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비 있는 집" 아이
16기 강은실
세월이 유수처럼 빠르다는 말이 요즘처럼 뼈져리게 느껴진 적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벌써 할머니라니... 입버릇처럼 되어버린 나의 이 말이 몇년 후엔, 아니, 얼마 후엔 단지 기억속의 멜로디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항상 지난 날을 뒤돌아보면 내가 남겨둔 흔한 자취들이 어느새 다른 누군가의 흔적으로 지워져 버리곤 한다. 내가 정말 늙어버린 걸까!! 요즘엔 유난히도 옛날 그 어린 시절이 자꾸 떠오르곤 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순수한 어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는게 지금은 동화속의 얘기처럼 마냥 흥미롭기만 하다.
나의 어린 시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어느 때라도 심심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봄이면 산이나 들로 나물을 캐러가기도 하고, 진달래 꽃을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다니기도 했으며, 보리밭을 지날 때면 항상 그곳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밭주인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러다가 여름이 오면 하루 온종일 마을 앞 냇가에서 몸이 불어 터질 정도로 수영을 하고, 저녁이 되면 동네 아이들끼리 모여 감자며 옥수수며 과일이며 온갖 작물들을 훔쳐다가 삶아먹기도 했다.
가을에도 그럭저럭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녔는데, 논에서는 메뚜기 잡아 튀겨먹고, 산에서는 알밤 따먹고, 밭에서는 홍시 따먹고 또, 호두(추자)도 따먹으며 마냥 즐겁게 지냈다. 겨울이 되면 마을 뒤 작은 언덕 위에서 비닐푸대 속에 지푸라기를 몽땅 쑤셔넣고,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미끄럼을 타거나 동네 골방에 모여 화투 - 이 시절 난 고스톱을 떼었다 - 를 치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즐거웠던 시절이다.
나의 이런 모든 추억이 있고 내가 태어난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마디로 두메산골 그 자체였다.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땐 정말 높고 웅장해 보이는 산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동쪽 산을 넘으면 미국이 있고, 서쪽 산을 넘으면 북한이, 남쪽 산을 넘으면 소련이, 그리고 북쪽 산을 넘으면 일본이 있는 줄 알았고, 이 세상에 다른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높고 큰 산이 서쪽 산이었는데, 그 산이 우리 할머니가 시집오던 해만 해도 호랑이가 살았다는 바로 '팔공산'이다. 그 산 봉우리에는 항상 북한 인민군이 총을 들고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으며, 그래서 이름도 팔공산(당)인줄 알았다. 특히 이 산은 우리 마을 뿐 아니라 그 근방의 모든 마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컸던 것은 바로 전파 방해였다. 이 전파 방해로 인해 우리 마을의 테레비젼이나 라디오는 무용지물이었거나, 설령 텔레비젼이 있다고 할 지라도 KBS 1 채널만을 감지덕지하며 보아야만 했다.
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가기 전 우리 마을엔 모두 텔레비젼이 3대가 있었다. 그 시절에 텔레비젼은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었으며, 그것을 갖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집이 부자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네 사람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저녁을 먹은 후에는 텔레비젼이 있는 집으로 모였다. 물론 우리 집 식구들도 예외는 아니였다. 내가 매일 다니던 '테레비 있는 집'은 마루에 테레비(그 시절 표현)를 내놓고 마당엔 멍석을 깔아 마을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저녁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 집으로 달려가서 테레비가 모두 끝날 때까지 그 곳에 있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테레비를 보고 다니던 나는 언제부턴가 할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집의 막내였던 터라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언니, 오빠들 보다는 훨씬 효과적이리라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의외로 할아버지께서는 완강했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셨다. 그 순간의 나의 기분은 너무나도 큰 절망감에 사로잡혔고, 그날 밤 내내 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도 빠짐없이 테레비를 보기위해 귀찮게 들락거렸던 그 집 아저씨가 슬슬 나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했고, 하지만 테레비 없이는 못살것만 같았던 나는, 그 눈치를 받으면서까지 그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결국 보다 못한 그 집 아저씨는 나의 할아버지에게 나좀 데려가라며 화를 내셨고, 이에 속이 상한 할아버지는 그 날 당장 테레비를 사자며 집안 식구들을 놀라게 했다.
아!! 그 때의 기분이란...!!
여칠 후 드디어 우리집에도 네발 달린 흑백텔레비젼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우리집도 마을에서 손에 꼽히는 '테레비 있는 집'이 되었다.
얼마 후 나는 마을에서 20분 거리에 자리잡고 있던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어릴 적 부터 떡잎이 좋았던 나는 국민학교에 진학 하자마자 나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공놀이,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머리핀 따먹기, 비석, 땅따먹기 등등 이런 모든 것들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테레비 있는 집' 아이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칠판 글씨가 제대로 보이질 않게 되었다. 거의 얼굴을 바짝 붙여 놓고 보던 텔레비젼 탓이리라.
국민학교 3학년때였다. 칠판 가득 메워진 글씨를 보이는대로 아무렇게나 필기를 하고 선생님에게 검사를 받았는데, 선생님께서 왜 이렇게 썼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 때 솔직히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나의 아버지를 불러오셨고, 칠판에 글씨를 써서 내 시력을 검사 하셨다. 그 날 이후 난 아버지를 따라 난생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우리 마을을 벗어나 낯선 도시를 가보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경이라는 그 자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시골인터라 그곳엔 안경점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난 그곳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있어서- 결코 작지 않은 거금을 투자하여 나의 두눈을 샀다.
이 사실은 우리 마을 뿐 아니라 우리 학교 전교생에게까지도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때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300여명 정도였는데, 그곳에서 안경을 쓴 사람은 내가 처음이자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든 아이들은 나의 안경을 만져보고 한번만이라도 써보고 싶어했다. 어떤 아이들은 과자까지 사주며 졸라대기도 했다. 결국 난 과자, 사탕, 라면, 껌 등 온갖 뇌물을 받아가며 안경을 빌려주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또 한번 '테레비 있는 집' 아이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국민학교를 졸업한뒤, 나는 그 곳 읍내에 자리잡고 있던 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그곳에서도 나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안경 쓴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전주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고 말았다. 시골과는 달리 전주는 안경 쓴 사람이 너무 많았고, 오히려 안경을 안 쓴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난 이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였으며, '테레비 있는 집'의 아이로서의 자존심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나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기 위해 어떤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 돌아가자! 나의 자존심이 있는 그 곳 두메 산골로...'
나의 결정은 귀향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테레비 있는 집' 아이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