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삼토 공부하면서 조영석의 <산수도> 제발에 “觀我之長在人物. 是卷雖非其本色 亦自瀟灑”란 글이 있었다. 瀟灑, 물뿌린 듯이 깨끗하다…!
수업 후 회식하면서 소쇄원이 있는 담양으로 답사 가기로 했다.
회원들이 시월보다 십일월이 더욱 소쇄하다 했고, 소쇄원을 안 가본 사람이 거의 없으니 다른 곳으로 답사가자고도 했다. 스님은 “본다고 다 본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셔서 모두 담양 답사에 동의했다. 그때 스님의 답을 오늘 답사에서 넘치도록 확인했다.
나는 담양 여행이 오늘로 네 번째이다. 그러나 오늘 답사는 완전 새롭다. 세 번의 여행이 겉으로 드러난 정자와 원림과 풍경만 보았다면, 오늘의 답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역사와 문화, 역사를 움직여갔던 훨씬 더 강력한 힘들을 느꼈다. 귀갓길에서 스님이 특강을 하셨는데, 눈꺼풀이 무거워 많은 부분을 놓쳤다. 스님의 강의에 이런 일은 처음이다.
왜 답사를 하는가?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이해가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라고 스님이 말씀하셨다.
첫 답사지로 면앙정을 생각했었는데, 스님은 담양 나들목에서 가까운 오층석탑과 당간부터 보자고 하셨다. 살짝 흐린 하늘 아래 아직도 단풍물이 예쁘게 물든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옆 읍내리 들판은 평화로웠다. 스님은 답사지에 도착하시면 우선 말없이 대상을 찬찬히 살펴보신다. 탑이나 석등의 경우에는 한 바퀴 돈다. 이어서 스님의 유장한 장광설이 이어진다. 스님과 답사를 해보면 보는 것도 행복하지만 듣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게 된다.
첫째, 읍내리 오층석탑과 당간이다.
“이 석탑은 너른 평야 지역에 세워진 백제계 고려 시대 석탑입니다. 상륜부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 석탑은 경상도 신라계 석탑에 비해 무엇이 다릅니까? 우선 신라계 석탑은 3층이 많은데, 백제계 석탑은 5층이 많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단층 기단이고, 기단부 덮개돌이 1층 지붕돌보다 좁습니다. 지붕돌의 낙수선과 처마선이 모두 곡선을 그리며 살짝 위로 반전되었습니다. 지붕돌의 낙수면과 낙수면이 만나는 우동이 선이 아니고 폭과 넓이를 가지는 입체입니다. 이것은 한옥 지붕 용마루 밑의 내림마루와 귀마루를 연상시킵니다. 지붕돌 밑의 층급받침이 3단이고, 가운데 층급받침은 부드럽게 원호형을 그립니다. 각 층의 몸돌 아래에 별개의 받침돌이 있습니다. 이 별개의 받침돌은 고려 시대 탑의 특징입니다.
당간은 절 입구에 세우는 건축물입니다. 당간은 철이나 돌, 나무로 만듭니다. 담양 읍내리 당간은 석당간으로 유일한 것입니다. 물론 모두 돌은 아니고 중간 부분부터는 철 당간입니다. 꼭대기에 보륜이 있고, 보륜 주위에 풍경과 같은 작은 방울 한 개가 남아있습니다.”
둘째, 면앙정이다.
면앙정은 송순이 지은 가사문학의 첫 자리이다. 가파른 166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갑자기 시야가 툭 트인 곳에 소박하고 단정한 정자가 나온다. 가운데 방 한 칸이 있고 사방이 마루로 둘러싸여 있다. 정자 주변은 온통 황홀한 단풍잎 카펫이다.
“정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 볼품이 없습니다. 다만 사방이 다 열려있어요. 입지가 특별한 것입니다. 전라도 지역 건축은 방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북쪽의 지평선과 닿을만한 너른 평야 지역이 면앙정의 중심입니다. 가운데 방 한 칸은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어요. 이곳은 겨울에도 그닥 추운 곳이 아니므로 따로 난방장치가 없어도 사용 가능합니다.
면앙정은 송순의 호이기도 합니다. 송순은 가사 문학의 대가입니다. 가사 문학은 무엇입니까? 학창시절에 경기체가 배웠지요? ‘경기체가’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크게 번성한 시가로, ‘景畿何如, 그 경치 과연 엇더 니잇고’ 같은 감탄형 문장으로 끝납니다. 조선 초에 경기체가가 시들해지면서 사대부들이 시를 지었습니다. 그때의 시는 근체시입니다. 시는 근체시와 고체시로 구분합니다. 근체시는 당대에 시 형식이 완비된 것으로 핵심 조건은 압운과 평측이 맞아야 합니다. 시는 문화 활동이자 사회활동이고 정치 행위였습니다. 가사문학도 시가의 일종으로 3‧4조, 4‧4조로 한없이 길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가사 문학의 시조는 정극인의 상춘곡이고 면앙정은 그 가사 문학의 징검다리입니다. 주변의 송강정,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도 가사문학권입니다. 그 자리들을 둘러보면서 이곳에서 이루어진 사람들의 살림 자리와 문화적 활동을 더듬어보는 것,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역사 이면의 강력한 힘을 살피는 것이 답사의 주목적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정자 자체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명옥헌 입구에 있는 <종가식당>에서 돌솥비빔밥과 불고기 전골로 점심 식사를 했다. 사전 답사를 하면서 식사해보지 않아 걱정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셋째, 명옥헌과 식영정이다.
명옥헌은 종가식당에서 걸어서 400m 거리에 있다. 수십 그루 배롱나무는 진분홍 꽃을 떨구고 매끈한 몸매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그 아래 진초록 꽃무릇잎이 더욱 도드라지게 보인다. 명옥헌도 면앙정처럼 가운데 한 칸 방이 있고 사방이 마루다. 여기는 아궁이와 굴뚝이 보인다. 다만 마루가 굉장히 높다. 스님이 마루로 올라가라고 하셨다. 높은 마루에 올라와서 정면의 사다리꼴 연못과 배롱나무를 보니 그야말로 별유천지비인간이요 극락정토이다. 정자를 지은 주인 오명중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틀림없다. 스님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아름다움 앞에서는 말씀을 적게 하시거나 아예 침묵하신다.
“마루는 건축주가 의도적으로 높인 것입니다. 이 원림은 인공을 최소한으로 하고 주어진 자연조건을 최대한 이용한 것입니다. 장하게 배롱나무꽃이 필 때는 연못에도 배롱나무꽃이 피어서 이 앞이 온통 붉습니다. 다만 관광객으로 인해서 조용히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이 주변에 황지우 시인이 집을 지어 통유리창으로 이 원림을 통째로 조망합니다.”
이어서 식영정에 도착했다.
부용당과 서하당을 왼쪽에 두고 108계단을 올라가면 식영정이 나온다. 정자 앞 우람한 소나무 사이로 은빛 물비늘 반짝이는 광주호와 자미탄이 흐른다.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이곳을 드나들었지만, 이곳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정철이 성산별곡을 지은 산실이란 점이다.
넷째, 소쇄원이다.
청신한 왕대밭과 애양단, 대봉대를 지나 오곡문이라고 쓰인 담장 앞에서 멈추었다. 스님은 설명하시는데, 나는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곳을 찾기 위해서다. 대봉대 옆에 대나무와 오동나무를 찾았고, 愛陽壇과 五曲門, 瀟灑梁公之廬란 송시열의 글씨도 찾았다. 담 밑으로 넓적한 바위를 걸쳐놓아 냇물이 흘러들도록 만든 기가 막힌 오곡문을 바라보다가, 오곡문 옆의 담장이 뚫린 곳을 나서니 작은 우물이 나왔다. 다시 안으로 들어와서 두 개의 꽃계단을 지나 제월당에 올랐다. 소쇄원에서 가장 높고 밝은 곳이다. 송나라 황정견은 성리학자 주돈이의 사람됨을 가리켜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밝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 胸懷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했다. 이름과 모습이 명실상부한 정자이다. 우리는 제월당과 광풍각의 반들거리는 마루 위에 올라가서 희희낙락 웃으면서 스님의 설명을 들었다.
“한옥은 사용하지 않으면 퇴락합니다. 출입금지란 팻말이 붙어있지 않으면 올라가 보세요. 주인의 마음으로 주변 경관을 둘러보게 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으니 읽어보세요. 김봉렬의 책, <한국 건축 이야기>도 읽어보세요.
소쇄원을 한 마디로 가장 잘 평한 글은 ‘소쇄원은 건물로 조형한 일종의 시다’입니다. 이 이상의 더 멋진 표현은 없습니다. ”
소쇄원은 아주 섬세하게 계획된 원림이다. 크지 않은 공간에 온갖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예쁘고도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있다. 네 번째 답사이지만 아직도 다 보지 못했다. 계곡에 물이 말라서 스테레오로 들린다는 소쇄원만의 멋진 음악도 듣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오리라 다짐하면서~
다섯째, 개선사터 석등이다.
석양이 깔리는 시각에 마지막 코스를 환벽당으로 잡고 버스를 탔다. 길을 보니 개선사터 석등 가는 길과 같다. 정자는 볼 만큼 봤으니 석등을 보자고 했다. 좁은 산길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꽤 들어가서 마을 근처에서 멈추었다. 나는 새처럼 날 듯이 걸어서 일등으로 석등 앞에 도착했다. 석등은 대지에 단단히 발을 붙인 고독한 거인 같다.
“이 석등은 간주석이 장구의 배 모양으로 된 고복형 석등입니다. 고복형 석등은 9세기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집니다. 고복형 석등은 모두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석재는 응회암이며, 화사석 화창은 모두 뚫려서 8개이고, 지붕돌과 연화 하대석에 귀꽃이 솟았습니다. 간주석 이하 부분을 보수해서 돌의 색이 달라졌습니다. 특히 장구 몸통 부분의 끼워 넣은 석재가 약해서 조금 주저앉은 모양입니다. 지붕돌의 아랫선은 팔각이지만 지붕돌의 윗선은 가벼운 물결 같은 16각입니다. 화사석의 화창 기둥에 열 줄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내용은 왕실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내용으로 원등입니다.”
여섯째, 귀갓길 버스 안에서 특강이다.
스님은 일어서서 마이크를 잡고 우리 쪽으로 돌아보시면서 지리산 나들목까지 줄곧 특강을 하셨다. 정여립 모반 사건, 사화와 환국으로 얼룩진 격동의 시대 이야기와 정철의 파란만장한 삶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졸음에 겨워 제대로 듣지 못했다.
혹시 특강 들으신 분, 이야기해주세요!
♣답사 경비 내역(2019. 11. 16. 토요일)
수입 25명 × 4만원 = 100만
지출 ; 35인승 버스(덕일어린이집 버스) 50만
종가식당 점심 28만
스님 저녁식사비 10만
과일 52,000
소쇄원 입장료 38,000
소쇄원 엿, 물 기타 20,000
첫댓글 별꽅님의 답사기는 늘 현장을 보는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