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海金氏族譜序
原文 1934年갑술보 解釋2020.1.15. 駕洛 金順大
祖首露王上系卽璿源譜也 譜金海氏下系卽世族家也 以世族而蒙國系信乎靈芝有根而其秀也 璞醲泉有源而其流也
조상이신 수로왕과 상계는 선원보이고, 보첩의 김해김씨 하계는 세족의 집안이다. 세족으로서 나라의 계통을 덮는 것이 진실인가. 영지는 뿌리가 있어서 뛰어나고, 박농천은 근원이 있어서 흘러간다.
長是豈尋常閥閱家之所可同日而語者哉 以愚所問金氏之厥初荷天之休誕膺寶命昉於駕洛而經麗到鮮上下千載之間三王之神明三賢之道學四君之勛勞如彼赫赫而其他
오랫동안 이러하니 어찌 평범한 문벌가의 일을 두 번 다시 말할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질문이니 김씨가 처음으로 하늘의 도움으로 보배로운 생명을 누리게 되었고, 마침내 가락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니 상하 천여년간 삼왕의 신의 기운과, 삼현의 도의 학문과, 사군의 공로는 그토록 빛나고 빛났든 것이 바로 그것이다.
名公碩輔貞忠嵬節爲國棟梁者史不絶書金相國所謂王山金氏之門戶王山高則金與之高王山不毁則金與之俱存者尤菴先生擧以爲序至哉言乎
뛰어난 재상과 어진 신하, 절개와 충성, 높은 충절은 나라의 기둥이 되어 역사책이 끊이지 않고 기록되어 있다. 김상국[1]이 말하기를 왕산은 김씨의 문호이니 왕산이 높아지면 김씨도 높아지고, 왕산이 훼손되지 않으면 김씨도 더불어 보존될 것이다라고 했고, 우암선생도 거론하여 서문에서 말씀하셨다.
[1] 1802년 임술대보 서문을 쓴 안동 김희순.
金氏屢嘗修譜矣而京鄕四派與之協和今日之修譜也 四派亦共之應培提其綱學洙良洙專其事鍾允秉洙浚琬主其刊
김씨들은 여러 번 일찍이 수보를 해 왔고, 서울과 지방의 네(사) 파가 같이 협동한 것이 오늘의 수보이다. 네 파가 역시 공동으로 합심하여 응배가 줄기를 잡아 이끌고, 학수와 양수가 그 일에 전심을 다했으며, 종윤과 병수와 준완이 간행을 맡았다.
鍾燦則議政公後孫也 袖草譜一冊命余爲序余豈其人哉然而有不辭者存一以幸名家之世德不泯一以幸賤务之題名爲榮乃爲之叙曰
종찬이 의정공의 후손인데, 소매에 초간 보첩 한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므로 내가 어찌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이겠는가 마는 사양하지 못했는데, 그 하나의 행운은 명문집안의 세덕이 없어지지 않은 것이고, 또 하나의 행운은 하잖은 일로 맨 앞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영광이라 서문을 써본다.
左氏傳曰三后之胤於今爲庶杜甫氏贈曺霸曰將軍魏武之裔孫於今爲庶爲淸門推此以觀首露王之胤爲庶爲淸者環顧域中可歷歷數也
좌씨전에서 이르기를 ‘삼후의 아들도 지금에는 서민이 되었다.’하고, 두보가 조패에게 써준 글에는 ‘장군은 위무제의 후손이나 지금은 청빈한 가문이 되었네.’라 하였으니 이를 추천하여 수로왕의 후손을 보면 모두다 청빈하게 되어 이 근방을 둘러보면 가히 역력하다.
積慶累仁之餘宜乎芬馥之未沬 鳴乎合族之禮始於周家立宗之法昉於宋朝此君子之所以倣諸古而著爲例者也
경사와 인의가 쌓인 결과는 마땅히 짙은 향기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 종족을 합치는 예의는 주나라에서 종족을 세우는 법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송나라에서 군자들이 여러 옛 규례를 모방하였기 때문에 현저하게 나타난 것이 그 예이다.
金氏其於此得矣乎願金氏上以述三王之緖業下以章三賢之道學四君之功烈使左海之人是則是倣咸知其來處孝家忠國始終不渝焉
김씨들이 이 일을 해냈다. 원하건대 김씨들은 위로는 삼왕의 여러 업적을 기록하고 아래로는 삼현의 도학과 사군의 공적을 밝혀,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따르게 하고 그 근원을 알게 하면,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는 것이 처음과 끝이 다름이 없을 것이다.
則今日金氏之譜奚但朝家之史雖謂之百家源流非過語也 金氏以爲然乎不然乎按譜而澄省以求則孝弟之心必油然而生矣請書此以爲序
오늘날 김씨들의 보첩이 어찌 조정의 역사이겠는가. 그러나 여러 집안의 원류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김씨들이 한 일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보첩을 살펴보면 마음을 맑게 하고 반성함을 구하니, 즉 효도와 우애의 마음이 반드시 피어나니 청하건대 이 글로서 서문에 대한다.
歲甲戌南至月上弦咸平人李鍾宅謹序
세갑술(1934년) 11월 상현(7,8일) 함평인 이종댁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