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인간공격용이 아니라, 만물의 화해용이다
이근호목사는 십자가가 인간공격용이라고 한다. 일견 십자가의 복음이 인간의 죄와 허물을지적하고 공격하는 일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옳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십자가의 한 면만 강조하고 다른 면을 무시하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왜곡시키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근호목사의 인간공격용으로서의 십자가에 대해서 성경의 십자가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근호목사는 자기 신학에 근거한 십자가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계시록6장을 인용한다. 하지만, 계시록6장의 인용된 그 구절에는 “어린양의 진노’라는 표현은 나와도 “십자가의 진노”라는 말은 없다. 그가 십자가가 인간공격용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잘못 인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십자가’라는 표현이 성경에서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표현되고 있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골로새서에서 ‘십자가’라는 용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1장19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에 “십자가의 피”라는 말이 나온다. 이 구절을 보면, 도대체 “십자가가 인간공격용이다”라는 이근호목사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만한 구절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근호목사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라고 한다. 또한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근호모목사의 십자가는 인간공격용일지 모르지만, 성경의 십자가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하해용, 화목용이다. 어떤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일까? 이 글을 읽는 이들이 판단해야 한다. 어느 십자가가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줄 것인가? 공격하는 것에 그치고 마는 것인가? 그것을 넘어서서 화해케 하고 화목케 하는 십자가인가?
실은 얼핏 보면, 십자가가 공격용으로 사용되는 듯한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성급하지 않아야 한다. 우선 그 구절을 보자. 골로새서2장14-15절의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지금 십자가로 “증서”를 도말하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고 밝히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공격용인 것 같다.
잠깐, 스톱! 십자가가 무엇을 공격하는가? “인간”이 아니다. “증서”를 공격하고(만일 “공격”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정사와 권세”를 공격한다. “인간공격용”이 아니고, “증서공격용”이요, “정사와 권세 공격용”이라고 해야 한다. 왜 증서를 공격하는가? 왜 정사와 권세를 공격하는가? 그 증서, 그 정사와 권세에 매여서 종노릇하고 있는 “인간”을 해방시키고, 또한 그 인간과 더불어서 “화해”하시고 “화목”하시려고 “공격”하는 것이다.
다시 그 성경구절을 보기 바란다. 이근호목사의 주장은, 성경구절만 유의해서 보면 금방 그 주장의 허구가 드러난다. “증서”가 어떤 것인가? ‘정사와 권세”가 어떤 것들인가? 증서는 바로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 이 글을 쓰는 바울을 포함한, “그리스도안에서 신실한 형제들”(골1:2)이다. 곧 “성도들”이다. “증서”를 도말하고, “정사와 권세”를 드러내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화해”한 사람들, “화목케 된” 사람들이 바로 이 구절의 “우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구원받은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이근호목사가 십자가는 인간공격용이라는 말을 할 때에 얼마나 그 말을 조심성 없이 사용하고 있는 지 금방 드러난다. 십자가는 인간공격용이라고 할 때에, 그 ‘인간’이란 말이 ‘어떤’ 인간인가를 구분해야 한다. 그런 구분이 없다면, 그의 인간공격용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공격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당신과 더불어 화해하시고 화목시키신 바로 그런 성도들을 공격하게 된다.
이근호목사의 공격용십자가는 어떤 인간을 공격하고 있는가? 손무성목사를 공격하고 있다. 손무성목사는 무언가 자꾸만 인간의 긍정적인 면만을 드러내려고 한다고 이근호목사가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무성목사가 무엇을 주장하는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 곧 성도는 그리스도안에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손무성 목사가 이 점에 있어서 한치도 어김이 없다. 그가 성도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이다. 자랑하려거든,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1)고 하지 않았는가?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 때문에 이근호목사가 손무성목사를 공격한다면, 그의 공격용십자가는 도대체 성경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을까? 화해용십자가를 공격용으로만 사용하면 과연 성경의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과연 누구와 화해하는가? 십자가가 화해한 자들과 더불어서 그가 화해하는가? 아니면 자기의 공격용십자가와 화해한 자들과만 화해하는가? 도대체 그가 말하는 화해의 기준이 무엇인가? 자기의 신학인가? 십자가인가?
성경은 십자가를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6-18)
십자가가 공격용인가?
인간공격용의 십자가는 바로 이근호목사의 십자가이다.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성경의 십자가는 여기서도 화해와 평안의 십자가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십자가는 인간공격용십자가가 아니라, 바로 만물화해용십자가이다.
이 십자가의 도가 양극단으로 오해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값싼 십자가로 변질되어 버렸다. 회개도 없고 참믿음도 없이 “화해”와 “화목”을 이야기함으로 인하여, 그 십자가는 장사꾼의 십자가로 변질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변질된 장사꾼들의 십자가를 비판하다가 그만 이근호목사의 십자가도 또한 변질되어 버렸다. “화해”와 “화목”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고 제대로 강조하지 않고, 그냥 십자가를 “공격용’으로만 강조하다 보니, 십자가의 성격 자체가 “공격”용으로만 곡해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변질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의 십자가가 거짓된 것이어서, 그 거짓을 공박하다가, 자신들의 십자가도 변질되고 만 것이다.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근호목사의 십자가신학이 과연 성경적인가 성경의 빛에서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십자가.
이 십자가를 두고 바울사도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다(고전2:2).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고전1:18).
무차별인간공격용십자가인가? 죄인을 불러 의인되게 하시는 화해용십자가인가?
십자가를 변질시키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좌에서 혹은 우에서.
모든 영을 믿지 말고 시험하라고 사도요한이 권면하였다(1요4:1). 이 글을 읽는 이도 이 글조차도 직접 시험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책임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대한 피값은 이제 나에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내가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로다!
첫댓글 저의 답글도 퍼오셨다는 <우리교회>게시판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교회>를 "우리"교회로 삼아야겠군요 ^^
저도 홀리죠이님 글에 superb~, 십자가마을로 퍼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