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기원 박사의 周·人·工 四書三經] *—<제87강> (2017.11.27)
— <周·人·工 四書三經>은 ‘周易과 人性을 工夫하는 四書三經 강좌’를 말한다 —
코드주역(周易) (제15강) — [2]
———————————————————————————————
<오늘의 공부> ; 코드 주역 ; [24] 地雷復 [25] 天雷无妄
오늘의 주역(周易) 읽기 ② ☞ [25] 천뢰 무망(天雷无妄)
* [25] 无妄卦(무망괘) [天雷 无妄] *
무망괘(无妄卦)의 상괘는 건괘(乾卦, ☰)이고 하괘는 진괘(震卦, ☳)이다. 상괘인 건괘는 양(陽)들의 집단이라 건실하지만, 하괘인 진괘는 지각변동(地殼變動)이 일어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괘의 변화의 초점은 초구(初九)이다.
초구(初九)는 자기가 속해 있는 하층부의 빈약한 음(陰)들은 쇄신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안목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양(陽)의 집단인 상층부는 강력하고 충실하다. 만일 초구(初九)가 상층부의 실력을 간과하고 대변혁을 도모하려 하면 경거망동(輕擧妄動)이 되고 만다. 초구(初九)는 자기 나름의 망동을 하지 말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며, 상층부의 호흡을 맞추어 오직 하층부의 침체된 국면만 쇄신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 괘의 이름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의미로 ‘무망(无妄)’이라 했다.
『역전』에서 말했다. “무망(无妄) 괘는 <서괘전(序卦傳)>에 ‘돌아오면 망령되지 않으므로 无妄卦로 받았다.’ 하였다. 復은 道로 돌아옴이니, 이미 道로 돌아오면 正理에 합하여 无妄이 된다. 그러므로 復卦의 뒤에 无妄卦로 받은 것이다. 괘의 됨이 乾이 위에 있고 震이 아래에 있다. 震은 動함이니, 動하기를 天道로써 하면 无妄이 되고 동하기를 人慾으로써 하면 妄이 되니, 无妄의 뜻이 크다”
[傳] 无妄은 序卦에 復則不妄矣라 故受之以无妄이라하니라 復者는 反於道也니 旣復於道면 則合正理而无妄이라 故復之後에 受之以无妄野라 爲卦 乾上震下하니 震은 動也라 動以天은 爲无妄이요 動以人欲則妄矣니 无妄之義大矣哉라
*—— [천뢰무망(天雷 无妄)의 괘사(卦辭)] ——*
无妄, 元亨, 利貞, 其匪正有眚, 不利有攸往. |
[25无妄]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아야 하는 형국이다. 크고 밝은 마음으로, 바르게 하는 것이 이롭다. 그 바른 것이 아니면 재앙이 생긴다. 가는 바가 있으면 이롭지 않다.
· ‘其匪正有眚’에서 ‘匪’(비)는 ‘非’와 통용된다. ‘眚’(생)은 ‘재앙(災殃), 천벌’의 뜻이다.
· ‘不利有攸往’(불리유유왕)에서 ‘往’은 ‘有爲’ 즉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작위적(作爲的)으로 행동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 다시 말하면 ‘무위(無爲)’의 삶, ‘차분하게 지켜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 [강 설(講說)] ———
『주역강설』에서 말했다. “무망괘(无妄卦)는 하층부가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몹시 어지럽다. 혼란기의 삶의 방식은 상황에 알맞게 대처하는 시중(時中)이어야 한다. 그래서 ‘크고 밝은 마음으로 바르게 하는 것이 이롭다’다고 했다. 시중은 뿌리 깊은 사상이 있어야 가능하다.『노자(老子)』제8장에서 말한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시중(時中)의 지극한 덕이다. 물은 자기의 모양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그릇에 맞게 자유자재로 대응한다. 그런데 혼란한 틈을 타서 얄팍하게 사욕(私慾)을 채우기 위해 임기응변하는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기회주의자가 되면 결국 패망(敗亡)하고 만다. 그러므로 혼란한 때일수록 바르게 판단하고 매사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래서 ‘그 바른 것이 아니면 재앙(災殃)이 생긴다. 가는 바가 있으면 이롭지 않다.’고 했다.”
☞ [주역(周易)의 삶] — 무망괘(无妄卦)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① 매사에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 ← [无妄]
② 어려운 상황일수록 크고 밝은 마음으로 하라. ← [元亨]
③ 바르게 하지 않으면 재앙이 따른다. ← [其匪正有眚]
④ 일부러 새로운 일을 벌이려 하지 말라. ← [不利有攸往]
*—— [천뢰무망(天雷 无妄)의 단전(彖傳)] ——* 단전을 괘사에 대한 공자의 설명이다.
[25无妄] 彖曰, 无妄, 剛自外來而爲主於內,
動而健, 剛中而應, 大亨以正, 天之命也.
其匪正有眚, 不利有攸往, 无妄之往, 何之矣?
天命不祐, 行矣哉!
단(彖)에서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강한 것이 밖으로부터 와서 안에서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움직이고 강건하며, 굳센 것이 중앙에 있으면서 응하기 때문에, 바른 마음으로 크게 떨쳐 일어나야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늘의 명(命)이다.
그 바른 것이 아니면 재앙이 생기고 가는 바가 있으면 이롭지 않다는 것은, 경거망동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서 간다면 어디로 가겠으며,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행할 수 있겠는가?”
· ‘大亨以正’에서 ‘以’은 '以A爲B'의 문형이다. 여기선 도치되었다. 원래는 ‘以正爲大亨’이다.
여기에서 ‘大’는 괘사의 ‘元’을 설명한 말이고 ‘바르게 한다[正]’는 것은 굳세게 해야 할 때 굳세게 하고 부드럽게 해야 할 때는 부드럽게 하는, 즉 ‘시중(時中)’을 말하는 것이다.
· ‘何之矣’에서 ‘何’는 ‘之’의 목적어이므로 원래는 ‘之何’인데 의문사 선행으로 도치되었다.
* [강 설(講說)] ———
강(剛)은 상층부의 건괘(乾卦, ☰)를 말한다. 상괘는 밖이고 하괘는 안이다. ‘강한 것이 밖으로부터 와서 안에서 주인이 된다’는 것은 하층부의 모든 일을 상괘인 건괘(乾卦)가 관장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괘[☳]는 행동력이 있고 상괘[☰]는 강건하며 구오(九五)의 굳센 양이 가운데 위치하여 하괘의 일에 호응해 주기 때문에, 하괘는 크고 밝은 마음으로 하되 오직 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체의 입장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하늘의 작용이므로, 상괘와 한마음이 되어 상황에 맞게 크고 밝은 마음으로 일어나는 것은 하늘의 명(命)이다.
하늘은 전체를, 명(命)은 그 작용을 의미한다. 경거망동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서 경거망동을 하면 전체의 조화를 잃기 때문에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했다. 윗사람을 무시하고 아랫사람이 경거망동하면 윗사람이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면 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행할 수 있겠는가?’ 했다.
*—— [천뢰무망(天雷 无妄)의 상전(象傳)] ——*
[25无妄] 象曰, 天下雷行, 物與无妄, 先王以茂對時 育萬物.
상(象)에서 말했다. “하늘 아래에 우레가 치니 만물이 아울러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선왕이 이 괘의 이치를 살펴 무성하게 상황에 맞게 대처하여 만물을 기른다.”
· ‘先王以茂對時’에서 ‘時’는 ‘상황’, 이때의 ‘時’는 시간적·공간적 상황을 말한다.
· ‘茂對時’에서 ‘茂’(무)는 ‘하늘과 같이 무성한 마음’이니, ‘하늘 같이 정성스러운 마음’을 말한다. ‘對時’는 ‘때를 기다려 상황에 맞게 하는 것’이므로 ‘하늘같은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때에 맞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수신(修身)하면서 순천(順天)하는 것이다.
· ‘茂對時’에서 ‘茂’의 주역 코드는 乾卦[☰]이고, ‘育萬物’에서 ‘育’의 주역 코드는 震卦[☳]이다.
* [강 설(講說)] ———
경거망동(輕擧妄動)을 하지 않아야 하는 무망괘(无妄卦)의 이치를 안다면, 근시안적으로 안목(眼目)으로 상황을 쇄신하려고 덤비지 말고 전체적 상황을 잘 판단하여 행하면 적절하게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은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조화(調和)를 이루어 대처하는 것은 만물의 삶을 기르는 것이다.
『역전』에서 말했다. “우레가 하늘 아래에 행해서 陰陽이 서로 和하여 서로 부딪쳐 소리를 이루니, 이에 숨고 감춰져 있는 것들을 놀라게 하고 싹을 振動시켜 만물을 發生해서 부여하는 바가, 크고 작은 것과 높고 낮은 것이 각기 性命을 얻어 어그러지고 망령됨이 없으니, 이는 물건마다 无妄을 준 것이다. 先王은 하늘 아래에 우레가 행하여 발생하고 부여하는 象을 관찰하여 天時에 盛大하게 합하여 만물을 養育해서 각기 마땅함을 얻게 하니, 마치 하늘이 无妄을 주는 것과 같다. 茂는 盛함이니, ‘茂對’라는 말은 盛行·永言이라 따위와 같은 것이다. ‘對時’는 天時에 순하게 合함을 말한다. 하늘[天道]이 만물을 낳아 각기 그 性命을 바르게 하여 망령되지 않으니, 王者가 하늘의 道를 體行하여 人民을 養育해서 昆蟲과 草木에 이르기까지 각기 마땅함을 얻게 함은 바로 天時에 합하여 만물을 기르는 道이다.”
[傳] 雷行於天下하여 陰陽交和하여 相薄而成聲하니 於是에 驚蟄藏하고 振萌芽하여 發生萬物하여 其所附與 洪纖高下가 各正其性命하여 无有差妄하니 物與无妄야라 先王觀天下雷行發生附與之象하여 而以茂對天時하여 養育萬物하여 使各得其宜하니 如天與之无妄也라. 茂는 盛也니 茂對之爲言은 猶盛行永言之比라 對時는 謂順合天時라 天道生萬物하여 各正其性命而不妄하니 王者體天之道하여 養育人民하여 以至昆蟲草木히 使各得其宜는 乃對時育物之道야라
*—— [천뢰무망(天雷 无妄)의 효사(爻辭)] ——*
‘九五, 无妄之疾, 勿藥有喜.’ ‘九五, 无妄之疾, 勿藥有喜.’ ‘九四, 可貞, 无咎.’ ‘六三, 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 ‘六二, 不耕穫, 不菑畬, 則利有攸往.’ ‘初九, 无妄, 往吉.’ |
* [무망괘(无妄卦) 초구의 효사] ————
[25无妄] 初九, 无妄, 往吉.
象曰, “无妄之往” 得志也.
초구(初九)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가면 길하다. 상에서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행동하는 것은 뜻을 얻는다.”
* [강 설(講說)] ———
초구(初九)는 무망(无妄)의 상황에서 하늘과 같은 마음을 지닌 순수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아가면 길하다. 초구는 양(陽)의 자리에 양(陽)이 와서 정(正)의 지위에 있으니 굳세게 하면 앞길이 열린다. 상(象)에서도 말하기를 무망의 상황에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뜻을 얻기 때문이라고 했다. 뜻은 일을 추진하는 힘을 말한다.『중용(中庸)』에서 뜻을 기르는 방법을 ‘성(誠)’이라고 했다.
‘지성무식(至誠無息)’이 그것이다. “성(誠)은 하늘의 도(道)이고, 성(誠)을 실천하는 것은 사람의 도(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고 했다. 지극하게 정성스러운 것[至誠]은, 삶을 유도해 가는 근본적인 의지(意志)인 성(性)이 그대로 발현된 것이므로, 이때에는 삶이 가장 충실해진다. 사람 중에 성(誠)을 실천하는 사람은 성(性)에 따라서 온전하게 사는 자인데, 이가 곧 성인군자이다. 따라서 성인(聖人)은 하늘의 작용을 실현하는 사람이다. 성인은 무심히 성(誠)을 실천하기만 해도 저절로 최선의 도리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극히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 ‘博學之하고 審問之하며 愼思之하고 明辨之하며 篤行之하라’고『중용(中庸)』(제20장)에서 말했다. 그 지극히 정성스러움이 쉼이 없으므로[至誠無息] 생명은 영원히 보존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천지와 만물은 유구하게 이루어지는 것[無爲而成]이다. 그래서 자연(自然)이다.
『주역강설』에서 말했다. “초구(初九)는 굳센 성격을 지닌 유능한 존재이다. 음들의 침체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지각변동을 일으키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안목이다. 상층부가 건실하고 능력이 있다.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상층부와 화합하여 하층부의 침체한 부분만 쇄신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안목에서 바른 판단이 필요하다.”
『역전』에서 말했다. “초구(初九)는 剛陽으로 안[下卦]에서 주체가 되었으니 无妄의 象이요, 剛實로 柔弱한 것을 변화시켜 안에 거하였으니 中心이 성실하여 妄靈되지 않는 자이다. 无妄으로 가면 어느 곳인들 吉하지 않겠는가. 卦辭에서 ‘가는 바가 있으면 이롭지 않다’는 것은 이미 无妄이면 다시 가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니, 지나치면 妄動을 말한 것이요, 爻辭에서 ‘가는 것이 길하다’고 말한 것은 无妄의 道로 가면 吉함을 말한 것이다.
[傳] 九以剛陽으로 爲主於內하니 无妄之象이요 以剛實變柔而居內하니 中誠不妄者也라 以无妄而往이면 何所不吉이리오 卦辭에 言不利有攸往은 爲旣无妄이면 不可復有往也나 過則妄矣요 爻言往吉은 謂以无妄之道而行則吉也라
* [무망괘(无妄卦) 육이의 효사] ————
[25无妄] 六二, 不耕穫, 不菑畬, 則利有攸往.
象曰, “不耕穫” 未富也.
육이(六二)는 밭 갈지 않아도 수확을 하며 개간하지 않더라도 밭은 얻는다. 가는 바가 있으면 이롭다. 상에서 말했다. “밭 갈지 않더라도 수확하는 것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不菑畬’(불치여)에서 ‘菑’(치)는 ‘묵정밭’, 여기에서는 동사 ‘(황무지를) 일구다, 개간하다’의 뜻이다. ‘畬’(여)는 ‘새로 일군 밭’이다.
· ‘利有攸往’에서 ‘往’은 ‘천명에 순응하여 무위(無爲)함’을 말하는 것이다.
* [강 설(講說)] ———
육이六二)는 중정(中正)의 덕(德)을 지니고 있는 능력자이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얻는 바가 있다. 그래서 ‘밭 갈지 않아도 수확을 하며 개간하지 않더라도 밭은 얻는다’고 한 것이다.
『주역강설』에서 말했다. “육이六二)는 하층부의 중심적인 존재이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초구(初九)가 시도하는 변화가 엄청나다. 초구(初九)의 일을 저지하지 않고 잘 이끌어주면 초구(初九)로 말미암아 자기도 이득을 본다. 예컨대 초구의 젊은 사원들이 급여인상 투재을 하여 성공을 하면, 육이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급여가 올라간다. 그래서 ‘밭 갈지 않아도 수확하며 개간하지 않더라도 밭은 얻는다’고 한 것이다.”
“육이(六二)는 하층부의 주도권을 가진 기득권자이다. 초구(初九)가 하는 일에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여 거부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군자의 태도가 아니다. 전체의 흐름을 따르는 군자는 초구(初九)와 호흡을 맞추어 개혁을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가는 바가 있으면 이롭다’고 했다. 가야 할 때는 가고 가지 말아야 할 때는 가지 않는 것이 시중(時中)이다. 초구(初九)의 힘을 통해서 얻는 육이(六二)의 이득(利得)은 그렇게 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밭 갈지 않더라도 수확하는 것은 아직 넉넉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정이천의『역전』에서 말했다. “무릇 理致에 마땅한 것은 妄이 아니요, 사람이 (억지로) 하고자 하는 것이 妄이다. 그러므로 ‘耕穫’(경확)과 ‘菑畬’(치여)로 비유하였다. 六二는 中에 거하고 正을 얻었으며, 또 九五의 中正과 應하며, 動體[☳]에 거하여 柔順[陰爻]하니, 動함에 中正을 순히 함이 되니, 바로 无妄인 것이다. 그러므로 无妄의 뜻을 지극히 말한 것이다.”
“‘밭이 1년 된 것’을 ‘菑’(치)라 하고 ‘3년 된 밭’을 ‘畬’(여)라 한다. ‘밭 갈지 않고서도 수확하고 1년 된 밭을 만들지 않고서도 3년 된 밭이 된다’는 것은 앞장서 일을 만들지 않고 事理의 當然한 바를 따르는 것을 말한 것이다. 앞장서서 일을 만든다면 이는 人心으로 作爲한 것이므로 바로 妄이요, 일의 당연한 바를 따른다면 이는 理致와 사물에 순응하는 것이므로 妄이 아니니, ‘穫’(확)와 ‘畬’(여)가 이것이다.
[傳] 凡理之所然者는 非妄也요 人所欲爲者 乃妄也라 故以耕穫菑畬譬之라 六二居中得正하고 又應五之中正하며 居動體而柔順하니 爲動能順乎中正이니 乃无妄者也라 故極言无妄之矣라 耕은 農之始오 穫은 旣成終也라 田一歲曰菑요 三歲曰畬라 不耕而穫하고 不菑而畬는 謂不首造其事하고 因其事理所當然也라 首造其事면 則是人心所作爲니 乃妄也라 因事之當然이면 則是順理應物이니 非妄也니 穫與畬是也라
* [무망괘(无妄卦) 육삼의 효사] ————
[25无妄] 六三, 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
象曰, 行人得牛, 邑人災也.
육삼(六三)은 무망의 상황에서의 재앙이다. 혹 소를 매어 놓았는데 행인이 가지고 가게 된다. 읍인이 재앙을 당한다. 상에서 말했다. “행인이 소를 얻는(가져가는) 것은 읍인이 재앙을 당하는 것이다.”
· ‘或繫之牛’에서 ‘或’(혹)은 ‘혹자’ 또는 ‘어떤 경우’의 뜻. ‘繫’(계)는 ‘묶다, 묶어놓다’의 뜻. 여기에서 ‘之’은 앞의 ‘繫’가 뒤의 ‘牛’를 수식하는 어조사이다.
· ‘邑人之災’에서 ‘邑’은 자기의 관할 아래에 있는 고을이므로 ‘邑人’은 ‘자기의 집안’이다. · · ‘行人之得, 邑人之災’의 앞의 ‘之’는 모두 우리말 주격조사의 역할을 하는 어조사이다.
* [강 설(講說)] ———
육삼(六三)은 자리가 중(中)도 아니요 정(正)도 아니며, 하괘(下卦)의 극(極)에 있고 상구(上九)와 짝이지만 상구(上九) 또한 부중(不中)·부정(不正)이므로 바르게 하기가 어렵다. 스스로 중심(中心)을 잡지 못하므로 망령(妄靈)된 자이다. 그래서 육삼(六三)은 무망의 상황에서도 재앙(災殃)을 당한다. ‘소를 묶어놓았는데 행인이 가져가 읍인이 재앙을 얻는다’는 것은 그러한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소’의 주역 코드는 손괘(巽卦, ☴)이다. 소는 성격상 순할 뿐만 아니라, 소의 등짝이나 몸통은 굳세지만 다리는 왜소한 것이 손(巽)의 괘상[☴]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주역강설』에서 말했다. “육삼(六三)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소외당하기 쉬운 위치이다. 그래서 불만이 많고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초구(初九)가 나타나 변화를 주도한다. 그로 인해 가까운 육이(六二)는 이득을 보지만 육삼(六三)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육삼(六三)은 재앙으로 여기고 불만을 가지고 반항을 한다면 그것은 경거망동이다. 육삼(六三)의 경거망동은 용서받기 어렵다. 큰 손해를 보게 된다. … 옛날 농경시대에는 가정에서 가장 귀한 재산이 소다. ‘소를 잃는다’는 것은 큰 손해를 보는 것이다. 육삼(六三)이 경거망동을 하면 혹 소를 매어 놓아도 남이 몰고 가버려 큰 손해를 당하고, 그 때문에 온 집안이 어렵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삼은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역전』에서 말했다. “육삼(六三)은 柔弱한 陰으로서 中正하지 못하니 이는 妄靈된 짓을 하는 자이며, 또 뜻이 上九와 應함을 하고자 하니 이 또한 妄이니 无妄의 道에 있어서 災殃이 된다. 사람이 妄動함은 慾心이 있기 때문이다. 망동하여 얻게 되면 또한 반드시 잃게 되니, 비록 가령 이로운 바를 얻더라도 그 動함이 망령되었다면 잃음이 이미 클 것인데 하물며 다시 흉함과 뉘우침이 뒤따름에 있어서랴. 지혜로운 자는 妄靈되이 얻음을 보면 그 잃음이 반드시 상응함을 안다. 그러므로 聖人이 六三에 망령된 象이 있음으로 인하여 그 이치를 밝혀서 말씀하기를 ‘无妄의 災殃이니 혹 소를 매어 놓았으나 행인이 가져가는 것이 읍인의 재앙이다’하고 하였으니, 六三처럼 망령된 짓을 함은 무망의 재해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傳] 三以陰柔而不中正하니 是爲妄者也요 又志於上은 欲也니 亦妄也나 在无妄之道에 爲災害也라 人之妄動은 由有欲也라 妄動而得이면 亦必有失하니 雖使得其所利라도 其動而妄이면 失已大矣요 況復凶悔隨之乎아 知者見妄之得이면 則知其失必與稱也라 故聖人이 因六三有妄之象而發明其理하여 云无妄之災니 或繫之牛하나 行人之得이 邑人之災라하시니 言如三之爲妄은 乃无妄之災害也라
* [무망괘(无妄卦) 구사(九四)의 효사] ————
[25无妄] 九四, 可貞, 无咎.
象曰, “可貞无咎”, 固有之也.
구사(九四)는 바르게 참고 있어야 허물이 없다. 상(象)에서 말했다. “바르게 참고 있어야 허물이 없는 것은 본래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강 설(講說)] ———
구사(九四)는 상괘의 시작이다. 비록 부중(不中)·부정(不正)이나 괘체가 건괘(乾卦)이므로 가히 바르게 할 수 있다. 구사는 그 자리가 음(陰)의 자리이므로 그 바탕이 부드러운 음이다. 구사(九四)는 짝[初九]도 양(陽)이요, 이웃[九五]도 양(陽)이다. 구사는 그 부드러운 자질을 십분 발휘하여 그들과 조응하여 무망(无妄)의 상황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래서 허물이 없다고 한 것이다. 주역(周易)에서 ‘바르게 한다’는 것은 도덕적인 가치 개념은 물론 ‘그 상황에 맞게 하는 것[時中]’을 말한다. 즉 굳세게 해야 할 상황이면 굳세게 하고, 부드럽게 해야 할 상황이면 부드럽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象)에서 ‘본래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드러운 음(陰)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주역강설』에서 말했다. “구사(九四)는 하층부를 지휘해야 하는 자리다. 실력 있는 상층부의 입장에서 보면, 초구(初九)가 도모하는 개혁은 경거망동으로 보일 뿐 아니라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초구(初九)의 요구는 경솔한 것이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발전을 위한 몸부림이다. 개혁을 요구하는 행동을 나쁘게 생각하여 엄단하면 그들의 의욕을 꺾는 결과가 되어 좋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을 너무 저지하지 말고 어느 정도 참고 바르게 해야 한다. 그래서 ‘바르게 참고 있어야 허물이 없다’고 했다. 하층부의 움직임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므로 ‘본래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본래 가지고 있다는 말은 ‘진실성을 본래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역전』에서 말했다. “구사(九四)는 剛陽으로 乾體에 거하고 다시 應與가 없으니, 无妄한 자이다. 굳세고 사사로움이 없으면 어찌 妄靈됨이 있겠는가. 바르고 굳세게 이를 지킬 수 있으니, 이는 스스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傳] 四剛陽而居乾體하고 復无應與하니 无妄者也라 剛而無私면 豈有妄乎아 可貞固守此하니 自无咎也라.
*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의 효사] ————
[25无妄] 九五, 无妄之疾, 勿藥有喜.
象曰, “无妄之藥” 不可試也.
구오(九五)는 무망의 병은 약을 쓰지 않으면 기쁜 일도 있으리라. 상(象)에서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질병의 약은 써서 안 되는 것이다.”
· ‘不可試也’에서 ‘試’(시)는 원래 ‘시험하다’. 여기서는 ‘약을 시험하다, (약을) 쓰다’
* [강 설(講說)] ———
구오(九五)는 전체의 리더이다. 그 위상과 자질이 중정(中正)하고 짝인 육이(六二)와도 정응의 관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리더로서 ‘걱정’을 하는 병통이 있다. 이런 경우 섣불리 인위적으로 약(藥)을 쓸 필요가 없다. 군자의 병통은 자신을 위한 걱정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병통이다. 예컨대『논어(論語)』<헌문편(憲問篇)>(제45장)에 나오는 요·순(堯舜)의 병통이 그런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경(敬)으로 수양하고 세상 사람들을 편안하게 한다”고 하셨다.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14-45-01 子路問君子 子曰 修己以敬 曰如斯而已乎
曰修己以安人 曰如斯而已乎
曰修己以安百姓 修己以安百姓 堯舜 其猶病諸
자로(子路)가 군자(君子)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孔子)께서 대답하셨다. “자기를 닦기를 경(敬)으로써 한다.” “이와 같은 것뿐입니까?” “자기를 수양함으로써 남을 편안하게 한다.” “이와 같은 것뿐입니까?” “자기를 수양함으로써 남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니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요순(堯舜)도 오히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군자(君子)란 자기를 닦아 본마음을 되찾는 사람을 말한다. 본마음은 욕심 때문에 상실되므로 욕심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을 경건(敬虔)하게 가짐으로써 되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갈등과 집착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화락하도록 한다. 요·순 임금도 이를 위해 평생 진력하신 분들이다.
『주역강설』에서 말했다. “구오(九五)는 전체를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하는 위치이다. 전체의 상황에서 보면 하층부의 변혁을 시도하고 있는 초구(초九)의 행동은 골칫거리처럼 보인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층부에서 보면 그것은 필요 없는 경거망동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 따로 특별한 조치를 할 필요가 없다. 가만히 두면 저절로 해결이 된다. 따라서 가만히 놓아두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로 ‘약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역전』에서 말했다. “구오(九五)가 中正으로 尊位에 있고 아래의 六二가 中正으로 順應하니 无妄함이 지극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 道가 이보다 더할 수 없다. … 구오(九五)의 无妄으로 만약 病이 있으면 藥돌로 氣를 다스려 제거하여 精氣를 길러야 하거니와. 만약 氣體가 화평하여 본래 질병이 없는데 (약돌로) 다스린다면 도리어 精氣를 해치게 된다. 그리하려 약을 쓰지 않으면 기쁜 일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데 병이 있으면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낫는다.“
[傳] 九中正當尊位하고 下復以中正順應之하니 可謂无妄之至者也니 其道无以可矣라 疾은 爲之病者也요 以九五之无妄으로 如其有疾인댄 勿以藥治則有喜也라 人之有疾이면 則以藥石攻去其事하여 以養其正이어니와 若氣體平和하여 本无疾病而攻治之면 則反害其正矣라 故勿藥則有喜也라
* [무망괘(无妄卦) 상구(上九)의 효사] ————
[25无妄] 上九, 无妄, 行有眚, 无攸利.
象曰, 无妄之行, 窮之災也.
상구(上九)는 경거망동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서 가면 재앙[眚]이 생겨 이로울 바가 없다. 상(象)에서 말했다. “경거망동으로 행하는 것은 궁해서 재앙이 생기는 것이다.”
* [강 설(講說)] ———
상구(上九)는 부중(불중) 부정(不正)의 자질로 괘의 마지막에 거하여 무망(无妄)이 지극한 자이다. 다시 더 나아가면 바로 망(妄)이 되니 이제 은퇴하는 원로의 입장에서 되도록이면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좋다. 스스로 훌륭한 인품(人品)을 갖추고 있으면서 무망(无妄)의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좋다. ‘그분이 계시는 구나!’하는 믿음만 주면 된다. 노자(老子)가 말한 “가장 좋은 것은 그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太上 下知有之)”가 바로 그것이다.
『역전』에서 말했다. “상구(上九)는 괘의 마지막에 거하였으니, 무망(无妄)이 지극한 자이다. 지극한데 다시 가면 이치(理致)에 지나치니, 이치에 지나치면 망(妄)이 된다. 그러므로 상구(上九)가 가면 허물이 있어 이로운 바가 없는 것이다.(上九居卦之終 无妄之極者也 極而復行 過於理也 過於理則妄也 故上九而行 則 有過眚而无所利也)” 주자의『본의(本義)』에 이르기를, ‘상구가 망령된 것이 아니고, 다만 궁극하기 때문에 갈 수 없는 것이다.(上九非有妄也 但以其窮極而不可行耳)’ 라고 했다.
¶ [복습 정리] 『주역(周易)』(제15강) ☞ [25] 무망괘 [天雷无妄]의 괘사와 효사
[25] 无妄, 元亨, 利貞, 其匪正有眚, 不利有攸往.
‘九五, 无妄之疾, 勿藥有喜.’
‘九五, 无妄之疾, 勿藥有喜.’
‘九四, 可貞, 无咎.’
‘六三, 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
‘六二, 不耕穫, 不菑畬, 則利有攸往.’
‘初九, 无妄, 往吉.’
———————————————————————————————
* 『주역(周易)』(제15강) ☞ [24] 地雷復 [25] 天雷无妄 *———<끝>
|
첫댓글 금년에도 주역 글 정리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