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
최진석
서양 문명사를 중심에 놓고 말하면, 인간이 근거를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는 일은 16세기, 즉 르네상스 이후이다. 그전에는 ‘관념’과 ‘말씀’ 위주였다. 인간의 기술력이 증가되어 망원경처럼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새 능력을 갖게 되면서 인간은 아직 경험에 포착되지 않은 영역까지를 포함해서 설명할 수 있기를 원하였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경험되는 곳과 경험되지 않은 곳을 모두 포함해서 설명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법칙’이다. ‘법칙’은 주관적 ‘관념’들 사이의 규칙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들 사이의 규칙이다.
인간의 진화 방향은 언제나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여 객관성을 확보할 것인가하는 방향을 향해왔다. 그 최초의 높은 봉우리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어떻게 억측(doxa)에 빠지지 않고 인식(episteme)에 도달할 것인가를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분명한 계승자 가운데 한 명이 데카르트이고, 그 계승의 최고봉이 또 칸트이다. 데키르트 시기에 와서 인간은 변화가 세계의 진상임을 받아들이고, 그 변화하는 세계의 법칙을 발견하는 데에 집중한다. episteme가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정확한 인식을 제공하여 인간에게 세계와 관계하는 효율성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영혼의 정화도 그 단계에서라야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사실들 간의 관계에 대한 확실한 인식으로 주관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근대의 중요한 성취이다. 근대를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즉 근대의 성취를 체화하지 못하면, 여전히 주관적 감성이나 감각을 행위의 주요 원천으로 삼는다. 근대의 성취를 체화했다면, 비교적 더 사실과 근거와 법칙에 의존한다. 이것은 진화의 정도를 반영한다.
사실들에서 법칙과 근거를 발견하려는 데까지 온 인간의 진화 과정은 ‘통계’라는 장치에 이른다. ‘통계’는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세계와 관계하는 기술로서 인간이 개발하여 만든 것이다. ‘확률’이라는 개념이 없이 ‘통계’는 서지 못한다. ‘통계학’(statistics)이라는 이름 자체가 ‘확률’(statisticus)이라는 라틴어와 연결되어 있음도 알 수 있다. 통계학은 특정한 목적으로 모은 표본집단 자체를 해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표본집단의 이해를 바탕으로 그것을 일부분으로 포함하는 어떤 ‘전체’에 대한 정보를 구하려는 것이다. 일부로 전체를 알아내려는 태도이다. 17세기에 와서야 인간은 ‘통계’를 통해 전체에 대한 정보를 구하려 했다.
인간에게는 ‘전체’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이 국가이다. 그래서 통계학이 처음에는 나라의 전체 세력이나 인구를 이해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나라를 의지나 말씀이나 감성으로 이해하는 단계를 지나, 통계적 추론으로 이해하는 단계로 진화한 것이다. ‘통계’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빅데이터’의 시대까지 왔다. 진리를 발견하려는 태도의 과격한 진화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누가 빅데이터를 더 잘 모으고 잘 다루는가로 승부가 갈릴 것이다.
국가를 논하려면, 우선 ‘통계’를 근거로 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앞 선 인간은 통계에 밝고, 그렇지 않은 인간은 믿음(감성)에 밝다. 美中 간의 비교도 우선은 통계적 비교로 출발해야 한다. 인구, 자원, 국토, 지리, 총생산량, 신산업 발생 추이, 통화가치, 군비지출, 에너지 자급률, 식량 자원, 공중 위생, 교육, 의료, 과학기술 능력 등등...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도 먼저 통계적 비교가 우선되어야 한다.
통계는 이제 진리의 원천 가운데 하나이므로 매우 진실하게 다뤄야 한다. 마치 수원지(水源池)를 다루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