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 가문으로 경건한 다음 세대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비전
들어가면서
현대 사회는 가정, 교회, 직장, 학교라는 각 영역의 삶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세분화되고 파편화되어 있어서 공동체적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가정은 가장 중요한 사회 단위이면서도 기본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정이 올바로 서야, 교회, 학교, 직장도 공동체로서 원활히 기능하게 되고,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온 나라와 세계 열방이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 교육을 열심히 설파하고 계신 현용수 박사는 “가정 해체로 인한 인성 교육 실종”으로 우리 사회에 “대재앙”이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현대 사회를 “피로 사회”나 “위험 사회”라고 하는데, 그 문제의 출발점은 모두 가정에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먼저 가정이 살아있는 신앙 공동체로 세워지는 것은 매우 시급하고도 중대한 일이다. 일주일에 한번만, 또는 교회의 정해진 예배 시간, 기도 시간, 성경공부 시간에만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매순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각 가정이 날마다 이른 아침 시간부터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온 종일,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주일 내내, 매월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일주일 내내, 정월 초하루부터 12월 31일까지 일 년 내내,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 가정이 온전히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앙 가문의 전통이 세대와 세대로 이어져서 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처럼 흔들리지 않는 삶의 원칙, 하나님의 원안에 가장 충실한 삶의 모습이 자자손손, 세대와 시대, 역사의 유구한 흐름 속에서도 고스란히 지켜지는 신앙 가문을 세우고, 그로 말미암아 경건한 다음 세대들이 주렁주렁 열매 맺는 하나님의 비전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이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행 17:11)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이어지는 글에서 나누는 성경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분별하고 통찰해 보기 바란다.
신앙 가문이란 무엇인가?
숲이 우거져야 각종 생명들이 깃들게 된다. 땅 위를 뛰어다니는 동물들, 하늘을 나는 새들, 나무에서 자라는 곤충과 벌레들, 땅속에 자리 잡고 있는 숱한 미생물들 … 짙게 숲이 우거지지 않는다면, 이 모든 생명체들의 터전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처럼 각종 생명체들이 깃들어 서로 유기적인 협력과 상생을 통해 건강한 삶을 향유하는 공동체는 만들어 가자는 것이 바로 신앙 가문 세우기 운동이다.
농사를 짓고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땅을 만드는 작업이다. 해당 식물이 자라기에 가장 알맞은 토양 환경을 배양하는 게 가장 우선적인 과제다. 요즘 자연농법이나 자연재배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연 상태에 가장 가까운, 자연 상태나 다름없는 땅 만들기다. 그 다음에는 좋은 씨앗을 부리거나 건강한 나무를 심는 것이다. 이 토양에 해당하는 것이 신앙 가문이며, 씨앗이나 나무에 해당하는 것이 부모요, 열매에 해당하는 것이 경건한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빛, 온도, 물, 공기와 같이 튼실한 열매를 얻기 위한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는 것처럼, 경건한 다음 세대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도 수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좋은 토양과 씨앗보다 더 핵심적이고 중대한 요소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토양에 해당하는 신앙 가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첫째, 신앙 가문이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대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계 원안(God’s Original Design)대로 살아가는 가정들의 공동체이다. 어떤 건물을 짓든지 건축 공사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설계도이다. 기초 공사를 잘 한 다음, 아무런 문제없이 그 위에 튼튼한 건물을 지으려면, 제대로 된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오랜 시간 동안 든든히 서 있는 훌륭한 신앙 가문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가정에 대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설계 원안에 정통하고 그에 따라 모든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견실한 다음 세대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신앙 가문이란 삶의 모든 영역을 기독교 세계관(Christian Worldview)으로 바라보고 적용하고 실천하는 가정들의 공동체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프리즘을 통해 온 세상의 제반 영역들을 바라보는 인식 틀(frame), 또는 관점(viewpoint)을 말한다(『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알버트 그린/CUP), p. 55 그림 참조). 어느 한 구석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색깔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느냐는 것이다.
셋째, 신앙 가문이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삶의 원리를 지키며 후손에게 유산(기업)으로 남겨주는 가정들의 공동체이다(렙 35장).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당연히 변하는 것이 있고 반드시 바뀌어야 하는 것들도 많다. 그러나 본질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원리와 원칙은 시간에 관계없이 지켜지는 것이다. 진리는 사람이나 장소나 시대에 상관없이 준수되어야 한다. 그게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넷째, 신앙 가문이란 날마다 정기적으로 만남과 대화의 시간(Family Time)을 갖는 전통이 계속되는 가정들의 공동체이다. 신앙 가문에서는 이 시간을 통하여 다양한 차원과 내용을 통하여 성령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코이노니아가 막힘없이 이루어진다. 요즘 거의 모든 가정에서는 아이들의 사춘기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나 이런 가족 간의 대화가 살아있는 가정, 시시때때로 성령의 코이노니아로 말미암아 서로 비폭력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그리하여 가족들 사이에 세대 간의 단절, 부부 사이의 단절, 부모 자녀 사이의 단절, 형제자매 사이의 단절 없이 온전히 하나 되는 가정에서는 사춘기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연령대에 이르든지 서로 간에 더욱 돈독한 사랑이 깊어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신앙 가문이란 지금까지 이야기한 신앙 전통과 삶의 양식이 세대와 세대로 이어지는 가정들의 공동체, 적어도 3-4세대 이상 오롯이 일관되게 이어지는 가정 공동체를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와 후손들의 세대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과 이웃과 사회에도 커다란 영향력과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에베소서 2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과거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리셨도다”(1절)고 선포하면서,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오는 “오는 여러 세대(모든 세대: 새번역, 공동)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역설한다. 그렇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우리 가정의 믿음은 단 한 세대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오고 오는 여러 세대, 아니 모든 세대에게 전달되고 전수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신앙 가문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단 말인가?
2. 실패한 모델 이야기
사사기 2장 6-15절의 말씀을 통하여 그 원인을 한번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는 여호수아 세대와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의 세대,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가 등장한다.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여호수아 세대(1세대)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일일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장로들의 세대(2세대)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를 잘 섬겼는데, 그 다음으로 이어진 세대(3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온갖 악행과 우상숭배를 일삼은 나머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재앙을 받게 된다.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 사사와 선지자들과 선한 왕들을 보내 일시적으로 상황이 좋아지긴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신앙 가문다운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실패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출애굽 과정과 광야 생활을 통하여, 도대체 그렇게도 생생하게 하나님을 대면하고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던 여호수아, 그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과 큰일을 목격했던 장로들의 믿음은 어디로 사라지고, 겨우 3세대만에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등장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 전체를 좀 더 깊이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에 관하여 어떤 성경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많은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크게 세 가지 이유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한다. 이스라엘은 신앙 가문의 결혼 원리를 일관되게 지켜내지 못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신앙 가문의 교육 원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신앙 가문의 경제 원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믿음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a. 신앙 가문의 결혼 원리(Marriage)
그러면 먼저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앞서 이야기한 대로, 창세기 1장 26-27절에서, 하나님은 가정을 창조하시고 가정 명령을 주셨다. 2장 18-25절에서 하나님은 최초의 결혼식을 계획하시고 주도해 나가신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하나님이 아담의 처지를 아시고 가장 적합한 돕는 베필을 지어서 그 곁으로 데리고 오신다. 아담은 첫 눈에 하와를 향한 더 없이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설계하여 연출하고 진행해 가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여기서 결혼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나온다. 우리 결혼의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24장에는 이삭과 리브가의 혼인과 관련한 극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면서 아들의 결혼식 연출자로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충복인 종을 불러 이방 족속이 아니라 친족에게로 가서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고 당부한다(창 24:3-4). 하나님의 아들인 이삭이 사람의 딸인 가나안 족속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아브라함의 당부에 따라 선택된 신부 리브가가 이삭 앞에 나타난다. 리브가를 아내로 삼기 전에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아버지가 골라온 신부감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불평하거나 다른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들 이삭은 그저 아버지 아브라함의 처분에 모든 것을 믿고 맡겼다. 이게 바로 결혼에서 두 번째 중요한 원리다. 자녀의 결혼은 부모의 권위와 감독과 보호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의 세 번째 원리는 야곱의 결혼에서 이어지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딸과 혼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브가는 남편 이삭에게 이방인 헷 사람의 딸들에게서 아들 야곱의 아내를 맞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창 27:46). 그래서 이삭은 야곱을 불러 가나안 사람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외삼촌 라반의 딸들 가운데서 네 아내가 될 사람을 찾아서 결혼하라고 당부한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에게 복을 주셔서,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마침내 네가 여러 민족을 낳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너와 네 자손에게도 주셔서, 네가 지금 나그네살이를 하고 있는 이 땅,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땅을, 네가 유산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일평생 한 여자의 남자, 한 남자의 여자(One man woman, one woman man)가 되어야 한다. 욥기 31장 1-4절에서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젊은 여인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겠다고 나 스스로 엄격하게 다짐하였다(“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개역), “젊은 여인에게 눈이 팔려 두리번거리지 않겠다고 나는 스스로 약속하였네”(공동)) 여자나 유혹하고 다니면, 위에 계신 하나님이 내게 주실 몫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께서 내게 주실 유산은 무엇이겠는가? 불의한 자에게는 불행이 미치고,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재앙이 닥치는 법이 아닌가? 하나님은 내가 하는 일을 낱낱이 알고 계신다. 내 모든 발걸음을 하나하나 세고 계신다”(새번역). 우리는 정결한 신랑 신부가 되어 깨끗한 영혼으로 부부가 되고 경건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 그게 신앙 가문을 세워가는 지름길이다.
『코트십 전략』(“하나님은 웨딩 플래너”)에서 돈 로니카는 이와 같은 원리를 코트십 전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일목요연하게 소개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데이트”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상호모순적인 표현이라고 강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마치 “창조론적 진화론”이라는 말처럼, 그리스도인과 데이트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이다(『No 데이팅』과 『Yes 데이팅』 참고).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의 딸을 쫓아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방법으로 연애에 접근하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처럼 보인다(창 6:1-8, 삿 14:1-3).
이처럼 태초로부터 역사가 흘러오면서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설계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깨어지고 잊어지고 상실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끔찍이도 싫어하셨다. 그리하여 사람 자체를 지으셨음을 한탄하면서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여 경건한 믿음의 가문을 다시 세워가기에 이른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죄성과 사탄의 치밀한 전략 탓에 상황은 어느 시대에서나 크게 나아지지 않았던 듯하다. 이와 같은 현실은 바깥세상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교회에서조차도,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심지어 믿음의 가정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결혼과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원안을 분명히 마음에 새김으로써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믿음의 반석 위에 견고하게 신앙 가문이 우뚝 세워지기를 소망한다.
b. 신앙 가문의 교육 원리(Parenting)
신명기 6장 1-9절의 말씀, 곧 쉐마로 널리 알려진 이 말씀은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창조 명령(문화 명령, 또는 가정 명령), 마태복음 28장에 등장하는 지상 명령과 더불어 성경의 3대 명령으로서 “교육 명령”이라고 불릴 만하다. 예수님이 가장 크고 첫 번째 되는 계명으로 언급하면서(4, 5절), 대부분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만 주목하지만, 사실 이 단락의 전체 문맥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자녀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당부를 담고 있다. 그게 바로 세대와 세대에 걸쳐 영원히 복을 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대표하여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 명령을 부지런히, 언제 어디서나 실행하면서 세대와 세대로 이어지는 신앙 가문을 튼실하게 일구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이 본문에서 가르치는 세 가지 중요한 교육 원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너”라고 지칭되는 대상은 “부모”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7절에서 자녀와 집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녀 양육(Parenting)의 일차적인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을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정신은 신앙 가문 훈련 지침서나 마찬가지인 잠언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부모가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하나님이 명령하는 모든 말씀을 마음에 새긴 다음 자녀들에게 부모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하여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어디서나, 언제든지 가르치라고 명령한다. 때와 장소와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은 그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바로 “가정”임을 상기시키고 있다(교육 현장). 자녀를 말씀으로 올바로 키우고 믿음으로 자라도록 교육하는 일은 가정 이외의 이 세상 어디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다. 어느 나라에서도 그 책임과 권리와 의무를 감당해 주지 않는다. 어느 사회에서도 그 짐을 온전히 져주지 않는다. 어느 학교에서도 그와 같은 신앙 교육을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어느 교회에서도 우리 자녀를 책임지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 몫은 부모가 가정에서 떠맡아야 할 책임인 것이다.
이 본문에서 가르쳐주는 세 번째 교훈은 우리 자녀 양육의 중심 내용이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이 가정교육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 이외의 다른 어떤 교육도 자녀를 경건한 세대로 세워주지 않으며, 신앙 가문으로 믿음으로 다음 세대에 전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말씀을 전수하는 데 자녀 교육에 투자하는 모든 에너지의 70%를 쏟아 붓는다고 한다. 일반적인 지식을 익히는 데 나머지 30%의 열정과 자원과 시간을 투입한다고 한다. 소수의 유대인들이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상당히 많이 올라가 있다는 사실은 말씀 교육에 전념하는 유대인 교육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신명기 6장에서 알 수 있는 자녀 양육은 부모 중심(교육 주체), 가정 중심(교육 현장), 말씀 중심(교육 내용)을 세 가지 기둥으로 삼아 신본주의적 교육을 실시하라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 무엇이 다른가?』라는 책 256-257쪽에서 루서스 존 러쉬두니는 교육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와 인본주의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9가지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신본주의 교육과 인본주의 교육은 전제와 내용과 방법이 전혀 다르다. 우리 가정 밖의 교육,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학교 교육은 인본주의로 점철되어 있다. 마치 벽돌공장에서 똑같은 벽돌을 대량 생산하듯이 획일적인 방식으로 국가에 충성하는 시민을 양성하는 것을 표면적인 목표로 내세우는 공교육 제도, 그러나 한층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실제로는 방법론적 무신론자 양성 체계를 바탕으로 무신론적인 인본주의자들을 양산하는 의무 교육 제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무턱대고 아이들을 그냥 학교에다, 세상에다 내맡기고 안심하고 있을 것인가? 이제 우리는 신명기 6장에서 명령하는 부모 중심, 가정 중심, 말씀 중심의 자녀 양육, 곧 신앙 가문의 교육 원리로 돌아가 마음에 새기고 부지런히, 언제 어디서든지 실천해야 한다. 자녀 양육, 또는 자녀 교육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Parenting”이다. 이 단어에 담긴 의미를 그대로 옮겨보자면 “부모 되기”나 “부모 역할 다하기” 정도일 것이다. 영어 문화권에서는 자녀 양육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뜻이리라.
c. 신앙 가문의 경제 원리(Economic):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소홀히 여기다 못해 깨어버린 삶의 원리 가운데서 결혼 원리, 교육 원리에 이어 경제 원리로 넘어가 보자. 대개 경제 원리라고 하면 돈(재정, 자본)이나 노동(임금)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성경에서는 토지 문제를 근원적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레위기 25장 23-24절에 따르면,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나그네, 소작인)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잠언에서는 “너의 선조들이 세워 놓은 그 옛 경계표를 옮기지 말아라”(22:28)거나 “옛날에 세워 놓은 밭 경계표를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아라”(23:10)고 말씀한다.
레위기 25장에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도록 명하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땅은 이스라엘 각 지파별로 공평하게 분배되었으며, 각 지파에 속한 모든 가정들에게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분깃이요 기업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땅의 창조주이자(창 1:1) 소유주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땅의 소유권을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대로 영원히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고 계신다. 그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은 토지신유 사상을 강력하게 주창하며 일관되게 지지하고 있다.
여기서 판다는 말은 소유권에 대한 매각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토지 사용권을 넘겨준다는 말이다(토지에 관한 권리에는 토지소유권, 토지사용권, 토지수익권, 토지처분권, 이렇게 4가지가 있는데, 성경은 인간의 토지소유권은 부정하지만, 그렇다고 토지사용권을 부정하거나 그 토지를 개량하거나 그 토지에서 무언가를 생산해서 수익을 얻는 개인의 권리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어떤 사람의 기업에 대한 사용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안식년과 희년에는 반드시 원래 가족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기업에 대한 사용권을 돌려받으려면 나머지 기간에 해당하는 사용료(임대료)를 지불하기만 하면 지체 없이 원 소유자에게 기업을 물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을 먹지 못하면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이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경적 토지법을 통하여 토지에 대한 평등한 사용권(平均地權)을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하고 계시며, 이는 물, 공기를 비롯한 자연 자원처럼 누구나 최소한의 땅을 어려움 없이 사용하는 것도 역시 모든 인간에게 허락된 기본적인 권리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나라들에서는 지주의 신인 바알을 섬기면서, 토지를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기업으로써 사고 팔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대신, 마음대로 거래하고 독점할 수 있는 재산으로서 개인이 얼마든지 소유하고 축적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불로소득을 마음껏 혼자서 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바알제도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나안 입성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러한 성경적 토지법을 지켜내려는 몸부림 속에서도 주변 이방 나라의 바알제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어,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결국 전부 바알제도로 넘어가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나라의 운명도 이방 민족에게 멸망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은 토지신유 사상, 토지 사유 금지 사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으나, 후손 대대로 거기서 나오는 소산을 먹고 살아가야 할 기업인 토지를 팔아넘겨 삶의 터전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망 없는 피폐한 삶을 이어가게 된다. 땅은 생명이다. 생명의 근거지인 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의 황폐한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한 사회는 점점 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경제 위기, 경기 침체, 주기적 불황, 대량 실업, 과도한 토지 투기 열풍,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빈곤의 문제, 생산적인 활력을 잃어버린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아래 놓이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처럼 명백한 성경의 토지법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지금 우리 현실은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황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 간격을 매워야 할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구약의 토지법은 단지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그 현대적인 적용법에 관해서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못 박는다. 그런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선지자라고 불린 헨리 조지(Henry Geroge: 1839-1897)는 이와 같은 성경적 토지법을 정확히 이해한 다음, 그 정신과 가치를 오늘날 상황에 고스란히 적용하는 방안을 발견하였다. 그게 바로 토지가치세(Land Value Taxation)이라고 불리는 방법이다. 이것은 지대조세제나 토지단일세라고도 불린다(『진보와 빈곤』, 『토지와 경제 정의』, 『새로운 해방의 경제학』, 『희년의 경제학』 참고).
헨리 조지는 토지사유제가 오래 동안 고착화된 관계로 거의 모든 토지의 소유권이 각 개인에게 다 넘어가 있는 상황을 그대로 인정한다. 다만 거기에서 발행하는 토지 가치에 대해서만 국가에서 세금으로 환수하여 공공 재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각 토지의 소유권은 그대로 두고 토지 사용료에 해당하는 지대만 모두 거두어서 사회 전체에 필요한 비용으로 지출하자는 제안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처럼 각종 생산 활동이나 소비 활동에 매기는 거의 모든 세금을 철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세금들은 더욱 많이 창의적으로 생산과 소비 활동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하기 때문에 일종의 벌금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세금은 철폐하고 오직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만을 걷자는 방안이기 때문에 토지단일세 제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면 각종 경제 문제들이 사라지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덴마크, 호주, 싱가폴, 홍콩, 대만, 미국의 일부 주(州)에서 상당한 실험을 거치고 그 효과가 입증된 실증적인 이야기다(『토지를 중심으로 본 성경적 경제학』, pp. 116-158).
이것은 통일 한국의 경제 체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토지를 중심으로 본 성경적 경제학』, pp. 159-193). 흔히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통일 방향으로 불안정한 북한 체제의 급작스런 붕괴에 따른 남한의 흡수 통일을 생각한다. 아직 통일에 대한 공감대나 준비가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우리 사회에 이와 같은 통일은 재앙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통일 한국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한참 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분단 이전의 북한 토지 문서를 챙기고 있다는 이야기, 이러한 토지 문서가 거래되고 있다거나 가짜 문서가 만들어져 매매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제대로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선이 열리고 남북한의 자유로운 왕래가 이루어지게 된다면, 남한의 자본은 무분별하게 북한으로 몰려가 거기에 있는 땅을 무질서하게 사들이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혼란과 저주의 서곡이다.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되든 간에, 적어도 북한에서는 경제 문제의 핵심을 차지하는 토지 제도만큼은 현재의 국가 소유 내지는 공유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토지법 정신과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헨리 조지가 제안한 토지가치세를 도입하야 한다. 이게 바로 남한도 살고 북한도 사는, 다시 말해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통일 방안 내지는 통일 한국의 경제 체제일 것이다. 아무튼 이스라엘에서 실패한, 역사적으로 거의 대다수 사회에서도 역시 그러했지만, 토지를 중심으로 한 신앙 가문의 경제 원리가 헨리 조지의 현대적인 적용방안을 토대로 삼아 한반도 통일을 계기로 북한 지역뿐만 아니라 남한 지역에서도 생생하게 되살아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3. 성공한 모델 이야기
예레미야 35장에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레갑 족속이라는 가문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곳 외에도 성경에서 레갑이라는 인물은 사무엘하 4장 초반(2-12절)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열왕기하 10장 15, 23절과 역대상 2장 55절과 느헤미야 3장 14절에도 등장한다.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레갑은 베냐민 지파 사람 림몬의 아들로 형제 바아나와 함께 이스보셋의 군장으로 있었으나 자기 주인이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죽이고 머리를 다윗에게 바쳤다. 그러나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다윗에게 처형당하여 헤브론 못가에 매달리는 처지가 된다. 열왕기와 역대기에 등장하는 레갑은 함맛의 후손으로 여호나답(요나답)의 아버지로서, 예후의 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유다 평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가문이었으며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으로 공격할 때 성 안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여기서 레갑 족속이라고 불린 사람들의 선조라고 알려져 있다. 역대서상에는 금속 세공을 업으로 삼았던 겐 족속이 레갑 족속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가 있다. 느헤미야서에 등장하는 레갑은 말기야의 아버지이며, 말기야는 포로 귀환 후 벧학게렘을 다스리며 예루살렘 성 북문을 중수하였던 사람이다.
사무엘하에 등장하는 레갑이 혹시라도 예레미야의 레갑 족속과 관련이 있다면, 그 당시는 다윗이 활동하던 BC 1000년 이전이며,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BC 600년 전후이므로 400년 가까이 시차가 있다는 말이다. 열왕기하에서 예후의 개력 운동에 동참한 레갑의 활동 시기는 BC 800년 이전이고, 여기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BC 600년 전후이므로 그래도 2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는 이야기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웬일인지 느닷없이 예레미야에게 레갑 족속을 성전의 한 방에 불러모아놓고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레갑 족속 사람들은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따라 이를 거절하였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은 200여 년(또는 400여 년) 전에 자손들에게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렘 35:6-7)고 명하였다. 하나님은 이 명령을 굳건하게 고수해온 레갑 족속을 칭찬하는 대신, 상대적으로 불순종을 거듭해온 이스라엘에게는 재앙을 선포하셨다(렘 35:12-17).
레갑 족속은 부패한 가나안 정착 이후의 이스라엘 사회상으로부터 자신들을 철저히 구별하여 유목민적인 생활 양식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가문의 순수성을 지켜내려고 하였다.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한 나실인의 규례를 실천하였으며, 농경 문화, 곧 정착 문화가 가져오는 유약성과 사치성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결국 이러한 충성된 생활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렘 35:18)는 칭찬과 인정에 이어서,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렘 35:19)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선조들의 신앙 전통과 생활양식을 오랜 세월 동안 그대로 준수함으로써 하나님께 이토록 커다란 칭찬과 축복을 받은 가문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개인적으로 믿음의 거장들이 시시때때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한 신앙 가문이 공동체 전체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례는 전무할 것이다. 이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소원이 정확히 성취되었던 유일한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굉장히 놀라운 삶을 살아낸, 엄청난 신앙 가문으로 살아온 레갑 족속이다. 우리 모두 레갑 족속의 모범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아마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그러니까 1800년대(또는 160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자기 집안이나 가문에 200년 전쯤 어떤 조상들이 살았으며, 그 선조들은 어떤 정신 자세와 마음가짐, 생활양식으로 살았는지, 어떤 가르침을 후손들에게 주었는지, 가훈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1800년 전후 우리나라에서는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여러 번의 도시와 농민 반란, 정약용 형제들의 활동, 개항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 등 사회적, 국가적 격동기였다. 이제 우리부터라도 레갑 족속처럼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흔들리지 않는 삶의 원리를 성경에서 찾아내 가정생활을 비롯한 모든 생활양식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신앙 가문의 전통을 세우고 지켜나가도록 해야 되겠다.
4. 어떻게 경건한 다음 세대를?
우리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바쁘다는 핑계로, 자녀 교육을 위해 들어가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학교에다, 학원에다, 사회에다, 국가에다 맡기고 자녀 양육의 책임을 소홀히 여기거나 아예 무시해 버린다. 어릴 때부터 탁아방, 어린이집, 유치원 등으로 아이들을 내몬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릴 때일수록 부모의 사랑과 관심, 손길이 더 많이 필요하다. 한 이간으로 성장해 나가는 데 너무나도 기본적인 사랑의 애착 관계가 형성되는 시기가 바로 그 때이기 때문이다.
자녀 양육의 책임은 교회나 학교나 국가의 책임이 아니다. 그 책임과 의무와 권리는 일차적으로 가정에 있으며, 철저하게 부모의 몫이다. 그 책임을 회피하고 교육 전문가들에게 무작정 맡기는 것은 우리 자녀들을 유기하고 방치하는 범죄에 해당한다. 다른 어떤 책임이나 부르심이나 비전보다 막중한 것이, 가정에서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는 사명임을 명심하고, 신앙 가문을 세워 경건한 다음 세대에게 그 믿음을 전수하고, 이 믿음이 자자손손 대대로 영원토록 이어지도록 하는 부르심임을 기억하고, 아이들에게 집중하도록 하자. 분주한 일손을 멈추고 자녀들을 향해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도록 하자. 온통 가정 바깥으로 떠나있는 마음을 사로잡아 집안으로 다시 가져오도록 하자.
마치 탁구공처럼,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집으로, 집에서 다시 학교로 이리저리 떼밀려 다니는 아이들이 되지 않도록,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모두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마음이 되지 않도록, 표면적으로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모두 역기능 가정의 증상을 앓고 있는 자녀들이 되지 않도록, 이제 우리 가정에서 자녀들을 가지고 부질없는 핑퐁 게임은 그만두어야 할 때이다. 그게 신앙 가문으로 세우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지름길이다. 그렇게 하나씩, 조금씩 신앙 가문으로 세워가다 보면, 때가 이르러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신앙 가문을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남편과 아내 관계 바로 세우기, 부모 자녀 관계 바로 세우기, 형제자매 관계 바로 세우기가 있어야 한다. 경건한 아버지, 남편, 남성의 모델과 경건한 어머니, 아내, 여성의 모델이 가정에 살아있어야 한다. 부모가 가정과 자녀 양육에 헌신하는 삶이 살아있어야 한다. 가정을 희생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가정 예배가 살아있는가? 가족 사이의 대화가 살아있는가?
지금까지 논의한 많은 것들 중에서, 그게 과연 그러한지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보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음으로써, 거기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실천 가능한 것들을 우리 삶에 적용함으로써, 우리 몸과 마음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준행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주여,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
참고 자료(Bibliography)
1. 『기독교적 세계관』(양승훈/CUP)
2.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알버트 그린/CUP)
3. 『코트십 전략』(“하나님은 웨딩 플래너”로 제목 변경/미션월드)
4. 『No 데이팅』, 『Yes 데이팅』(조슈아 해리스/두란노)
5. 『샬롯 메이슨과 함께 하는 교육』(카렌 안드레올라/DCTY)
6. 『라브리의 가정 교육』(수잔 쉐퍼 맥콜리/그리심)
7. 『진보와 빈곤』(헨리 조지/비봉출판사)
8. 『토지와 경제 정의』(대천덕/홍성사)
9. 『토지를 중심으로 본 성경적 경제학』(전강수, 한동근/CUP)
10. 『신앙 명문가의 자녀 교육』(김재헌/비전북)
11. 『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배운다』(도로시 로 놀테와 레이첼 해리스/오리진하우스)
12. 『마음을 다루면 아이의 미래가 달라진다』(테드 트립/디모데)
13. 『부부 학교』(게리 토마스/CUP)
14. 『남편의 기도로 아내를 돕는다』, 『아내의 기도로 남편을 돕는다』(스토미 오마샨/생명의말씀사)
15. 『저지대비전론』(성인경 외/DCTY)
16. 『진정한 성공의 길: 품성의 가정을 세우는 비결』(IBLP), 품성 회보, 품성 카드, 품성 달력
17.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김요셉/두란노)
18. 『기독교 교육, 무엇이 다른가?』(루서스 존 러쉬두니/DCTY)
19. 『홈스쿨 가정 이야기』(김남영, 임종원 편저/미션)
20. 『청교도들은 누구인가?』(에룰 헐스/목회자료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