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 갑신보(甲申譜) 서문, 범례
解釋 : 金順大 2004. 11. .
1. 서문(序文)
夫自我 始祖王傳至十世 仇衡王見羅運之盛不以養人者害人遜位於新羅而入智異之會稽建 始祖廟刱宮室以居終而葬焉
우리 시조왕으로 부터 전하여 10세 구형왕까지 이르렀으나 <구형왕이> 신라의 운이 번성함을 보고, 양인으로서 해를 입히면 않되겠기에 신라에 왕위를 양보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머무르며 시조묘를 쌓고, 궁실을 만들어 생을 마치고 장사 지내어 졌다.
王之德詰抗於太王去邠之躅至 王之曾孫純忠壯烈興武王合三韓拓六鎭偉功壯跡斑斑靑史環東土人庶莫不被其澤是以朝家崇獎之廟享於慶州西岳山淸之會稽會稽之號稱王山以三王遺蹟之致也
왕의 거빈(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함)에 대한 행적은 왕의 덕이 그 비난을 감쌀 수 있고(詰抗), 왕의 증손인 순충장렬 흥무왕에 이르러 삼한을 통일하고, (육진을 개척하여) <그> 위대한 공로가 역사의 기록에 베어 있다. 동쪽나라(우리 나라) 사람 모두 그에 <감히> 미치지 못하므로, 조정에서 널리 권장하는 묘로서 경주 서악에 제사를 지내고, 산청에 회를 쌓고 왕산이라 칭하며 삼왕유적지로서 관리하고 있다.
王山一面便是駕洛乾坤盆城日月則金相國
왕산의 한쪽은 가락의 땅이고, 분성의 땅은 김씨의 나라이다.
所謂王山金氏之門戶王山高則金與之高王山不毁則金與之俱存者豈非千載的確之論耶
소위 왕산은 김씨의 문호이며 왕산이 높아지면 김씨도 같이 높아지고, 왕산이 허물어지지 않으면 김씨도 함께 보존될 것이다. 이 어찌 천재적(오랜 세월의) 명확한 이론이 아니겠는가.
噫金海之納陵王山之石陵雙全於嶺右粵在 先朝遣重臣祭宥之數此莫非我 始祖王神異之聖也 仇衡王遜位之德也 興武王合三韓之功也
아! 김해의 납릉과 왕산의 석릉은 둘 다 영남의 오른쪽에 있다. 이전의 조정에서 중신을 파견하여 제사지내는 것을 돕도록 한 것은 우리 시조왕의 신과같이 기이한 성스러움과, 구형왕의 양위에 대한 덕과, 흥무왕의 삼한통합의 공이 아니겠는가.
豈不盛於哉顧余之金莫不盡祖 三王而三王之後派分支列各祖所蒙我中祖輔國公及嶺之三賢宅湖之四君家幷顯于世歲之甲戌壬戌三家連爲合譜譜族也 是譜也
되새겨 보건 데 조상이신 삼왕께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는 어찌 김씨가 번성하지 않겠는가. 삼왕 후 각 파가 나누어져 각 조상을 받들고 있다. 나의 중조이신 보국공(宇杭)과 영남의 삼현과 호남의 사군가가 나란히 드러나서 후세에 전하여 갑술년(1754)과 임술년(1802년) 세 가계가 연합하여 합보하게 된 것이 이 족보이다.
卷至三十有餘恐或難於急遽收藏之端故與近派族人鳩如干財刊成我 輔國公派譜便同家乘也 顧余不肖忘拙謹識世守敦睦以寓羹墻之慕焉
권은 30여권에 이르고, 간직되어 온 단서들을 급하게 모으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되어 근처에 사는 파족인들이 비용을 모아 간행을 완성하였다. 우리 보국공 파보는 가승되는 것과 일치한다. 불초가 서투른 서문을 삼가 쓰고 기타 부분을 생각건대, 조상을 기리고 그리워하며(갱장지모) 세세토록 돈독한 화목을 지켜주기 바란다.
歲崇禎四甲申三月晦不肖孫進士象鉉謹序
숭정4갑신(1824년)3월 불초손 진사 상현(문충공파,宇兼->漢熙->益祚->象鉉,1751~1832) 근서
2. 凡例(범례)
一 自鼻祖距仇衡王凡十世自仇衡王至長淸 盖六世以仇衡王論至今擧成數千二百餘年 年代蒼茫世系難尋者理固 其然而今觀各派草單則或六七十代或至四五十世人皆聽氷世皆駭矚似是井邑僞譜傳派詿誤則一依前後大譜規各立中祖以各派中祖叙列于左依此愼重之義焉
-. 시조로부터 구형왕까지 10세, 구형왕으로 부터 장청까지 6세이며, 구형<왕>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천이백여년이 흘러 연대가 오래되고 아득하여 세계는 찾아보는 것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지금 보건데 각 파의 초단이 혹 6~70대 혹은 4~50세로서, 사람들 모두 세대의 계통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氷世)을 듣고, 모두 놀라 유사함을 자세히 보니 이는 정읍의 위보가 전한 속임수요 잘못된 것이다. 전후 대 보규에 의하여 각 중조를 세우고, 각파 중조의 순서를 매김에 있어 신중을 기하라.
一 前輩有曰輿地勝覽三國史紀及駕洛國記似涉荒誕云而旣是久遠之文字則不信史筆而誰信乎並收錄焉
-. 전의 선배들이 이르시되 <동국>여지승람과 삼국사기 및 가락국기에서 유사하게 답습하고 있는 황당무계한 얘기 등은 영구하고 오래된 문자로서 믿을 수 없는 역사가의 글이고 누가 믿을 것인가 마는 같이 수록하였다.
一 首露王之金與時興之金雖混稱金海之金而所謂時興封君金海故時興之孫貫稱金海時興之先卽敬順之后也 與首露王之金同貫異本 勿許同譜識別異姓焉
수로왕의 김씨와 시흥의 김씨를 혼돈하여 김해김씨라 하나, 소위 시흥은 김해군으로 봉군된 고로 시흥의 자손들이 본관을 김해라 칭하나, 시흥의 선조는 즉 경순왕의 후예이다. 따라서 김수로왕의 김씨와는 동관이본(관향은 같으나 시조가 틀린)으로서 동 보첩에 기록하지 아니한 것은 이를 다른 성씨로 식별하기 위함이라.
一 庶子女不計年序書諸嫡子女之下以別嫡庶而庶女爲人妾則必書某人妾以別妻妾焉
-. 서자, 서녀는 연령과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적/서를 구별하여 적자/적여 밑에 썼다. 첩이된 서녀는 누구의 첩이라고 꼭 써서 처와 첩을 구별하였다.
一 湖南井邑有譜一本上自鼻祖下系六七十代僻土管見樂其誕自祔年代之錯誤擧措之儧越不足深誅後之君子庶可辨其眞贋矣
-. 호남 정읍에 있는 보첩 한 책에 시조이하 6~70여대를 어긋난 토관 같이 이어져 있어 보기에 좋을지 모르나, 그 허망한 거짓이 합쳐져 있고, 연대의 착오가 있으며, 이리 저리 모은 것이 뒤섞이어 깊이 보기에는 부족하니 후에 군자는 모두 그 옳고 그름을 분별할 지라.
一 始王納陵山川局體已顯圖圈而至若仇衡王陵在於山淸縣王山庚坐之原王與后眞像曁弓若劍服御等物凡我子姓或顯或徾散處中外有難瞻拜故別成一圈附于納陵圖之末使遠道諸姓孫以爲觀感之資焉
-. 시조왕 납릉의 산천 형상은 이미 그림에 나타나 있고, 구형왕릉은 산청현 왕산 경좌에 있다. <구형>왕은 왕후와 같이 실제 형상과 활과 칼과 의복 등의 물건을 그렸다. 모든 우리 자손(子姓)이 혹 드러나거나 혹 서로 따르거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더라도 우러러 숭배할 수 있도록 별도로 한곳에 모아 납릉도를 그려, 멀리 있는 모든 자손들이 보고 느끼는 자료로 하도록 하였다.
一 本宗各派中祖諱字上不敢加姓金字者尊始祖之義也外孫則特書姓字者以表內外之別焉
-. 본 종 각파의 의 중조 휘자 앞에는 성인 ‘김’자를 더하지 아니한 것은 시조를 존귀하게 여긴다는 뜻이고, 외손에는 표시로서 성을 특별히 쓰고 내외를 구별하게 하였다.
一 姓族派分互相殊異不能名字隨行者多矣然各派中各有行列觀者祥之
성족에서 파가 나누어져 서로 단절되어 이름자를 따르기가 불가능한 것이 많아져, 자연히 각 파중에 있는(사용하는) 항렬을 나타내어 자세히(祥->詳)했다.
一 遠處單本或有晩到於校正之後而派系昭然則載之編末以爲傳信
먼 곳에 사시는 분의 수단이 혹시 교정이 끝난 후 늦게 도착하면 파계를 밝고 분명하게 편의 말에 실어 확실히 전해지도록 하였다.
一 世代未繼之派則書以別譜以示其百代同源之意焉
-. 세대가 계승되지 않는 파는 별도의 보에 기록하여 백대가 지나도 동원이라는 의미를 나타내었다.
一 中祖諱牧卿派子孫散在京鄕中徾不振有若行路之不相識故象鉉先以發文興河東族姪濟奎晋州族人濟淵甫以成修譜之議示其百代敦睦之誼焉
-. 중조 목경파의 자손이 서울과 지방에 산재되어 있어, 서로 따르는 것이 부진하고 길거리에서도 서로가 알지 못하므로, 상현(문충공파,宇兼->漢熙->益祚->象鉉,1751~1832)씨의 앞서 발문<과 같이> 하동족의 족질(조카뻘) 제규와 진주 일족의 제연 씨가 수보를 하자는 의견을 이루었다. 이는 백대의 돈독한 화목의 정의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