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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종대왕(世宗大王), 퇴계(退溪), 율곡(栗谷), 이순신(李舜臣), 다산(茶山) 등 선현(先賢)들은 주역을 터득하고 실제의 삶에 활용한『주역』의 대가들이다. 특히 모든 마음의 수양(修養)과 국가 대사나 실제의 생활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에는 주역을 요긴하게 활용하였다. 특히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잡는 것, 입으로 읊조리는 것,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붓으로 기록하는 것부터 밥을 먹고 … 손가락을 놀리고 배를 문지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도 주역(周易)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윤영희에게 보낸 편지>)고 갈파했다. 우리 <동인문화원>의 이기동(李基東) 선생도 ‘주역(周易)은 참되고 진실한 삶의 지혜를 제시한다. 그것은 이웃과 조화되는 삶이며 자연과 조화되는 삶이다.’라고 역설했다. (이기동 지음,『주역강설』(1996, 초판) ‘머리말’ 중에서)
[10]-2 是以君子 將有爲也하며 將有行也에
問焉而以言커든
其受命也 如嚮하야 无有遠近幽深히 遂知來物하나니
非天下之至精이면 其孰能與於此리오
그러므로 군자는 장차 무슨 일을 계획하고 무슨 행동을 하려 할 때에는,
(점으로) 그것을 물으면 말씀으로써 제시해준다.
그가 그 명을 받는 것은 마치 메아리가 들리는 것과 같아서
먼 것이나 가까운 것, 그윽한 것이나 심원한 것을 가리지 않고
마침내 미래의 일을 알게 된다.
천하에 지극하고 정밀한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관여할 수 있겠는가.
· ‘將有爲也’는 ‘장차 하고자 하는 바’ 즉 ‘to plan’에 해당하고, ‘將有行也’는 ‘장차 실행하고 자 하는 바’, 즉 ‘to do’에 해당한다.
· ‘問焉而以言’에서 ‘問’은 점(占)을 쳐서 묻는 것이고, ‘以言’ 다음에는 ‘答(답)’ 또는 ‘示(시)’가 있어야 하나, 생략되어 있다.
· ‘其受命也’에서 ‘其’는 앞에 나온 ‘군자(君子)’를 가리킨다. ‘命’은 주역의 점(占)으로 말하는 하늘의 뜻이다.
· ‘如嚮’에서 ‘嚮’(향)은 ‘향(響)’과 통용된다. ‘점에서 말하는 말씀을 따른 것이 메아리가 소리를 따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 [강 설(講說)] —————
이 단락은『주역』의 네 가지 효용(效用) 가운데 ‘言’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신 부분이다. 군자가 어떤 일을 하거나 무엇을 행하려 할 때, 점을 쳐서 역에게 물으면 역은 구체적인 말로써 분명하게 답변해 준다. 그리고 군자는 그 답변을 주저함 없이 실천에 옮기니 마치 메아리가 소리를 따르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 없다.
주역의 명(命)에 따라 진리를 실천하는 것은 지극히 정밀하고 순수한 사람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소인이라면 점괘를 뽑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답변이 나오면 따르기를 주저하고, 심지어 무시함으로써 낭패를 당하게 된다.
[10]-3 參伍以變하며
錯綜其數하여 通其變하여 遂成天地之文하며
極其數하여 遂定天下之象하니
非天下之至變이면 其孰能與於此리오
각 爻(효)를 이리저리 섞어봄으로써 변화를 만들고,
그 효[경우]의 수(數)를 섞고 뒤집어 봄으로써 변화에 통달하여 천지의 모든 법칙을 이루며,
그 경우의 수(數)를 끝까지 추극(推極)하여 천하의 모든 상(象)을 정한다.
천하의 지극한 변화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 ‘參伍以變’에서 ‘參’(참)은 ‘헤아리다, 섞이다’, ‘伍’(오)는 ‘섞다, 섞이다’는 뜻이다. ‘參’은 ‘세 가지를 섞는다’는 뜻이고 ‘伍’는 ‘다섯 가지를 섞는다’는 뜻이므로, ‘參伍’는 ‘이리저리 뒤섞어본다’는 뜻이다.(이기동)
· ‘錯綜其數’에서 ‘錯’(착)은 ‘섞다, 섞이다’, ‘綜’(종)은 ‘바디’, 바디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위아래를 섞는다’, ‘위아래를 뒤집는다’는 뜻을 갖는다. 그러므로 주역에서 ‘綜卦’는 본괘(本卦)를 아래위로 뒤집어보는 괘를 말하고, ‘錯卦’는 본괘(本卦)의 효(爻)를 그 반대의 효로 바꾸어 보는 괘를 말한다.
· ‘極其數’의 ‘極’은 ‘추극(推極)하다, 망라하여 알다. 마스터하다’ 등의 뜻이다.
· ‘遂成天地之文’에서 ‘文’은 ‘(천지 운행의) 원리, 이치’를 뜻한다.
* [강 설(講說)] —————
『주역』의 네 가지 효용(效用) 가운데 ‘變’과 ‘象’에 대한 내용을 설명한 부분이다. 주역의 괘에는 괘사(卦辭)와 효사(爻辭)가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괘(卦) 자체가 의미하는 상징성과 내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각 효(爻)의 상관관계를 이리저리 맞추어 보며 판단해야 한다. 초효와 이효의 관계, 초효와 삼효의 관계, 또는 초효와 이효 및 삼효의 관계, 초효와 이효·삼효·사효와의 관계 등 두루 섞어가면서 살펴야 그 변화과정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이를 ‘參伍以變’(삼오이변)으로 표현했다.
또 각 효를 수(數)대로 바꾸어 보기도 하고 뒤집어 보기도 해야 그 괘가 내포하고 있는 변화를 읽을 수 있다.[사례-『주역강설』p.902] 말하자면 주역이 제시하는 ‘메세지’를 더욱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착괘(錯卦)와 종괘(綜卦)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각 효의 음/양을 바꾸어 헤아리는 것이 착(錯)이요, 상/하를 뒤집어 헤아리는 것이 종(綜)이다. 그 수를 착종한다는 것은 각 효를 몇 개씩 착종하기도 하고 수대로 다 착종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각 효(爻)를 참오(參伍)하고 착종(錯綜)하면 그 괘가 처한 상황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데, 이를 변화에 달통(達通)한다는 의미에서 ‘通其變’(통기변)이라 한 것이다. 역리(易理)를 이해하면 천지의 운행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역리(易理)는 태극에서 음양, 사상, 팔괘, 64괘, 384효 등으로 확산된다. 그러므로 384효를 추극하면 64괘를 알 수 있고, 64괘를 추극하면 팔괘를 알 수 있으며, 팔괘를 추극하면 사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상을 추극하면 음양을 알 수 있고 음양을 추극하면 태극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태극을 통찰하게 되면 세상 모든 진리의 표상을 알 수 있다.
[10]-4 易은 无思也하며 无爲也하야
寂然不動이라가 感而遂通天下之故하나니
非天下之至神이면 其孰能與於此리오
역(易)의 진리는 사려하는 일이 없고, 작위(作爲)하는 일이 없다.
고요하여서 동요하지 않지만 감응(感應)하면 드디어 천하의 모든 이치(理致)에 통달(通達)한다.
천하에서 지극히 신묘한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 [강 설(講說)] —————
『주역』의 네 가지 효용(效用) 가운데 ‘占(점)’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신 부분이다. 역의 진리(眞理)는 점괘로 나타나고, 점괘는 ‘하늘의 작용’을 대변한다. 하늘의 작용이 의식적인 생각 없이 ‘자연히’ 진행되듯이 역(易)의 진리도 생각이 없다. 또 하늘의 작용이 작위(作爲)함이 없듯이 역의 진리도 작위함이 없다. 따라서 역의 진리에 통달(通達)하여 실천(實踐)하면 하늘과 하나가 되어, 하늘의 작용을 하게 된다.
사람이 하늘의 작용을 알게 되면, 그 마음은 의식이나 분별이 개입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늘 고요하고 동요됨이 없다. 마음이 동요(動搖)하는 것은 사려, 분별, 의식, 계산 등이 개입되어 ‘욕심(慾心)’이 생겼을 경우이다. 욕심이 생기면 그것을 구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마음을 써야 하니 그 동요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욕심이 개재되지 않고 ‘순수한 마음의 상태[寂然不動]’에서는 마음에 하늘의 뜻에 감응(感應)하여 세상의 이치를 모두 파악하여 실천할 수 있다.[感而遂通]
❊ [寂然不動과 感而遂通]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마음’으로 산다. 사람이 제대로 살고 못사는 것은 모두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 인간에게 있어 하늘의 뜻과 하나가 되어 통하는 것도 마음이요, 사사로운 마음에 사로잡혀 자신의 의식으로만 살아가는 것도 마음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모두 자기 ‘마음의 작용’[메카니즘]이다. 참다운 진리의 삶을 사는 사람은, 그 마음이 ‘지극히 깨끗하고 고요하여 어떠한 외물에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를 지닌다. 그것이 바로 적연부동(寂然不動)이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하늘의 뜻에 감응함으로써 천하의 모든 이치를 통달하는 것’, 이것이 감이수통(感而遂通)이다.
사람의 ‘마음’은 ‘성(性)’과 ‘정(情)’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는데, ‘성(性)’은 사람이 지닌 순수한 본연지성(本然之性)이요, ‘정(情)’은 그것이 겉으로 발현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적연부동(寂然不動)’은 성(性)에 해당하고 ‘감이수통(感而遂通)’은 정(情)에 해당한다. 예컨대 ‘적연부동’은 지하에서 수맥으로 흐르는 청정한 물이라면, ‘감이수통’은 청정지하수가 옹달샘이나 우물로 솟아나는 물에 해당한다. 원래 물은 청정하나 그것이 지표로 솟아나오면서 다른 ‘이물질’이 섞여 들어가면 오염이 된다. 이 ‘이물질’을 사람의 마음으로 말하면 욕심(慾心)이나 사심(私心)이다. 주역 수풍 정괘(井卦)의 가르침은, 이러한 마음을 수양하는 과정을 상징적인 코드[우물치기]로 제시한 것이다.
적연부동(寂然不動)은 또한『중용(中庸)』제1장에서 말한 온전한 ‘天命之謂性’이다. 그 성(性)을 그대로 보존해 나가는 것이 사람이 나아가야 할 참된 길이다.[率性之謂道] 그런데 하늘의 마음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가 ‘미발(未發)’이요 그것이 밖으로 발현되는 것이 ‘이발(已發)’이라고 한다면, 미발(未發)의 마음이 바로 성(性)이라면 이발(已發)은 마음은 정(情)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미발(未發)의 성(性)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늘 ‘군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하는(戒愼乎其所不睹하고 恐懼乎其所不聞)’ 것이다. 그리고 또 이발(已發)의 상황에서는 ‘숨은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미세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莫見乎隱 莫顯乎微)’ 그러므로 성(性)의 청정수가 그대로 발현되어, 맑은 우물물로 솟아나서 참되고 아름다운 삶의 물길로 이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率性之謂道’가 아닌가.
군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숨은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미세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다.(愼其獨)’
‘愼其獨’이야말로 군자(君子)가 마음을 지켜나가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愼其獨’은 일반적으로 ‘혼자 있을 때 삼간다’고 해석하지만, 기실 ‘자기 혼자만이 아는 마음의 기미(幾微)를 살펴서 늘 신중하여 그 순수함을 보존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퇴계(退溪) 선생은 일상 경건한 명상을 통해, ‘신독(愼獨)’을 잠시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寂然不動과 感而遂通’의 경지를 이루어 군자의 덕을 실현하신 것이다.
[10]-5 夫易은 聖人之所以極深而硏幾也니
唯深也故로 能通天下之志하며
唯幾也故로 能成天下之務하며
唯神也故로 不疾而速하며 不行而至하나니
子曰 易有聖人之道四焉者 此之謂也라 右는 第十章이라
그러므로 역(易)은 성인이 심오함을 다하고 조짐을 연구하는 수단이다.
‘심오’하기 때문에 세상의 이치를 통할 수 있고,
‘조짐’을 보고 움직이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 작용이 신묘하므로 빨리 가지 않아도 빠르고, 가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이를 수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주역』에 네 가지 도(道)가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 ‘聖人之所以極深而硏幾也’에서 ‘以’의 목적어는 ‘易’이다. 그러므로 역은 극심하고 연기하는 수단이다.
* [강 설(講說)] —————
『주역』은 진리(眞理)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역의 이치에 통달하여 그 행동이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성(性)에서 나온다면 천하의 모든 일에 자연으로 대처할 수 있다. 모든 일은 일어나기 전에 ‘조짐’이 있다.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균열이 가는 조짐이 있다. 이 조짐을 보고 미리 대처하면 엄청난 화를 면할 수 있다. 주역은 그 조짐을 보여준다.
역리(易理)를 알아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헤아리지 않아도 무심히 일을 이룬다. 동해안의 강(江)에서 부화한 연어는 알래스카 앞 바다에까지 나아가 성장을 한 뒤, 다시 산란을 위해서 원래의 강(江)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연어는 동해안의 강으로 가려는 생각을 가지고 방향을 찾아서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심한 상태에서 때가 되면 헤엄칠 뿐이다. 이 경우 빨리 가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리저리 궁리하는 것보다 더 빨리 간다. 또 그 강으로 가야 한다는 의도나 의식 없이 다만 헤엄만 쳤지만 거기에 도착할 수 있다. 역리를 따르는 사람의 삶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다.
<제11장> ; 역(易)의 기능과 성립 과정
[11]-1 子曰 夫易은 何爲者也오?
夫易은 開物成務하여 冒天下之道하나니 如斯而已者也라
是故로 聖人이 以通天下之志하며
以定天下之業하며 以斷天下之疑하나니라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역(易)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역(易)은 만물에게 참된 삶의 방식을 열어주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며,
천하의 모든 도리를 망라하는 것이니, 이와 같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주역의 이치로써 천하의 모든 뜻에 통하고,
천하에 모든 일을 정하며, 천하의 의심스러운 모든 문제를 결단한다.’
· ‘開物成務’에서 ‘物’은 ‘만물’. 여기서는 주로 ‘사람’을 지칭한다. 따라서 ‘開物’이란 ‘사람에게 참다운 삶의 방식을 열어 보여준다’로 해석한다.
· ‘冒天下之道’에서 ‘冒’는 ‘덮다’. 전체를 덮는 것은 전체를 망라하는 것이므로 ‘망라하다’.
* [강 설(講說)] —————
만물은 천지의 변화와 사시(四時)의 변화에 순응하여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존재들이다. 역(易)의 이치는 천지 변화의 원리와 사시 운행의 원리 등을 담고 있다. 자연의 변화 속에서 참되게 존재하고 생존할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역리는 천하 만물의 모든 삶의 이치를 망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역의 이치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의지를 알 수 있다. 하늘의 작용은 만물을 살리는 작용이고, 모든 생명체는 삶으로 향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삶의 의지를 아는 성인은 세상의 모든 일을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획정하였다. 그리고 획정하기 힘든 의심스러운 문제들에 대해서도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것이고, 그 반대의 것을 그른 것으로 결단내렸다.
[11]-2 是故로 蓍之德은 圓而神이요 卦之德은 方以知(智)오
六爻之義는 易以貢이니 聖人이 以此로 洗心하여
退藏於密하며
吉凶에 與民同患하여
神以知來코 知以藏往하나니
其孰能與於此哉리오 古之聰明叡知神武而不殺者夫인저
그러므로 시초(蓍草)의 특성은 원만하고 신묘하고, 괘의 특성은 방정하고 지혜롭다.
육효(六爻)의 뜻은 변화의 법칙을 제시하며 사람에게 변화에 대처하는 지혜를 제공해준다.
성인은 이 괘(卦)와 효(爻)의 내용을 가지고 마음의 욕심(慾心)을 씻어내고,
가만히 물러나 마음 속 은밀한 곳에 역의 진리(眞理)를 간직한다.
그러다가 길한 상황이나 흉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백성과 함께 근심한다.
신묘한 능력으로 미래의 일을 알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과거를 간직한다.
그 누가 이러한 일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총명하고 예지가 있으며,
신묘하고 씩씩하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자일 것이다.
· ‘易以貢’에서 ‘易’은 ‘역리(易理), 변화의 이치와 방법’
· ‘古之聰明叡知神武而~’에서 ‘叡’(예)는 ‘밝다’, ‘叡知’는 ‘밝은 지혜’. ‘武’는 ‘씩씩하다’
* [강 설(講說)] —————
시초(蓍草)를 통한 점괘(占卦)는 특정한 괘만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점치는 자의 상황에 맞게 다양한 괘를 제시해 주니, 원만(圓滿)하다고 할 수 있고, 또 언제나 상황에 맞는 괘를 정확하게 뽑아주니 신묘(神妙)하다.
일단 나온 점괘(占卦)는 64가지의 변화 유형 중 점치는 자에게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괘의 형태를 갖는다. 그래서 ‘방(方)’라고 했다. '방(方)’이란 일정한 방향과 모양이 있는 것을 말한다. 괘는 일정한 유형을 제시하여, 그 당면한 상황의 변화,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방도를 일러준다.
각 효(爻)는 괘의 일정한 변화의 유형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설명하여 각각의 상황에 대처하는 방안을 세밀하게 제공한다. 이 괘와 효의 지시에 따르는 것은 진리를 따라 실천하는 것이니, 곧 성인이 되는 길이다. 성인은 역(易)의 이치를 가지고 사심(私心)을 모두 씻어내는 것이다. 역리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욕심을 씻어내는 길잡이가 된다.
성인은 모든 사람을 자신처럼 생각하고, 그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처럼 안다. 그래서 백성들의 길흉화복에 대해서도 그들과 함께 걱정하고 즐거워한다. 역의 이치에 통달한 성인은 조짐을 보고 천지의 운행원리를 연역하여 신비스러운 능력으로 미래의 일을 예견하고 그에 대처한다. 그리고 과거의 일 중에서도 현재와 미래에 교훈이 될 만한 것은 잘 기억하여 자료로 삼는다. 이것이 과거의 일을 지혜롭게 간직하는 것이다.
[11]-3 是以明於天之道而察於民之故하여
是興神物하여 以前民用하니
聖人이 以此齋戒하여 以神明其德夫인저!
이 때문에 하늘의 도(道)에 밝고, 백성의 일에 상세하여,
이에 신물(神物)인 시초(蓍草)를 생기게 해서 백성의 쓸 것에 대비하여
미리 갖추도록 해야 하는 것이니,
성인은 이 때문에 재계(齋戒)하여 자기의 능력을 신비하고 밝게 만들기 위하여 계속 노력한다.
* [강 설(講說)] —————
성인은 사심이 없고 역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으니, 하늘의 뜻에 밝고 , 만물의 뜻을 상세히안다. 성인은 천지의 마음과 완전히 하나가 된 존재이므로, 그의 일은 자신의 하늘 마음을 확장하여 이제 다른 사람의 삶을 바람직하게 이끄는 일이다.
인류로 하여금 하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 성인의 유일한 사명이다.
[11]-4 是故로 闔戶를 謂之坤이오 闢戶를 謂之乾이오
一闔一闢을 謂之變이오 往來不窮을 謂之通이오
見을 乃謂之象이오 形을 乃謂之器오
制而用之를 謂之法이오 利用出入하여
民咸用之를 謂之神이라
이 때문에 문을 닫는 것을 곤(坤)이라 하고, 문을 여는 것을 건(乾)이라 하며,
닫았다가 열었다가 하는 것을 변(變)이라 하고, 가고 옴이 무궁한 것을 통(通)이라 하며,
나타난 것을 상(象)이라 하고, 형체로 구체화된 것을 기(氣)라고 한다.
만들어 쓰는 것을 법(法)이라 하고, 문을 이용하여 나가고 들어가는데
이는 백성들이 모두 쓰는 것이니 이를 신(神)이라 한다.
· ‘闔戶’(합호)에서 ‘闔’은 ‘닫다’ / ‘闢戶’(벽호)에서 ‘闢’은 ‘열다’
· ‘見’(현)은 ‘나타나다, 드러나다’
* [강 설(講說)] —————
역(易)의 이치(理致)는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하는 도리(道理)이니,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門)에 비유할 수 있다. 문을 열어 바깥으로 통하는 것은 양(陽)에 해당하는 일이니, 건(乾)이요, 문을 닫아 정지시키는 것은 음(陰)의 일에 해당하니, 곤(坤)이다.
문을 닫고 여는 것은, 건(乾)과 곤(坤)의 작용 곧 음양(陰陽)의 작용이다. 음양의 작용에 의하여 천지 만물의 변화가 일어나니 이를 ‘변(變)’이라 하였다. 이렇게 역의 이치는 모든 것에 적용되는 변화의 원리이면서 음양의 작용을 무궁하게 하는 것이니, ‘통(通)’이라 했다.
역리(易理)가 추상적으로 표현된 것을 상(象)이라 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 것을 기(器)라고 한다. 예(禮)는 성인이 역리에 따라 인간이 사회적으로 지켜야 할 절도를 제정한 것이니 기(器)라고 할 수 있다. 또 역리에 따라 사람이 사회적으로 지키고 실천해야 할 규칙을 제정한 것이 법(法)이다. 역리는 모든 사람이 사용해도 그 범위가 무궁하기 때문에, 이를 신통(神通)하다는 의미에서 신(神)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11]-5 是故로 易有太極하니 是生兩儀하고
兩儀 生四象하고 四象 生八卦하니
八卦 定吉凶하고 吉凶이 生大業하나니라
이러한 까닭에 역(易)에는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가 되고,
양의는 사상(四象)이 되며, 사상은 팔괘(八卦)가 되니,
팔괘가 길함과 흉함을 정하고, 길흉은 큰 사업을 생성한다.
* [강 설(講說)] —————
역에서 태극(太極)은 최고 단계의 진리이다. 역리(易理)의 최고의 경지는 우주대자연의 변화 그 자체와 하나 되어 사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로 살아가는 차원이 태극(太極)의 상태이다. 그런데 태극은 실천할 수 있지만 인식할 수는 없다. 인식은 구별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역[태극]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은 음양(陰陽)에서 비롯된다.
양의(兩儀)라고 말하는 음양(陰陽)은 태극이 작용하는 두 가지 양상을 말한다. 그런데 천지 만물의 변화와 작용에서 음(陰)과 양(陽), 두 양태만으로 부족하다. 음과 양은 각각 적극적인 경우가 있고 또 각각 소극적인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양의에서 사상(四象)이 나온 것이다. 사상(四象)은 태양(太陽)·소양(소양)·소음(少陰)·태음(太陰)을 말한다.
그러나 사상(四象)만으로 천지만물, 세상만사의 복잡한 변화의 모습을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세분화한 것이 팔괘(八卦)이다. 그래서 ‘사상이 팔괘가 된다’고 했다. 팔괘를 중첩하여 64괘를 만든 것인 역인데, 여기에서 64괘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팔괘(八卦)에서는 삶의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변화의 유형을 획정하고 대처방안을 제시한다. 그 변화에 잘 대처하면 길(吉)하고 잘 대처하지 못하면 흉(凶)하다. 그래서 ‘팔괘가 길흉을 결정한다’고 한 것이다. 길흉(吉凶)이 결정되면 사람들은 길하게 되는 길을 따르고 흉하게 되는 길을 피해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래서 ‘길흉은 대업을 낳는다’고 했다.
『중용(中庸)』제22장에서 말했다. “오직 지극히 정성스러움만이 자기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 자기의 성(性)을 다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성(性)을 다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성(性)을 다할 수 있으면 사물(事物)의 성(性)을 다할 수 있으며, 사물의 성(性)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天地)와 하나가 될 수 있다.”
22-01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 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지극히 정성(精誠)스러우면 천지(天地)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태극(太極)을 실천하는 상태이다.
[11]-6 是故로 法象 莫大乎天地하고
變通 莫大乎四時하고
縣象著明 莫大乎日月하고
崇高 莫大乎富貴하고
備物하며 致用하며 立成器하여 以爲天下利 莫大乎聖人하고
探賾索隱하며 鉤深致遠하여 以定天下之吉凶하며
成天下之亹亹者 莫大乎蓍龜하니라
이렇기 때문에 본보기가 되고 모범(模範)이 되는 것은 하늘과 땅보다도 더 큰 것이 없고,
변하고 통하는 것은 사계절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모범을 나타내서 드러내고 밝히는 것은 해와 달보다도 더 큰 것이 없으며,
숭고함은 부귀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인생살이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천지자연의 형상과 이치를 파악하여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
천하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한 것은 상인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을 다듬어 풀어내고, 은밀한 것을 들추어내며,
헤아릴 수 없이 심오한 것을 끄집어내고,
고원한 것을 이루어내어 세상의 모든 길흉을 단정하며,
천하의 모든 사람들의 부지런함을 이루는 것은 시초와 거북보다 더 큰 것이 없다.
· ‘縣象著明’(현상저명)에서 ‘縣’은 ‘懸’(현)과 통용. ‘드러내다, 나타나다’
· ‘立成器’에서 ‘立’의 아래에 ‘象’이라는 글자가 생략된 것이다.(이기동)
· ‘成天下之亹亹者’에서 ‘亹亹’(미미)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양’이다.
* [강 설(講說)] —————
사람은 시간적·공간적 변화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이 타고 있는 공간적 변화의 으뜸은 천지(天地)이고, 시간적 변화의 으뜸은 사계절(四季節)이다. 그러므로 태극을 실천하는 완벽한 삶은 천지의 변화와 하나가 되고, 사계절의 변화와 하나 되는 것이다.
천지라는 공간(空間) 속에서, 사계절이라는 시간(時間)의 변화를 이끌고 가는 운행하는 주체는 해와 달이다. 그러므로 해와 달의 운행을 따르는 것은 바로 천지를 본보기로 하고 사계절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해와 달이 천지와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운용하는 모범을 드러내 밝힌다고 했다. 이에 사람이 하늘과 땅의 작용에 따르고,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살게 되면 아주 참되게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영위하는 존재는 그 존재가 고귀하고 그 삶이 넉넉하다. 그래서 ‘숭고함은 부귀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역리와 하나가 된 성인은 천지의 상황과 사계절의 변화 및 일월의 운행의 법칙을 파악하여, 천문 역법(曆法)을 만들어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농기구와 가옥 등 문명의 이기(利器)를 만들고 예의와 문자 등 문화(文化)를 창조하여 인간이 편리하고 문화적인 삶을 누리도록 하였다.
[11]-7 是故로 天生神物이어늘 聖人이 則之하며
天地變化이어늘 聖人이 效之하며
天垂象하야 見吉凶이어늘 聖人이 象之하며
河出圖하고 洛出書이어늘 聖人이 則之하니
이런 까닭에 하늘이 (시초, 거북 등의) 신통한 물건을 만들었으니 성인은 이것을 본받는다.
하늘이 상을 드리워 길흉을 나타내니 성인은 이것을 본받는다. 황하에서
용마의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거북이 등에 새긴 신통한 글이 나왔으니
성인은 이것을 본받는다.
· ‘則之’(칙지)에서 ‘則’은 ‘원칙이나 법칙을 따르는 것’, ‘행동강령이나 법도를 따르는 것’
· ‘效之’(효지)에서 ‘效’는 ‘앞서 가는 사람이나 다른 움직임을 따라 하는 것’
· ‘見吉凶’(현길흉)에서 ‘見’(현)은 ‘나타내다’
· ‘象之’(상지)에서 ‘象’은 ‘흉함을 피하고 길한 방향의 길을 파악하여 실행하는 것’
* [강 설(講說)] —————
운전하는 것에 비유한다면, ‘규정 속도, 교통신호, 주차금지’ 등의 지시사항을 준수하여 법규대로 운전하는 것은 ‘칙(則)’이고, 모범운전사의 반듯한 운전방식을 따르는 것이 ‘효(效)’이며, 위험한 곳에 해골을 그려놓거나 낭떠러지 그림을 그려놓은 표지판이 ‘상(象)’이다.
하늘이 황하(黃河)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있는 그림[河圖]과 낙수에서 나온 용마의 등에 있는 그림[洛書]을 통하여, 천지의 운행 법칙을 제시했고, 성인은 그 법칙에 따라 인간의 삶의 도리와 법칙을 만들었다. ——★「하도(河圖)」와「낙서(洛書)」는 <별첨> 내용 참조
[11]-8 易有四象은 所以示也요 繫辭焉은 所以告也요
定之以吉凶은 所以斷也라. 右는 第十一章이라
주역에 사상이 있음은 역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설명하는 말을 붙인 것은 역리를 알려주게 위한 것이다.
길흉으로써 정한 것은 역리늘 단정하기 위함이다.
* [강 설(講說)] —————
완벽한 삶은 태극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고, 또 인식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움양, 사상, 팔괘, 육십사괘 등의 부호 등을 통하여 역리를 표현하였다.
그런데 육십사괘 등의 부호를 통해 표현해 놓아도,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각각의 괘에 설명하는 글을 붙여 역리를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참된 삶의 길을 제시하였다.
설명을 통하여 역리를 알림으로써 참다운 삶의 방식을 제시했어도, 그 참된 삶의 추구를 용이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길흉으로 규정하여 실천을 촉구하게 되었다. 그래야만 역리의 따른 삶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삶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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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계사전」·상(제10장~제11장) <제4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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