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5년 런던을 중심으로 번진 흑사병은 런던을 폐허로 만들었다. 위기를 느낀 왕과 왕실은 1665년 6월 런던을 떠나 피신해 있다가 이듬해 2월에야 돌아왔다. 런던 인구 46만 명 가운데 1665년의 흑사병으로 인한 전체 사망자 수는 7만 5,000명 이상이었다. 전체 인구의 16퍼센트가 사망한 셈이다.
런던에서 흑사병이 사라진 데는 1666년 9월에 일어난 대화재가 크게 기여했다. 1666년 9월 2일 월요일 런던 다리 부근 푸딩 레인Pudding Lane에 있는 왕실 빵가게에서 우연히 발생한 이 화재는 때마침 불어 닥친 거센 동풍으로 하루 종일 꺼지지 않았으며 다음날에도 불길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수요일 들어 약해진 불길은 목요일에는 진화된 듯했으나, 목요일 저녁에 다시 템플Temple에서 화염이 치솟기 시작했다. 화약으로 여러 채의 집을 폭파한 뒤에야 화재는 완전히 진압되었다.
런던 역사상 최악의 화재로 알려진 이 사건에 대해 새뮤얼 피프스는 《일기Diary》에서 상세하고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화재를 피해 재산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로 꽉 찬 배들이 강을 가득 메웠다.
앞 못 보는 밀턴은 연이어 들이닥친 대재난 속에서 많은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는 흑사병을 피해 1665년 7월에 런던을 떠나 피신했다가, 이듬해 2월 또는 3월에 런던의 자택에 돌아왔다. 돌아온 밀턴을 기다린 것은 대화재였다. 1666년의 대화재는 밀턴의 거주지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불길이 밀턴이 살던 아틸러리 워크에서 400m 떨어진 지점까지 밀어닥쳤던 점으로 보아 밀턴이 겪었을 불안과 공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밀턴의 출생지이자 소년 시절을 보냈던 브레드 가의 가옥―그것은 밀턴이 당시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의 전부였다―도 소실되었다. 그는 사흘 밤낮을 수많은 목격자들과 더불어 대화재의 공포에 떨었고, 이에 더하여 재산상의 손실까지 입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호국경 체제 아래서도 형편이 제법 넉넉했던 밀턴은, 말년에 당한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졸지에 궁핍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밀턴이 필생의 역작인 《실낙원》을 출판한 것은 대화재의 불길이 가라앉은 직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