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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와 지적 긍지
4월 7일 ~ 8일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4월 7일 ~ 8일의 ~ 표는 4월 7일부터 8일에 걸쳐서라는 뜻)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즉 주님은 나에게 어떤 일을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도 더 깊은 사고에 의해 통찰하도록 한 것으로 보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가치가 없으며 가장 큰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죄의 근원 그 자체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내 죄는 그런 이유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죄보다도 더욱 깊은 근저를 지니고 있다 이 일로 해서 나는 나의 무가치와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도 더욱 큰 나의 죄를 발견했던 것이다>
지적인 긍지는 그의 가장 빠지기 쉬운 결함의 하나였던 것 같다 그것은 같은 날짜 일기 밑부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서점을 보았다 그러자 곧 나의 저작은 다른 사람의 것들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그러나 곧 나는 나 자신을 억제했다 그것은 한 사람은 다른 자에게 봉사하고 있고 우리의 주님은 인간성을 갖추게 하는데 무수한 방법을 취하고 계시므로 각각의 또는 모든 책은 모든 인간의 합리적인 상태에 따라서 가깝고 또는 먼 수단으로서 그 자체의 공적을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항상 교만이 곧 나타나게 된다 신이여 이를 억제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 힘은 주님의 손아귀 안에 있습니다>
언젠가 그는 런던의 왕립 외과대학의 강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때 경솔하게도 나는 해부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되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러나 그것이 행하여지지 않아서 나는 기뻤다>
4월 8일 ~ 9일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볼 수 있다 <나는 그렇게도 많은 교만과 생각을 품고 우쭐대는 것에 대하여 주님의 자비를 빌었다>
<나한테는 나의 저작을 자랑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4월 13 ~ 14일에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수 개월 후에(10월 6일 ~7일) 이렇게 쓰고 있다 <그후 나는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고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았다 즉 어떤 대상이건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은 예컨대 내가 지금 관계하고 있는 일에 대한 사랑은 모두 그런 대상이 그 자신을 위해서는 사랑 받고 (정작) 신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인 유일한 사랑에 대한 수단으로 사랑되지 않을 때는 항상 더럽혀진 사랑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신의 의지에 반해서 자기 자신의 코오스를 택하는 경향이 있음을 많은 경우에 인정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신의 은총에 맡겨야만 한다는 생각에 순응하여 신이 원하시는대로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이 내 마음 속에 있었다>(4월 10일 ~ 11일)
그는 그의 생활에서 변화가 일어나 새롭고 높은 일이 그 앞에 놓여져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처럼 좋아하고 또 그의 명성을 높이려는 마음으로 되어 있던 그 철학적 연구를 단념할 뜻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만일 스스로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신이 받아들인다면 그런 희생은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지적인 긍지는 그를 엄습한 시련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었다 그의 영혼의 가장 내적인 깊은 곳은 그러한 몇몇 생각으로 흐트러지고 그 때문에 그 자신은 악일 뿐이며 더구나 끊임없이 악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4월 11일 ~ 12일의 일기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나하나의 생각 속에서도 모두 우리가 순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서도 무한량의 죄와 불순이 내포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그것은 신체에서 사고로 들어오는 모든 욕망 속에서 내포되어 있는 것을... 나는 나 자신 속에서 보았다 그래서 한 가지 생각이 순결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소심과 위선에서 또는 다른 많은 원인에서 다른 방향으로 좋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사실이어서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점검함으로써 찾아낼 수도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인간은 그만큼 자신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는 없는 것이며 불결과 불순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생각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실제로 다음과 같은 것을 인정했다 즉 나의 의지 전체는 그 속에서 우리들을 태어나 있으며 또 그것은 신체에 의해서 지배되어 많은 생각을 끓어들이고 있지만 그 의지 전체는 영에 반해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좋은 것에 대해서는 죽은 것이 됐으며 우리들 자신 스스로가 모든 나쁜 것에 기울여지고 있다>
그의 덕 그것조차도 시련의 원천이었다
<가끔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누군가가 나를 성도로 생각하고 그런 이유에서 나를 존경한다고 한다면 아니 어떤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사색에 잠겨있는 성인이나 성도로서 나를 존경할 뿐만 아니라 또한 숭배까지 한다면 나는 그 경우 그 죄가 그 자에게 돌려지기보다는 나의 잠재적인 그 자로 하여금(묵인하고 있는 자기 자신?) 그렇게 만들고 있음을 나는 알았다 나는 또 그러한 무서운 죄에- 만일 그런 죄를 범한다면 나는 고발되고 말 것이지만- 일체 관여하지 않기를 가장 진지한 기도로 주님에게 간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가혹한 시련의 억압 아래 육신과 영 사이에서 생기는 투쟁을 경험한 바 있는데 그 시련은 외부의 원천에서 생긴다는 것을 믿었다 그는 사악한 영들이 그를 소유하고 그에게 강요해서 그가 원하지 않는 악을 수행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가끔 느끼기도 했지만 결코 신앙이나 용기를 잃지 않고 그를 유혹하는 자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열렬히 기도했다
그는 또 그의 기도가 보답됨을 느끼고 이따금씩 실의의 구렁텅이에서 분명한 승리의 높은 언덕으로 비상했다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사악한 생각을 거의 억제할 수도 없는 극히 가혹한 시련의 한 기간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썼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련은 매우 가혹하긴 했지만 오늘 이상으로 용기를 가진 일은 결코 없었다는 것과 전날처럼 실망하거나 괴로워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단언할 수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는 그 자신의 약속에 따라서 나를 도와주시리라는 강한 신앙과 신뢰를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나는 이런 신앙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경험했다>(4월 19일 ~20일)
그는 자신이 신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고 인내를 갖고 그 시도에 승복하고 자기 자신을 중세기의 성자와 같은 가혹성을 띠고 수련해 왔던 것이다
<(4월) 9일 하루 동안을 나는 기도하고 찬미가를 부르고 신의 성서를 읽고 단식하고 지냈다 아침 한 때를 다른 일로 보내기는 했지만...>
그는 자주 우울하고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졌었지만 환희에 넘쳐 있을 때도 있었다
<나는 내 생각을 순결한 상태로 두기를 결심했을 때 주님의 은총을 받는 경험을 하고 가장 깊은 환희를 맛보았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크나큰 은총을 글로 쓰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의 나에 대한 기질에 따라서 나를 호의적으로 또는 비호의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 이외에는 도움이 될 수 없으며 또 한편으로는 신의 은총을 찬양하는 것이 나 자신의 자기애를 강조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 주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떤 한낱 농부가 영주나 왕으로서의 권력을 갖게 되고 그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채울 수 있다하더라도 그 농부의 마음 속에는 무엇인가가 있어서 그 무엇인가가가 그 농부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이에 그 농부에게 가르치려 하고 있는 그런 모습에 비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비유에 의해서 이 큰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아 신이여] 바로 당신의 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4월 7일 ~ 8일]
재삼재사 그는 겸양의 은총을 기도로 구하고 또는 그것에 조금이라도 도달한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는 그 시련의 하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배웠다 즉 이 상태에서의 단 한 가지는 나는 그 이상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최대한으로 겸손하게 신에게 그 은총에 감사하고 그것을 기도드리며 자신의 무가치와 신의 무한한 은총을 아는 일인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재삼 나는 눈물에 젖는 일이 있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 그다지도 무가치한 죄인에게 은총을 내려 주심에 대하여 가슴으로 느끼는 기쁨의 눈물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필요한 단 한 가지는 자기 자신을 비하할대로 비하시켜서 주님의 은총에 파묻히고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비하시켜서 그 은총을 신에게 감사하는 일인 것이다>(4월 7일 ~ 8일)
신의 의지를 행하는 것이 그의 마음의 바램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신의 은총을 나의 모토로 삼고 있다 나는 당신의 것이며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주님에게 바쳤으며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나를 처치해 주시기를..>
그리고, <나는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신이 나를 신의 것으로 만드시도록 신에게 기도드리고 있다> 그는 많은 황금을 본 환영을 기록한 후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처리하시는 주님은 내가 유아처럼 내 걱정거리를 주님에게 투정할 때 영적인 일이나 세상 일도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나에게 내려주신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모든 일에 관하여 자기 자신을 단순한 그릇이라고 보고 있다 신의 인도에 대한 그의 의식은 때가 지남에 따라 점점 강해졌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10월 12일 ~ 13일)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즉 종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 전날에 그는 우리한테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종교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는 그 전에 놓여졌던 일에 대하여 적당한 그릇이 되기 이전에 그 모든 자기 의지와 선입관념을 없내는 일이 필요했다 이런 꿈과 환영에는 자주 격렬한 경련, 피로, 혼수, 발한이 따르고 적어도 한 번은 실신상태에 빠졌다 그것이 계속 되고 있는 동안 그는 가끔 10시간에서 12시간 이상 신비로운 잠 속에 빠졌다 틀림 없이 그 신체는 거기에 가해진 긴장에 의하여 기력이 소모될대로 소모되고 왜냐하면 이 전지간 중 그는 격렬한 문필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연은 그 요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따금 길에서 친구를 만나도 그 인사에 답례를 할 수 없을 만큼 허탈상태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일은 광신자에는 모두가 공통된 경험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광신자와는 정반대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경우에는 이러한 공통된 경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면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가 종교적으로 조금도 흥분에 사로잡히지 않고 과학적인 눈으로 자신의 입장을 주시하고 연구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는 사람이 자주 감정에 사로잡히는 모든 종류의 것을 상상하는 일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10월 6일 ~ 7일) <인간은 얼마나 쉽게 다른 종류의 영(즉 악령)에 의하여 갈팡질팡하고 있는가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그 각각의 사랑의 성질에 맞추어서 나타내고 있다>
그 한 가지 환영에 대하여서도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주님은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다> 그리고, <신이여 나를 이 일로 인해서 헷갈리지 않게 하소서 나는 잘못되어 있지는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꿈과 육체의 경련을 경험한 밤을 지내고 그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단순한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 또는 그렇지 않은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상상에 사로잡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는 참으로 독특하다 우리는 무지한 자 또는 광신가 또는 마음이 정해지지 않은 자가 환각을 그릇 판단하여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지만 이 세상에서 활동적인 정상 생활을 하고 있는 수학자 이론가 자연과학에의 헌신자에게 이런 일이 있다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그에게 있었던 변화를 설명하는 갑작스런(회심)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정신능력의 쇠퇴 또는 정신착란 증세를 증명할 만한 것도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이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에도 그는 놀라운 정신력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그 당시의 가장 우수한 지식인들의 인정을 받은 바 있는 철학적 저작을 집필하고 그것을 출판하는 일에 종사했으며 또 다른 저작을- 그것은 철두철미 건전하고 모순이나 자가당착이 없는 것이어서 그것을 가장 주의깊게 검토한 자에게는 인간의 지혜 이상의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지만 약 30년 동안을 계속 집필하고 출판했던 것이다 믿어도 좋은 또는 가장 쉬운 설명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것이었다
이 중년의 철학자가 그처럼 그 생애의 대망을 내던져버린 것을 생각할 때 또는 그가 신의 소명으로 인정한 것을 어린애처럼 복종하고 그가 가장 애호했던 이 세상의 지혜에도 등을 돌린 이면에는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것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왕후들의 친구이며 이지의 왕자인 어떤 자가 낯선 고장의 한낱 길손으로서 캄캄한 밤의 어둠 속에 단신으로 그 혼을 신에 대한 기도로 바치고 아마도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배울 때와 같은 단순한 찬미가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애창가는 예수는 나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실로 그것은 주목할 만한 모습인 것이다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기의 그의 신학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하자 스베덴보리는 루터 교회의 복음적 교의를 가르침 받았으며 중년까지는 신앙만을 주제로 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타당성에 의문을 품은 것 같지는 않다 신앙만의 주제에 대해서는 그의 부친도 그와 같은 또래의 교직자의 태반보다도 넓은 견해를 품고 있었다 이 일기는 그 아들이 여전히 그 초기의 가르침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격적 삼위일체성의 교의는 여러 번 일기 속에 나타나고 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의 특수한 임무는 엄밀하게 정통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부에게 기도를 드리고 구세주의 피와 공적에 호소하고 있다 그는 이해를 신앙과 혼동하는 것을 비난하여 신앙은 우리의 이해에서 분리되어 이해를 초월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완전히 조시된 후에는 <<천계에 장려한 신전의 환영을 보고 그 입구 위에 이제 신앙의 비의에 지적으로 들어가도록 허락되다>>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 이후는 그의 끊임없는 이성이 무시되는 곳에는 신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윽고 올 변화의 징조는 특히 신의 성질과 단일성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신성과 관계가 있는 견해 속에 나타나 있다 초기의 일기 속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신성의 완전함이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그리스도만이 기도 속에서 불리어져야만 한다 그는 전능하시며 유일한 중개자이시다 그리고 다시 앞에서 인용한 기도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것은 아아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여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그는 그가 초대받고 수행해야만 했던 사명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몇몇 기사에서는 그가 그 일에 대하여 어떤 예감을 품고 있었음이 나타나 있다 4월 21일 ~ 22일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신을 아직은 충분히 또는 생생하게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신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듦으로 나는 고국을 향해 여행을 하는 것이 좋은지 어떤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용기를 내어 내가 네덜란드로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며 또한 신의 영광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재능을 받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모든 것이 이 목적을 위하여 도움이 되고 있음을 알았으며 또 영은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있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옳은 방향으로 따르지 않는 한 자신의 생명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다른 일체의 유혹을 경멸했고 내가 추구했던 사치 부 영예를 경멸했다>
이 주목할 만한 일기는 10월 26일 ~ 27일의 글로 끝나고 있는데 그 후의 경험은 다른 곳에서 기술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주님이 1745년 4월의 특정 일시에 스베덴보리에게 나타났는가에 대하여 그 자신이 설명하고 있는 글을 바탕으로 한 카알 롭샘의 설명이다 앞서의 몇몇 전기에 이미 나타나 있는 사항을 인용할 필요는 없지만 그 설명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 경험은 그의 그 후의 세월의 성격을 결정지은 것이다
그가 식사 후 하숙집에 있을 때 한 사람이 환영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 적지 않게 그를 놀라게 했다 롭샘에 의하면 스베덴보리의 글은 다음과 같이 계속 되고 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밤 중에 앞서 나타났던 분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 분은 그때 자신이 우주신이며 세계의 창조자 속죄자이며 성서의 영적의미를 인간에게 설명해 주기 위하여 나를 택한 것이고 내가 그 주제에 관하여 써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설명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날 밤에도 영적눈이 열렸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것들의 실재성 영들의 세계 천계 지옥을 철저하게 확신하고 그곳에서 온갖 상태의 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지기를 보았다>
<그날부터 나는 세상의 모든 과학의 연구를 단념하고 주님이 나한테 쓰라고 명령하신대로 영적인 일에만 정력을 쏟았다 그후에도 주님은 낮 동안에 여러 번 나의 영안을 뜨게 해주셨다 그래서 낮 동안에도 나는 다른 세계를 보았으며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로 천사와 영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것은 신비적 또는 광신적이라고도 생각될 수 있는 감정이나 말을 그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단순하고 명백하게 설명된 놀라운 기사이다 만일 스베덴보리가 그렇게까지 복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실로 그 증명을 그의 저작 속에서 발견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유일한 만족스런 해답을 얻기 위하여 그 저작에 눈을 돌려야 하겠다
- 견신자 스웨덴보르그 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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