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 금강회는 흥선스님을 지도법사로 모시고 <육조단경>을 시작으로 법문을 들었다.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명징한 법문으로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2011년 3월 <득어망전得魚忘筌>의 법문을 끝으로 불교중앙박물관장직과 김룡사 주지 소임을 맡아 훌쩍 우리들 곁을 떠나셨다. 그 후 2012년 12월 14일, 제 8교구 직지사 주지스님으로 취임하셨고, 4년의 주지 임기를 마치고 실상사 약수암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올해 3월 금강회와 직지사불전한문승가대학원을 합쳐 삼토회라 명명하고 옛그림읽기 강의를 시작하셨다. 스님과 금강회가 마지막으로 다녀온 답사는 2010년 가을, 부안 개암사/함평 용천사/임실 용암리 석등이다. 몇 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에 다시 만나서 강의를 듣고 답사를 하니 소중한 인연에 눈시울이 뜨겁다.
貫古今 歷千劫而不古 亘萬世而長今!
고금을 꿰뚫어, 천만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고, 만세에 뻗쳐도 항상 지금이다.
가랑비가 비단실처럼 서늘하게 흩어지는 8월 15일 오전 9시, 김천고등학교 정문에서 승합차 1대와 자동차 2대에 나누어 타고 20여명이 실상사로 출발했다.
첫 도착지는 백장암이다. 비안개에 쌓인 지리산 자락과 대웅전 앞으로 팔각석등, 그 앞에 삼층석탑이 우아하고 도도하게 서있다. 여러 번 보았지만 볼 때마다 절로 감탄이 나온다. 나는 국보인 석탑보다 보물인 석등이 더 좋다. 둘 다 화강암이 아닌 짙은 섬록암으로 만들었지만, 석등의 솜씨는 사람이 빚었다기보다는 천인이 빚은 것처럼 공교롭다. 살아있는 연꽃잎을 새기듯 얇고 보드랍게 빚었고, 은은한 향기마저 감도는 것 같다. 상대석의 앙련 위 난간은 고식으로 신라시대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상사로 들어와서 공양간에서 점심부터 먹었다. 생태 뒷간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니 스님이 예전의 답사 전용 모자를 쓰고 절 마당 한복판에 서계셨다.
“스님, 백장암으로 오시라고 메시지 보냈는데 답도 안하시고 오시지도 않고 그러세요? 국보는 백장암에만 있고 실상사에는 없지 않아요?” 하고 따지듯 묻자,
“곧장 실상사로 들어올 건데 뭘 거기까지 가요? 그리고 약사전 철불도 곧 국보로 지정돼요.” 하신다.
중심 법당인 보광전 앞에서 스님의 기나긴 설명이 시작되었다.
“보광전 건물을 보세요. 기단은 가구식으로 우주와 탱주가 조각된 신라시대 건축이고, 집은 조선시대 지어진 것입니다. 모신 불상은 천과 옻칠을 거듭한 건칠불입니다. 조선시대 종도 눈여겨 볼 작품입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곳곳에 드러난 돌덩이는 옛날에 건물이 있었던 곳입니다. 실상사는 신라 말 9세기 홍척스님이 세운 선종사찰입니다. 구산선문 중 최초 사찰이지요. 약사전의 철불은 640년경, 탑과 석등은 시대가 훨씬 내려와서 860년경 세운 것이라 추정합니다. 보광전을 바라보았을 때의 오른쪽 너른 절터는 목탑지입니다. 황룡사탑에 비길만한 장대한 구층목탑입니다. 밤이 되면 목탑지 곳곳에 불이 들어와서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어요. 4.16 세월호 희생자를 추념하는 작품으로 변신했어요. 실상사 경내를 잘 보면 곳곳에 작가들이 현대예술품을 설치했어요.”
목탑지 옆에는 목탑지에서 나온 기와로 쌓은 원형의 탑, 그 앞에는 임옥상 화백이 만든 부처님 두상을 두 나무 사이에 걸었다. 제목은 ‘허허금강’이다. 목탑지 너머에는 ‘실상사 기도소’가 있다. 304개의 대나무 기둥을 이용하여 세운 기도소로 세월호 희생자 304명을 기념한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하면서도 성스런 공간이다.
<약사전>에서 멈췄다. 건물은 새로 지은 듯 작지만 정갈했고, 철불부처님은 예스럽다. 철불은 9세기 세운 것이며 후불탱화는 전통의 불보살그림이 아니라 현대 화가가 그린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이다. 불교신앙과 민간신앙, 자연생태, 생활문화의 만남을 그린 드넓은 인드라망의 세계이다.
“실상사는 사부대중이 함께 공부하며 생활하는 절집입니다. 절집과 사하촌과 귀농과도 관계가 아주 좋습니다. 귀농학교도 실험 했고, 회주이신 도법스님은 생명, 평화, 화엄을 늘 이야기하지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너와 내가 함께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입니다. 실상사는 타 사찰과는 달리 지자체 지원을 받지 않습니다. 지원금이 없으니 천천히 정진할 뿐입니다. 공양간만 보더라도 가건물입니다. 현대한국사찰이 나아가야할 기본 방향에 실상사가 던지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실상사는 불사를 하는 열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나아갑니다. 일본 나오시마섬에 안도 다다오가 지은 ‘지중미술관’이 있습니다. 노후된 섬을 미술관으로 만들었어요. 섬 전체가 예술입니다. 이 섬이야말로 21세기 지향해야할 표본입니다. 여건이 되면 둘러보세요. 2박 3일만 해도 충분합니다. ”
다시 <보광전> 앞으로 왔다. 보광전 앞에는 우람한 석등과 날렵한 한 쌍의 석탑이 서있다.
“석등은 전형적인 팔각간주석이 아니라 간주석에 소리북을 두른 고복형 석등입니다. 우리나라 고복형 석등은 6기입니다. 고복형 석등은 모두 상륜부가 보개형이고, 귀꽃이 있으며, 기대석은 8각으로 안상을 조각했습니다. 9세기에 등장했고 경주 지역이 아니라 지리산 주변, 즉 백제지역에 분포합니다. 팔각석등보다 규모가 매우 큽니다.
실상사 석등은 화사석 화창이 8개이며, 앞 정면 화창이 제일 큽니다. 지붕돌을 보면 연꽃잎이 이중으로 조각되어있고, 화창에 불을 켤 수 있는 등계燈階가 있습니다. 등계가 남아있는 석등은 실상사와 금강사 묘길상앞 사각석등 밖에 없습니다.
석탑은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처마받침이 5개에서 4개로 줄었습니다. 두 탑이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지붕돌 귀마루 경사가 다릅니다. 귀마루 경사가 급할수록 시대가 떨어집니다. 상륜부가 거의 온전히 남아있는 귀중한 석탑입니다.”
<극락전>쪽의 부도와 탑비를 보러갔다. 증각대사탑비를 보고 있는데 바로 앞 극락전 요사채에서 도법스님이 나오셨다. 환히 웃으시는 모습이 연꽃봉우리가 벙그는 듯 예뻤다. 극락전 왼쪽은 증각대사탑이고, 오른쪽은 수철화상탑이다.
“증각대사탑은 석재가 3가지 이상이며, 각 부의 조화가 맞지 않아서 원형이 아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철화상탑은 거의 완벽한 팔각원당형 부도입니다. 증각대사탑보다 더 시대가 빠른 것으로 보입니다. 극락전 아미타 부처님 후광도 잘 보세요. 이것도 현대 예술품입니다. 최근에 부처님 두상을 CT로 찍어보니 고려사경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보광전>의 서쪽으로 300m 떨어진 산길을 걸어서 두 기의 부도를 만났다. 하나는 어느 스님의 부도인지 모르는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상대석이 원통이며 중대석과 몸통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는 소박하지만 듬직한 느낌을 주는 부도이다. 또 하나는 석종형 부도인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자운대화상부도이다.
자동차를 타고 약수암 가는 산길을 조금 올라가다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특이한 형태의 부도가 있다.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용 큰 발우 모양이다. 홍척국사의 제자인 편운화상부도이다. 명문이 있다고 한다. 전문적인 설명을 집중해서 들으니 다리도 아프고, 머리에 쥐가 났다.
“스님, 이제 용량 초과예요.” 라고 하자,
“그래 가지고 무슨 답사를 가요?” 하신다.
다행히 짧게 설명을 끝내고 드디어 약수암으로 올라갔다.
실상사에서 산길로 2.3km 떨어진 곳에 약수암이 있다.
이사하고 나서도 한동안 짐정리가 안 된 종이박스는 깨끗하게 정리되었고, 마당이며 채마밭도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채마밭에는 키다리 코스모스가 비에 쓰러졌고, 법당 올라가는 경사지에는 설악초와 루드베키아, 닥풀이 피었다. 마당 곳곳에는 금방 뽑은 것 같은 풀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이 정도로 너른 마당을 혼자서 관리하자면 매일 초인적인 노동을 해야 할 것 같다. 법당에 참배하고 책으로 둘러싸인 스님 방에서 편히 앉아서 놀았다. 물맛 좋은 약수도 마시고 채마밭에 웃자란 깻잎과 고추, 정구지(부추)를 가득히 따서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