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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변(4.19)에 대한 나의 솔직한 감상을 말한다면, 앞으로는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느낌이다. 이는 물론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에 대한 느낌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결국 모든 악은 공중의 티끌 같고, 악인의 소행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그들의 길은 살같이 빠르다고 한 시편 기자의 말을 다시 한번 내 눈으로 확인한 셈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나는 얼마나 무력했던가. 악이 천 년 만 년 갈 것 같이 이를 무서워하고 떨지 않았던가. 얼마나 이런 무서움에 빠질 뻔 했던가. 아니, 결국 이에 굴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사실 본지 권두문을 쓸 때마다 그 정도의 글을 쓰면서도 늘 무서움을 느껴왔던 것이다.
조봉암 씨의 사형에 대해서는 구상까지 하고도 끝내 발표를 하지 못했었다. 그뿐이랴, 아니, 심중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은 불평을 품었던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진리와 믿음을 얼마나 무시하고 멸시했던가. 아니 얼마나 모독했던 것인가. 아, 지난날의 나의 불신이여!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스도는, 나의 이 모든 불신과 죄악과 모독을 못 본 체 하시며, 조용히 당신의 능력과 심판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를 회복케 하시고, 나로 하여금 다시 믿음을 되찾게 하셨다. 아, 나는 하나님 앞에서 가슴이 찢어짐을 느낀다. 나는 마음 속 깊이, 다시는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앞에 어리석은 자같이 부끄러움을 돌리지 말아야 하겠다고 결심 아닌 결심을 했다.
도대체 내가 이 세상에 몇 년을 살 것인가? 영원히 살 것인가? 아니다, 사람이 장수를 한다 해도 시편 기자의 말처럼 칠십 인생이 아니던가? 얼마 안 가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한다. 아, 그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겠다. 물론 하나님은 나의 행동을 일일이 조사하시는 인색한 아버지는 아니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 역시 값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내게는 이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배반이나 불신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쳐다보고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다시는 불평 없이, 원망 없이 새롭게 살아야겠다. 세상에 곁눈을 파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악을 무서워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정말 충실한 믿음의 자식이 되어야겠다.
4월 19일의 밤, 이 더러운 백성의 수도 서울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불바다가 되지 않았음을 하나님의 크신 섭리, 특별한 사랑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연구> 제8호(1960년 5,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