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도문]노평구 선생님의 신앙과 사상
<성경말씀> 11호(2003년 8.9월)에 기고한 글입니다.
1.
노 선생님께서는 평소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부모님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부친께선 자제들에게 지극히 엄격한 분이었다고 했습니다. 한번 역정을 냈다 하면 혹독하게 매질을 하고는 함경도의 그 추운 겨울에 발가벗겨서 문밖으로 내쫓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모친께서는 온몸으로 아들을 감싸 안고 대신 매를 맞으셨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토록 엄하기만 하던 부친은 나중에 감옥에 갇힌 아들을 면회 와서는, 쩍쩍 갈라져 피가 흐르는 자식의 손등을 어루만지시며 “내가 이러자고 너를 키운 게 아니었는데……”하며 비통해 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면 선생님의 눈가에는 대개 눈물이 비치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이토록 엄격한 부친과 한없이 자비로운 모친의 성품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사랑을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훗날 노 선생님이 일본에서 쓰카모토 토라지(塚本虎二) 선생 문하에서 성경과 무교회신앙을 배울 때, 어린 시절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했더니 다들 위대한 부모님이라고 놀라워했다는 말씀도 들은 기억이 납니다.
1930년 초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경찰에 의해 1년간 옥고를 치른 선생님은, 출옥 후 학업의 길이 막히자 마포 도화동 산동네에서 빈민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교육활동에 종사했습니다. 당시 선생님의 연세는 스무 살 안팎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무렵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고 했습니다. 가르치던 한 여자아이가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죽기 직전 그 아이는 자기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노 선생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마침 출타 중이어서 아이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들려주실 때도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결국 교육사업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한글을 깨친 아이들이 남을 속이거나 도둑질을 하는 모습을 본 선생님은, 교육만으로는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노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선생님은 이 무렵 ‘자의식이 깨면서’ 인생문제로 고민했다고 합니다. <노평구전집> 각권 말미에 있는 저자 약력에도 그런 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얼마 전 이 ‘자의식’이란 말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의식’이란 바로 ‘기독교적 죄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젊은 날 죄짓는 것이 두려워서 길거리에서도 여성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아마 이 무렵의 일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저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선생님은 교육활동을 하던 어느 날 종로에서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을 발견한 후 김교신 선생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김교신 선생의 권유로 일본에 가서 성경 공부를 하기에 이릅니다. 선생님이 김교신 선생을 자택으로 처음 방문했을 때, 김교신 선생은 한복을 갖춰 입고 대문에서 노 선생님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노 선생님은 김교신 선생과의 첫 대면에서 잊을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진정한 조선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노 선생님은 모든 공적 활동에서 은퇴하신 만년에 접어들어 김교신 선생과의 첫 만남에 관한 말씀을 특히 자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득한 옛날, 젊은 시절에 있었던 스승과의 인격적 만남이 노 선생님의 인생에 그만큼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19세기 영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리는 예언적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이 “시대의 징표”라는 글에서 한 다음의 말은, 두 분의 진실한 인격이 만나던 아름다운 장면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인간 영혼의 신비로운 심연 속에서 발흥했으며, 그것의 확산은 어디까지나 말씀의 전파에 의해, 그리고 자연스럽고 소박한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기독교는 마치 ‘신성한 불꽃’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흘러들어가, 마침내 모든 사람이 그 불꽃에 의해 정화되고 빛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2.
노 선생님이 별세하신 직후 9월 10일자 국내 신문들은 일제히 ‘애국지사 노평구 선생 별세’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를 냈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 이 기사 제목을 읽고서 황당했습니다. ‘애국지사’라는 칭호는 노평구 선생님의 평소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애국지사’라고 할 때 언뜻 떠오르는 것은 정치적 투쟁이나 실천적 봉사의 이미지 아닙니까?
물론 노 선생님은 청년 시절 항일운동에도 참여하시고 빈민 아동들을 위한 교육활동에도 헌신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95년엔 정부에서 주는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노 선생님은 그 후 곧 진리에 의한 인간내면의 변화 없이는 모든 정치활동과 교육활동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이 때 이후 선생님의 생애의 의미 있는 부분은 전적으로 기독교신앙과 복음진리의 심화와 전파에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글로도 쓰셨던 것처럼, 선생님은 ‘영혼을 고치는 의사’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기독교 인사들의 3.1운동 참여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언급하셨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에 대해서도 “개도 그보단 잘 뛴다”며 평가절하 한 선생님께서 과연 세상 언론이 붙여준 ‘애국지사’란 칭호를 달가워하셨을까 의문스럽습니다.
노 선생님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보노라면 사람이란 결국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하긴 당대의 인물을 제대로 평가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 ‘땅에 코롤 박고 사는’ (이 또한 노 선생님의 표현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인물 평가란 그저 현세에서의 권력과 지위와 재력으로 사람의 크기를 재는 유치한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림을 그릴 때 원근법에 맞춰서 그립니다. 가까운 것은 크게 그리고 먼 것은 작게 그립니다. 하지만 그림에서 크게 그려졌다고 그것이 실제로도 크다고 여기고, 그림에서 작게 그렸다고 실제로도 작다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판단력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그런 결함투성이의 판단력을 갖고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항일운동 같이 세상에 드러나는 활동은 크게 보고, 정작 본인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헌신한 부분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해서 별 것 아닌 것처럼 지나쳐 버립니다.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아테네 시민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진면목을 못보고 그저 수많은 소피스트들 중 한 사람으로 간주했을 뿐입니다.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긴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정치적 메시아를 갈구한 자기 백성에 의해 십자가 죽음을 당했으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노 선생님을 30년 가까운 세월 알아오면서 가장 강하게 느낀 점은 ‘진실’입니다. 여태껏 살면서 만난 어느 누구보다도 진실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노 선생님의 ‘진실’ 앞에 서면 저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저는 제가 선생님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선생님을 ‘닮지 못한’(不肖)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진실의 부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언젠가 6.25때 인민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한 기독교인 청년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인민군이 이 청년을 끌고 가던 도중 어느 곳에 이르자 청년에게 꼼짝 말고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 다음, 그러겠다는 다짐을 받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묶어두지도 않았습니다. 인민군은 차마 가엾어서 그 청년을 슬그머니 놓아주려고 했었나 봅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청년이 도망치기를 내심 바랐던 것이지요. 하지만 인민군이 돌아와 보니 그 청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는 것입니다.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길 수 없어서라는 말이었습니다. 노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중에도 눈가에 물기가 번졌습니다.
선생님은 진실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분이었으며, 도덕적 진실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일생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습니다. 조국과 민족의 원동력으로서 성서의 진리를 제공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선생님은 ‘나도 남자인데’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진리 앞에서 초지일관 평생 지조를 꺾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사상> 2003년 9월호에는 최근 미국에서 종교사회윤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 감리교인이 쓴 “교회여, 무교회에게 들으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제목에 나타난 것처럼, 교회 사람으로서 무교회에 배울 점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바라본 점은 평가할 만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글에서 “함석헌 님은 김교신 님의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멀리 뛰었습니다”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이분이 헛다리를 짚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김교신 선생의 뒤를 이어 한국 무교회 기독교신앙의 지조와 순수성을 지켜낸 것은 누가 뭐래도 노평구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3.
노 선생님은 도덕적 진실에 못지않게 학문적 진실 앞에서도 진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이따금 사석에서 교육 이야기를 하시다가 ‘대학 물을 먹으면 머리에 때가 좀 벗겨지거든’ 하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선생님 주변에서 종종 보이는, 무지와 독선에 사로잡힌 아둔패기 기독교신자들의 행태가, 폭넓은 독서를 통한 ‘교양의 세례’(선생님은 이것을 ‘대학 물’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를 받지 못한 때문이라는 점을 의식하신 지적입니다.
선생님의 독서는 대단히 폭넓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교양이 각별히 19세기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호메로스, 플라톤, 단테, 밀턴 등 고대와 중세의 다양한 고전들을 섭렵하셨고 또 그 고전들을 중심으로 저의 대학생 시절 고전독서회를 주관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정신세계에서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비중을 점했던 것은, 역시 칸트, 피히테, 헤겔, 칼라일, 에머슨, 휘트먼, 괴테 등 19세기적인 교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교신전집>을 읽은 분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이점은 김교신 선생에게서도 분명히 나타나며, 그 근원을 소급해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결국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게 됩니다. 저는 이 19세기적 교양이 무교회주의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무교회에는 우치무라 간조, 김교신을 거쳐, 노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각별한 사상적 전통이 관류하고 있습니다. 노 선생님이 평소 교회 사람들이 하는 ‘신학’을 기피하고 ‘기독교고전’을 강조한 것도 이런 문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조직신학이니 목회신학이니 하는 신학에 함몰된 교회 사람들이 무교회신앙을 끝끝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는 계몽사상(the Enlightenment)의 반(反)기독교적인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패러다임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조심스럽게 활용하기만 한다면 이 19세기적 교양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유용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노 선생님이 즐겨 읽은 19세기 사상가들은 18세기 유럽을 압도한 계몽사상에 대한 반격을 가한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서양사상사에서는 계몽주의에 대한 이런 반격을 ‘18세기에 대한 반란’(Revolt against the Eighteenth Century)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독립신앙을 강조하는 무교회주의는 정치, 사회, 자연, 우주 등에 대한 독자적인 관(觀)을 형성하여 분석, 종합,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각자 사상가(Thinker)가 되어야 하는데, 이 사상(Thought)을 형성하는데 19세기적 교양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유효하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에 대한 답으로 노 선생님이 평생 <성서연구> 권두문을 통해 해 오신 예언자적 현실 비판을 읽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노 선생님은 대단히 사고가 유연한 분이어서 언제나 배우려는 자세를 갖추셨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선생님은 8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종종 제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전화를 주신 시간은 대개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였는데, 주로 원고 작성 또는 전집 교정에 관한 일로 저의 의견을 구하셨습니다. 제가 역사 전공인 관계로, 역사적인 인명, 지명, 사건, 연대 등에 대한 질문을 특히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원래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편인지라, 자다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관련 자료들을 찾아가며 선생님의 질문에 응해야 했습니다. 제게는 선생님의 전화가 ‘모닝 콜’(morning call)이었던 셈입니다. 지난 5월경에 받은 새벽 전화가 선생님의 마지막 ‘모닝 콜’이었습니다. ‘모닝 콜’은 불치하문(不恥下問)하시는 선생님의 지적 성실성의 상징이었습니다.
4.
80년대 후반 순창 복흥의 하기 성서집회에서의 일입니다. 감화회에서 급진적 성향을 지닌 한 청년이 민중을 압제에서 해방하기 위한 정치 투쟁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은 이 청년을 무섭게 질타하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자네가 옛날에 내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 장차 시골 우체부가 되어 산골 농부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싶다고 말이야. 나는 자네가 그 때 편지에서 쓴 시골 우체부의 꿈이 너무나 값지다고 본다. 그런데 왜 그 꿈을 잃어버렸나?”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한 젊은이가 오래 전에 보낸 편지와 그 젊은이가 편지에서 펼쳐보였던 소박한 꿈을 그토록 소상하게 기억하고 계신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치 운동보다는 진실한 한 영혼이 훨씬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는 선생님의 신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젊은 날의 꿈을 잃은 한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정치는 삼류 인간들이나 하는 것’이란 서양 속담을 인용하시면서, 학계, 종교계에 있다가 정치에 입문한 사람들을 맹렬하게 비난하곤 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 들어가 ‘왕사’(王師)로서 국사 강의를 했던 사학자 이선근(李瑄根, 1905∼1983)에 대해서도 한심하다는 투로 말씀하셨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선비가 학문을 하다가 왕에게 불려가 벼슬을 얻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습니다. 벼슬을 하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었으니 실로 정치지상주의라 할 것입니다.
노 선생님은 우리 사회의 이런 행태를 근절해야할 추잡한 ‘동양적 폐습’으로 여기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선생님의 독서 목록에는 동양 고전이 빠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심지어 <삼국지>도 하찮게 여기셨습니다.) 종교적 진리가 되었건 학문적 진리가 되었건, 진리 그 자체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90년대 말의 일입니다. 전집 1차분 편집이 거의 끝날 무렵 어느 날 선생님이 저의 집에 예의 ‘모닝 콜’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전집의 이름을 <노평구신앙문집>으로 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견을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반대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이 일생 해 오신 일이 ‘기독교’와 ‘신앙’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진행된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은 늘 민족과 사회 전체를 상대로 살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신앙문집’이라는 식으로 전집의 성격을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집은 <노평구전집>이 되어야 합니다.”
대략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선생님 앞에서 그렇게 단호한 어조로 말씀드린 적은 이 때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그 후 저 이외에 다른 분들과 어떤 의논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전집 이름은 <노평구전집>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 제가 선생님께 말씀드린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기독교계’만을 활동범위로 삼으신 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성서연구> 창간사 ‘원동력으로서의 성서’에서 말씀하신대로 선생님은 언제나 우리 민족과 사회 전체를 염두에 두셨던 것입니다.
앞서 노 선생님을 ‘애국지사’로 평가한 세상 언론에 대해 제가 황당하게 느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노 선생님을 정치적 투사로 여겨 ‘애국지사’란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그들은 오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선생님은 분명 ‘애국지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정치적 수단이 아닌 ‘원동력으로서의 성서’로써 이 민족과 사회의 토대를 놓기 위해 반세기 넘도록 초지일관한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애국지사’인 것입니다. 수학 문제로 치면 세상 언론은 ‘풀이 과정’은 틀렸지만 ‘정답’만은 제대로 맞춘 것입니다. 헤겔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성의 간지(奸智)’가 아닐는지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노 선생님이 사셨던 시대는 우리 민족이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 있던 시기였습니다. 선생님은 가혹한 현실에서 하나님 앞에 신앙 지조를 끝까지 관철하시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큰 인간적인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늘 공적인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셨고, 그 와중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큰 희생을 입은 것은 가족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제단에 바쳐진 이삭과 같다고나 할까요. 이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이루신 모든 일들은 가족과 함께 이루신 것이기도 합니다. 가족 여러분께 하나님의 큰 위로와 축복이 있으시길 빕니다.
박상익(우석대 교수/ 서양사)
첫댓글 노평구 선생님의 생애를 생활을 외침을 다시한번 꿰뚤러 보니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거목 노평구선새님 곁에서 자란 또 하나의 거목을 발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