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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그동안 성서그룹공부에 참여하고, 또 몸소 봉사를 하면서 느낀 부정적인 봉사자의 유형이다.
성서 그룹에는 실제로 성령께서 실재하시며 또 직접 개입을 넘어서 직접 주관하시기에 그만큼 은총을 느끼는 곳이다.
성서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지금은 성서봉사를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과 표징뿐 아니라 눈에 뜨이는 기적과 표징, 나를 포함해 각자가 선물받은 은총은 정말 하느님은 말씀 속에 살아계시다는 것을 또 한번 확인하게 만들었다.
성서 그룹의 수장은 성령님이고, 봉사자는 말 그대로 servant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가 말씀 자체이신 성삼위에 묻히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탄의 속삭임이 그마만큼 치열하고 집요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유혹은 늘 우리 마음 속에 있고, 어느 순간 유혹에 휩쌓여진 나 자신을 늦게 발견하기도 한다.
창세기 3장의 뱀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결론은 하와의 굳건하지 못함과 불필요한 호기심이 점차적으로 죄를 만들게 되었다.
우리 본당 사제께서는 별도의 창세기 강해 시간에 "성경이 우리 나라에서 쓰여졌다면 유혹자는 뱀이 아니라 여우가 되었을 것이고, 어느 나라는 원숭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을 것이 있다면 하와라는 여인은 이름은 바뀌었을지도 모르나 분명 인간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다. 결국 유혹자는 끊임없이 바뀔수도 있다는 것은 누가 유혹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져드는 내게서 죄와 타락의 본질이 있다"라고 가르친바가 있다.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에덴동산에서, 가장 이상적인,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 인간들, 완벽한 환경, 그 안에서도 죄가 발생되었다는 것은 결국 유혹과 타락은 어떤 환경에서도 인간을 노리고 있으며 어느 순간 내가 죄에 빠지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성서그룹원 개개인도 그런 각오를 해야하지만, 그룹을 이끌어야할 봉사자에게는 더더욱 정신적 무장이 필요하다.
아무리 열심한 마음과 순수한 마음으로 성서 그룹공부에 임했어도 누구라도 한명이 한 순간 그룹에서 그 시간을 안락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원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선 그룹원 모두가 동일한 상황에 놓여지게도 된다.
이런데서 봉사자가 어떻게 처신하는가에 따라 성령의 은총이 뿌려지는 속에 상호간의 소통과 조화가 이루어질수도 있고, 상호반목과 더불어 말씀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그중 봉사자가 피해야할 상황을 경험에 입각하여 정리하여 보았다.
1. 우유부단한 봉사자
어떤 여성그룹원이 요한복음 공부를 하는데 뜬금없이 "왜 하느님은 여자를 나중에 만들었어요? 짜증나요. 창조부터 불평등이쟎아요? " 그룹공부 진도와는 상관없이 이런 말을 한다.
이럴때 봉사자는 안면몰수하고 끊어야 한다.
"그래요? 우리 함께 연구해 봅시다...."
이렇게 되면 입달린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게 되어 있고, 평소 민감한 사회적, 가정적 문제인 남녀간의 대립까지 그룹에서 오가게 된다.
이건 본인이 요한그룹에 참여할때 실제 있었던 일이고, 창세기때 했을 법한 질문--사실은 여러 담론을 어지럽게 끌어내기 딱 좋은 주제에 대해 의도성을 가지고 질문하는듯 했다.
오직 우리는 그주, 그날에 주어진 말씀을 주제로 한정하더라도 무궁무진하고 지칠줄 모르는 샘물을 마실수 있는 기회를 쓸데없는 잠담과 토론으로 망쳐버릴수 있다.
그룹원들에게 인격적인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 주에 던진 숙제를 묵상토록하는 것이 봉사자의 임무이다.
본인은 1년간 요한 그룹공부를 하면서 내내 술담배 논쟁, 개신교논쟁, 불교논쟁, 남녀불평등논쟁으로 지새운 기억이 더 많다.
학교 다닐때 보면 선생님한테 자꾸 개인사 이야기를 해달라는 학생들이 몇몇 있고, 거기에 넘어간 교사는 수업진도보다 다른 이야기를 재밌게 하게 되고, 학생들은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성서그룹에 들며 그룹원들은 처음에 무슨 생각으로 왔을까?
처음에 무슨 각오로 왔는지는 다들 그럴듯한 생각으로 왔겠지만, 어느 순간에 유혹에 빠져든다.
그 유혹의 순간을 안면몰수하고, 봉사자가 좀 너무 뻑뻑하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강경하게 대응해야 그룹이 무너지지 않는다.
이런 것에 끌려 다니는 봉사자는 우유부단한 봉사자라기보다는 나름의 인품과 민주주의적 이미지를 버리기 싫어하는 세속적 생각에 젖어 있는 탓도 있다.
다들 아시겠지만, 세속적인 존경은 그야말로 세속의 것이다.
봉사자에게 자꾸 다른 말을 시키고, 진도 외의 이야기를 유도하는 그룹원이 밖에 나가서 "성경공부는 신부님이나 수녀님이랑 해야만 한다", "난 요한까지 했지만 남은게 하나도 없어"라고 말하는 것도 목격했기 때문이다.
2. 체험이 많고 매우 훌륭하신 봉사자
본인은 창세기와 마르코 복음을 7년간 사목회에서 봉직하신 분에게 봉사받았다.
지금도 노트를 펴보면 "공동체의 악은 늘 휩쓸려다니는데에 있다"라는 나의 필기문이 드문드문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내 그룹원들에게 전달할수가 없다.
나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기에, 아무리 진리에 가까운 말씀이다 하더라도 그룹원들에게 실체감있게 말할수가 없다.
그분은 7년간 오만 체험을 하면서 얻은 지혜를 그렇게 짧막한 말로 전달하는데, 말로 표현할수 없는 포스가 느껴졌다.
구체적으로 사목회에서 무슨 구설이 있었고, 어떻게 헤쳐나갔는지 그 봉사자님은 말씀하지 않으셨기에 우리는 모른다.
아니, 굳이 알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들을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커멘트는 그분이 어떤 일을 당했고, 어떻게 해오셨고, 지나간 지금 어떻게 회고하고 성경 말씀 속에 어떻게 갈무리하는지를 웅변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신의 직업, 체험, 전공, 취미와 연관된 구절이 나오면 구구절절이 개인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때 1번 항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그룹원들이 나온다.
"그래서요, 어떻게 되었나요, 봉사자님?"
거기에 넘어가 20~30분동안 개인의 무용담이 계속되면, 어느덧 그룹원 모두가 "그래서요?" 라든지 개인평과 추가질문이 이어진다. 그래서 딱 한문제만 풀고 집에 간적도 있다.
가령 5남매를 키운 어머니가 봉사자라고 하자. 얼마나 체험도 많고 한도 많겠는가?
그런데 2남매를 둔 어머니그룹원이 "아이 많이 키우시느라 힘들었겠어요. 남편은 많이 도와주었나요?" 그러면 그 5남매의 어머니출신 봉사자님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통한이 올라와 입으로 배출되기 시작한다.
그쯤되면 미혼그룹원이나 신혼그룹원도 한마디 하고 싶어하지만 "미성년자는 좀 빠지지"이런 말이 나온다.
성서그룹에는 남자도 여자도, 연장자도, 젊은이도, 고학력자도, 저학력자도 빈부의 차이도 없이 똑같은 시간과 발언권을 배당받아야 하는데 그룹 내에서 공공연한 발언권자와 침묵을 지켜야할 자의 구분이 생겨난다.
....아마 입달린 엄마 아빠 그룹원들은 계속 질문공세와 더불어 자녀교육토론의 장으로 변질시켰을 것이다. 그쯤되면 배우자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윤리교사 출신의 봉사자에게 이사야예언서를 봉사받을적에,
문제집에 보면 사회정의, 사회윤리 문제가 많이 나오는데 역시 온 세상 윤리걱정을 혼자 도맡아하시는 봉사자님은 문제 자체에 흥분하셨다.
결국 이 세상이 썩었다는 것이다.
정치고, 국민이고, 교육이고, 제도고, 경제고.....하다못해 가정가진 엄마아빠들도 따로 애인두는 이들도 늘어났고 등등.....입술까지 떨리신다.
내게 다가오는 느낌은 "홀로 고고하고, 홀로 도덕적이시고, 홀로 이 세상 걱정을 다 끌어 안으신분".
공부의 결론은 이 뭣같은, 하느님을 떠난 세상에서 다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려는 것이 대안인데 그게 무어냐.....
그런 중요 문답의 답변은 그냥 아주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다같이 흥분하다 끝나 버렸다.
이미 답은 본문에 예지되어 있으나, 성령이 떠난 상태에서 형식적인 선언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매우 짧막한 본문조차 어떤 자세로 읽거나 알려주는데서 영이 빠진것과 함께 하시는 것의 차이가 크다.
부패한 세상에 보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경고를 공부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온갖 세상걱정을 선포하게 된 것이고, 그 열매는 그룹원들 각자가 "저는 안 그래요, 저는 안 그래요. 어찌 그런 일들이.....참 몹쓸 인간들이네요" .....
그게 결론으로 끝난 날도 있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자신조차 불신하며 자위를 하던 제자들을 연상하는 결론이었다.
본인은 역사학 전공으로 아무래도 성경텍스트를 보면 실제 역사랑 비교하는 습성이 있다.
창세기에 이집트라는 강대국과 아브라함, 요셉이 관계맺게 되는데, 요셉 편에서 나는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를 좀더 알려줄 욕심에 원고를 준비했더니 무려 30분어치의 분량이었다.
여기서 과연 이 사람들에게 고대 이집트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할까를 끊임없이 묻다가, 결국 하느님은 어디까지 원하실까라는 것을 묵상하게 되었다.
결론은 그룹원들에게 필요한 것은 요셉과의 밀접한 관계를 알아내는데 필요한 자료와 향후 출애굽의 배경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3과 요셉편에서 이집트 이야기를 한 것은 딱 5분으로 줄일수 있었다.
만약 그 이야기를 처음 계획처럼 길게 이야기했다면 메이크업팔렛 이야기, 눈화장이야기, 탱크(전차)이야기, 하다못해 클레오파트라의 스캔들까지 질문이 나왔을런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의 근원은 사실 나를 내세우려는데 있었고, 그나마도 직전에 내 욕심을 깨달아서, 말씀을 전달하는데 최우선을 두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수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체험, 지식, 경험이 많고, 사회적 성공과 지위를 누리는 봉사자들이 피해야할 것이 바로 어느덧 자기 자신을 선포하게 되며 떠나버린 성령을 깨닫게 되는 상황이다.
훌륭하신 봉사자는 그 사람의 학식과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또한번 강조하며 묵상인지 체험담인지, 무용담인지 구분이 애매한 내용으로 흥미를 끌어 그룹원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 텍스트와 함께 하는 성령의 열매로 만들어진다.
그룹원들의 마음에 유혹이 스며들때 그 순간과 그 공간을, 과거 억지로 공부하기 싫어하던 철없던 시절의 학교교실로 만들어 버린다.
성서공부는 우리의 영혼이 성서 기술 당시의 삶의 자리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들어가야 하는 모임인데, 청소년기의 교정의 추억으로 퇴행해서는 안된다.
그리되면서 봉사자는 봉사자가 아닌 그때 당시의 '다루기 쉽고 마음여렸던 선생님'으로 자리바꿈되어 버린다.
3. 먹는것 문제
봉사자 연수를 받을때 '다과지침'이라는 매뉴얼이 있었다.
본인은 그 다과지침이 불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대부분 직장인이라는 특성상 초저녁에 모이게 되어 출출한 기를 달래기 위해서 커피나 코코아, 과자 몇조각은 두시간 정도를 앉아서 버틸 힘으로는 충분하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다과를 허용하게 되면 나중에 통닭이 나오고 피자가 나온다.
치킨 피자를 먹는데 그냥 먹게 되는가? 콜라도 한병 있어야 하고, 콜라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사이다도 있어야 하고, 탄산음료 싫어하는 그룹원이 있다며 의협심에 넘치는 그룹원이 성당 근처 편의점으로 뛰어간다.
거기에 대해 눈치를 줄 양이면 "저희가 봉사자님 대접하는거에요"라는 예쁜 소리까지 나오고 대부분 우유부단하게 처신하게 된다.
또 다른 반에선 짜장면집에 배달까지 시키는 경우도 보았고, 오리고기까지 배달시키는 것을 보았다.
본인의 그룹은 대부분 여성들이라 특유의 애교와 미소에 이 노총각 봉사자의 마음이 깜빡 약해진 틈을 타서 아예 전기밥솥이랑 뭐 만드는 장비까지 바리바리 등장했다.
물론 단 한번뿐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음식 자체를 가져오지 않도록 했다.(커피, 과자 제외) 그런 무거운 음식을 먹는 시간은 꼭두 30~40분 이상을 소요하게 되며 문제 1, 2개를 풀 시간이 지나간다.
게다가 포만감으로 인해 공부의 의욕이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흐리게 만든다.
본인도 문제풀이같은데서 스스로 흥분하여 내 개인사적인, 혹은 내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견해를 설파한적이 있었다.
그후로 예외없이 후회하게 된다.
그것은 성령의 활동무대를 내 임의로, 혹은 내 감정으로 가로 막았고, 그룹원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들 기회를 박탈시켰다는 자괴감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반드시 그룹원들에게 엉뚱한 질문, 혹은 그 이야기를 연장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의 커멘트가 예외없이 뒤따랐다.
사실, 두서없이 그룹을 이끌다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잘 모를때가 많다.
내가 아닌 내 안에 계신 아버지의 영이 말씀하시는거라면 기뻐할 일이지만, 내가 내 기분에 들떠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소리를 유도하는 그룹원이 있을때, 그건 내가 내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하나의 표지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늘 성서그룹에 갈때는 "선포되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닌 하느님이십니다" 라는 봉사자 선서문의 일부를 큰소리로 기도한뒤에 떠난다.
첫댓글 정말 중요한 내용들을 솔직 담백하고 진솔하게 기록하였네요. 봉사자들의 생활현장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말씀들이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봉사자들의 교육을 아무리 잘 시킨다해도 위에 말씀하신 한계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룹을 믿고 맡기는 것이니 아무튼 봉사자 교육때 잘 참고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훌륭한 봉사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이글을 봉사자들에게 게시해도 되겠죠 수지성서모임 봉사자들에게 전해주고 싶네요.
넵
좋은글 감동깊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