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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冥 先生의 遺跡地 探訪] ♣ 지리산 <산천재(山天齋)>를 찾아서 (2)—☆
2016년 12월 4일 (일요일)
남명 조식 선생 화상(畵像)
* [남명 조식 선생의 생애 — 경(敬)과 의(義)로 선비정신을 실천한 산림처사(山林處士)
☆…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1501년(연산군 7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 경상도 삼가현 토골(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曺彦亨)과 인천 이씨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딸의 3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역시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지만, 과거에는 한두 번 응시하고 이후로 응시하지 않았다.
소년기에 아버지 조언형이 단천군수로 발령되자 따라가 단천에서 지내면서 경전자사(經典子史)와 천문, 지리 , 의방, 수학, 궁마, 진법 등 유교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지식과 재능을 익혔고, 특히 자기의 정신력과 집중력, 담력 등을 스스로 시험하려고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 한다. 또한 좌구명(左丘明), 유종원(柳宗元)의 문장(文章)과 노장(老莊)에 심취하여, 거의 초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 조언형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그 뒤 성수침 형제, 성운, 성혼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여러 책을 다독하던 중 1525년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典)〉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충격을 받고 관직을 단념하게 된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숙부인 조언경이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고 이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는 처가가 있는 김해(金海) 탄동으로 옮겨 18년간 산해정(山海亭)이라는 독서당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김해의 <산해정(山海亭)> [자료사진]
☆… 30대 후반에 "경상좌도에는 퇴계(退溪)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南冥)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덕성 수양,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그는 일생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수행을 하듯 늘 근신하였다. 1539년(중종 33년) 38세에 특별히 초빙되어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그해 6월에 유일한 적장자였던 조차산을 병으로 잃었다.
1545년 인종(仁宗) 즉위 후 다시 조정에서 불렀지만 다만 그는 인종(仁宗)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슬퍼하며 안타까워했다 한다. 명종(明宗) 즉위 후 문정왕후와 그녀의 동생 윤원형과 첩 정난정 등 외척이 어린 왕을 등에 업고 전횡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으나 그때마다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 1548년 전생서 주부(主簿),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였고, 합천 삼가면 집 근처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뇌룡’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에서 따온 말이다. 즉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龍)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는 뜻이다. 1551년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주부(司導寺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뒤에 인종 때와 선조 때에도 사림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나 그는 관직에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그 뒤 선무랑에 제수되었다가 1555년 단성 현감, 1556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역시 고사하였다. 단성현감 직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가「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인데 「단성소(丹城疏)」라고도 불린다.
원래의 <뇌룡정(雷龍亭)> [자료사진]
<뇌룡정(雷龍亭)> 현판과 주련(柱聯) '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 [자료사진]
새로 옮겨지은 <뇌룡정(雷龍亭)> 전경(全景) [자료사진]
새로 옮겨지은 <뇌룡정(雷龍亭)> [자료사진]
* [남명의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 부패한 조정(朝廷)을 질타하다
☆… <뇌룡정(雷龍亭)>에서 강학하던 시절, 남명(55세, 1555년 을묘년)에게 조정에서 산청군 ‘단성현감’ 벼슬을 내렸다. 당시의 조정은 어린 임금 명종(明宗)을 대신해서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외척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던 때였다. 남명(南冥)이 그런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는가? 남명은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사직의 상소문(上疏文)를 썼다. 거기에는 벼슬을 사직의 이유와 함께, 임금과 조정의 무능과 무도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개진했다. 남명의 시퍼런 칼날[筆鋒]이 부패한 조정을 질타했다. ‘목숨’을 내어놓고 쓴 글이었다. 이것이「단성소(丹城疏)」인데, 그 추상같은 상소문의 일부분을 읽어보자.
《南冥集》에 수록된「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抑殿下之國事已非。邦本已亡。天意已去。人心已離。比如大木。百年䖝心。膏液已枯。茫然不知飄風暴雨何時而至者。久矣。在廷之人。非無忠志之臣夙夜之士也。已知其勢極而不可攴。四顧無下手之地
“… 전하의 나랏일이 그릇된 지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전하(殿下)에게서 멀어졌으며, 인심(人心)도 이미 떠나 버렸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에게 파 먹혀 진액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는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의 인물 가운데 충성스럽고 뜻 있는 선비가 없는 것도 아니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나랏일에 힘쓸 선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小官嬉嬉於下。姑酒色是樂。大官泛泛於上。唯貨賂是殖。河魚腹痛。莫肯尸之。而且內臣樹援。龍挐于淵。外臣剝民。狼恣于野。亦不知皮盡而毛無所施也。臣所以長想永息。晝以仰觀天者。數矣。噓唏掩抑。夜以仰看屋者。久矣
아랫자리에선 히히덕거리며 주색을 즐기고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어물거리며 오직 뇌물로 재산만 불리고 있습니다. 물고기의 배가 썩어 가는데도 아무도 치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궁궐 안의 신하는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을 못물에 끌어들이듯 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의 재물을 벗기기를 이리[狼]가 들판에서 날뛰듯 하는데도 가죽이 다 헤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臣)은 이 때문에 낮에는 깊이 생각하고 자주 탄식하면서 하늘을 자주 우러러 보고, 밤에는 흐느끼며 침울해 하면서 천정을 우러러 본지 오래되었습니다.
慈殿塞淵。不過深宮之一寡婦。殿下幼冲。只是先王之一孤嗣。天災之百千。人心之億萬。何以當之。
자전(慈殿, 文定王后)께서는 비록 생각이 깊으시다 하나 깊은 궁중의 일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일개 어린 후사(後嗣)이실 뿐입니다. 그러니 온갖 천재(天災)와 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하략>”
<남명기념관> 마당에 있는「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비(碑)
☆… 이렇게 지엄한 대비[국왕 명종(明宗)의 어머니]를 일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만인지상인 임금을 고아(孤兒)에 지나지 않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무엄하고 신랄한 비판인가. 이 상소문으로 그는 목숨이 위태한 지경에 갔지만 다행히 그를 벌하면 언로가 막힌다는 사림의 지원 덕분에 참형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언로가 자유로운 오늘날에 보더라도 참으로 섬뜩한 ‘돌직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언로가 보장된 정치 제도라 하더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임금까지 비판했으니, 스스로 죽음을 불사한 상소였다. 오히려 뜻있는 선비나 모든 백성들이 상소문에 따른 형벌(刑罰)을 두려워하여 모두 가슴을 졸였다.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不敬)을 범했다"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적극 변호하여 파문은 겨우 가라앉았다.
* [무진봉사(戊辰封事)] — 관료들의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批判)
☆… 명종 22년(1567) 6월 왕이 승하하고 이어 등극한 선조(宣祖)의 세 번에 걸친 부름에도 남명은 ‘구급(救急)’과 ‘군의(君義)’란 두 가르침만 써서 보내며 끝까지 거부하다가 이듬해 5월「무진봉사(戊辰封事)」를 써서 상소했다. ‘봉사(封事)’는 관찰사나 승정원 등 다른 상소문과 달리 중간에서 개봉을 하지 않고 임금에게 직접 전하는 상소문을 말한다.
<남명기념관> 마당에 있는무진봉사(戊辰封事)」비(碑)
☆… 1568년 선조(宣祖)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무진봉사'(戊辰對事)」를 올렸다. 남명의「무진봉사(戊辰封事)」는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이 그 주제다. 남명은 68세(1568년)에 새로운 정치 시대를 열어보려는 선조로부터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이번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1,600여 자에 달하는 긴 문장의 상소문(上疏文)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정치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관리를 선발할 때에 문관은 시와 문장으로 시험을 치렀고, 무관은 활쏘기, 말타기 등으로 뽑았기 때문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하는 관리들은 실무를 제대로 몰랐다. 그리고 인사 이동이 심해서, 관리들은 일을 파악할 수 없어 모든 행정이 저절로 아전[胥吏]들 손아귀에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소문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하게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남명(南冥)의 이와 같은 정신은 제자들에게로 이어져 남명이 죽은 지 20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제자들은 구국의 선봉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영남의 3대 의병장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송암(松庵) 김면(金沔)을 포함한 의병장급 인물이 무려 50여명이 넘었다. 한 사람의 정신적 유산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수신(修身)하면 치국(治國)의 길로 향하는 것이 당연지사로 여겼던 시대에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늘 자신을 경책(警責)하고 후학들을 기르는데 힘썼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는, ‘할 말’은 언제 어디서나 기꺼이 하는 선비의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 [민암부(民巖賦)] — ‘물이 사나우면 배를 전복시킬 수 있다’
☆… 임금과의 독대나「무진봉사(戊辰封事)」와 같은 상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백성을 위한 정치에는 관심이 없자, 남명은 임금과 벼슬아치를 넌지시 깨우쳐 주기 위해 다시「민암부(民巖賦)」라는 글을 지었다. 이 글은 백성은 물, 임금은 배에 비유하여 물이 사나우면 배를 전복시킬 수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현실 정치의 모순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민에게서 찾고 있어 남명의 대민의식을 잘 보여 주는 글이다. 맹자(孟子)의 ‘혁명론’과 그 궤(軌)를 같이한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남명의 민에 대한 인식이 조선조 초기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민본사상과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삼봉의 민본사상이 고려 말 부패 타락한 관료 지배층의 학정 밑에서 신음하던 백성의 처지를 동정하고,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기 위한 현실적인 개혁의지에서 출발해 혁명사상까지 연결되었다면 민을 기반으로 한 척신세력이나 부패관리를 추방하려고 한 사림세력의 개혁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민암(民巖)이라는 말은『書經』의 ‘고외우민암’(顧畏于民巖, 백성들의 암험함을 돌아보고 두려워하라)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본문에 등장하는 ‘戴君’(대군)과 ‘覆國’(복국)은『순자(荀子)』「왕제(王制)」에 나오는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의 비유와 흡사하며, ‘天視廳之在此’는『孟子』「만장」장에 나오는 ‘天視自我民視 天廳自我民廳’에 근거하고 있다. 남명은 백성의 힘을 중시한 각종 경전을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남명은 배를 뒤엎을 수 있는 민의 암(巖)이 생기는 원인은 당시의 현실에서 찾았다. 그는 궁실의 광대함, 여알(女謁)의 성행, 과중한 세금, 도가 넘는 사치, 가렴주구의 성행, 형벌의 자행 등 6가지를 문제로 지적하고 수습을 위해서는 군덕(君德)이 가장 중요함을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덕치가 행해지면 백성은 결코 국가운영에 부담이 되지 않는 존재임을 강조했다.
* [생애(生涯)의 마지막] — 산림처사 남명에 대한 선조(宣祖)의 극진한 예우(禮遇)
☆…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다. 1571년(선조 5년) 선조가 그에게 특별히 식물(食物)과 전답을 하사하자 그는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1월에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남명에게 병(病)이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특별히 전의(典醫)를 파견하였지만, 전의가 도착하기 전에 남명은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고, 경의(敬義)에 관계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다고 한다. 음력 2월 8일에 남명은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宣祖)는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그의 나이 만 70세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회를 파하고, 바로 예장을 명하고 부의를 내렸다. 지금 <산천재> 입구에 ‘남명에게 올리는 선조대왕의 제문’을 비석에 새겨 놓았다. 증직으로 통정대부 사간원(司諫院) 대사간에 추증되었다. 후에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남명(南冥)이 여생을 보내고 생애를 마친 <산천재> 외경(外景)
* [남명의 학문관(學問觀)] — 실천궁행(實踐躬行)
☆… 만년(61세)에 남명(南冥)은 이곳 지리산 <산천재>에 들어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의 학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해야 된다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의 뜻을 펴는 것이었다.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과 실천’에 대한 강조는 후일 북인학파와 남인실학파들이 실천, 실용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등과 같은 관료학자,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퇴계와 기대승 등과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理)와 기(氣)에 대한 ‘이기논쟁(理氣論爭)’을 모두 공리공담으로 치부했다. 그의 학맥은 북인에게 계승되었으나, 북인은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의 이괄(李适)의 난 때 모두 숙청당하고 만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 중 김우옹과 한강 정구는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고, 한강 정구의 제자들은 북인과 남인에 모두 진출하여, 그의 학문은 부분적으로 남인을 통해 조선후기까지 계승되었다.
남명(南冥)의 저서로는 1604년(선조 37)에 처음 간행된 ≪남명집 南冥集≫과 ≪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신명사도 神明舍圖≫·≪파한잡기 破閑雜記≫가 있으며, 문학작품으로 <남명가 南冥歌>, <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 등이 전한다.
*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남명학] —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적 인식
☆… 남명(南冥)이 말하는 실천에는 물론《소학(小學)》과《가례(家禮)》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예의 실천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유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대학(大學)》의 학문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면이 강하다. 즉 유학자는 고답적인 이론에 매몰되어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실학적 학문관이다. 이는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던 공자 이래로 유학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견해이기는 하지만,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문제의식의 핵심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명 조식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실천적 학풍과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현실을 중시하는 학풍을 이어주는 사상사적 고리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남명은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 [남명의 경의학(敬義學)] — “內明者敬 外斷者義”
☆… 남명(南冥)은 부패한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의 처사로 지내면서, 내면의 수양을 뜻하는 ‘경(敬)’과 도의 적극적인 표출을 의미하는 ‘의(義)’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의학(敬義學)’을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다. 퇴계(退溪)가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의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반면, 남명(南冥)은 이론 논쟁을 비판하면서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노장(老莊) 사상 등 이단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였던 그는, 조선 시대 내내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와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노자와 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몇 안 되는 학자 중의 한사람이다.
남명(南冥)은 ‘경(敬)과 의(義)’를 학문과 수양의 신조(信條)로 삼았다. <산천재(山天齋)>의 왼쪽 창문에 ‘敬’ 자를, 오른쪽 창문에 ‘義’ 자를 써 붙이고, 또한 경(敬)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의(義)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녔는데 그 칼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義)다)라는 글귀를 새겼다. 남명(南冥)의 경의검(敬義劍)에 적은 글귀는 주역(周易) 곤괘(坤卦)의 육이(六二) 효사(爻辭)의 문언(文言)에 나오는 ‘敬以直內, 義以方外’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는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언행을 방정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남명에게 있어 ‘경(敬)’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수양하는 것이라면, ‘의(義)’는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실천을 이룩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그는 얕은 지식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는 것보다, 깊은 학문탐구와 사유로 흔들림이 없는 단단한 인격을 완성하고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직설(直說)을 하여 정의를 세우고 민본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 [남명에 대한 후대의 평가] — “기개(氣槪)와 절조(節操)”
☆… 18세기의 실학자 이익(李瀷)은 저서《성호사설(星湖僿說)》에 따로 <남명선생문>이란 항목을 두고 “내 글은 비단을 짜서 한 필을 이루지 못한 것이고, 퇴계의 글은 포목을 짜서 한 필을 이룬 것.”이라는 남명의 말을 인용하였다. <남명선생시>라는 항목에서는 “천 석 무게의 종을 보라.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어떻게 하면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거나?”(「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라는 부분을 인용하여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부여하며 그의 우뚝 솟은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다음은 성호 이익의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에 대한 평설이다.
“퇴계(退溪)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유학자의 종주(宗主)가 되셨는데, 그 계통의 인물들은 깊이가 있고 빛을 발하여 예가 있고 겸손하였으며 문학은 찬란하여 수사의 유풍을 방불케 했다. 남명(南冥)은 지리산 밑에서 태어나 우리나라에서 기개(氣槪)와 절조(節操)로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셨으니, 그 후계는 정신이 강하고 실천에 용감하였으며 의(義)를 숭상하고 목숨을 가볍게 여겨 이익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않았고, 위험에 처하여 뜻을 굽히지 않는 독립적인 지조(志操)를 지녔으니, 이는 상도(上道)와 하도(下道)의 다른 점이다.” — 《星湖僿說》권지1,「天地文」'백두정간'
☆… 남명(南冥)은 또한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참다운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또한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대체로 조식 및 남명학파에 대한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 남명이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은신한 것에 대해, 유홍준(兪弘濬)은 ‘남명의 이러한 복거(卜居)와 불출사(不出士)는 결코 죽림칠현 같은 은일자의 모습도 아니고 공자의 제자 안회와 같은 고고함의 경지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세상을 외면해버린 은둔자가 아니었다. 그가 세상에 나아가지 않음은 시세(時勢)가 발이나 씻고 있음이 낫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평하였다.
*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 조선중기 영남학파의 두 거봉(巨峰)
☆… 1501년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태어난 해에 경상좌도(慶尙左道) 예안현(안동) 온계리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태어났다. 이후, 퇴계(退溪)는 70세, 남명(南冥)은 72세까지 장수를 했다. 두 사람은 16세기 조선 중기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다. 퇴계(退溪)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南冥)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인데,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東人) 정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동인 정파는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분립된다.
퇴계(退溪)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고, 남명(南冥)은 1539년 39세로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遺逸)로 인정받아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당연히 치인(治人)의 단계로 가서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이었다. 당시 퇴계는 처음에는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남명(南冥)은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선비가 굳이 조정의 관료가 되어야만 국가를 위하여 일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명은 유학(儒學)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골똘히 공부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경계(警戒)하며 후학을 가르치는데 진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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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레알 산천재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성성자''경의검'이 진리를 향한 깨달음, 실천궁행에 대한 남명 정신을 표시 하는 것 같습니다. 후세에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