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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학교 1998년 겨울 성경모임 감화회 발표 내용입니다. 글 정리하다가 찾아낸건 데 자료삼아 올립니다.
1997년을 돌아보면서 우리 사회의 지나친 정치 지향성을 느끼게 됩니다. 정치적 관심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나 또한 정치 문제에 관심이 있으며 우리나라의 정치가 잘 되기를 누구 못지 않게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정치에 대해 도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학 교수, 대학 총장 출신 인사들의 현실 정치 참여를 바라보면서 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탄식은 “아, 儒敎!”였습니다. 나는 유교가 한국 사회에 미친 병폐 중에서 으뜸가는 것으로서 “정치 과잉, 정치 지상주의”를 꼽고 싶습니다. 유교의 격언 중에서 내가 가장 불쾌하게 생각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입니다.
물론 “修身齊家”에 대해서조차 이의를 제기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修身齊家”를 한 후에는 반드시 나라를 다스려야만 된다는 것입니까? 학문을 하다가도 때가 되면 반드시 정치에 투신해서 나라를 다스려야만 사람으로서 태어난 보람을 얻는다는 것입니까? 학문보다도 정치가 한층 차원 높은 직분이란 말입니까? 학문이 고작 정치의 예비 과정에 불과하다는 말입니까?
어떤 철학자가 우리의 단군 신화를 분석해 놓은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철학자는 우리에게 창조 신화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화에는 존재론적 사고가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桓雄이 아버지인 天帝 桓因으로부터 天符印 세 개를 받아 인간 세상에 내려와 다스렸다는 내용입니다. 신화에서부터 정치 과잉, 정치지상주의가 배어 있습니다.
사실 조선시대의 경우를 보아도 우리에게 학문이란 벼슬길에 올라 정치 활동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퇴계 이황처럼 임금의 명을 한사코 뿌리치고 향리에서 학문에 진력한 학자가 우리에게도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런 학자는 우리 역사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절대 다수는 벼슬살이하는 것을 실로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에서 진리란 그저 권력을 얻고 출세를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심지어 도덕성 문제, 의식 개혁 문제 등마저도 정치적 리더십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지적 풍토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사회 기강을 확립하고 의식을 개혁하는 작업은 정치에 맡겨진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정신과 관계되는 부분은 정치의 일이 아니라 진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진리 그 자체로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달성될 수 없습니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돈은 모든 일을 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돈의 영역을 알고, 돈을 그 영역 속에 국한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으려고 하면 다시 거기다 차 넣어야 한다.”
칼라일이 돈에 대해 한 말은 정치에 대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는 모든 일을 하지는 못한다. 특히 인간의 정신을 계발하는 일에는 정치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정치의 영역을 알고, 정치를 그 영역 속에 국한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으려고 하면 다시 거기다 차 넣어야 한다.”
나는 인문학, 각별히 기독교적 인문학이야말로 이러한 정신 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견인차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나라의 인문학 연구자 대부분은 기독교적 소양이 지극히 빈약합니다.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인문학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학문과 교회 생활이 별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신앙 문제는 교회 출석이나 교회에서의 각종 봉사 활동으로 다 해결되었다고 간주하고, 전공인 인문학 연구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과 전혀 연관 없이 수행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에게 종교란 사교 클럽과 생명 보험을 합쳐 놓은 정도에 불과합니다.
인문학이란 인간 정신을 비옥하게 하고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데 그 본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출석하는 인문학자들은 자신의 학문 분야에 기독교적 신앙과 통찰을 적용하지 않은 채,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연구 활동을 수행합니다. 나는 그들이 아예 기독교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진리의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다 하면서 자신의 전공 학문인 인문학에 기독교적 안목을 관철시킬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로 돼지에게 진주가 던져진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문학이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文․史․哲의 세 분야를 주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문학, 역사, 철학이 그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데 그 일차적인 목적을 갖습니다.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세계와 인간을 균형감 있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남의 눈이 아닌 자기 자신의 눈으로 우주와 사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해줍니다.
기독교적 통찰로 조명한 인문학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을 무지와 편견의 쇠사슬에서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기독교 인구가 1천만 명이라면서 여태껏 지역감정이라는 편견 하나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에 난무하는 흑색선전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마치 세뇌 당한 것처럼 살아온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독교 인구 1천만 명만이라도 정신적으로 독립하고 자신의 눈으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볼 줄 안다면 도저히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와 인문학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입니다. <성경>은 인문학 연구를 심화시키는 통찰과 혜안을 제공합니다. 한편 인문학이란 성경에 대한 사상적 주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써 인문학은 깊이와 높이를 얻고, 이렇게 깊고 높아진 인문학은 신앙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역할을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문학의 바탕과 근본이 되는 것은 기독교이며 <성경>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인문학은 뿌리 없는 나무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크리스천을 자처하는 인문학자들은 커다란 사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종교를 무슨 장신구나 취미 생활로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 기독교 신앙의 원리를 사상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신앙과 학문이 합금 되는 그런 경지에 도달한 인문학자들이 우리 사이에서도 많이 등장했으면 합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그리고 인문학을 전문으로 한다고 하면서 신앙 따로, 학문 따로의 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첫댓글 자기 자신의 눈으로 우주와 사물을 볼 수 있고 또한 주님을 만날 수있는 삶이...아자 아자 화이팅!!
하나님이 인간에게 두 눈을 주신 이유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도록 하기 위함이죠?
돈이 우상이 된 사회.칼라일의 말씀이 넘 좋네요.
"돈의 영역을 알고, 그 영역 속에 국한 시켜야 한다"
지도자들부터 오로지 돈만 생각하니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