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갑인보(甲寅譜)
解釋 : 金 順 大 2004. 12. 20.
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序(김해김씨 선원대동세보서) 1)
夫譜者는 叙昭穆明彛倫하야 以敦親親之誼者也라
무릇 보첩이라는 것은 소목의 차례를 정하고 영원한 윤리를 분명히 하여, 돈독한 친목으로 친족간의 정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故로 眉陽蘇氏撰其譜序에 曰觀吾譜者는 孝悌之心이 可以油然而生矣라하니 譜之爲重於人家 固如是也라
따라서 미양(眉陽;지명)의 소씨가 찬(撰)한 그 보첩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보첩을 보면 효도와 우애의 마음이 가히 자연히 생긴다.” 라고 하니 보첩이 사람의 가문에서 중요함이 진실로 이와 같다.
惟我金氏 始祖於駕洛國太祖王而治臻淳厖하야 享國五百年하고 至十三世에 諱庾信 有智仁勇三德하야 佐新羅하야 統合三分之疆土하고 歷高麗入李朝에 名公巨宰繼世而作하야 炳耀史策하고 子姓又藩衍하야 蔚然爲東方大族하니 涵虛亭洪公이 稱吾金獨高於古今者 殆無怪也라
생각해 보면 우리 김씨의 시조는 가락국의 태조왕(수로왕)으로서 나라를 인정스럽고 도탑게 다스려 500년을 통치하고, 13세에 이르러 휘유신(흥무왕;김유신장군)이 지, 인, 용의 3가지 덕이 있어, 신라를 도와서 3개로 나누어진 강토를 통합하였고, 고려를 지나 조선에 들어와, 이름난 관리와 훌륭한 재상이 세대를 거듭하여 나와 역사책에 기록되고, 자손이 또 번성하여 동방의 대족이 되니, 함허정 홍공(홍귀달)이 칭하기를 우리 김씨가 고금에 홀로 우뚝하다. 라고 한 것은 의심할 바 못된다.
吾宗之譜自 英祖三十年甲戌로 二百餘年之間에 續修者 累矣라 然이나 尙有未盡之歎하고 派居於各鄕者取約爲譜하야 所嘗記傳者 以聞見之同異로 遂成岐貳之弊하니 盖根深則枝茂하고 源遠則流長하야 固難免其混焉이라
우리 종족의 보첩은 영조 30년 갑술년(1754)을 시작으로, 200여년의 사이에 계속 수보(修譜)를 여러 번 하여 왔다. 그러나 오히려 미진하다고 한탄하고 있고, 각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파에서 보를 만들어, 일찍이 기록하여 전하는 것들과 들어 보건대 서로 다르고, 둘로 갈라져서 좋지 않게 되어 있다. 대개 뿌리는 깊고 가지는 무성하여 근원이 멀어지고 물줄기가 길어져 그 혼잡함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是而로 其初則同出於一根源而莫辨其支流하야 兄弟或失序하고 叔姪或相錯하야 視之如秦越하니 奚可以講睦而致孝悌之道哉아 識者之所慨恨不己者也라
이리하여 그 시초 즉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으나 그 가지와 흐름을 분별하기 어려워, 형제가 간혹 순서를 잃어버리고 숙질(叔姪)이 간혹 서로 착오가 생겨, 이를 보는 것이 진나라와 월나라[1]와 같으니 어찌 돈목을 가르쳐 효도와 우애의 도리에 이를 수 있겠는가. 식자로서 이를 개탄하는 것이 본인만은 아닐 것이다.
[1]秦越; 중국의 춘추시대의 나라 이름. 진과 월나라와 같이 서로 멀어진 것을 뜻함.
元泰自早歲로 身縻公職하야 國政之是非와 民生之疾苦 聚訟于心膈之間하야 未暇念及於他事러니 一自赴任於宗親會以來로 間嘗閱譜하고 送迎宗親之際에 頗有秦越之感而思欲統合修譜하야 爲爛漫同歸之計하야 遂定時日大會宗族於一堂하야 詢謨僉同일새 於是에 輪告於各道郡하야 一齋收單하야 閱五個星霜하야 功始告竣하니 人將曰任司者之誠勤攸到而祖宗冥佑之力이 實多焉이라
원태(元泰)가 어릴 때부터 몸을 닦고 공직에 들어가, 국정의 시비와 민생의 질고를 마음과 가슴속에 모아서, 그 일을 쉴새없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종친회의 임원으로 된 이래로 틈이 있으면 보첩을 살펴보아, 종친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진과 월나라의 느낌이 있어 통합수보를 해 보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계획이 한곳으로 모아져서, 종족이 한곳에 모이는 큰 모임 날이 되어 그 일을 의논하니 전부가 동의하였다. 이때에 각도와 군에 이 일을 알려 일제히 단자를 모아, 5년동안 교정하고 검열하여 일이 끝났음을 알리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원을 맡은 사람의 정성과 부지런한 바가 조상에 이르니, 조상의 도움이 실제로 아주 많았다.” 고 하였다.
第有所感者는 譜所長宗洙堅執不渝하야 始自受單으로 至發刊히 其爲賢勞不尠故로 玆敢表謝云爾라
다음에 감사를 드리고 싶은 사람은 보소(譜所)의 소장으로 있는 종수(宗洙)가 굳게 이 일을 맡아 변함없이, 단자를 받는 것에서부터 발행에 이르기까지 이를 위한 어진 노고가 적지 않았으니, 이에 감히 감사를 표시하여 말하고자 한다.
駕洛紀元一千九百三十三年 甲寅 三月 日
갑인년(1974) 3월
後孫 前無任所長官 國會議員 駕洛中央宗親會長 元泰 謹序
후손 전무임소장관 국회의원 가락중앙종친회장 원태 근서
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序(김해김씨선원대동세보서) 2)
恭惟我大駕洛國 太祖王 始祖 受命誕降하사 立基定邦以來로 闢鴻濛 開民彛하사 以致熙皥之政하시고 俾蒙康衢之樂者는 殆天授神從之休美요 非比尋常君牧之可道也라
삼가 생각해 보면 우리 대가락국 태조왕(수로왕)인 시조가 <하늘의> 명을 받고 탄강하여, 기초를 세우고 나라를 정한 이래로, 큰물을 열고 백성의 영원한 도리를 열어, 밝은 정치를 펴기에 힘쓰니, 더욱 더 <은혜를> 입어 큰 거리에 즐거움이 넘치는 것은, 하늘이 준 신을 따르는 아름다움이니, 항상 찾아서 비교하지 않는 것이, 군목의(군자가 백성을 다스리는) 옳은 도리이다.
[1]康衢; 사방으로 두루 통하는 번화한 큰 길거리
由是로 聖嗣神孫이 繼繼承承하야 文武將相이 無世無之하고 龍鳳璿源이 彌萬國內하여 不許餘姓之追從者錦錦二千年于玆矣라
이런 이유로 성스러운 사손과 신의 자손이 계속 이어져서 문무의 장수와 재상이 끊이질 아니하고, 용과 봉의 조상들이 두루 온 나라에 있어, 타 성씨의 추종을 불허하며 면면히 이어온 지 2000년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然이나 金枝玉葉은 星羅碁布하야 宗支昭穆은 難可殫明하고 同源同根之親이 便若路人之歸者 不啻往往則 烏可副吾聖祖 同視一身之所企也리요
그러나 금지옥엽은 별과 같이 퍼지고 바둑의 돌같이 많아져, 종손과 지손의 소목을 전부 명백히 하는 것이 어렵고, 같은 근원과 같은 뿌리의 친족이 다시 길가는 사람으로 돌아가 버리는 일이 <한 두 번>뿐만 아니고 때때로 있으니, 어찌 성스러운 조상을 같이 바라보고 한 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是所共憂浩歎者 久矣러니 幸今 全宗之詢議로 編成大同譜而散而遠者로 統而合之하고 古而湮者를 溯而明之하니 昔之若疎者를 今以親之하고 前之不知者를 今以曉之則百代花樹之情은 資乎此而尤如盛矣리라
이러한 것들을 같이 우려하고 탄식해 온 것이 오래 되었으나, 다행히 지금 전 종친의 의견으로 대동보를 만들어 흩어져 멀리 사는 사람들을 통합하고, 옛날에 없어진 것을 찾아 올라가 밝히니, 오래 전부터 소원해진 사람들이 지금 친목하게 되고, 전에 알 수 없었던 사람을 지금 환히 알 수 있게 되니, 오랜 세대의 화수(花樹)의 정은 이를 바탕으로 더욱 성하게 될 것이다.
豈非久遠之所賴而不億麗孫의 不匱之活源也리요 興感之餘에 敢記數言而頌之하고 復以謝 僉宗諸丈之不惜勞苦之地云爾라
어찌 오래된 바에 의지하지 않고서, 헤아릴 수 없는 후손의 살아 있는 근본에 대한 것이 없어지지 않게 하겠는가. 들뜬 감정이 남아 감히 여러 말을 기록하여 이를 기리고 다시 여러 종친과 어른들의 아낌없는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駕洛紀元(後)一千九百三十三甲寅 月 日
1974년
駕洛太祖王 後孫(七十四世) (參判公派) 宗孫 榮鳳謹序
가락태조왕 후손(74세) (참판공파) 종손 영봉 근서
序(서) 3)
夫 北極斗牛는 率衆星而 旋斡於宇宙하고 崑崙太白은 萃群山而逶迤於大地하니 不由於大經大本則 烏能 如是不紊不蹇於 億萬世之光陰耶아 天公開闢之意 亦非偶然也로다.
무릇 북극성(북두칠성, 견우성)은 많은 별을 거느리고 우주를 돌고 있고, 곤륜산과 태백산은 여러 산을 모아서 대지에 연이어 있으니, 큰 이치에 유래하지 않는 큰 근본이, 즉 어찌 억만 세대에 있어서 이와 같이 어지럽지 아니하고 절름발이가 되지 아니하겠는가. 하늘이 개벽한 뜻도 역시 우연이 아니다.
唯我 駕洛國 太皇太后는 以天降之聖으로 定基業於神邦하사 治國立敎에 樹德無彊하시니 欽明日月은 光被四表하시고 人紀文明은 于玆始矣라
오로지 우리 가락국 태황.태후(수로왕.허왕후)는 하늘에서 내려온 성인으로 신의 나라에서 터를 잡고, 나라를 다스리고 가르침을 세우니, 베푼 덕이 끝이 없고 밝은 해와 달은 그 빛이 사방에 달하고, 인간의 문명이 이에 시작되었다.
五百年 無爲之治는 燦然於王史하여 聖子神孫은 繼繼承承하야 文武碩德은 掘拇朝野하고 不億麗孫은 遍滿於率土之內하야 爲孝爲忠에 愈久愈昌하니 環東土而 謂姓者孰有追於我哉아
500년간의 사심없는 정치는, 찬연히 왕의 역사에 남아 성스러운 자손들은 대대로 계승되어, 문무의 덕업이 조야에 우뚝솟아 첫째가 되고, 셀 수 없는 후손은 이 땅에 널리 퍼져 효자와 충신이 더욱 변하지 않고 많아지니, 우리나라 내의 성씨들 중에 누가 우리를 따라올 것이 있겠는가.
實是 列聖祖 無量遺澤이 綿延於萬古하야 釀成與天地 無窮之善慶也로다
실제 이 열성조가 수많은 업적을 남겨, 만고에 넓게 퍼져 하늘과 땅을 이루니 무궁한 선과 경사로다.
於戱 盛哉라 豈不興感於 駕洛之 靈源哉리요 然이나 歲久代遠에 亦不無 疎遠之嘆하니 比如 萬里長江에 支流分波는 難可溯及이요 千尋洪幹에 金枝玉葉은 莫可紀極이라
아하! 가상하구나. 어찌 가락의 영령과 근원에 흥감이 없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고 대수가 멀어져, 또한 소원해 진 것에 대한 한탄이 없지를 아니하니, 비교하자면 만리장강의 지류와 분파는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알아내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고, 하늘까지 이르는 큰 나무줄기에 금지옥엽이 그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운 것과 같다.
二千載前 一身之聖統이 悠悠爲路人之歸則 豈是情理之所可容而 人事之寧可忍哉아
2000년 전의 한 몸의 성스러운 혈통이 멀고멀어져 길가는 사람으로 되었으니 어찌 이를 정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으며 사람의 일로서 참을 수 있겠는가.
是爲之懼하야 明昭穆 修譜系 大同之議가 峻發於全宗하야 受任於中央之宗會者己乎 四五個星霜矣라
이렇게 되는 것을 걱정하여 소목을 밝히고 수보(修譜)를 하자는 여러 사람이 합동한 의견이 전체 종문에서 발의되어, 중앙의 종회에서 내가 그 임무를 맡아 4~5년이 지났다.
然이나 六百萬宗族은 散在於京鄕하야 或在於山之深谷之窮하고 或在於島之濱 海之陬하야 徒知 金海之後裔而 不知中世之系統하고 只認 派系之所傳而 莫知 何世之來歷하니 明之
그러나 600만 종족은 서울과 지방에 산재되어 있고, 혹은 산속의 깊은 골짜기에 있거나 혹은 외딴 섬에 있어서, 그 무리들이 김해의 후예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중간 세대의 계통은 알지 못하고 단지 파의 계통이 전해지는 것은 인정하나 세대의 내력이 어떠한지 분명하게는 모르고 있다.
修之於今日은 殆若 整群星而 統之於北辰하고 深山脉而 系之於太白也라
오늘 수보를 하는 것은, 거의 무리별들을 정리하여 북두칠성에 모이도록 하고, 깊은 산맥들은 태백산에 이어지도록 하는 것과 같다.
其所 推探之苦와 遡尋之勞는 豈可與 草草餘事로 同日而語哉아
이러한 바, <아래를> 찾아내려는 고통과, 위로 거슬러 올라가 찾으려는 노력은, 어찌 대충대충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尤有所難堪者는 有時乎 燈寒譜院에 依枕而達且하고 情外群謗에 身爲嗃的하야 忍苦呑酸은 不下於蜀道矣라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은 시간이다. 등잔불이 차가운 보원(譜院)에서 베개에 의지하여 도달하고? 또 관심을 두지 않는 여러 사람들의 비방에 몸가짐을 엄하게 하여, 고통을 참고 쓴 것을 삼킨 것은 나 하나만을 위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雖然이나 不成不己는 不肖之素志則 積來許多艱苦而 始成吾宗 總大譜本矣라
비록 그러하나 내가 아니면 이루지 못한다는 불초의 소신과 의지로, 쌓여 온 어려움과 고통이 허다하나, 우리 종족의 총 대보를 이루어 보자는 것이 그 근본이라.
域內外駕洛之後裔는 盡錄於此譜하고 昭明其 某祖某孫之 何處何事하니 試一開卷하면 上下祖宗을 瞭然相對하야 油然情愛가 湧上於胸膈하니 亦不可 不謂之 大同敦睦之誼가 未始不由此而 生矣로다.
모든 지역에 있는 가락의 후예는 이 보첩에 다 기록하고, 어느 조상의 어느 자손이 어디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를 소상히 밝히니, 한 권을 시험삼아 펼쳐보면 상하의 조상과 종친을 요연하게 상대하여 자연히 정과 사랑이 가슴에 용솟음쳐 오르니, 이 또한 대동(大同)의 돈목한 정의가 여기에 기인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素所 祈願于中者는 滿天星斗가 有統而 能成大千世界하고 編地崗陵이 有系而 能爲錦繡江山則 六百萬吾宗은 恭協於 同祖共源之瑞基하야 無添乎 列聖之鴻德하고 善述乎
소박한 마음으로 기원하건대 하늘에 가득 찬 별들이 북두칠성으로 모여 능히 크고 큰 세계를 만들고, 땅에 있는 구릉이 엮어져서 계통을 찾아 능히 금수강산이 되니, 600만 우리 종족은 모두 같은 조상과 공동의 근원인 상서로운 기초로 협력하여 더 없이 열성조의 넓은 덕과 선을 기술하였다.
駕洛之華源則吾宗은 不恨不大盛於來歲矣이라 吾固攢手而待焉이라.
가락의 빛나는 근원인 우리 종족은 다가오는 세대에 한없이 크게 창성하리라. 나는 진심으로 손 모아 기대하고 있다.
駕洛紀元一千九百三十三年甲寅(1974) 三月 日
1974년
後孫 大同譜編纂委員長 宗洙 再拜謹書
후손 대동보편찬위원장 종수 재배하고 삼가 쓰다.
序(서) 4)
天下之生人이 豈無所自來者乎아 繼禰之統支와 宗族之淵源은 必有根由而 溯極而上則 終至於 始祖一人之身矣라
하늘아래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자신이 나온 곳이 없을 수 있겠는가. 아비의 사당(제사)을 계속하는 통일된 지손과 종족의 연원은 반드시 그 뿌리와 유래가 있을 것인 즉, 위로 극을 찾아 올라가면 마지막엔 시조인 한사람의 몸에 이를 것이다.
然則 今日不億麗孫은 豈非 一身之中之所蘊所授之 血統也 精神也而 綿延於億千萬歲하야 不繁不己者也리오
그런즉 오늘날 셀 수 없는 후손은 어찌 한사람의 몸 중에서 쌓여서 물려준 혈통과 정신이 아니겠는가. 면면히 천억 만세에 번성하지 않았다 하겠는가.
唯我 六百萬吾宗은 東方之 掘拇華閥也라 上以 列聖祖 無彊之德과 下以千百人 鍾生之賢達은 垂耀於竹帛하고 紹述於今後하니 斷不可與尋常之此矣라
오로지 600만 우리 종족은 동방의 굴지의 빛나는 문벌이다. 위로는 열성조의 한없는 덕망과, 아래로는 수천만 후손의 뛰어난 사람들은 죽백(대와 비단)에 드리워져 빛나고 있고, 금후에 이어져 기록되어 있으니 이와 같은 것을 <타 성에서> 찾는 것은 불가하다.
族旣大矣라 宗不可不大矣요 旣爲大宗則 崇奉事業도 亦不可不大矣니 是豈非 今日爲後之責也오
종족은 이미 커졌고 종친의 규모도 커졌으니, 이미 대종이 되었다. 숭봉사업도 역시 커졌으니 이 어찌 금일이 아니고 후일로 미루겠는가.
屈伸往來之理는 隨所遇而有殊나 然이나 在我方寸之 駕洛靈脉은 歷千古而不磨하고 愈久而愈新하고 此勝理之所自然而 大氣 所必然也라
자르고 늘리고 왕래하는 도리와 따라가 만나는 것이 끊어짐이 있으나, 그러나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가락의 영령은 천년을 지나도 닳지 않았고, 더욱 오래되고 점점 새로워져, 이 뛰어난 도리의 목표하는 바는 자연히 큰 기운이고 이것이 필연적이다.
然이나 洪柯大葉이 散居域內가 己乎二千載于玆矣라 昭穆之邈遠과 世代之繁衍은 或不無 漏湮之慮이며 靑氈遺績을 難保其不泯이라
그러나 넓은 줄기와 큰 잎이(세대의 계통) 이 나라 안에 퍼져서 살고 있는 것이 2000년이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소목이 아득하고 멀어지고 세대가 번성하여 넘치니, 혹시 누락되어 없어지는 것에 대한 염려가 없지는 않고, 빛나는(푸른 털) 유적을 없어지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以此爲懼에 統之整之는 莫若修譜之爲先이라 僉意詢同하고 大宗合議로 委任於族丈宗洙氏하니 族丈은 生有慷慨大志하야 紹先裕後로 爲生平之己任이라
이러한 걱정으로 통합하여 정리하는 것은, 수보(修譜)를 하여 선조를 위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여러 사람의 의견들이 일치하고 대종이 합의하여, 족장 종수씨(宗洙氏)에게 위임하니 족장은 의기가 북받치는 큰 뜻이 있어, 선조를 잇고 후손을 받아들이는 것을 평생을 자기의 소임으로 하였다.
其在 西岳書院院長之任하야 環修 中先祖興武王之位次하야 奉而正之하니 全宗之願이 遂矣요 又勞於今斯之譜役하니 事大力綿하고 地廣援少하야 晝宵憂嘆尙可言也며 息食縣勞는 何可盡道也리요
서악서원의 원장의 임무를 맡고 있을 때, 다시 연구를 하던 중에 선조인 흥무왕(유신)의 신위(祭享)를 이어 받아 받들기(奉祀)를 바르게 하니, 모든 종친의 소원이 성취되었고, 또 지금 이 보첩의 일에 노력하니, 일은 크고 노력이 끊임이 없고, 할 일은 많으나 지원이 적어, 항상(낮과 밤) 근심하고 탄식하니 이루 말할 수 없다. 숨쉬고 밥먹고 일에 매달리니, 어찌 도리를 다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今日竣業은 誠非容易觀過也라 試一奉讀에 祖宗偉德과 宗族盛況을 瞭然如對하니 自榮於 駕洛之後裔이요
오늘 이룩한 일은 진심으로 보고 지나칠 것이 아니다. 시험삼아 한권을 읽어보니 조상과 종친의 위대한 덕과 종족의 성한 상황을 요연하게 대할 수 있으니, 자신은 영광스러운 가락의 후예이다.
又誇於海內之甲冑이라 豈獨不肖之專有也리오 實是百世之寶鑑也라 感賀 巨業之竣成이요 復以謝 全宗之貢勞也라
또 자랑 같지만 바다 내에서 제일가는 장손이라. 어찌 혼자 불초만의 전유물이라 하겠는가. 실은 이것은 백세의 보감이라. 감사하며 큰 일을 이룬 것을 축하하고 또 모든 종족의 공로에 감사드린다.
又以爲 後後人審考之資焉則 幸何可言이리오 尤有所 祈願者는 華山他日에 齋碑見成則 歲時春秋에 沐浴進拜於塋下하고 共歡花樹於齋上則 豈不美哉며 豈不樂哉아 感慨之餘에 忘僭敢叙云爾이라
또 이는 후손들이 깊이 상고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다행이라고 어찌 말할 수 없겠는가. 더욱 기원하고 싶은 것은 화산재의 날에 재비(齋碑)를 보고 만든 즉, 세시 춘추에 목욕하고 앞으로 나아가 선영앞에 절하고, 다같이 재상(齋上)에 꽃을 바치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며 즐겁지 아니한가. 감동과 느낌이 남아 잊어버릴까봐 참람되게 감히 서문에 대한다.
甲寅 仲秋節( 1974년 8월)
後孫 農水産部次官補(農學博士)駕洛中央宗親會事務局長 榮鎭 謹序
후손 농수산부차관보(농학박사)가락중앙종친회사무국장 영진 근서
跋(발)
駕洛紀元一千九百三十三年甲寅에 我金氏之大同譜編이 始成하다
가락기원 1933년(1974년) 갑인년에 우리 김씨의 대동보가 완성되었다.
盖自有譜以來로 氏姓之源遠이 莫如吾姓이요 族閥之繁衍이 亦莫如吾姓이라
대개 보첩이 있은 이래로, 씨족 성의 근원이 오래된 것이 우리 성만 같은 것이 없고, 종족의 문벌이 번성하고 넘치는 것이 또한 우리 성만 같은 것이 없다.
收盡吾族하야 共登一譜면 其麗 不億이엇마는 源遠族繁故로 統合이 尤爲難하니 難合者는 勢之固然也라
우리 종족을 다 합하여 같이 하나의 보첩에 등재하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게 많아지겠지만, 근원이 오래되고 종족이 번성하여 통합이 더욱 어려워 지니 합치기 어려운 것은 상황으로 보아 당연히 그러하다.
今世代益遠하고 族又益繁하야 統合爲譜 豈能容易乎아 惟中央宗親會長(元泰)寬仁之志와 譜所長(宗洙)堅久前進之力이 幷至而成此大編하니 仰亦始祖王巍然盛德이 與天地崇廣하야 便不億裔孫으로 無欲一人遺之也라
지금 세대는 점점 멀어지고 종족 또한 점점 번성하여 보첩으로 통합하는 것이 어찌 용이하겠는가. 생각하건대 중앙종친회장(원태)의 너그럽고 어진 의지와 보소장(종수)의 강인한 추진력이 함께하여 이 방대한 보첩을 이루게 되었으니, 시조왕의 높은 성덕이 천지에 숭고하게 넓혀져 다시 셀 수 없는 후손들에 의하여 한 사람의 바라는바 후세에 전할 것이다.
吾金之譜 始有駕洛國史하고 李朝 宣仁之際에 族先祖少痊公諱德承博考史乘하야 創明譜系하야 英宗甲戌에 諱運熙公이 刊行于世하니 一千數百年間에 歷代之諱號官爵과 賢否存亡이 瞭然如睹하고 兄弟叔姪之次序 整然하야 觀其譜者는 孝悌之心이 尙可以油然感發矣라
우리 김씨의 보첩은 가락국사에 나타나 있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 선조, 인조 때에 종의 선조이신 소전공 휘덕승께서 역사에 전해지는 것을 넓게 상고하여 보첩의 계통을 처음 밝혔고, 영조 갑술(1754)에 휘운희공이 간행하여 세상에 전하니, 천 수백년간에 역대의 휘와 호와 관작과 뛰어나거나 그렇지 못한 것들을 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하였고, 형제와 숙질의 순서를 정연하게 하여 이 보첩을 보는 사람은 효도와 우애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느껴서 발생될 것이다.
然이나 同是一根而 滄桑飜轉之餘에 或移于東하고 或遷于西하야 相居絶遠하야 不得盡收之爲可恨이라
그러나 같은 이 하나의 뿌리가 푸른 뽕밭에 엎어지고 뒤집혀져, 혹은 동쪽으로 가고, 혹은 서쪽으로 이사하여 서로 살고 있는 곳이 끊어지고 멀어져, 모두 다 기록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是以로 派譜之論이 幷起하야 金寧君派之己未譜와 版圖判書公派之紫溪譜와 監務公 都摠管公 文敬公 栗隱公 襄毅公及諸派 隨其地域하야 續修之하니 榮悴之運과 博約之例와 通塞之見이 致疵於其間하야 不復統合而修整之면 終至於路人之不如也 此擧之作이 與尋常所修之譜로 豈可同一視之哉아
이로서 파보를 하자는 논의가 같이 일어나, 금녕군파의 기미보와 판도판서공파의 자계보와, 감무공, 도총관공, 문경공, 율은공, 양의공 및 여러 파가 그 지역에 따라서 계속 만들어지니, 흥망성쇠의 운과, 넓은 약속(?)의 예와, 막힌 것을 뚫어 볼 수 있는 식견이, 그 사이에 흠이 되어서, 다시는 통합할 수 없이 수정되어 정리되면, 결국 길가는 사람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 진 것이, 그렇게 찾던 수보와 어찌 동일시 하겠는가.
藐玆蔑識이 猥參任司諸族丈之後하야 奉閱諸家單本에 怳然如望洋하야 不敢措手나 然이나 必準衆議하고 參古酌今하야 用積數年之功하야 今旣告訖하니 鴻泰秉奎敬鎭榮鵬柄出玉謙榮達鍾範鍾勳諸宗이 共殫勞焉이라
조금씩 이를 멸시하고 인식하게 되어, 합쳐져 참석한 여러 족장들에게 그 일이 맡겨진 후에 여러 가문의 단자를 받들어 열람하니, 망연자실한 것이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아, 일에 착수는 했으나 반드시 여러 사람의 의견에 근거하고 옛 것을 참고하고 현대 것을 취하여, 수년간 노력하여 지금 일이 끝났음을 알리니, 홍태, 병규, 경진, 영붕, 병출, 옥겸, 영달, 종범, 종훈의 여러 종친이 함께 노력을 다하였다.
不揆僭越하고 附說少痊公之創譜와 及續修之由와 今日大同譜之所以起而敢書如此云爾라
참람되게 주제넘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덧붙여 설명하는 소전공의 최초의 보첩과, 계속하여 수보한 유래와 금일 대동보를 하게 된 까닭을 감히 이와 같이 적어 말하고자 한다.
歲甲寅仲秋 月 日 後孫善益謹識
갑인년(1974) 8월 후손 선익 근지
* 위 해석문은 원문의 취지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므로, 원문 취지와 크게 다름이 확인되면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少痊公諱德承舊譜遺記(소전공휘덕승구보유기)
생략
甲戌舊譜序(갑술구보서)
생략
己未譜序(기미보서)
생략
凡例(범례)
一, 惟我金海金氏 自駕洛으로 至今二千年에 世代久遠하야 譜牒多逸故로 璿源世系十六世後에 派派各立中祖하야 列書至六世하야 合爲總編하야 以明同源之義하고 自六世以下는 分門各編하야 以圖其昭穆繼序之愼中叙明也라
생각건대 우리 김해김씨는 가락으로부터 지금까지 2000년이 되었고, 세대가 오래되고 멀어져, 보첩이 많이 없어져 선원세계의 16세 후에, 파들마다 중조(中祖)를 세워 6세까지 열거하여 쓰고, 합하여 총편으로 만들어 같은 근원의 고리를 분명히 하고, 6세 이하부터는 문중별로 분리하여 각편으로 만들어 그림으로서 그 소목과 계속되는 차례를 신중하게 밝혔다.
一, 我金之譜은 有崇禎再甲戌(李朝英祖三十年檀紀四0八九年)譜하고 後有崇禎三己未譜하고 檀紀四二八七年甲午에 又重修之하고 今自中央宗親會로 爲大修之計하야 輪告于各道君하야 舊譜之未及載錄者를 一一收錄하야 俾免遺漏하고 仰舊推演成秩하야 以成統史焉이라
우리 김씨의 보첩은 숭정재갑술보(1754)가 있었고, 그 후 숭정3기미보(1799)가 있었고, 단기4287년 갑오(1954)에 또 다시 고치고, 지금 중앙종친회로부터 대 수보(修譜)하자고 계획하여, 각 도와 군에 돌려서 알리고, 구보에 기록되지 못한 자 들을 일일이 수록하고 더하여 남기거나 빠뜨린 것을 면하게 하고, 구보를 따르고 새로운 것을 추천하고 서로 통하게 하여 질서를 잡게 하여 통일된 역사를 이루었다.
一, 諸派之譜 因正德遺譜하야 興武王曾孫諱長淸下에 直書子雄元하야 濫稱駕洛王幾世孫하고 或踏襲其餘風하야 淆亂頗多하니 今依己未舊譜例而(金寧君諱牧卿은 在高麗忠惠王朝하고 侍中公諱琢은 恭愍王朝而按正德譜則金寧君은 自駕洛王五十一世요 侍中公은 五十七世니 是以爲難信者也라) 立中祖하야 隨其源流하야 整其昭穆하고 有其名而無實證하야 昭穆難叙者는 只憑其本單하야 別立中祖하야 爲一派焉이라.
여러 파의 보첩들은 정덕보에 기인하여, 흥무왕 증손의 휘 장청 밑에, 곧바로 아들로서 웅원을 써 넣고, 함부로 칭하기를 가락왕의 몇 세손이라 하고, 혹은 그 풍속을 그대로 따라서 어지럽혀진 것이 아주 많으니, 지금 기미구보의 예에 따라서 (금녕군 휘목경은 고려 충혜왕 때 있었고, 시중공 휘탁은 공민왕 때 있었는데, 정덕보를 보면 금녕군은 가락왕으로 부터 51세요, 시중공은 57세이니, 이것은 믿기가 어렵다) 중조를 세우고, 그 원류를 쫓아서 그 소목을 정리하고, 이름은 있으나 실증할 수 없거나, 소목의 순서를 정하기 어려운 자는, 단지 본 단자에만 근거하여 별도로 중조(中祖)를 세워 하나의 파가 되게 하였다.
一, 譜冊은 洋裝爲製하고 內面에 畵爲六層欄하야 自一世二世로 隨次書之하고 第一第六欄諱字下에 編名及頁數를 洋錄之하야 以明上下系索引之方하고 以甲乙丙丁으로 定編名하야 分爲大中小秩하야 以圖奉藏之便宜焉이라
보책은 양장으로 제본하고 안쪽 면에는 6층으로 칸을 그려, 1세부터 2세로 순서대로 써서, 제1과 제6란의 휘자 밑에 편의 이름과 페이지 수를 양쪽에 기록하고, 분명하게 상하계의 색인을 넣고, 갑을병정으로 각편의 이름을 정하고, 나누어 대중소질이 되게 하여, 그림으로 받들어 모시기에 마땅히 편리하도록 하였다.
一, 文獻錄은 隨聞採輯하야 揭載三王尊影하고 添付各派齋室圖하야 分作一二三編하야 幷合世系總編爲一券焉이라
문헌록은 듣고 채집한 것에 따라, 삼왕존영을 게재하고 각파의 재실도를 첨부하고, 나누어 만들어 1,2,3 편으로 하여, 세계를 합친 총편을 1권으로 하였다.
一, 始祖諱字上에 書姓字하고 以下子孫은 不書姓字하며 女婿는 必書姓字는 以別其同族異姓也라
시조의 휘자 위에는 성자(姓字)를 쓰고, 이하 자손은 성자(姓字)를 쓰지 아니하며, 사위에는 반드시 성자(姓字)를 쓴 것은 그 동족과 다른 성이라는 것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一, 各位下에 字號와 生卒年月日을 書之하고 行職과 實蹟은 書生日下하며 壽職은 加壽字하고 贈職은 忌日下에 書之하며 不知卒年則只書忌月日者는 自來一定之規而今依時制하야 現行職名及專工學士碩士等을 書之라
각위 아래는 자호와 생졸연월일을 쓰고, 행직과 실적은 생일 밑에 쓰고, 수직은 수(壽)자를 더하여 쓰고, 증직은 기일의 밑에 쓰고, 졸년을 모르고 다만 기일인 월일만 쓴 자는 지금까지 전해온 일정한 규약을 지금 시대에 맞게 제정하여, 현행 직명과 전공 학사 석사 등을 쓴다.
一, 配位는 姓貫及其父名을 詳錄之하고 有前後配則如例各書之焉이라.
배위는 성, 관 및 그 부친명을 상세히 기록하고 전후배가 있으면 예와 같이 각각 쓴다.
一. 墓所는 所在地郡面里와 山名坐向을 皆書之하고 配位同墳則書同墳하며 各墳則隨所在地書之하고 有碑碣則書某之撰하야 以備後日參考焉이라.
묘소는 소재지 군면리와 산명 좌향을 전부 쓰고, 배위 동분(同墳)이면 동분(同墳)이라 쓰고, 각분(各墳)이면 소재지를 쓰고, 비(碑)나 갈(碣)이 있으면 누가 찬술했는지를 써서 후일에 참고하게 준비하였다.
一, 本宗系后者는 本生名字下에 書出系某之後하고 系后下에 直書子某하야 傍註書生父某者는 以取禮記에 爲人后者는 爲人子之義也라.
분종의 계후자(系后者)는 본 생가의 이름 밑에는 출계 누구의 후라고 쓰고, 계후(系后)의 밑에는 직접 자(子) 누구라고 써서, 방주에 생부는 누구라고 쓴 것은 예기에 따라서 사람의 뒤를 이은 자는 그 사람의 자식이 된 도리이다.
一, 年號는 以本國檀紀로 爲準而每張面에 擇一二處書之하고 其餘는 但以六甲書之라.
연호는 이 나라의 단기로, 이것에 준하여 매 장의 면에 한 두 곳을 택하여 쓰고, 그 외는 단지 6갑으로 썼다.
一, 본항 1991년 京派統合譜(경파통합보) 凡例(범례)根據(근거)하여 削除(삭제), (金寧君六世孫參議公諱孝源이 按舊譜及江陵劉氏譜則俱無子孫縣錄하니 來單中에 書以孝源子震叙者는 不可不辨正故로 今於大宗會議에 據舊譜是正하고 再審其註錄及來歷하야 追錄震叙於判書公諱震孫之弟而定爲戶參公一派焉이라.
금녕군 6세(손) 참의공 휘효원이 구보와 강릉 유씨보를 살펴보니, 무자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보내 온 단자중에 효원의 자로 써 있는 진서는 부득불 판정하여 바로 잡았으므로, 지금 대종회의에서 구보에 근거하여 시정하고, 그 주석의 기록과 내력을 다시 검토하여, 진서를 판서공 휘진손의 동생으로 추록하니 호참공의 한 파로 정한다.)
* 1991年譜(년보) 關聯凡例(관련범례)
(金寧君六世孫參議公諱孝源이 按舊譜及公之配江陵劉氏譜則俱無子孫縣錄하니 來單中에 書以孝源子震叙者는 依據舊譜를 是正하고 再審其註錄及來歷하야 追錄震叙於判書公諱震孫之弟而定爲贈戶曹參判하여 龍山譜에 謄載하였고 尙州華山齋建立時誠金도 出資하고 金寧君墓碣을 物担建立한 後 戊辰年震叙派譜刊行途中孝源後에 任議로 變更하였음으로 今般京派統合譜에는 全宗員의 宗議로서 震叙派는 己未譜參照로 除籍되었다. 後日을 念慮하여 以上略述하니 後孫들은 遵守할지어다.
금녕군 6세(손) 참의공 휘효원이 구보와 강릉 유씨보를 살펴보니, 무자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보내 온 단자중에 효원의 자로 써 있는 진서는 구보에 의거하여 시정하고, 그 주석의 기록과 내력을 다시 검토하여, 진서를 판서공 휘진손의 동생으로 추록하니 증 호조참판으로 정하여 용산보에 등재하였고, 상주의 화산재 건립시 성금도 출자하고, 금녕군 묘갈을 물질을 부담하여 건립한 후, 무진년 진서파보 간행 도중 효원의 뒤로 임의로 변경하였으므로 금번 경파 통합보에는 전 종원의 종의로서 진서파는 기미보를 참조하여 제적되었다. 후일을 염려하여 이상 약술하니 후손들은 준수할 지어다.)
一, 金寧君之子忠簡公諱普요 歷三司公諱到門摠郞公諱覲參判公諱孝芬至判書公諱震孫하야 生四子하니 曰參判公諱永堅橫城公諱永瑞安敬公諱永貞石城公諱永純이 爲四派하고 又六派하니 文簡公諱著密直公諱秀平章事公諱蘭은 忠簡公之弟也요 佐郞公諱達門奉常公諱顯門密直使公諱昌門는 三司公之弟而甲午修譜時에 雖不入單이나 湖南舊譜 皆有明證하니 今大同修譜而不可漏闕故로 依湖南譜編入하야 亦各爲一派焉이라.
금녕군의 자는 충간공 휘보요 삼사공 휘도문을 거쳐 총랑공 휘근, 참판공 휘효분, 판서공 휘진선이 이르러, 4자를 낳으니 참판공 휘영견, 황성공 휘영서, 안경공 휘영정, 석성공 휘영순이 4파가 되고, 또 6파로 되니 문간공 휘저, 밀직공 휘수, 평장사공 휘란은 충간공(보)의 동생이요, 좌랑공 휘달문, 봉상공 휘현문, 밀직사공 휘창문은 삼사공(도문)의 동생으로서 갑오의 수보시에 비록 입단하지 못하였으나, 호남의 구보에 모두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이번 대동 수보에 있어서 누락하는 것은 불가하니, 호남보에 의하여 편입하여 역시 각각 하나의 파로 되었다.
一. 橫城公石城公兩派宗孫이 見漏於舊譜故로 甲寅譜修譜時에 入系他宗矣러니 今此修譜에 本宗孫이 瞭現하야 文獻이 明白故로 前入系宗은 還歸本宗而宗支辯論을 今玆是正焉이라 ○甲午譜(갑오보)
횡성공 석성공 양파의 종손이 구보에는 빠져 있어서 갑인보 수보시에 타종에서 입계하였으나, 지금이 수보에 본 종손이 분명히 나타나서 문헌이 명백하므로, 전에 입계한 종은 본가의 종으로 돌려보내는 종손과 지손의 바로잡는 논의를 지금 이에 바르게 한다.
一, 版圖判書公七世孫梅軒公諱下에 準大宗公議하야 去系字하고 書子子以定次序焉이라.
판도판서공 7세 (자손) 매헌공 휘준손의 휘자 밑에 대종의 공통된 의견에 준하여 계자(系子) 대영(大榮)의 계(系)자를 빼어 버리고 자(子)라고 써서 다음의 순서로 정한다.
一, 各派譜系 多有異同故로 今裁成世系圖一部하야 註錄住所하야 以示統一之義而俾知該子孫之居某地하고 但本單이 晩到者는 追附於本編之首焉이라.
각파의 보계는 서로 다른 것이 많아서, 지금 세계도의 일부를 다시 고쳐서, 주석의 기록에 써 넣어, 통일된 도리를 보이고 이에 더하여 해당 자손의 거주지도 기록하였으나, 단 단자가 늦게 도착한 자는 본편의 첫머리에 추가하여 붙여 넣었다.
一, 金海之金이 有同源異姓者하고 又有異籍者하며 又有源之元不同者故로 陳列于左하야 以表明之라.
김해의 김씨는 동원이성(본관이 같고 성은 다름)이 있고, 또 다른 본적이 있고, 또 근원이 원래 서로 다른 자가 있으니, 아래에 진열해 놓아 표시를 분명히 하였다.
許氏 有七籍하니 金海陽川河陽泰仁孔岩漢山咸平이 是라
허씨는 7개의 본적이 있으니, 김해, 양천, 하양, 태인, 공암, 한산, 함평이 그것이다.
李氏有一籍하니 仁川李氏是也라(李氏始祖는 許謙이니賜姓하야 爲李許謙이라)
이씨는 하나의 본적이 있으니 인천이씨이다.(이씨의 시조는 허겸이니 성을 받아 이허겸이 되었다.)
金氏有七籍하니 咸昌咸安高靈星州碧珍固城晋州是也
김씨는 7개의 본적이 있으니 함창, 함안, 고령, 성주, 벽진, 고성, 진주이다.
延安金氏有關西一派하니 光祿大夫知門下省事諱裕簡之后也라
연안김씨는 관서에 한 개의 파가 있으니 광록대부 지문하성사 휘유간의 후이다.
金時興一派는 新羅敬順王之后也니 麗朝에 封金寧君하야 移籍金海者也라
김시흥의 한 개의 파는 신라 경순왕의 후이니 고려조에 금녕군으로 봉해져김해로 적을 옮긴 자이다.
金慕夏堂一派는 宣祖壬辰之亂에 日本人沙也將軍이 欽服朝鮮禮義하야 感化者也(○宣祖壬亂에 服屬于金襄毅公景瑞轅門下하야 合力伐倭하야 以成大功故로 宣祖嘉其功하야 賜爵兵曹判書하고 賜號慕華堂하고 賜姓金氏하니 以其襄毅公同姓之願也라)
김모하당의 한 파는 선조 임진왜란에 일본인 사야장군이 조선의 예의에 깊은 감명을 받아 감화된 자이다.(선조시의 임진왜란에 김양의공 경서의 진영에 복속되어 힘을 합하여 왜군을 토벌하고 큰 공을 이루었으므로 선조가 그 공을 기뻐하여 병조판서를 내리고 호를 모화당이라고 내리고 김씨의 성을 내리니 이는 양의공과 같은 성을 원했기 때문이다)
此兩派는 姓貫이 雖同이나 根源이 不同故로 不許同譜焉이라.
이 양파는 본관이 비록 같으나 근원이 같지 않음으로 동보를 하지 말 것이다.
一, 正德譜는 正德年間編成之謂也니 舊譜凡例에 曰湖南井邑地에 有一譜하야 自始祖王以下로 至六十四世聯系爲譜하야 頗多無稽之言하고 實非公籍故로 甲戌譜時에 不取錄者是也라 丙戌年間에 井邑人金德埰 私自潛刊하야 妄稱宋尤菴先生撰序云하니 諸家譜-或多模之나 然이나 各有異同하고 不可信憑故로 今亦仍舊하야 附書於 上系之下하니 以備後日參考之資焉이라.
정덕보는 정덕연간에 편성되었다고 하니, 구보의 범례에 말하기를 호남의 정읍땅에 하나의 보첩이 있어, 시조왕으로부터 그 이하로 64세에 이르기 까지 연계하여 보첩을 만들어, 이해하지 못할 말이 많고 실제로 공인된 책이 아니므로 갑술보를 만들 때, 이를 취록하지 않았다. 병술년(1776)간에 정읍인 김덕채가 자신이 스스로 몰래 간행하여, 망령되게 칭하기를 송우암 선생(송시열)이 서문을 찬했다고 말하니, 여러 가문의 보첩에서 간혹 많이 모방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고 신빙하기에 불가하므로, 이번에도 역시 거듭하여 구보를 상계의 아래에 첨부하여 써넣으니, 후일에 참고를 위한 자료로서 준비하였다.
一, 行列은 取金水木火土相生之義하야 定名者 例也라 總編所載派는 有一四十四而或有未單하고 惟入單諸派 各隨其昭穆하야 例定輪行之行列字하야 列記于左하야 以爲世世遵行焉이라.
항렬은 금수목화토의 상생의 도리를 취하여 이름을 짓는 것이 상례이다. 총편에 실은 파는 144개가 있으나 간혹 미단이 있고, 입단된 여러 파는 각각 그 소목에 따라서 돌림항의 항렬자를 정하여 아래와 같이 열거하여 기록하니 세세토록 준수하여 행할 것이다.
金寧君諱牧卿派 自金寧君二十世로起顯字라
顯○ ○培 鍾錫○ ○泰洙 榮○ ○燮謙 在載○ ○鎭 浩○ ○根 性炳○ ○用坤 鎬○ ○淳 東○ ○煥烈 重○ ○鎔善 洛○ ○相 炯○ ○基奎
監務公諱益卿派 自監務公十九世로起相字라
相○ ○炫 在○ ○鎬 永○ ○植 炯○ ○奎 鎔○ ○淳 東○ ○勳 重○ ○會 源○ ○柱 燦○ ○基 鍾○ ○涉
判圖判書公諱 管派 自判書公十九世로起昌字
昌○ 斗○ 容○ ○坤 鍾鎭○ ○洙泰 相東○ ○煥熙 基奎○ ○鎬錫 永洛○ ○植柱 熹○ ○在壎 錡善○ ○洪 東○ ○夏
文敬公諱琢派 自文敬公二十世로起寬字煥字
○寬 永○ ○棋 熙○ ○載 鏞○ ○泰 來○ ○燮 奎○ ○鍊 洪○ ○杓 ○煥 喜○ ○鉉 漢○ ○植 炅○ ○坤 鉦○ ○洪 秉○ ○勳 圭○ ○錫
府使公諱瑾派 自府使公十七世로起鎰字
鎰 ○洙澤 相東○ ○燮炯 奎均○ ○鍾 洛○ ○相 烈○ ○載 鉉○
忠貞公諱 球派 自忠貞公二十世로起梓字
梓○ ○炫 性○ ○錫 浩○ ○柱
都摠管公派諱敬臣派 自都摠管公二十一世로起履字
履○ ○燮 堯○ ○鍊 漢○ ○錫 海○ ○孝 忠○ ○東 龍○
兌○ ○永 錫○ ○澤 柄○ ○煥 冑○ ○鎬 築隱公派 인동항렬
○國 潤○ ○杓 炳○ ○基 龜○ ○麟鳳 築隱公派 보성항렬
判典公諱 明澤派 自判典公諱十六世로起鎭字
鎭章○ ○周柱 致炳○ ○祚 鍾○ ○泰 相○ ○烈 圭○ ○鎔 海○ ○植 炳○ ○埈 鉉○ ○洛 榮○ ○煥 在○ ○銖
判書公諱不比派 自判書公二十世로起洙字
○洙 秉○ ○燮 圭○ ○鎭 浩○ ○榮 炯○ ○載 鎬○ ○洪 權○ ○熙 柱○ ○錫 泰○ ○植 炳○
版圖判書公諱添劍派 自判書公二十一世로 起永字
永○ ○柱 炳○ ○圭 ○錫 ○洙 東○ ○燮 基○ ○鍾
副正公諱平派 自副正公十九世로起淵字
○泰淵 秉榮○ ○煜燮 吉圭○ ○鎔鍾 永泰○ ○相 炳○ ○均
栗隱公諱遜派 自栗隱公十八世로起柄字
○柄相 斗○ ○時基 鍾善○ ○淳浩 根榮○ ○燮煥 圭載○ ○鉉德 洛永○ ○東植 勳熙○ ○堯培 鎭鍵○ ○大洙 柱樂○ ○煥 用均○ ○錫欽 漢泰○ ○模杰 煜烈○ ○坤聖 鍍承○
參奉公諱麟瑞派 自參奉公二十世로 起泳字
泳○ ○東 熹○ ○圭 錫○ ○源
司正公諱利亨派
炳○ ○圭 錫○ ○湜 東○ ○烈 孝○ ○鎭 泳○ ○樂 南○ ○基
承仕郞公諱之瑞派 自承仕郞公十八世로 起致字
致○ ○錫 永○ 秉○ ○煥 在○
副護軍諱巨公派 自副護軍公十六世로 起洛字
○洛泳 相炳○ ○烈燮 在圭○ ○鉉錫 泰源○ ○植榮 顯炯○ ○培採
判決事公諱用萬派 自判決事公十世로 起鍊字
○鍊 淙○ ○植 炳○ ○基珉 浩洙○ ○相 熙○ ○圭
雲隱公諱大震派 自雲隱公十二世로 起澤字
○澤 炳○ ○換烈 圭○ ○鍾永○ ○杓 熙○ ○海 東○ ○燮炫 在○
副護軍公諱天翼派 自副護軍公十二世로 起賢字
○賢 榮載○ 圭○ ○銖泓○ ○柱林 煥炳○ ○採基 鍊錫○ ○淳河 東相○ ○燮熙 均在○ ○鎭鎔 浩泰○ ○模根 永源○ ○培坤 鎬鉉○ ○洙洛
進士公諱虔派 自進士公十二世로 起基字
基○ ○鉉 濟○ ○柱植 煥○ ○坤均 鎭鍾○ ○洛 秉○ ○炯
大提學公휘得河派 自大提學公十六世로 起斗字
○斗 ○煥 圭○ 鎭○ 永○ ○東根 熙炳○ ○基均 錫○ ○洙
文川公諱貴存派 自文川公十四世로 起淵字
○淵鍊 泰○ ○根榮 熙○ ○圭 鎭○ ○浩 東○ ○烈在○ ○鍾 洙○ ○根 炳○ ○基賢○
崇政公諱宗貞派 自崇政公十一世로 起律字
○律 基○ ○鎬 永○ ○柱
忠順衛公諱克悌派 自忠順衛公九世로 起在字
在○ ○鎭永○ ○植 炯○ ○圭 鎔○ ○淳 東○ ○煥用○ ○鎬 泰○ ○根 炫○ ○均○ ○洙 柄○ ○烈
通仕郞公諱汝龜派 自通仕郞公十三世로 起植字
○植 顯○ ○培 鍾○ ○泰 榮○ ○燮 在○ ○鎭 浩○ ○根 益○
通政公諱昌壽派 自通政公十四世로 起鍾字
鍾○ ○泰 榮○ ○燮 在○ ○鎭 浩○ ○根 性○ ○用
判書公諱盡業派 自判書公八世로 起濟字
濟○ ○植 顯○ ○培 鍾○ ○泰 榮○ ○燮 在○ ○鎭 浩○ ○根
參議公諱盡始派 自參議公九世로 起植字
○植 顯○ ○培 鍾○ ○泰 榮○ ○燮 在○ ○鎭 浩○ ○根 性○ ○用
隋城伯公諱昉派 自隋城伯公九世로 起植字
○植 顯○ ○培 鍾○ ○泰 榮○ ○燮 在○ ○鎭錫 浩永○ ○根東 炯○
學生公諱洛瑞派 自學生公七世로 起元字
○元 塡○ ○鈺 瀀○ ○柱 炳○ ○均 錆○ ○洽 東○ ○炅
副護軍公諱宇榴公派 自副護軍公六世로 起植字
○植 顯○ ○培 鍾○ ○泰 榮○ ○謙 在○ ○鎭 浩○ ○根 炳○
左政丞公諱萬希派
顯熙○ ○培 鎭鍾○ ○澤海 根柱○ ○炫勳 在圭○ ○鎬銓 淳潤○ ○杓模 炯炅○ ○均根 錫鏞○ ○瀅淡 柱東○ ○烈煥 恒坪○ ○鐸 洪漢○ ○彬 燕燦○ ○堅孝
留守公諱芸派 自留守公十五世로 起在字
在○ 廷○ ○ ○ ○ ○
生員公諱鉉重派 自生員公十五世로 起培字
○培 鍾○ ○泰 榮○ ○燮 載○ ○鎭 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