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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族譜序
김해김씨 족보서[1]
[1]고종 병자보(고종13년,1876) : 경북 星州에서 판도판서공 휘관파, 도총관공 휘경신파, 부사공 휘영필파, 장사군휘 선파가 참여하고 金昌潤 金鍾燮 金在瓘公 등이 주관한 보첩으로 총11권이다.
陶唐氏克明峻德以親九族周冡宰宗繼別爲大宗修族大凡人之氏族本一而支分族至於九而明其德而親焉宗之於大而繼其別而修族雖孤子之家人無不本支所分昭穆有序
요(堯)나라 임금인 도당(陶唐)씨는 높은 덕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구족(九族)[2]을 친하게, 하고 주(周)나라의 재상 주공(周公)[3]은 종가의 계통을 나누어 큰 종족의 차례를 밝혔다. 무릇 사람의 씨족이란 근본은 하나이나 가지가 나누어져 구족(九族)에 이르렀으니, 그 덕을 분명히 함으로써 친하게 하고, 종족이 커지면 계통을 구별하여 그 가계(家系)를 정리하는 것이다. 비록 외로운 집안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그 근본과 가지로 나누어지지 않는 바 없으며 그 소목(昭穆)[4]에는 차례가 있는 것이다.
[2]구족(九族) : 고조이하 즉 부계친족의 총칭
[3]주공(周公) : 주(周)의 政治家. 文王의 아들이며 武王의 동생, 이름은 旦 武王을 도와 殷을 멸망시킴.
[4]소목(昭穆) : 사당에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
况以金海之氏金者上自首露王式至于今歲之相距常數千載其子孫之綿綿羅列殆同商孫之不億周後之百世也族以親焉敬唐堯五敎之敷宗以修族襲周禮九兩之誼支分本一之理尊祖敬宗之道於是乎明焉而彛倫惟叙五品相遜譜系之義豈不重且大
더구나 김해로써 본을 하는 김씨는 위로 수로왕으로부터 지금에 이르니 그 사이의 세월이 수천년이나 그 자손의 면면히 이어짐은, 거의 상(商)[5]나라 자손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음과 주나라 자손의 오랜 세대로 이어짐과 같은 것이다. 한 종족이 서로 친하고 요임금(唐堯)의 오교(五敎)[6]를 공경하여 폄으로써 한 집안을 다스리게 함은 주례 구양(周禮九兩)[7]의 다스림을 이어받아, 한 근본에서 많은 가지로 나누어진 이치와 조상을 존중하고 종중(宗中)을 공경하는 도리임을 이에 밝힌 것이다.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떳떳한 도리를 베풀고 오품(五品)[8]을 지켜 서로 사양하니 집안의 계통과 혈통의 바른 길이 어찌 무겁고 또한 크지 않으리오.
[5]상(商) : 중국 고대 은나라의 처음 이름.
[6]오교(五敎) : 五常 書經의 敬敷五敎를 말함. 左傳에서는 父와 義母이 慈, 兄의 友, 弟의 恭, 子의 孝를 말함.
[7]주례구양(周禮九兩) : 周禮에 백성을 다스리는 九種의 사람으로 즉 牧. 長. 師. 儒. 宗. 主. 吏. 友. 藪를 말함.
[8]오품(五品) : 五典 五常 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의 品類 또는 父. 母. 兄. 弟. 子를 말함.
歟粵乙丑弁首之文惟余族兄故判書參鉉之所制而頃當嶠館按節之時顧余莅玆星山而刊是譜於玆州之古寺又請余文余雖不文事不偶然於是乎書
옛 을축보(乙丑譜;고종2 1865년刊) 서문은 나의 족형 고(故) 판서 삼현(李參鉉)[9]이 지은 바이며 그때 마침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였다. 돌아보건대 내가 이 성산(星山)에 임하니 이 고을 옛절[10]에서 이 족보를 간행하면서 나에게 글을 청하니 내가 비록 서투른 문장이나 우연한 일이 아니므로 이에 서문을 쓴다.
[9]삼현(李參鉉:1807~?, 字台卿號鍾山龍仁人 哲宗庚戌文科官至禮判)
[10]옛절: 雙溪寺 星州甑山坊에 있음(距州六十五里) 孝宗丁亥年(에 불타고 再建은 兩 水地之間에 터를 찾았기에 雙溪寺라함. 6.25변란 때 없어졌고 現金陵郡 지역임.
崇禎紀元後五丙子至月上澣通訓大夫行星州牧使龍仁後人李稷鉉謹序
숭정기원후5병자(고종13년 1876년) 지월상한(11월 상순) 통훈대부 행 성주목사 용인후인 이직현 근서
舊序文(구서문)
해석 : 2006. 3. 4. 金順大
參鉉駐節嶠舘啣 命致酹于海口之壇謁 納陵於金海府山川雖古村翁野老徃徃說駕洛故事而未知其詳謹按駕洛國記曰金榼六卵化爲六童而遂奉始生者一人爲立始爲首露王也以其生于金榼故以金爲姓
삼현이 경상관찰사로 근무하라는 명을 받고 내려와 바닷가에 있는 단에 술을 뿌리고 김해부에 있는 납릉을 배알하였다. 산천을 비록 오래된 마을로서 동네의 늙으신 어른들이 종종 가락국의 옛 이야기를 하곤 하였으나 그 상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삼가 가락국기를 살펴보니 금합의 6개의 알이 6명의 어린아이로 변하여 마침내 맨 처음 태어난 한 사람의 아이를 받들어 임금으로 세우니 이 분이 수로왕이 되었으며 금합에서 태어났으므로 김(金)을 성(姓)으로 하였다고 한다.
命留天于望山島迎阿踰陀國公主立爲后誕生十子太初洪荒人文草昧商郊之降鳦?周室之履武固已洋洋於雅頌之什而我東之檀木降神鷄林毓靈又何必多也哉
유천간에게 망산도로 가서 아유타국 공주를 맞아들이게 하여 왕후로 삼고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태초에는 세상이 거칠고 사람과 문명이 아직 질서가 없었으나 상나라의 교외에 제비가 내려오고(?) 주나라의 종실의 이무(履武)[1]의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시가로서 불리어지고 있고, 우리 동방의 나라에선 단목의 아래로 신이 내려오고[2] 계림의 신령스러운 이야기[3]들이 어찌 이렇게 많은가.
[1]履武; 주나라의 선조라 일컬어지는 후직(后稷)의 탄생 설화로소 그의 모친이 들판의 큰 발자국을 밟고 아이를 배어 후직을 낳았다고 한다.
[2]환웅이 내려온 설화
[3]신라시조 김알지 설화
子居登王九傳至仇衡王遜于新羅降國號爲金官郡仇衡曾孫庾信以統合三韓功封興武王子孫之羅麗者未艾綿綿入 本朝代有聞人名節勳功磊落相望而諸孫之相率謁 陵者常數千
아들인 거등왕이 9대를 전하였으나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나라를 양보하고 항복하니 가락국은 금관군이 되었다. 구형왕의 증손자인 유신은 삼한을 통일한 공으로 흥무왕에 봉해졌으며, 그 자손들은 신라와 고려를 거쳐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와 본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유명하고 공로가 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뭇 사람들이 우러러 보게 되었으며 여러 후손들이 서로를 이끌어서 납릉에 참배하는 자도 항상 수천명이나 된다.
鳴呼環東土千百里氏金之以金海系者又不知爲幾千百人而昭穆旣遠支分派裂遂至於交臂不相識慶吊不相來往相視如塗人而其初則首靈一人之身也首靈十子之昆季也譜牒修各烏可已乎
아! 우리나라의 여러 곳을 돌아다녀보니 김해의 계통에서 나온 김씨들이 또한 얼마나 수가 많은지 알 수가 없으나 소목이 이미 멀어지고 가지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서 마침내 손을 마주잡아도 서로를 알지 못하고 경조사가 생기더라도 서로가 왕래하지 않게 되어 서로를 길가는 사람처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수로왕 한사람의 몸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수로왕 의 10명의 아들들의 후손들인데도 보첩은 각각이니 어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周禮冡宰以九兩繫邦國也其五曰宗以族得民註曰宗繼別爲大宗修族也竊謂三代以後宗族旣廢而先王尊祖敬宗修族之遺意廑有於存者莫重於譜系也
주나라 예법에서 주공은 구양[1]으로서 나라의 계통을 세웠는데 그 5번째가 종(宗)으로서 종족에 의해 백성을 얻었다고 했으며 그 설명에는 종족의 계통을 구별하고자 종족이 커지면 새로운 족(族)을 만들었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기서 말하고 있는 3대 이후로 종족이 이미 없어지면 선왕의 조상을 존중하고 종친을 공경하여 족(族)을 새롭게 하라는 뜻을 남기는데 이것이 근근히 존재해 오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보첩의 계통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1]구양(九兩); 周禮에 백성을 다스리는 九種의 사람으로 즉 牧. 長. 師. 儒. 宗. 主. 吏. 友. 藪를 말함.
今我主上殿下以天縱 聖知之姿八承 大統初元德懿春春於敬宗叙倫而百世一室至發於試士之庭陶唐氏克明峻德以親九族者也
지금 우리 주상전하(고종)께서는 하늘의 뜻을 쫓아 팔승(?)의 바탕을 아시고 덕과 아름다움을 쫓아서 봄마다 종친을 공경하고 도리를 지키시며 백대의 한 일가가 마침내 시사의 정원(과거시험을 치루는 정원?)에서 시작되게 되었으니 요나라 임금인 도당씨가 높은 덕을 분명히 밝혀 구족을 친하게 한 일이다.
化行俗美桴應斯捷金海之金刊譜至來余弁首之文余何能文哉錄首露始終及角干世家以爲之說而塗人始由於一身百世肇出於一室 聖世敦倫之化當觀於是譜而知則可不勉乎哉
행실과 풍속을 아름다워져 마룻대처럼 서니 이에 응하여, 김해 김씨들이 보첩을 간행함에 있어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내가 어찌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만은 수로왕의 여러 일들을 기록하고 또 각간(김유신)의 일들을 기술하게 되었다. 길가는 사람들도 본래는 한사람의 몸에서 시작하였고 백대의 사람들도 처음은 한 일가에서 시작되었다. 세상의 윤리가 돈독해지고 화합하게 되는 것을 이 보첩을 통하여 볼 수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崇禎紀元後五乙丑十二月下澣嘉善大夫吏曺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事成均館事藝文館提學龍仁李參鉉序
숭정기원후 5을축(1865년, 4을축임) 12월 하순
가선대부 이조참판겸 동지경연춘추관사 성균관사예문관제학
용인 이삼현 서
金海金氏舊譜序
김해김씨 구보서
夫族以宗別宗以祖顯祖以孫傳孫 故保族者必敬宗 敬宗者必自尊祖
무릇 종족은 종친으로서 다른 종친과 구별되고, 할아버지로서 또 그 조상이 나타나고, 손자로서 그 후손에 전해진다. 따라서 씨족을 보존하려면 반드시 종친을 존경해야 하며 종친을 존경하려는 자는 반드시 조상을 숭배한데서부터 시작된다.
始金海之金以首露王爲祖越十世至仇衡王以德讓國於新羅 遂避地入智異山 宅于王山之下其終也
김해 김씨의 시작은 수로왕이 시조가 되어, 10세(世)를 지나 구형왕에 이르러, 덕으로서 신라에 나라를 양도하고 마침내 그 곳을 피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왕산 밑에 터를 잡고 임종하였다.
葬于王山 其孫大角干諱庾信 追慕厥祖之盛德 築室崇岡之側 晨昏灑掃至于七年之勤
왕산에 장례를 지내니 그 후손<증손자> 대각간(大角干) 휘 유신(庾信)이 그 조상<증조>의 성덕을 추모하고, 숭강(崇岡;숭고한 언덕=묘를 지칭)의 곁에 집을 짓고,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 까지 청소하기를 7년간이나 열심히 계속하였다.
伊後羅麗之亂失其陵所 子孫又中替不顯于世 逮入我朝圭組蟬聯 貞忠姱節歷世炳朗 亦有文章德業踵武而作世之以金爲氏者殆遍於國中
이후 신라와 고려의 난리에 그 능소를 잃어버렸고, 자손들이 중간에 바뀌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다가, 조선조에 와서 <변두리의 미미한>관직이 연속되었고, 충신과 절의가 대대로 빛을 냈으며, 또한 문장과 덕업을 닦은 분들이 뒤를 이어 배출되었고 세상에서 김씨 가진 사람들이 나라안에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今有顯道者濯纓之孫也 早業家學性又嗜古篤於向先
이제 현도(顯道,1755~1815)란 사람이 있으니 탁영(濯纓, 김일손, 1464~1498)의 후손이다.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하였고 성품 또한 옛것을 좋아하여 선조를 위하는데 독실하였다.
歲戊午入山陰登縣之換鵝亭 搜覽扁楣得其失傳之陵於千有餘載之後 鳴呼 苟非至誠能若是乎金氏 其可謂有孫矣
무오년(1798년)에는 산음현에 들어가 그 고을에 있는 환아정에 올라가 현판과 글(편미)을 찾아 살펴보고 그 실전된 능(구형왕 능)을 천여년이 지난 후에 찾아냈다. 아! 참으로 그 지극한 정성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김씨 집안은 참으로 훌륭한 후손을 두었다 할 것이다.
顯晦理也 固自有時者存而旣顯矣 不可以復晦 又不可不收其族以顯 其祖顯其祖以延其世遂乃謨之同人鳩如干財創譜牒之役顧其意 豈淺淺乎哉
나타나고 감추어짐은 세상의 이치이다. 진실로 다 그때가 있는 것인데 이미 나타난 것을 다시 감춰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 또 종족을 모아서 그 조상을 나타내고, 조상을 나타내게 함으로써 그 세(世)를 연장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마침내 이에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상의하여 약간의 재정을 모아 가지고 보첩(족보)의 일을 시작하였으니, 그 뜻을 생각하건데 어찌 얕다고 하랴(깊고 크다)
夫王山金氏之門戶也 王山高則金與之俱尊 王山不毁則金與之相終 始而金海之納陵慶州之西岳于 光有耀矣要余一言而叙之遂次其意如此云
무릇 왕산은 김씨의 문호(門戶)이다. 왕산이 높으면 김씨가 더불어 높아질 것이고 왕산이 허물어지지 않으면 김씨도 더불어 서로 시작과 끝(終始)을 같이 하리라. 그러니 김해의 납릉(納陵)과 경주의 서악(西岳)은 선대가 남긴 빛나는 영광(榮光)이라 하겠다. 나에게 한 말씀 서(序)해 주기를 요청함으로 곧 그 뜻을 펴기를 이와 같이 한다.
壬戌十月下澣嘉義大夫行吏曹參判兼同知經筵實錄事安東金羲淳序
임술(1802)년 10월 하순 가선대부 행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실록사 안동 김희순 서
一 自始祖王至仇衡凡十世自仇衡至長淸 盖六世以仇衡論之 至今擧成數千三百餘年 年代杳茫世系難徵矣挩近 皇明正德遺譜始顯于世故謹按顚末諱長淸下四十世系代與東國史記所載符合又見輿地勝覽及萬姓譜故別附一局?依舊譜規例以中祖尊閣以爲愼重之義焉
-. 시조왕으로 부터 구형<왕>까지 10세, 구형<왕>으로부터 장청까지 대개 6세이며, 구형<왕>으로 부터 논하여 지금 까지 천 삼백여년이 흘러 연대가 오래되고 아득하여 세계는 찾아보는 것이 어렵다. 최근에 황명 정덕보의 유보가 세상에 나타났으니 삼가 그 전말을 고찰해 보면 휘 장청이하 40세가 계통을 이었고 동국사기(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내용과 부합하고 있다. 또 여지승람과 만성보를 보니 예전에는 별도의 페이지에 하나의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으니 구보의 규례에 따라 중조를 받듦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一 前輩有曰輿地勝覽三國史記及駕洛國記似涉荒誕云而旣是久遠之文字則不信史筆而誰信乎並收錄焉
-. 전의 선배들이 이르시되 동국여지승람과 삼국사기 및 가락국기에서 유사하게 답습하고 있는 황당무계한 얘기 등은 오래된 문자로서 믿을 수 없는 역사가의 글이고 누가 믿을 것인가 마는 같이 수록하였다.
一 譜冊畫爲六疊隨次塡書以表其章次而冊首標立天字使各派子孫開卷易考焉
-. 보책은 6첩(6칸)이 되게 쓰고, 순서에 따라 전서를 쓰서 그 장의 다음을 표기하여 차례를 매겨 썼고 책의 수표(첫 장)에는 천자(千字文)의 천자(天字)를 사용하여 각 파의 자손들이 책을 열면 상고하기 쉽게 하였다.
一 本宗中祖諱字上不敢加姓金字者尊始祖之義也外孫則特書姓字以表內外之別焉
-. 본 종의 중조 휘자 앞에는 성(姓)인 ‘김’자를 더하지 아니한 것은 시조를 존중 한다는 도리이고, 외손에는 특별히 성을 적어 내외를 구별하게 하였다.
一 男女以長幼次苐書之則雖云倫序之明白而先男後女自是家譜之常例且重宗之道也 至於外孫則不必用此規
-. 장유로서 남녀를 순서대로 쓰는 것이 비록 윤리의 도리로 명백하나 남자를 먼저 쓰고 여자를 나중 쓰는 것이 이러한 가정의 보첩의 일반 상례이고 또한 종족을 귀중하게 여기는 도리이다. 외손에 있어서는 이 규약을 반드시 사용하지 않았다.
一 庶子女不計年序書諸嫡子女之下者以別嫡庶之分而庶女爲人妾則必書某人妾以別妻妾焉
-. 서자, 서녀는 연령과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적었는데 모든 적자 적녀의 다음에 적어 구별하여 적서를 나누었다. 첩이된 서녀는 반드시 누구의 첩이라고 꼭 써서 처와 첩을 구별하였다.
一 女婿名下書姓貫父名及科宦其先世如有達官聞人者則傍註亦書某之幾代孫俾知其某閥焉
-. 사위의 이름 밑에는 성과 본관, 부친의 이름과 벼슬을 적었는데 그의 선조 중에 고관직을 지낸 분이나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있으면 방주에 누구의 몇 대손 이라고 추가하여 적어 그의 가문을 알게 하였다.
一 外孫固不可䟽略而亦有難盡錄故只限二三世其子孫中如有顯名高宦者則亦書其名下傍註焉
-. 외손은 개략적인 것만 적고, 또 다 기록하는데 어려움이 많으므로 단지 2~3세에 한정하였고, 그 자손 중에 뛰어난 사람이나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있으면 그 이름아래의 방주에 썼다.
一 本宗人出系於他派則於本派名下只書出系某之後又於所後處書字號及子孫以便參考而亦重繼軆焉
-. 본 종에서 타파에 입계나 출계한 자는 본 파 이름 밑에 단지 누구의 자손으로 출계하였다고 쓰고, 또 후처(입계한 곳)에 자와 호 및, <그> 자손을 기입하여 참고하기 편리하게 함으로서 계통을 잇는 것을 중요시 하였다.
一 生曰室死曰配自是別生死之義配位姓貫封爵及四祖以上如有顯名之人則必書某之後使知其某閥焉
-. 살아 있으면 실이라 하고, 죽었으면 배라한 것은 생과 사를 구별하기 위함이고, 배위의 성과 본관과 봉작 및 4조 이상에 유명한 분이 있으면 반드시 누구의 후손이라고 기입하여 그의 가문을 알 수 있도록 했다.
一 三王陵所山川局體已見圖圈而至若仇衡王陵在於山淸縣王山庚坐原王與后眞像曁弓釼服御等物藏于王山陵所故便遠處諸姓孫以爲觀感之資焉
-. 삼왕(수로왕, 구형왕, 흥무왕)의 능소와 산천 형상은 이미 그림에 나타나 있고, 구형왕릉은 산청현 왕산 경좌의 언덕에 있다. <구형>왕은 왕후와 같이 실제 형상과 활과 칼과 의복과 사용하던 물건을 그려 왕산의 능소에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멀리 떨어져 사는 여러 후손들에게 편리하게 이를 보고 느끼는 자료가 되게 하였다.
一 生卒則生於某 朝某年卒某年月日書于旁註以知年代墳墓則在某郡某山某坐有碑碣誌石則詳細書錄俾無永世失傳之患焉
-. 생과 졸, 즉 어느 시대의 몇 년에 태어나고 몇년 몇월 몇일에 졸하였음을 방주에 기록하여 연대를 알 수 있게 하였다. 분묘는 어느 군 어느 산 무슨 좌에 있고, 묘비, 묘갈, 지석이 있음을 상세히 기록하여 영원세세 토록 잃어버린 염려가 없도록 하였다.
첫댓글 본 1876년 丙子譜 序文 내용을 올려주신 카폐지기 죽산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