오 성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당부했다.
카푸아 신부는 이번 방한에 성인 혈흔이 묻은 헝겊 조각과 장갑 등 유품을 가져와 성인 숨결을 함께 전하고 있다. 그는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와 서울 삼성산성지, 답십리성당, 대구대교구 형곡성당 등을 방문하고 30일 출국할 예정이다.
[평화신문, 2011년 1월 30일, 이힘 기자]
오상의 성 비오 신부 기념행사 마련
선종 40주년 기념…4~9월 비오 신부 유해 공개
[산 지오반니 로톤도, 이탈리아 외신종합]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처럼 손과 발, 가슴에서 피를 흘려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성 비오 신부(카푸친 작은형제회.1887~1968). 올해로 비오 신부의 타계 4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도메니코 담브로시오 추기경은 1월 7일 이탈리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오 신부의 40주기를 맞아 그가 살아왔고 선종한 이탈리아 동부의 산 지오반니 로톤도 시 정부가 비오 신부를 기리는 기념 행사를 기획 중에 있다"며 "특히 올 4월 중순경부터 9월 말까지 비오 신부의 유해를 성지 순례객들에게 공개하고 추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887년 이탈리아 베네벤토대교구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난 비오 신부는 전쟁과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1918년 초 어느 날, 손과 발 가슴에는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1968년 9월 23일 81세를 일기로 로톤도의 수도원에서 선종할 때까지 반세기 동안 손과 발, 가슴 등에서 피를 흘렸으며, 그것은 어떤 의학적 치료나 과학적 설명으로도 불가능한 기적이었다.
끝없는 기도와 고해성사, 감탄할 만한 고행의 삶을 통해 사도직에 헌신한 비오 신부의 삶은 무신론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분의 현존과 기적을 통해 신앙의 신비와 기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일깨워주고 있다. 비오 신부는 1999년 5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됐으며, 3년 뒤인 2002년 6월 16일 성인품에 올랐다.
[가톨릭신문, 2008년 1월 18일]
오상의 비오 성인 유해 40년 만에 개장
장기보존 처리해 4월 24일부터 일반에 공개 예정
오상의 비오(1887~1968) 성인의 시신이 2일 이탈리아 동부 산조반니 로톤도에 있는 성인 성지에서 개장됐다. 40년 만에 개장된 성인의 시신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고, 특히 성인의 손은 방금 매니큐어를 칠한 것처럼 잘 보존돼 있었다.
성인의 시신은 장기 보존을 위한 화학처리를 거쳐 유리관에 안치돼, 오는 4월 24일부터 일반 신자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공개된다. 사진은 오상의 비오 성인 성지 산조반니 로톤도를 관할하는 도메니코 담브로시오 대주교(왼쪽)가 2일 개장된 성인의 유해를 살펴보고 있다. [산조반니 로톤도(이탈리아)=CNS]
[평화신문, 제960호(2008년 3월 9일)]
오상의 비오,신부 유해 일반인에 첫 공개
9월 하순까지…올해 방문객 100만명 예상
[산조반니 로톤도, 이탈리아 외신종합]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더욱 잘 알려진 파드레 비오 성인(카푸친 작은형제회.1887~1968)의 시신이 4월 24일 이탈리아 동부 산조반니 로톤도에 있는 성인의 성지에서 일반 신자들에게 최초로 공개됐다.
지난 1968년 선종한 후 40년 만에 개장된 성인의 시신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으며, 장기 보존을 위한 화학처리를 거쳐 유리관에 안치됐다. 성인의 시신은 9월 하순까지 공개되며, 순례객들은 전화(39-088-241-7500)로 사전에 날짜와 시간을 예약할 수 있다.
현지 수도자들에 따르면 4월 23일 현재 예약을 마친 성지 순례객들은 약 75만 명에 이르며, 성지 측은 올해 방문객이 1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8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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