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BN1q0nB3K9g
본문 창세기 32:21-30 제목 :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우리 나라는 정말 자랑스럽고 좋은 나라입니다. 1950년대 이후 후진국이었다가 선진국으로 도약한 나라는 세계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하지요.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역사와 6.25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초토화 되어 버렸지만 온 국민의 엄청난 노력과 수고로 가난의 올무에서 벗어나 이제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여권으로 비자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고 하지요. 우리가 예전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 갔듯이 이제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면서 한국에서 행복한 삶을 위해 일하러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줄을 서 있지요. 누가 뭐래도 우리 나라는 정말 대단하고 좋은 나라, 그리고 자랑스러운 우리 조국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랑스러운 면 뒤에 안타깝게도 여러 그늘들이 존재하지요.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이고, 우울증 환자 비율도 역시 1위입니다. 행복지수는 거의 하위권이고, 출생률 또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 있지요. 젊은이들 중에는 헬조선이라고 하면서 이 나라가 지옥 같다고까지 말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 어떻게든 들어오려고 애쓰는데 정작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런 선진국에 살면서도 도대체 왜 행복하지 못할까요?
오늘 본문의 야곱이 그렇습니다. 형 에서에게서 속임수로 장자의 명분을 가로챘지요. 분노하는 에서의 칼날을 피해서 멀리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 피신해서 거기서 2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몸뚱아리만 가지고 갔기 때문에 외삼촌 라반의 무수한 갑질과 속임수로 어려움과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지만 마지막에 야곱은 야곱대로 또 여러 가지 방법들을 써서 많은 재산들을 모았지요. 아내도 네 명이나 두었고, 아들도 11명까지 두었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크게 성공한 셈이지요. 성공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가는데 야곱은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재산과 많은 가족도 야곱에게 행복이 되어주지 못했지요.
고향으로 돌아가면 무엇보다 형 에서와 만나야만 합니다. 헤어진지 20년이 지났지만 형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없었지요. 나를 반갑게 맞아줄지 아니면 여전히 분노하며 죽이려 할지 불안했습니다. 본문 앞부분인 11절에 불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야곱을 볼 수 있지요.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그래서 먼저 요즘 화폐가치로 수억원 대의 선물을 얍복강 건너편에서 야곱에게로 오고 있는 에서에게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 21절과 22절에 의하면 그의 모든 소유와 가족들까지 얍복강을 건너 먼저 보냈지요. 24절 첫 부분에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렇게 많은 재산과 가족들이 있어도 그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현실 앞에 야곱은 결국 홀로 남게 된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주변에 나를 사랑하고 나와 어울리고 나와 함께 일하는 가족이나 동료들이 계시겠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행복할만큼 재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어느 순간 결국은 홀로 남겨지고 말지요. 야곱처럼 재산도 많고 가족도 많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홀로 남겨지게 되고 마는 것처럼 말입니다.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말처럼 내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어느 순간에는 결국 나 홀로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인 거죠. 특히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내 가족들이 둘러앉아서 나를 위로해준다 한들 나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누구와 함께 나눌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우리 인생의 결국은 홀로 남게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족들은 행복하게 웃고 있지만 홀로 골방에서 눈 앞에 다가온 심각한 상황이나 위험한 운명 앞에서 홀로 고민하고 홀로 눈물 흘려야 하는 이 땅의 가장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전에 잘 나갈 때에는 나와 어울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하는 일이 망하거나 심각한 비극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나를 떠나버리기도 하고, 내 스스로도 고생하는 내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스스로 고립되어 홀로 전전긍긍하게 되기도 하지요. 어쨌든 우리의 인생은, 특히 인생의 마지막은 결국 홀로 맞이해야 하는 겁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홀로 있기를 두려워하지요. 특히 홀로 있는데다가 돈까지 없다면 정말 최악의 두려운 고독입니다. 홀로 있으면 불안하고, 외면당하고 왕따당하지 않을까, 홀로 있다가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그래서 어떻게하든 어디엔가 소속되어 있으려 하지요. 그럼에도 이 나라는 홀로 살아가는 일인가구가 늘어납니다. 그 일인가구들 중에는 홀로 되어서 홀가분하고 자유롭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홀로 있는 외로움과 불안감에 젖어 있는 사람이 훨씬 많지요. 특히 홀로 죽는 고독사나 홀로 있다가 깊은 우울증에 빠지는 현상들은 홀로 있는 두려움을 더 크게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과연 홀로 고독한 것은 내 인생에 독약이 되기만 하는 걸까요?
24절 말씀을 다시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홀로 남은 절대 고독의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찾아왔지요. 위로가 아니라 힘겨운 씨름을 걸어옵니다. 20년 전에도 야곱이 에서에게서 도망쳐 삼촌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길에서 홀로 돌을 베게로 삼고 노숙을 해야 했던 적이 있었지요. 그 때의 야곱도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절대 고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셨지요. 비슷하지만 좀 다르게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으로 찾아오셨고 야곱은 그와 밤새 괴로운 씨름을 하게 된 겁니다. 도대체 왜 씨름을 했을까요?
중요한 것은 그 절대 고독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이고,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 후반부에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런 말은 하나님께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존재에게만 할 수 있는 말 아닙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살다보면 야곱과 같은 깊은 절대 고독 속에 혼자 남을 때가 있지요. 하나님은 주로 그 때 찾아오십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처럼 절대 고독 같은 인간의 끝에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하시는 거죠. 야곱 뿐만 아니라 야곱의 아들이었던 요셉도 오랜 감옥생활의 절대 고독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나 홀로 양치는 절대 고독의 자리에서 떨기나무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부였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밤새 고기 한마리도 못잡고 지쳐버린 그 절대 고독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났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것은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어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거죠.
성경 속에서는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셨는데 지금 이 시대는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실까요? 각자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오시는 통로가 있지요. 바로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온 자리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만나주시는 자리입니다. 찬양 속에서 만나주시고, 공동기도 주기도나 기도담당자의 기도를 통해서 만나주시고, 말씀을 교독하거나 설교자가 선포하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고 계시는 순간임을 믿으십니까?
이렇게 주일마다 예배에 나오고, 매일 새벽기도에까지 오는데도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분들이 계신데, 가장 큰 이유는 자기가 기대하는 만남의 형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나를 감격케하던지, 어떤 신비한 현상이나 하늘의 음성이 들리던지, 아니면 내 소원이 이루어져가는 게 구체적으로 있다던지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의 형식을 자기 생각과 욕심으로 정해버리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의 테두리에 갇히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다가오십니다. 그것을 인식하고 깨닫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요. 본문의 야곱도 씨름하는 처음부터 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았겠습니까? 밤새도록 씨름해 가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깨달았던지 아니면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달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이 예배시간은 본문의 야곱처럼 우리가 주님과 만나 씨름하는 시간입니다. 오늘의 찬양과 오늘의 기도에 내 마음의 중심을 진실하게 담으려 해야 하고, 오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고민하는 씨름과 같은 노력이 필요한 거죠. 이 예배시간으로 다 소화하지 못한다면 교회 다음카페나 유튜브에 예배 실황이 그대로 올려지고 있고, 특히 주일예배와 새벽기도회는 설교 원고를 그대로 다 올립니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고 보고 들을 수 있는 거죠. 이런 씨름의 과정이 없이는 주님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단지 구경하고 관전하는 예배, 설교를 감상하고 비평하는 자세로는 아무리 예배가 쌓여가도 주님과 만나는 경험은 어려운 거죠. 이 예배의 형식이 내 취향이 아니고 내 기대와 다르기 때문에 예배에서 마음이 떠나 있으면 이 예배가 아무리 훌륭하고 감동적으로 진행되어도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은 할 수 없을 겁니다.
야곱은 밤새 씨름했지요. 그래서 새롭게 얻은 이름이 28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거죠. 그리고 그 씨름했던 곳을 30절에 의하면 브니엘이라고 이름을 붙였지요. 내가 하나님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든 브니엘이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담고 있지요. 황홀경에 들어가 화려한 신비의 광경을 보는 것으로가 아니라 전혀 바라지도 않았을 힘겹고 고통스런 씨름을 밤새 벌이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도 만나주시겠지만 모두에게 공통적인 방법은 이 예배를 통해서 만나주시는 거죠. 이 예배 시간이 지루하고 졸렵고 고통스러우시든, 편안하고 즐거우시든 이 예배 시간을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씨름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세상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