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5rpR_vGNh68
본문 창세기 24:1-9 제목 :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
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5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6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8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9 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오늘 본문의 다음 장인 창세기 25장 후반부에 보면 야곱과 형 에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집에서 팥죽을 쑤고 있었지요. 형 에서가 들에서 사냥하다가 몹시 배가 고팠나봅니다. 사냥 도중에 집에 와보니 동생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던 거죠. 그 죽을 좀 달라고 하니까 야곱이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면 주겠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에서가 한 말이 있지요. 25:32절입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렇게 말하면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겼지요. 에서의 말처럼 과연 한 끼 배고픈 것이 정말 죽음까지 생각해야 할만큼 심각한 것이고, 그래서 장자의 명분까지 팔아야 할 상황이었을까요?
2016년에 나왔던 ‘곡성’이라는 영화에서 한동안 사회적인 유행어가 되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딸이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지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나고?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하고 별로 의미도 없는 것에 집착하는 현실을 풍자한 거죠. 에서의 경우 한 대엿새쯤 굶었다면 모르겠지만 한 끼 못먹었다고 해서 이걸 죽을 지경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그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그렇게 쉽게 버려도 되는 거였을까요?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장가 보내기 위해 고심하는 내용이지요. 창세기 24장 전체는 장장 67개절에 이르는 창세기에서 가장 긴 장인데 그 내용은 아들 이삭의 신부감을 찾는 내용입니다. 아들 하나 결혼시키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토록 길게 성경 속에 기록해 놓은 걸까요?
아브라함은 본래 갈대아 우르라는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달하던 곳에서 잘살고 있었는데, 창세기 12장에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해서 안정되게 살아왔던 터전을 떠났지요. 그리고 하나님 인도하심을 따라 전혀 낯선 가나안 땅에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가나안 땅에서 너희 후손들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 약속만을 믿고 아들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 25년, 그리고 이삭이 태어난 이후로 오늘 본문의 상황까지 40년을 가나안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땅 한 평 없이 여기저기 유랑하며 가축을 키우는 유목민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본문 1절에서처럼 이제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늙었지요.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가나안에 들어온지 65년이나 되었고, 아브라함 나이가 140세 되도록 땅 한 평도 없고, 본처 사라에게서는 오직 이삭 하나만 아들을 두었을 뿐입니다. 과연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사실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안정된 삶을 위해서 그가 떠나왔던 본토로 다시 돌아가거나 아니면 가나안 땅에서 더 이상 외국인과 나그네로 불안하게 살 게 아니라 가나안에 귀화해서 가나안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던지 해야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느 쪽도 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오로지 믿고 의지했던 거죠. 그래서 본토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가나안에 귀화하지도 않고 여전히 불편하고 위험하고 안정되지 못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아들 이삭에게도 살아가게 하려는 거죠. 이 세상에서의 행복하고 안정된 삶도 중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위험과 위기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종에게 이렇게 명령하지요.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지금 살고 있는 가나안에는 여성이 없었겠습니까? 당연히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가나안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를 수 있는 여인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로 가서 이삭의 아내를 구해오라고 종에게 명령한 거죠. 현실적인 편리함이나 효율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믿음의 결단이었던 겁니다.
아브라함의 명령에 종은 몇가지 상황을 생각하며 물었지요. 5절에 보면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마도 종은 적절한 여인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만났다 해도 그 여인이 과연 자기 나라를 떠나 먼 곳 여기까지 오려고 하겠는지 의문스러웠나 봅니다. 그래서 오지 않으려 한다면 이삭을 차라리 그리로 데려가도 되겠는지를 물은 거죠.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내 본토와 고향을 떠나왔는데 아들 결혼문제 때문에 아들을 본토로 보내버리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의 말씀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는 거죠. 아브라함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삭의 결혼이 아무리 시급하더라도 이것 때문에 이삭을 본토로 돌려보내지는 않겠다고 한 겁니다. 8절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했지요.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그리로 데려가지 말지니라.’ 혹시 실패했더라도 그것은 너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해 준 거죠. 이삭을 장가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합당한 길로 행하는 게 더 중요했던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24장 전체는 창세기에서 가장 긴 장인데 바로 이삭의 아내를 찾아 데려오는 이야기이지요. 겨우 아들 하나 장가보내는 내용을 이렇게까지 길게 말할 필요가 있겠나 싶은데,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브라함이 기대했던대로 동족에게서 리브가라는 여인을 이삭의 아내로 데려올 수 있어서 이렇게 긴 내용이어도 나름 의미는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렇게까지 아브라함이 노력했는데도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일이 실패했다면 그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이 안되었을까요? 저는 실패했더라도 그 실패한 내용이 기록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24장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말하려 하기보다도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려는 그 과정과 그 과정 속에 담긴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지, 어떻게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어떤 위기와 시급한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고 굳게 붙잡으려는 믿음의 의지를 말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왜 살아야 할까요? 성공하기 위해서인가요? 내 목표와 뜻을 이루기 위함인가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 폼나게 잘살아가는 나를 과시해보기 위해서인가요? 좋습니다. 그렇게 성공해서 자랑스러워졌다고 하지요. 그 다음은 무엇인가요? 그렇게 성공해서 나에게는 무엇이 남을 수 있나요?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내가 거둔 성공 중에서 과연 저 세상까지 가지고 갈 만한 게 있을까요?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에서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어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도 않았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늙었고, 본처의 유일한 자식인 이삭을 나이 40세가 되도록 장가도 보내지 못해 여전히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도 있었겠습니다만, 아브라함은 거기에 집착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언약의 말씀이 있었고, 그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지켜가는 것을 세상적인 성공이나 육신적인 번영과 안정된 생활보다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았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드리신 기도를 기억하실 겁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고통스럽고 처참한 죽음 앞에서도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는 이 기도는 그야 말로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여기서 내가 살아내어야 할 삶, 내가 감당해야 할 소중한 책임과 역할에 하나님의 뜻대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부를 때에 3절에서처럼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은 천국이라는 말처럼 모든 게 하나님의 뜻대로만 지배되는 완벽하고 완전한 생명과 사랑과 평화의 세상이지요. 반면 땅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 같이 무수한 죄악과 어두움, 비극과 슬픔과 불안함과 답답함의 세상입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처럼 서로 넘나들 수 없는 수준의 격차를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늘처럼 완벽한 세상에도 하나님께서 계셔야 한다면 이렇게 불안함과 불완전함과 죄악과 어두움이 많은 이 땅에는 얼마나 하나님이 더 계셔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서도 필요한 분이겠지만 이 땅에서 더 필요한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알았지요. 그래서 이 어둡고 불안한 세상에서 사는 방법은 세상처럼 어둡고 세상처럼 불의하고, 세상처럼 인간의 욕심과 욕망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함을 알았던 것이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거친 광야의 현실 속에서도 실천해 갈 수 있었던 겁니다.
영화 곡성에서처럼 무엇이 중할까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예수께서 기도하셨듯이 이 세상 한복판이 아무리 절박하다 해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과 평화, 구체적으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셨던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역사, 이와 같은 생명과 구원의 복음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참된 생명과 구원의 길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드리며 추구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