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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고향, 그리운 부산 ― 김평일―
―기억력이 좋은 편인지, 나는 한국전쟁 체험을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일 수 있다. 1950년 6월25일부터 9월28일까지 6살 바기 나는 적치하(赤治下)를 체험 하였다. 언젠가 그 기억도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만, 적치하(赤治下) 100일은 큰 상처로 남아 기록하기 두렵다. 아래 기록은 1.4 후퇴 이후의 기록이다.
―중공군이 서울로 침입한 소위 1.4후퇴(51년 1월4일)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彭德懷/ 펑더화이)는 아무도 없이 텅 빈 대도시 서울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과거 서울 점령 100일간 무얼 했길래 -- 서울 사람이 모두 피난을 갔는가? 인민은 물이요 당신은 고기다 고기가 물을 다 잃었으니 이 전쟁은 진다--
* * *
1951년 1월 3일,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하루 전 새벽―, 만 5살 3개월로, 우리 나이 7살 된지 3 일만 인 그날, 6남매 막내였던 나는, 의대생 큰누나가 철도의무실 간호사로 철도원 가족이어서, 그 덕으로, 영등포역에서 피난 열차를 얻어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열차라는 그 열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탓는지 지붕 위에 한 동네, 객차 선반 위에 한 세대, --열차 복도에는 피난 보따리가 산 같은데, 그 위에 앉고, 포갠 피난민들 수많은 세대 ……, 우리 식구에겐 그래도 3인석이 보장 되어 있었다. 중 1 이라 체격이 작은 막내 누나가가 없어져 어머님께서 통곡하셨는데, 나중에 피난 보따리 틈새에 빠진 체 잠든 것을 몰랐었다니,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한 객차 인구밀도는 상상을 불허 했다.
13량에 달하는 길고 긴 열차는 엄청난 피난민과 피난 보따리 무게로 자전거보다 느렸고, 기적을 크게 울리면 기차는 정차하여, 피난민들이 용변을 보도록 했다. 물론 창문으로 오르내렸고, 지붕 위에 가득 탄 피난민들도 객차 창틀을 사다리 삼아 딛고 오르내리는 동작, 노약자 어린이들을 손에 손잡고 오르 네리는 동작은 묘기 수준을 넘었다. 뭘 그리 먹었는지, 대소변이 철길 따라 이어졌으나, 남녀 구별도 없었고, 그러나, 모든 경우가 이해되고, 생존이라는 공동 목표가 일치하는, 마음은 다 한 가족이었다.
변을 보는 사이, 피난민들은 밥을 짓기도 했다. 기적이 3번 불면 기차가 떠난다는 신호라서 덜 익은 밥솥을 들고 난리 아우성이지만, 그 인내와 투지는 감동적이었다. 열려진 창문은 출입문이라 닫을 수도 없었다. 그 열린 창으로, 유엔군 군용열차와 교행할 때 미군들이 먹거리를 마구 던져 넣어주니, 천사표 미군은 피난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영하 10도 이하의 피난길이지만, 누구라, 감기라도 앓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논두렁 얼음 깬 물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았고, 우울증, 신경성 질환 따위는 전혀 없이, 모두가 야수처럼 강건했다. 우리 기차 칸과 지붕위에선 의사 찾는 사람이 2건 있었다. 출산하는 산모와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 부러진 아저씨, 외엔 환자가 없었다. 의대생이었지만 철도 의무실에서 임상경험 많은 알바 생이었던 큰 누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엄청난 인구 밀도로 열흘 넘어 추풍령에 이르니, 김천에서 화물차로 환승하라고 한다. 우리 기차는 병원차이기에 건강한 사람은 탈 수 없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작은 형이 제2국민역에 징집된 큰형 대신 철도국 직원에게 어머니가 반신불수라서, 우리는 환자 가족이라고 완강히 주장 했으나, 당시 환자는 전상(戰傷) 군인이라는 것이 관계자의 독재성 주장이었다. 우리는 김천에서 화물차로 옮겨 탔다.
갈아 탄 화물차는, 많은 피난민이 현지에서 흩어지는 바람에 보다 훨씬 넓고 여유가 있어서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어머님은 제2국민병에 징집된 형을 만나려면 부산으로 가야 한다고 하셔서, 우리 여행은 계속 되었다. 동생이 없는 막내라 아기를 귀여워했는데, 이미 타고 있는 피난민이 아기를 안고 있다. 추풍령에서 태어나 이름을 김추풍령이라고 지었다는 아기다.
기차는 삼량진이던가에서 또 내려야 했다. 전시 동원으로 기차를 쓰지 못한다 하여, 우리는 낙동강 철교를 걸어서 건너야 했다. 피난민 보따리에 반신불수 어머니, 그중 제일 큰 짐은 막내, 바로 나였다. 그래도 제2국민 병에 징집된 큰형 대신, 12살 난 작은 형이 막내, 나를 업고 발밑에 시퍼런 물이 보이는 철로 침목 교량을 건넜다. 그 다리가 아마 구포다리가 아닌가 생각 된다. 다리를 건넌 다음 작은형은 등이 아프다고 내 배를 뒤져 본다. 작은 형이 깎아준 목검을 허리띠에 맨 때문에 손잡이 고리 쇠가 작은형 등에 백인 때문이다. 두툼한 겨울옷을 입어 겉으로 알지 못한 까닭이었으니, 너무나 민망하고 미안 했다.― 평생 그 일을 잊지 못한다. 늘 그리운 작은 형, 태평양을 격하여 늘 그리워하며 산지 50년 이다.
보름 걸려 정착한 피난민 판잣집, 가까이 철도가 지나고 기찻길 밑으로 차도가 지나는 기차굴이 있던, 부산 서면 피난민촌, 큰형은 제2국민병에 징집되어 있어서 6식구가 새우잠으로 살던 판자 집이다. 그 집을 차지한 것도 대단한 행운이었다. 기찻길 뚝방 아래 막지어진 판자촌 동네는 군인 가족 피난민을 위해 지어졌다는데, 소녀 가장이신 큰누님의 의대 친구, 홍정주 누님의 오빠께서 해군 장교여서 그 분 주선으로 입주가 가능했다. 방 하나를 칸막이 한 까닭에 전등이 두세대에 하나, 방문도 두 집에 하나, 그런 집이었다.
놀라운 일은 우여곡절 끝에 정해진 이번 치과대학 졸업 45주년 여행 1박 숙소, 서면 한솔 폴라리스가 피난 당시 서면 집과 위치 오차가 10여 미터 이내로 일치하는 것이 확실 했다. 새벽 3시에 조용히 1128호 숙소를 빠져 나간 나는, 66년 전을 기억, 추리하면서 밤새 답사를 했다. 랜드 마크는 철길과 기차굴다리 ― 철길은 그대로이고 기차굴다리는 2차선 도로가 왕복 6차선으로 확장되어 굴다리 폭이 넓어진 뿐―그 새벽 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찾아간 옛 고향 길과도 같았다.
제2국민병 자원으로 입대하신 큰형이 당시 사령관이 군량미를 일본에 밀수출하여 애국청년 들을 굶어 죽게 한 사건으로 귀향 조치된 큰형을, 서면에서 만났을 때, 뺨에 이빨이 비칠 정도로 말라 죽기 직전이었던 기억이 충격적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그자를 대포로 砲殺하라하셨는데, 총살 집행으로 끝냈다.
형이 돌아 온 뒤 우리 가족은 연산리로 이사 했다. 서면에서 피난 생활을 탈출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녀 가장 큰 누나의 강한 생활력이었고, 이를 돕는 동생들도 큰 몫을 했다. 큰누나의 가족사랑, 그 리더십이 피난지 부산에서 기적을 만들었다.
해방 전 정신대(강제 위안부)를 면제 받으려면 여의사가 되는 것이 정답이었고, 그래서 경성여의전(京城女醫專) 합격해야 했고, 입학은 하늘의 별따기 이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인 1945년 해방직전 봄, 경성여의전을 전 일본 수석 합격인 누나는 해방을 맞아 서울여의대(현재 고대의대)이름으로 공부하셨다.
그러나 시련의 때가 시작 된다. 1947년 7월 막내인 내가 한돌 반, 3살일 때 아버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우리 집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아버지를 잃은 후 서울에 일가친척도 없어 하루아침 큰 짐을 지시고 혼자가 되신 어머님은 그 충격에 중풍으로 쓰러지시니, 그 모든 짐을 맏이인 큰누나가 소녀 가장으로 어머니 병 수발을 포함하여 7식구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큰누나는 의대 공부를 휴학하고, 흑석동 은로초등학교 선생으로 취직하여- 교사로 종사하시던 중, 6.25전쟁을 맞는다.
이미 이때도 큰누나는 방학 때면 영등포 철도 공작창에 시간제 간호사로 이중직을 갖고 동생들을 돌보았다. 밤엔 두 여동생과 뜨개질을 하여 화신백화점에 납품하는 생계형 뜨개질로 뜨개질 달인이 되셨다. 훗날 의사가 되어 개업 하시면서도, 평생 뜨개질 봉사를 하셨다. 보름 전, 2017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작고 선종하셨으니, 향년 만 90세 2개월, 당신의 세례명 마리아 승천 축일 이었다.
부산 피난이 되자 큰 누님은 연산리 제14 야전병원에서 간호사로 남성여고 야간 교사로 상명여고 교사로 겹치기 직장을 가지고 의대 휴학도 복학하였다.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중의 전시 연합 대학을 다녔기 때문이다. 모든 의대를 통합 강의 했는데, 시험만 정확히 봐서 학점을 따면, 직장 생활이 가능 했다.
작은 누나도 언니를 따라 피난지에서 서울여의대로 진학, 같은 의대생으로 , 14야전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니, 큰누나의 큰 힘이 되었고, 제2 국민병에서 돌아온 큰 형 역시 전시 병역 문제로 병역 연기가 되는 서울 사대에 진학하면서, 통역관으로 취업하여 훗날 판문점 휴전회담 통역관, 환도 후엔 신길동 우신초등학교에 주둔한 이탈리아 병원부대 이탈리아어 통역관도 하였다.
큰누나 직장인 제 14 포로수용소 야전병원 앞으로 이사 하니 지금의 연산동, 연산리였다. 연산리 원주민 사이에 돌연 나타난 서울 피난민, 우리가족은 그 땐 몰라도 주민들 사이에 호기심 대상이었을 것이다. - 동래까지 훤히 보이도록 논이 펼쳐진 연산리, 그런, 연산리에서 농사도 안 짓고 포로수용소에서 받는 월급으로 사는 우리 식구를 눈여겨보며, 동네 아줌마들은 생활에 변화가 왔다. 미군들은 현지 민간인 문관을 쓴다. 그걸 알게 된 주민들은 포로수용소에 연이 닿는 우리 누나들을 소개로, 일용잡무, 주로 미군 군복 세탁 업무에 문관으로 취업 했다. 한편 포로 아저씨들은 정에 목말랐고, 외부 인이 너무 그립던 차 더구나 연일 계속 되는 오징어 국에 학을 뗄 만큼, 집밥이 몹시도 그리웠다.
문관 취업으로, 아침 출근길엔 동네 아줌마들도 우리 누나 들과 함께 출근 했는데, 아줌마들 복장은 모두 임신 8개월-. 허리에 탄띠를 두르시고 거기에 고추장, 된장, 김치, 각종 나물을 주렁주렁 매달고, 치마로 덮어 임신부로 위장하고, 정문을 들어서면, 검문 M P(미군헌병)는 출입증 얼굴만 확인 할뿐, 절대 몸을 건들지 않았다. 퇴근길엔 아줌씨들 배는 더 켜져 임신 10개월로 변해 퇴근했다. P.W.(prisoner of war:전쟁 포로)라고 흰 페인트(휘발유로 잘 지워짐)로 쓰이어진 미제 군복, 군화, 담요, 등 등, 포로 일용품이었다.
이들의 반출 물자는 국제 시장으로 제 값을 받고 유통 되어, 연산리 주민들은 부수입을 올렸고,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은 인기리에, 제대로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작은 누나도 이들 아줌마들에게서 힌트를 받아 허리띠 내부에 탄피 주머니 같은 띠를 만들어 페니실린 등 주로 항생제를 넣어 출 퇴근을 했으니, 아마도 단가는 담요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다. 훗날 천주교 입교 후 고백 성사를 보니, 신부님 말씀은 하느님 자비하심이 미치신 것이니, 감사 하라 하셨다나―. 큰누나는 연산리도 무의촌(당시 완전 시골이었음)임을 감안, 동네에서 무의촌 의사로 상담 투약 치료도 하셨다. 의약품을 작은 누나가 가져 나오니 물론 무료 의료봉사를 했다. 자연스레 우리 온 가족은 부산 사람이 되었다.
첫 연산리 집은 "누부야" 네 집 이었다. 그 이웃 개동이란 학생은 누부(누나)가 시집가서 사는 집이라 개동이는 “누부야- “를 복창하면서 늘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사 한 집이 개동이네―개동이는 본명이 아닌 듯 ―우리 큰형 만큼 키가 큰 학생으로 외아들이었다. 그의 늙으신 아버지지가 개동아―라고 불러 우리는 개동이네 집으로 불렀다. 개동이는 개똥이를 부산억양으로 부른 것이다. 그 집은 제14 포로 야전병원 바로 앞집으로 14야전병원 후문과 마주보는 집이었다. 야전병원이 포로수용소인지라 철조망으로 외부와 엄중 격리되어 있고, 그 철조망과 개동이네 집 사이가 좁아 배 나온 사람은 지나기가 어려웠는데 거기만 지나면, 잘생긴 묘지가 있어서 포로수용소 사이에 잔디광장 구실을 했다.
거기서 첨엔 개미 땅강아지들을 잡아 흙을 담은 큰 유리병에 유리병을 차광 했다 벗기면 개미 나 땅강아지 생활을 관찰 할 수 있었으니, 다 작은 형 숙제 덕분이다. 나는 미취학 동네 꼬마들과 범어사 계곡에 가서 가제도 잡고 취학하기 전의 자유를 만끽했다. 맑은 소에 우거진 야생 숲엔 서울서 구경도 못한 검정잠자리도 있었다. 집에 오면 어머니께서 한 말씀하셨다. 가재 갔다 버리라고― 동네 애들은 소금에 넣었다 구어 먹는다는데 그 식도락이 차단 된 것이 지금도 아쉽다.
동네 애들은 다 부산 애들이다. 첨엔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좋은 고래개기 ―하며 나를 놀리며 접근 했는데, 며칠 내 나는 꼬마대장이 되어 버렸다. 그 비결은 형한테 전수받은 해박한 지식 때문이다. ―화랑 관창 같은 역사 위인 이야기로 꼬마들을 감동시켰고, 지구가 무엇인지, 밤하늘 별자리 같은 과학이야기엔 동네 꼬마들 눈동자가 별처럼 빛났다.
14야전병원 후문엔 M, P.위병소가 있었다. 금발에 키는 우리 큰형만한 그 M, P.와 나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작은 형이 손재주가 좋아 미군 나무박스로 장총을 깎아 붕대 끈을 꼬아 어께에 메니 나도 꼬마 M, P. 둘은 같이 근무하였다. ― 취학하기 전까지 ― 14야전 병원 정문 초소로 7살 어린 M, P.는 출근했다. 당연히 M, P.는 내 식사도 마련 했는데, 미제 음식이 내 입엔 딱 맞았다. ―- 포로 아저씨들이 만든 간이 샤워장에 아저씨들이 스피어 깡에 물을 길어 줄을 서고, 금발의 M, P.는 샤워를 시켜 줬다. ―포로 아저씨들의 슬픈 노래가 잊히지 않는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고파서 울고 /저녁에 우는 새 는 /집 생각이 나서 웁니다.―
반면 국군 헌병아저씨들 노래는 아주 신바람 이었다. ―고향을 떠나올 땐 무등 병사요/ 지금에 와서는 특무상사 양팔 에 써 붙인 이내 기쁨을 사랑하는 어머님께 보이고 싶어 ―
이에 동네 아줌마들도 노래를 개작하여 따라 불렀으니
―일등병 이등병은 인격문제요― 상사와 하사는 건방지고요/ 보기 좋은 게다짝(중위 계급장이 민짜 네모 2개)은 늙어 빠지고(대위는 네모 3개, 소령은 태극 한개―)―이 노래 가사를 같은 곡에 포로 아저씨들은 대련으로 다음처럼 불렀다. ― 고향을 떠나올 땐 인민군이요/ 지금에 와서는 피 더블류(P.W.) 등판에 써 붙인 이 내 슬픔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이아실까―
제14야전병원(포로수용소 내 포로 병원은 주말이면 철망사이로 "동민 위안의 밤"을 갖던 포로 아저씨들이 너무 좋았다. 개동아 네 집 뒤편 묘지가 있는 잔디 광장은 토요일 밤엔 멋진 공연장이 되었다. 그 때 동민 위안의 밤에 나오신 분이 서도 명창 이은관 선생님. 그 분도 포로였다. 그 유명한 "반공 포로 석방"은 주말이면 철망사이로 "동민 위안의 밤"을 갖던 포로 아저씨들에게 자유 탈출하도록, 국군 헌병들의 엄호 하에 단행 되었는데, 인민군 출신을 백성으로 품으신 이승만 대통령의 불멸의 업적이다.― 미국의 눈치를 보시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신 國父 이승만 대통령 그러나 1960 년 4월26일 사랑하는 자식(國民)들에게 쫓겨나시고, 외로이 하와이에서 돌아가신다.
생일이 10월이라 우리식 나이 8살 되던 1952년 봄, 거제리에 생긴 서울거제피난국민학교엘 입학했다. 학교 들어가면서 개동이네 집에서 김복순(가명)네 집으로 이사했다. 언어는 집에서 학교에선 서울말을 썼고 동네 꼬마들과는 부산 말을 번갈라 썼는데 부산 사람들은 나를 서울 아이로 알기 어려울 만치 부산 말에 정통했다.
새로 이사 간 집 외동 딸 복순이는 나와 동갑인데 무지하게 공부를 싫어해서 여름방학이 되도록 한글을 못 깨우쳤다. 복순 아버지는 머슴살이로 김 씨네 입주하셔서 사위가 되신 데릴사위이셨다. 온 집안에 궂은 일로부터, 농사 일, 가축 기르는 일까지 대소사를 도맡아 하셨으니, 사위였지만 복순이네 집안의 실제 의식주를 해결하는 가장이셨다. 위로는 홀 장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자식은 물론, 처남 처제를 위해 묵묵히, 즐거이 노동하는 천사표 데릴사위 복순이 아버지-.
― 매부여 매부여 돼지 밥 쭌나 ? 항도중학교 중1학년, 복순이 외삼촌은 아버지 같은 매부를 제 동생 보듯 대했다. 해바지(거제리와 연산리 사이의 옛 지명)에 있는 공장 다니는 복순이의 처녀 이모도 복순 아버지, 형부를 동네북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꼭 한대 칠 어투로 ―근질근질 하나? ― 시비를 걸었다. 그래도 복순 아버지는 늘 웃는 얼굴, 그러나 공부하는 복순이 앞에서 근엄하셨다. 복순이는 머리가 좋은 것이, 아버지가 국어책을 읽으라고 하면 갱상도 말로 소설을 즉각 써서 읽는 척 하면, 아빠는 잘 읽는다고, 흐믓하신 얼굴로, 대견해 하셨다. ―바두기가 삽창으로 들어 온데이― 대견한 듯 바라보시는 복순 아빠, "낫 놓고 기역자 모른다."시는 "절대 문맹"이셨다. 복순이는 잘 사는지―아마도 73세 할마씨로 됐을 터인데-.
서울거제피난국민학교는 거제리에 왜놈들이 도시계획 후 지어 놓은 적산 가옥이 있는 멋진 주거지 뒤 야산에 갑자기 유입된 피난민 인구 때문에 천막으로 신설된 피난민 학교다. 기대 부풀어 등교하니 ― 첫 수업이 유희였다. --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라오너라 노랑나비 흰나비---노래를 부르며 ―담임선생님께서 처녀이신지라 유아 교육이 방불해서 맘에 들지 않았다. 작은형 한테 교육 받은 화랑 관창이 맘속에 자리 잡은 내게는 전혀 궁합아 아니 맞는 수업이었다. --국어시간에는 말을 배우고/ 산수시간에는 하나 둘 배요/ 이와같이 우리들 일학년은요/ 첨부터 배워요 첨부터요 ―- 우리를 너무 아기 취급하는 학과 시간이 맘에 안 들었다. 그러나 조회 시간엔 정신이 번쩍 들게 흥미 있었다.
―우리의 맹세― 하나,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둘,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셋,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 하자 ―조회가 시작 되면 외치는 "우리의 맹세"는 대한민국 사랑하기 맹세였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중공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중공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 /동포야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
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 ―
전쟁은 서부 전선에서 중공군과 미군의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소강상태 이었지만, 우리 국군은 동부전선 산악지대에서 사투를 벌리며, 북진을 하니, 1953년 7월26일 휴전이 선언 되자 동부전선은 거의 금강산 까지 수복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심술궂게 쏟아지는 비바람도요/ 공산군 마주대고 싸우고 계신/ 용감한 아저씨들 머리 위 선/
소리 없이 소곤소곤 노래 불러요―
휴전이 1년은 남은 1952년 여름 방학 직전 학교에서 파하고 나오는 길에 전선으로 가시는 국군 아저씨들 행군을 만났다. 동래 쪽에서 줄지어 거제리로 들어오시는 행군은 아마도 부산역에서 군용열차를 타시고 전선으로 떠나시는 듯-, 아줌마들이 길 양쪽에서 시원한 샘물을 바께스에 들고 나와 표주박 바가지로 떠서 들고, 쫒아가며 한 모금 ,목을 축여 드리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요즘은 냉장고에 이온음료 지만, 그땐 냉장고도 없고 시원한 옹달샘 물이 전부였다.) 전선에 낭군을, 아들을 보내는 아낙의 어머니의 기약없는 이별의 아픔을 어린 눈으로 보았다.
― 태극기 흔들며 /임 떠난 새벽 정거장 / 기적이 울었소! /
만세 소리 하늘 높이 울려 퍼지고/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 용감하게 싸우시나/ 임이여 건강하소서 ―
무사 귀환을 정화수를 떠놓고 빌고 또 비는 늙으신 어머님의 치성이 바로 전투력이다. 한국전쟁 영화 “고지 전”을 보면 휴전 직전까지 고지 탈환 전투가 얼마나 치열 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목숨을 내어 놓았는지, 같은 동포를 왜 그리 죽여야 했는지, ― 누구든 평가해서는 아니 된다. 단지 그 아픔, 마음으로 느낄 뿐이다.
치열한 전쟁 중임에도 국회의원 선거도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하고 한 달쯤 지나서 아마도 1952년 봄이다. --"양ㅇ필 선생을 국회로 보냅시다. 양ㅇ필 선생을 국회로 보냅시다. 작대기는 두나 작대기는 두나"- 궁핍한 그 때도 검정 지프차에 확성기를 달고 선거 운동을 벌렸다. 거제리에서 연산리로 오는 해바지께에서, 어머니의 막내 사랑 때문에 어머니손을 잡고 하교하던 나는, 여러 아줌마들에 끌려 웬 식당으로 들어갔다. 뭐냐고 어머니께 여쭈니 입후보 아저씨가 국밥을 산 다는 것이다. 밥을 왜 사?― 그러면 표를 찍어 주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란다.― 하신다. 이윽고 중년의 경상도 말씨 아저씨가 일장 연설을 하고 박수를 마구 치고 - 고기가 들어 있는 국밥이 나왔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아저씨는 국회의원이 되셨다. 왜 “짝대기는 두나”라 했을까 기호 2번이 경상도 사투리로 두나. 그럼 짝대기는 왜? 선거 운동 중 동네 할마씨들 말씀을 듣고 글을 모르는 유권자 때문에 짝대기가 등장 한 것을 알았다.
포로수용소 내부의 규율은 포로 자치제 이었다. 제 14 야전병원 포로는 아저씨 말고 더러 빨치산 출신의 포로 아가씨도 있었는데, 대부분이 빨갱이한테 당해서 그런지, 반공정신이 투철했고 이런 내막을 잘 아시는 이승만 대통령은 훗날 포로 석방을 결심하신 것 같다. 그래도 포로들 간에 이념 투쟁이 때때로 폭동으로 이어지면, M.P.(미군헌병)들은 취루가스 살포로 진압 했다. 사이렌으로 주민들에게 경고 하면, 주민들은 담요 등으로 방문과 창문을 가리고 가스가 다 확산되기까지 숨죽이곤 했다. 그러나 이런 폭동은 새 발의 피, 사상적으로 위험한 포로만 특별 수용한 거제도 제 100 포로수용소는 상어요리용 횟칼로 반동분자를 처단하는 엽기적 사건은 만화로 발간되기도 했다.
만화는 당시 어린이들에게 요즘 스마트 폰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부산 피난지에서 창간 된 주로 중학생 대상인 “학원” 잡지는 내게 꿈을 선사 했다. 코주부 삼국지 김용환 화백, 꺼꾸리군 장다리군의 김성환 화백은 동아일보에 시사만화 고바우영감을 1970년대까지 연재 했고 직장인들을 주제로 고바우영감의 조카 "고사리군"을 그려 환상 작가이었다. 김성환 화백 만화 꺼꾸리군 장다리군 만화는 중고등학생 대상인데 초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통속 만화가로는 서봉재 화백이 가장 인기가 좋아 서울로 환도 후에도 인기폭발이었던 "밀림의 왕자" 철민이 스토리다. 환도 이후 5학년, 56년도까지 총14권이 출간되었고 그 1권은 1952년 겨울 부산에서 초간이었다. 한국판 타잔 만화인 "밀림의 왕자"는 비행기 사고로 아프리카 오지에 홀로 된 고아 '철민'과 현지인 '제가'추장 그리고 아나콘다 급의 '다나' 큰 뱀의 모험으로 우리세대에게 해외와 아프리카에 대한 시각을 열어주어 세계로 나가게 하는 기여도가 없지 않다고 하겠다. 그 시발점이 다 부산이다. 부산은 당시 출판문화의 메카였다.
1953년 4월진급인 당시 1 학년 동생들이 생긴다는 설렘의 그 시기, 한국전쟁의 총감독 소련(러시아) 독재자 스탈린이 갑자기 죽었다. 스탈린 사후 2주 만에 소련(러시아)국무 회의는 휴전을 결의하고, 실행하니, 휴전회담이 본격화하고, 통일을 포기 못하시는 이승만 박사는 결사 북진통일 관제데모를 밀어붙이신다. 어른들은 곧 서울로 간다고 설왕설래 하던 그 때, 중학교 학생이던 작은 형과 막내 누나는 연일 관제데모에 동원 된다. 53년 7월 26일 휴전의 그날까지 작은 형과 막내누나는 수업보다 데모에 더 치중 되었었다. 처음엔 북진통일 ―통일아니면 죽음을 달라(더위에 지친 누나는 아이스케키 아니면 얼음을 달라 라고 외치셨다나? ㅋㅋ)-- 이후엔 적성감위(赤性監委--어린 나는 적성감히 로 들렸다)물러가라 -- UN휴전 추진 당국이 폴란드 첵코 인도 등 중립국 감시 위원국을 선정 한 것에 대한 관제 데모가 연일 터졌고, 이들 형 누나 세대 데모 연습은 훗날 4.19 혁명의 예습이 되는, 데모 문화의 도화선이 되었다.
앞서 소개하듯 -오로지 민족을 생각하신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이 단행 된 때도 바로 이때였다. 남북 포로 교환 협정으로 반공 인민군 포로가 강제 송환 되는 비극을 방지 하고 희망 인민군 포로를 대한 민국 국민으로 환영 포용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큰 뜻은 전국민의 환영을 받았다. 1953년 초여름 부산 주민은 국군헌병 엄호로 무더기 탈출한 인민군 포로, 곧 반공포로를 집에 숨겨 주었고 더러는, 사위를 삼기도 했다. 미군들은 탈주 포로를 잡는다고 자동화기(L.M.G.)를 탑재한 지프차로 순찰을 하였는데, 결코 발포하지는 않았다.
1953년 휴전 6일전, 7월21일 여름방학은 방학식이 곧 피난국민학교 해산식이었다. 학교 이름도 서울거제피난국민학교를 서울봉래국민학교로 개명 했다. 담임선생님은 환도 할 학생과 부산에 잔류할 학생을 구분하는 학사 과정을 진행하셨고, 우리 반 학생 88명 중 부산에 남는 학생은 2명이었다.
1953년 8월 4일 아침 8시 40분, 우리가족은 환도(귀경) 열차를 탔다. ― 그리고 그 일이 그리운 제2의 고향 부산과 그렇게 오랜 이별이 될 줄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추억의 영등포 역에 내렸고, 땅거미가 질 무렵 흑석동 집에 도착하여, 아웃 집에서 1 박하고 다음날 우리 집에 살던 피난민이 자리를 내어주어. 실로 2년 8개월여 만에 집으로 돌아 왔다.
그 이듬해 1954년 갑오년 3학년 진급 하면서 라디오에서 구성진 노랫가락이 들려온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 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
― 부산 역을 떠나던 그 날 깍쟁이 서울은 날씨가 쾌정 했지만, 부산은 종일 비가 내렸단다.
― 그 부산을 생각하면, 내 마음엔 지금도 비가 내린다.―
저자 소개----------------------------------------------------
1945년 10월 21일 생
1972년 서울대 치대 졸업
1975년 강남(현 김평일)치과 개원
1977년 서울대 대학원 치의학석사
2001년 서울대 대학원 치의학박사
2003년 제1회 치과언론 문화상 수상(서울시치과 의사회*치과신문)
2014년 서울시 치과의사회 회사(會史) 편찬 위원장
치문회 회원
문협 회원(소설부분)
저작활동
단편 -천사와 악마의 공동 고백(등단 작품)/
아버지의 믿음(문협지 월간 문학)/
공수래 공수거가 아닙니다(문협지 계간 한국문학)
넌 픽션 -“착한목자는 양떼를 위하여”/
매부의 십자가
수필 -
테마 수필 “영육간의 건강”(월간 착한 이웃 48회 연재)
테마 수필 “천국” (월간 착한이웃 11회 연재)
테마 수필 한양 정도 600년 (월간 서울시치과의사 회지 15회 연재)
논설 -말보다 귀 (열린뜻 10년 시론 모음집-열린뜻 발행)
현재도 매월 열린뜻지와 치과임상에 시론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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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설 보다 더 재미있는 리얼 스토리 입니다. 이번에 잘 해 드리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수너기형의 늠름한 모습 자체가 행사의 주 프레임 이었습니다. 감사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