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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天 大有
大有, 元亨 | ‘上九, 自天祐之, 吉无不利’ ‘六五, 厥孚交如, 威如, 吉’ ‘九四, 匪其彭, 无咎’ ‘九三, 公用亨于天子, 小人弗克’ ‘九二, 大車以載, 有攸往, 无咎’ ‘初九, 无交害, 匪咎, 艱則无咎’ |
[14大有] 크게 소유하는 상황이다. 크고 밝은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상구(上九)는 덕(德)을 갖춘 원로이다. 육오(六五)에게 이념을 제공하는 정신적 지주이다. 육오(六五)가 물질적인 부(富)를 통하여 경제성장을 꾀할 때 상구(上九)는 정신적인 덕(德)을 수행하여 강조한다. 상구(上九)가 정신적인 감화력을 발휘하므로 육오(六五)는 상구(上九)를 존경한다. 그래서 상구는 모두가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모두가 필요로 하는 존재는 하늘이 돕는다. 그래서 '상구(上九)는 하늘에서부터 도움이 있으니 길하고 이롭지 않음이 없다'
[12]-2 子曰 書不盡言하며 言不盡意니
然則聖人之意를 其不可見乎아. (子曰)
聖人이 立象하여 以盡意하며 設卦하여
以盡情僞하며 繫辭焉하여 以盡其言하며
變而通之하여 以盡利하며 鼓之舞之하여 以盡神하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며, 말은 생각을 다하지 못하니,
그렇다면 성인의 생각을 알 수 없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성인은 상(象)을 세워서 생각을 나타내고, 괘(卦)를 설치하여
참과 거짓을 가려내며, 말[卦辭, 爻辭]을 붙여서 자기의 할 말을 다하고,
변화하고 통하여 이로움을 다하며, 북치고 춤추게 하여 신령스러움을 다한다.”
· ‘其不可見乎’에서 ‘見’(견)은 ‘알다’의 뜻이다.
· ‘立象’에서 ‘象’(상)은 주역에서 음(陰)·양(陽)의 코드를 기호로 나태낸 것이다. 역에 담긴 뜻이나 성인의 마음을, 상징적인 사물의 상(象)으로 표현했다. 상(象)은 회통의 수단이다.
· ‘繫辭焉’에서 ‘焉’는 지시적 어조사이므로 ‘거기[괘나 효]에 말을 붙인다’는 뜻이다.
· ‘鼓之舞之’는 ‘신명나게 고무(鼓舞)한다, 동기부여(動機附輿)를 한다’는 뜻이다. 분위기를 진작하여 고무하고 ‘동기부여’하는 주역의 괘는 ‘뇌지(雷地) 예괘(豫卦)’의 구사(九四)이다.
* ‘豫’(예)는 ① ‘기다리며 기뻐하다’ ② ‘기뻐하게 하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①의 경우는 전체가 침체된 상황에서 새로운 능력자를 기쁘게 기다리는 상황이고, ②의 경우는 ‘능력자’가 전체에 동기(motivation)를 부여하는 상황이다. 가라앉은 다른 구성원들을 고무(鼓舞)하여 힘을 북돋워주는 것이다. 실권자인 육오(六五)가 유일한 능력자인 구사(九四)로 하여금 능력을 발휘하게 지원하면, 구사는 전체를 위하여 동기를 부여한다. 구사(九四)는 그 상(象)으로 보면, 그 아래·위의 음효로 이루어지는 진괘(震卦, ☳)의 진원(震源)이 되기 때문이다.
* [강 설(講說)] —————
『주역(周易)』은 하늘의 뜻을 우리 인간에게 전하는 지혜(智慧)롭고 신비(神秘)스러운 경전이다. 사람은, ‘하늘’로 표상되는 태극(太極)은 그 자체로는 인식할 수 없으니,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단지 음양(陰陽)의 형태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음양은 모든 변화의 양상을 두 가지로 유형화하여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다. 만약 음을 좌, 양을 우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음과 양의 지극한 작은 한 부분만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규정으로 인하여 동정(動靜), 명암(明暗), 남녀(男女) 등등의 나머지 내용들이 모두 은폐되어 버린다. 그래서 음양으로 파악된 태극의 내용은 ‘말’로 표현 불가능하다. 더욱이 글[서]은 시·공간적 제한성으로 인해 말의 모든 내용을 표현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성인은 태극의 내용을 추상화하여 음(陰, - -)·양(陽, —)이라 상징적 기호로 표현하고 그것을 결합하여 사상(四象)으로 세분화화여 표현하였다. 이 상징적 부호가 주역(周易)의 상(象)이다. 그래서 ‘성인이 상(象)으로써 생각을 나타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상(象)만으로는 사람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상을 더욱 세밀화하여 팔괘(八卦)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중첩하여 64괘를 만들어 하늘의 뜻과 인간의 삶의 양상을 코드화하였다. 괘(卦)를 통해 상(象)을 보는 올바른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괘(卦)만을 보고 하늘의 뜻[易理]을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이에 성인은 다시 거기에다 말[卦辭나 爻辭]을 붙여 말로 가능한 것을 다하였다.
괘사나 효사를 통하여 모든 변화하는 상황과 통하는 상황을 표현하여 태극(太極)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태극의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으니, 태극을 실천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롭다는 것을 유도하고 고무(鼓舞)시켰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무궁한 역리를 실천하도록 고무하고 격려했기 때문에 신령스러움을 다했다고 했다.
[12]-3 乾坤은 其易之縕耶인저 乾坤 成列而易이 立乎其中矣니
乾坤이 毁則无以見易이오 易을
不可見則乾坤이 或幾乎息矣리라
건곤은 그 역리가 심오함이여! 건곤이 배열을 이루어 역리가 그 가운데에서 확립된다.
건곤의 이치가 허물어지면 역리를 알 수 없다.
역리를 알 수 없으면 건곤의 이치도 거의 멈추어 버린다[발휘되지 못한다].
· ‘其易之縕耶’에서 ‘縕’(온)은 ‘온(蘊)’과 통용, ‘쌓다[蘊蓄], 간직하다’는 뜻도 있고 ‘심오(深奧)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 ‘乾坤 成列而易’은 주역 64괘의 건괘·곤괘가 근간이 되어 배열된 체계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건괘나 곤괘 이하의 62괘는 건·곤괘의 효가 변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立乎其中矣’에서 ‘其’는 ‘건괘와 곤괘’이니 ‘其中’ ‘건괘와 곤괘 가운데’라는 뜻이다.
* [강 설(講說)] —————
역(易)은 천지, 자연, 만물의 변화의 양상과 그 대처 방안을 예순 네 가지로 유형화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 64괘의 변화 유형 기중이 되는 것이 바로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이다. 건(乾)의 하늘의 운행 원리이고 곤(坤)은 땅의 이치를, 그리고 나머지 62괘는 만물의 삶의 원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만물은 모두 하늘과 땅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하여 존재한다. 그래서 ‘건괘와 곤괘에 역리(易理)가 온축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천지와 만물의 역리는 건괘와 곤괘의 변화에 모두 포괄된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건괘(乾卦)와 곤괘(坤卦)가 없으면 역리(易理)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12]-4 是故로 形而上者를 謂之道요 形而下者를 謂之器요
化而裁之를 謂之變이요
推而行之를 謂之通이요
擧而措之天下之民을 謂之事業이라
이런 까닭에 형체(形體)로 나타나기 이전의 상태를 도(道)라 하고,
형체로 나타난 이후의 상태를 기(器)라한다.
(기(器)를 도(道)의 입장으로) 승화시켜 마름질하는 것을 변(變)이라 하고,
미루어 가서 참모습을 행하는 것을 통(通)이라 하며,
들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사용하도록 놓아두는 것을 사업(事業)이라 한다.
· ‘形而上者’에서 ‘形’은 ‘형체,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 ‘上’은 원래 공간적·시간적 개념이지만 여기서는 ‘인식의 범주로 들어오기 이전의 상태’이니 ‘形而上者’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形而下者’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 ‘化而裁之’의 ‘化’는 ‘질적인 변화’, 여기서는 ‘도(道)의 상태로 승화되는 것’. ‘裁’는 ‘마름질하다, 재단(裁斷)하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결단하다’의 뜻이다.
· ‘謂之變’에서 ‘變’은 ‘양적인 변화’, 여기서는 앞에 화를 통해 변한 것이므로 ‘질적·양적 변화’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기(器)는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도(道)를 표현한 것이므로 ‘변화하고 있는 상태임’을 읽어야 한다.
· ‘推而行之 謂之通’에서 ‘推’는 ‘미루어 가는 것’. ‘기(器)의 내용을 미루어가서 기(器)의 참뜻에 이르면 모든 것이 도(道)와 하나가 된다.’ ‘通’은 ‘하나로 통하는 것’, ‘회통(會通)’이다.
· ‘擧而措之’에서 ‘之’는 ‘道로서의 器’를 뜻한다. 그리고 ‘之’ 다음에 ‘於’가 생략되었다.
· ‘措’는 ‘놓다, 조치하다’의 뜻이지만, 역학자 고형(高亨)은 ‘베풀다(措 施也)’로 주석했다. 그러므로 ‘擧而措之天下之民’은 ‘(성인은) 도를 들어서 천하의 모든 백성들에게 베푼다’는 뜻이다.
· 그러므로 ‘事業’은 이익을 추구하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잘못된 삶을 바로잡고 교화하여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 [강 설(講說)] —————
역리(易理)가 구체적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상태[形而上者]는 태극(太極)인데 여기서는 도(道)라고 했다. 도(道)는 인식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음양(陰陽)의 형태로 바꾸어 인식할 수밖에 없다. 또 음양의 형태를 상세하게 인식하기 위해 세분한 것이 사상(四象), 팔괘(八卦), 그리고 64괘이다. 인식의 범주로 들어오기 이전의 상태인 태극(太極)이 도(道)이고, 음양, 사상, 팔괘, 64괘 등 인식의 대상으로 구체화한 것이 기(器)이다.
그러나 도(道)와 기(器)는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다만 인식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를 표현할 때 도(道)라 하고 그 범주에 들어 와 있는 상태를 기(器)라고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기(器)는 도(道)를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그러나 도(道)와 기(器) 사이에 어떤 선후나 우열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이 논의는 어떤 물체를 인식할 때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보았을 때, 사냥꾼은 그것을 보고 사냥감으로, 사진작가는 작품의 피사체로, 예술가는 예술품으로 인식할 것이고, 벌레들은 자기를 잡아먹는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새’ 그 자체의 본래면목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아무런 인식범주를 갖고 있지 않은 아기의 눈에 비쳤을 경우에만 그 새 자체가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새’로서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인식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은 ‘새’ 자체는 도(道)이고 인식의 범주에 들어온 ‘새’라는 개념은 기(器)에 해당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잠시도 머물러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존재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단지 인식하는 것은 대상을 고정시켜 인식의 범주에 끌어들인 다음 인식할 뿐이다. 움직이는 물체를 정지시킨 상태로 담는다. 시간(時間)의 흐름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지구가 태양을 한 번 도는 것을 대략 일 년으로 규정하고 이를 넷으로 구분하여 고정시킨 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봄의 끝 부분과 여름의 첫 부분은 분리할 수 없다. 사계절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보려면 먼저 계절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역리(易理)를 파악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음(陰)과 양(陽)을 구분하여 별개의 것으로 인식한다면 도(道)를 아는 것이 아니다. 음(陰)과 양(陽)은 고정되어 있지 있지도, 그 경계가 있지도 않다. 음은 양으로, 양은 음으로 변해가는 과정(過程)에 있다. 그러니 음(陰)에서 양(陽)을 보고 양(陽)에서 음(陰)을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도(道)의 입장으로 끌어올려 음(陰)·양(陽)을 파악하고 실천해야만 음(陰)과 양(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팔괘(八卦)나 64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괘를 고정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변화(變化)하고 있는 과정(過程)으로 보아야 한다. 도(道)를 음(陰)으로 인식해 음(陰)으로 대처하면, 그 순간 이미 양(陽)의 방향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도(道) 그 자체를 인식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
음양, 사상, 팔괘, 64괘 등은 도(道)를 인식하기 위하여, 그것을 ‘인식의 범주’ 안에 끌어들여 구분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음양, 사상, 팔괘, 64괘는 모두 도(道)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64괘를 볼 떼에도 64괘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각각의 괘를 통해서 도(道)를 읽어야 한고 태극(太極)을 읽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괘(卦)가 하나로 통한다. ‘추(推)’는 ‘’미루어 생각하고 미루어 적용해 나간다‘는 말이다. 각 괘의 이치를 추극(推極)하여 도(道)의 입장이 되면 모두가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성인(聖人)의 사업(事業)은 이러한 역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하여 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2]-5 是故로 夫象은 聖人이 有以見天下之賾하여
而擬諸其形容하며
象其物宜라 是故謂之象이요
聖人이 有以見天下之動하여 而觀其會通하여 以行其典禮하며
繫辭焉하여 以斷其吉凶이라 是故謂之爻니라.
그러므로 상(象)이라는 것은,
성인이 역리로써 세상의 만사만물 가운데에 깊이 감추어져 심오한 이치를 알고,
그 형용되는 모습에서 역리를 잘 견주어 설명하며,
그 사물이 역리에 마땅하게 되어 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상이라 한다.
성인은 역리로써 천하의 모든 움직임을 알고,
그것이 모두 하나로 모여 통하는 것을 살펴, 그 보편적인 전거(典據)를 실행하며,
말을 붙여 그 길하고 흉함을 단정한다. 그런 까닭에 효라고 했다.
* [강 설(講說)] —————
<제8장>의 문장이 중복되어 나왔다.
[12]-6 極天下之賾者는 存乎卦하고
鼓天下之動者는 存乎辭하고
化而裁之는 存乎變하고 推而行之는 存乎通하고
神而明之는 存乎其人하고
黙而成之하며 不言而信은 存乎德行하니라 右는 第十二章이라
천하의 모든 심오한 이치를 다 밝히는 것은 괘(卦)에 있고,
천하의 모든 움직임을 고무시키는 것은 사(辭)에 있고,
도의 차원으로 승화되어 마름질하는 것은 변(變)에 있고,
미루어 도를 행하는 것은 통(通)에 있고, 신묘하게 밝히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에게 있다.
묵묵하게 이루며, 말하지 않고 미더운 것은 덕행(德行)에 있다.
· ‘極天下之賾者’에서 ‘極’은 ‘극진히 하다, 마스터하다’. ‘賾’(색)은 ‘심오한 이치’
· ‘鼓天下之動者’에서 ‘鼓’는 ‘고무하다, 진작하다’
* [강 설(講說)] ——————
주역에서는,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의 모든 원리(原理)를 인식의 범주에 끌어들여, 상징적인 상(象)으로 표현한 것이 괘(卦)이다. 괘가 있어도, 그 괘의 진리를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니, 괘에 설명문[卦辭나 爻辭]을 붙인 뒤에, 그 괘의 진리를 따르면 길(吉)하고 따르지 않으면 흉(凶)하다고 단정함으로써 사람들이 괘의 진리에 따라 살기를 고무(鼓舞)시켰다. 그런데 아무리 성인이 진리를 설파한다 해도 그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결국 사람에게 달려 있다.
역리(易理)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말로 역리(易理)를 알 수는 없다. 묵묵히 언어를 세계를 초월(超越)해야만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진리를 이를 수 있다. 진리를 이루어 실천하는 것이 바로 덕행(德行)이다. 덕행이 있으면,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해도 모두가 그를 믿는다. 마치 봄에 하늘이 ‘다음에는 여름이 올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모두 여름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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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역 계사전] ☞ 계사전 (상) (제12장)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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