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빛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儉而不陋 華而不侈’의 기운이 곳곳에 서린 곳, 백제 지역의 답사를 다녀왔다.
지난 해 3월, 삼토회가 만들어진 이후 가장 성대한 답사였다. 멀리 경산에서 이정수님, 대구서 김정희님, 이진은님, 구미서 김정희님, 구혜경님, 김미정님 등 서른 한 분의 회원이 참석했다. 스님은 답사 날을 깜박 잊었다며 산청 선림사에서 법문을 하시고 선걸음으로 급히 달려오셨다. 우리의 답사는 스님이 오셔야 충만하고 완결된다. 스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답사 계획을 짜고 자료 준비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공부를 해야합니다.” 스님의 마음에 들려면 아무리 노력해도 족탈불급이요,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걸 스님은 알면서도 짓궂게(?) 모르는 척 하시는 거다. 그래도 가랑비에 옷깃 적신다고 다소나마 문화재에 대한 안목이 생겼음에 나는 흐뭇하기만 하다.
오전 8시, 김천고등학교에서 출발해서 10시 조금 넘어 부여 정림사터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문화재해설사와 약속한 장소인 정림사터 박물관에 가서 영상을 관람했다. 이어서 해설사에게 많은 설명을 들었지만 신기하게도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법주사 팔상전은 탑이 아니라 불전이라고 해야 한다는 해설사 설명에 의문이 생겼다. 오후에 스님께 물었더니 “팔상전은 목탑이자 불전입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나요?” 하신다.
박물관 밖을 나와서 정림사터 탑을 보았다. 날씨는 쾌청하고 사람들도 그다지 많지 않은데도 정림사터 탑이 가슴에 들어오지 않는다. 탑 뒤편의 새로 지은 불전과 탑 앞에 몇 개의 계단을 둔 무대 같은 시설도 마뜩찮다. 유선철님이 백제탑과 신라탑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백제탑은 신라탑에 비해 기단부 갑석이 1층 지붕돌보다 좁은 것, 지붕돌이 얇은 것, 지붕돌 아래 낙수선과 처마선이 모서리에서 모두 위로 살짝 반전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정림사터에서 조금 떨어진 부여박물관을 둘러보고 익산 미륵사터로 갔다.
미륵사터에서 500m 떨어진 <맛동미륵산순두부 063-835-8919>에서 순두부를 먹었다. 마음에 점을 찍고 미륵사터로 오니 스님이 도착하셨다. 점심은 드셨는지 물었더니 떡과 과일로 점을 찍었단다. 스님과 답사를 시작한 이후 스님은 세 번이나 답사 날을 잊었다. 스님께 항의를 하렸더니 스님의 피곤한 얼굴을 보는 순간, 반가움과 고마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스님과 같이 걸어서 미륵사터 목탑지 앞에 섰다. 나직하면서도 또랑또랑하고 자상한 설명이 그제야 가슴에 들어와 차곡차곡 쌓인다.
“미륵사에 남아있는 수많은 석재와 당간지주, 회랑터, 못을 보세요. 발굴 결과 이곳은 늪지대임이 확인되었어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무왕이 부인인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 아래를 지나가다가 미륵삼존을 참배하고는 부인의 요청에 따라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와 들어맞습니다. 절은 전체적으로 정남향을 향하고 있어요. 동서에 각각 석탑 1기, 중앙에 목탑 1기의 유구가 발견되었어요. 백제 가람 배치의 전통은 탑-석등-금당의 1탑 1금당입니다. 여기 미륵사의 삼원 가람은 미륵보살이 지상으로 내려와 삼회에 걸쳐 중생을 구제한다는 용화삼회를 지상에 세운 것입니다. 종교 건축이 불교 사상과 만나서 구현된 모범적인 사례이지요. 발굴 때, 남아있던 것은 서탑의 일부 밖에 없었어요. 발굴 후에 새로 세운 동탑은 전체적인 비례와 체감곡선, 기계로 깍은 돌의 질감으로 아무리 봐도 어색함을 감출 수 없어요. 파손된 서탑은 일제강점기 때 시멘트로 일부 덮은 것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01년부터 조심스럽게 해체 복원해서 올해 6월 20일에 완료했어요. 원래 탑은 9층으로 추정하지만 6층까지만 복원했어요. 연말에 탑 바깥에 설치된 가설물을 철거합니다. 철거를 하면 가설물을 이용하여 탑의 높은 부분을 볼 수 없기에 이곳으로 와서 탑을 보자고 했어요. 익산에서 나오는 황등석은 우리나라에서 질이 높은 화강암 산지입니다. 이 황등석으로 어마어마한 석탑을 만들었어요.”
설명을 듣고 목탑지 뒤에 석등의 부재 쪽으로 갔다.
“석등의 하대석과 지붕돌의 일부만 남아있어요. 이 석등은 아마도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석등으로 추정합니다. 홑으로 된 연꽃잎을 보세요. 그지없이 우아하고 부드럽습니다. 돌로 이런 연꽃잎을 만드는 것은 신기에 가깝습니다. 신라계 석등의 연꽃은 복엽으로 화려하고 섬세합니다. 지붕돌 위에 구멍이 뚫린 것은 연기가 빠지는 곳입니다. 구멍 위에 또 하나의 덮개돌이 있었을 거라 추정합니다.”
다시 동탑 쪽으로 갔다. 1층 몸돌 사방에 나무로 만든 문이 활짝 열렸다. 1층 몸돌 중앙에 거대한 기둥돌이 보인다.
“몸돌 중앙에 기둥을 심주석이라 합니다. 심주석 안에 사리장치를 보관합니다. 심주석이 있다는 것은 이 미륵사터 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번안한 탑임을 증명합니다. 곧 석탑의 출발입니다.”
해체 복원을 끝낸 서탑이 있는 거대한 가설물 안으로 들어갔다.
복원된 탑은 거인처럼 육중한 몸으로 장구한 세월을 견디며 말없음으로 우리를 용화세상에 안내한다. 9층의 동탑보다 낮은 6층으로 복원을 마쳤고 새로운 돌과 오래된 돌을 섞어서 복원한 미완성의 석탑이다. 그럼에도 동탑보다 더욱 우아하고 용틀임하듯 힘이 넘친다. 수많은 거대한 돌덩이들을 백제인들은 어떻게 운반해서 탑을 세웠을까? 가설물 1층부터 2층, 3층으로 올라가면서 석탑을 세세히 보았다.
“새로운 돌과 오래된 돌을 섞어서 복원했어요. 오래된 돌조각이 깨진 것은 새로운 돌과 붙여서 하나의 돌로 만드는 기법도 새로 사용했어요. 목조건축의 지붕과 지붕이 만나는 내림마루, 귀마루라고 하는 우동을 보세요. 신라계 건축은 우동이 선이지만 백제계 건축은 폭과 깊이가 있는 입체입니다. 목조 건축을 본떠서 만든 것입니다. 지붕돌 아래 층급받침이 살짝 둥근 것은 목조 건축의 공포를 본떠서 3단으로 만들었어요. 신라 탑은 층급받침이 5단이고, 말기에 가서 4단으로 줄어듭니다.”
일반적으로 탑은 높아서 우동을 직접 보기에 힘들다. 가설물 덕분에 폭이 넓고 우뚝한 우동을 자세히 보았다.
스님 설명 후에 구미 김정희님이 나를 부르더니,
“구돌과 신돌을 섞어서 복원했는데 신돌을 같은 돌로 하지 않고 빛깔이 다른 돌로 한 것이 아쉽네요” 하신다.
미륵사터 옆에 있는 유물관으로 들어갔다.
2009년 1월 14일, 서탑 해체 과정에서 1층 가운데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사리봉안기가 전시되었다.
천년이 지나도 이렇게도 생생히 백제인의 마음이 전해진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 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란 향가가 있지만 미륵사 서탑 사리봉안기에서 “我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種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이란 글이 나옴에 따라 서동/선화공주가 픽션에 불과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절대왕권 하에 왕비는 한 분이 아니지 않은가.
마지막 답사지 왕궁리 오층석탑에 갔다.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찍은 아주 멋진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탑 앞에 있는 벚꽃이 만개했을 때, 벚꽃과 탑을 동시에 넣고 찍은 사진입니다. 이 탑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탑입니다. 백제탑의 특징을 모조리 가지고 있어요. 이 탑을 만든 시기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 등으로 설명합니다만, 최근에는 백제탑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탑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난 후, 스님은 처음으로 김창순 보살님에게 “사진 같이 찍을까요?”라고 하셨고, 나도 잽싸게 “그 다음은 제 순서입니다.”라면서 스님 팔을 꽉 잡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는 자유롭게 탑과 유물관을 둘러보았다.
정림사터 탑이 날씬하고 눈부신 청춘의 꽃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왕궁리탑은 만상의 고뇌를 겪어낸 지어미처럼 후덕하고 편안하다. 지붕돌의 낙수선과 처마선이 모서리에서 보일 듯 말듯 은은하게 위로 반전되는 것이 볼수록 어여쁘다. 대지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수많은 잎과 꽃과 열매를 만들어내는 아름드리 거목 같은 탑.
마지막으로 스님은 버스에 올라와서 작별인사를 하셨다. 오늘 스님은 답사를 잊은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상세하게 오래 설명을 하셨다.
점심을 순두부로 든든하게 먹었고, 간식거리도 많이 남아서 저녁식사는 생략했다. 바로 김천에 도착하니 오후 6시 40분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