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최진석
세상의 일들은 당연(當然)보다는 필요(必要)를 따라 나옵니다. 존재하고 있는 것을 가만히 놓고 보면 ‘당연’에 가깝겠지만, 거기서 무슨 산출이나 발생 등과 같이 동적인 목적을 기대하면서 보면 ‘필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보니까 그렇지 사실은 ‘당연’과 ‘필요’는 섞여 있거나 중첩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족한 사람에게는 ‘당연’과 ‘필요’가 따로 있고, 성숙한 사람에게는 그 둘이 함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의 내가 정치를 말하려는 것은 ‘당연’해서가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하면서도, 평판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이 되면, 가끔은 이것이 마땅한 일인지의 여부를 놓고 저울질에 빠지곤 하는데, 아마도 내가 충분히 성숙하거나 강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나는 아직 소크라테스의 심장은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긴 글이던 조각 글이던 간에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하나도 없는 글에 독자들은 더 많은 박수를 보냅니다.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내용이 조금만 들어 있어도 박수 소리가 확연히 줍니다. 박수 소리가 줄어든 자리는 비난이 차지합니다.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는 글만 쓴다면 박수 소리는 더 길고 커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글만 쓰라는 충고도 많이 듣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발표하고 나서는 충고가 더 심해졌습니다.
정치도 인간이 필요해서 만든 것입니다. 정치라는 장치를 개발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아직까지 무모한 용맹성이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환경에서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치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타인의 뜻에 반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재로 성숙합니다. 철학의 탄생과 정치의 시작은 시기가 같습니다. 기원전 6-7세기 무렵, 폭력적 용맹성을 ‘말’이 대체하고,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생각’이 대신하고, 역사의 책임자를 무조건 신으로 여기다가 인간 스스로가 역사적 책임성을 감당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면서 철학과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비로소 주먹보다 말로 자신의 존엄을 증명하게 된 것이죠. 철학과 정치를 시작으로 인간은 말, 대화, 문자에 중심적인 역할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말 잘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됩니다. 그리스에서는 rector(rhector)가 말 잘하는 사람이자 웅변가라는 뜻이었는데, 지도자나 정치인이라는 의미도 갖는 이유입니다. 말을 잘해서 세상을 더 잘 설득하는 능력을 기른다는 의미의 수사학, 즉 레토릭도 이와 관련됩니다. 잘 아시겠지만, 수준 높은 정치 공간에서는 역사에 남을 명문장들이 생산되곤 합니다. 천박한 정치에서는 우선 레토릭이 처집니다. 정치의 수준이 말의 수준이고, 말의 수준이 곧 정치의 수준인 것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무엇인가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입니다. 종속적 인간은 야기된 변화를 수용만 합니다. 변화를 야기하는 모든 일에는 ‘설득’이라는 행위가 수반됩니다. ‘설득’이 곧 정치 행위입니다. 변화의 주도권이 신에게 있다고 믿을 때에는 정치가 없습니다. 변화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치가 출현한 것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정치’에 책임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는 정치가 꽃입니다. 어떤 일이건 정치 행위 없이 혁신되거나 완성되거나 조정되거나 심지어는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일조차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꽃이 잘못 피워져서 혐오스럽다 할지라도 꽃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정치가 혼탁하고 비효율적이어서 혐오스럽더라도 정치를 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 행위는 그 꽃을 잘 피울 것인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뿐입니다. 정치 혐오는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것도 자기가 아니라 자기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이 그렇게 만듭니다. 그래서 플라톤도 다음처럼 말합니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국민들에게는 큰 징벌이 내려지는데 그것은 국민들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지배자가 되고 그 사람의 지배를 받는 불행을 가져온다.”
저는 우리나라는 익숙한 과거의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미 도달해버렸고, 언제부터인가 하강을 시작했으며, 그 하강에 속도까지 붙었다고 봅니다. 아주 좋지 않습니다. 좋게 볼만한 부분적인 근거라도 이제는 찾기 어렵습니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하고를 따지기 전에 사회는 극단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분열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심한 분열은 앞으로 없을 것입니다. 나라가 분열되어서 잘 된 예는 역사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최근까지 대통령을 몇 명 지나면서 우리나라 경제 성장은 대세 하강 국면이 뚜렷합니다. 경제가 하강하면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이 보장된 예는 아직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헌말 헌몸짓>을 벗고, <새말 새몸짓>으로 무장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온 민족이고, 우리가 어떻게 번영시킨 나라인데, 여기까지만 살다 가도 괜찮은가?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며, 나 자신과 내 가족들 생존을 지켜야 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정치적인 태도입니다. 예수도 석가도 모두 정치행위자들입니다. 노자나 장자나 공자도 모두 정치 행위자들입니다. 정치는 혐오하고 배척해야 할 물건이 아니라, 잘 다뤄야 할 물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