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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내는 잡지의 주인 노평구
『뿌리깊은나무』 1980년 8월호
독자가 늘어나는 것도 골치야. 사람이 많아져 봐. 책에 대해서 갖가지 요구를 다해 온단 말야. 그렇게 되면 내 잡지의 본질적인 것이 흔들려.
그가 만드는 잡지는 이 나라에서 나오는 책이란 책, 잡지란 잡지를 거의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큰 책방에 가서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는다. 분명히 달마다 마지막 날이 되면 꼬박꼬박 나오는 잡지가 책방에는 없다. 책방에서 그 잡지를 구하지 못하거나 갖다 놓기 싫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잡지를 펴내는 사람이 제 잡지가 책방을 나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노평구란 사람이 서른다섯해 동안 삼백호가 넘게 제 손으로 펴낸 『성서 연구』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노평구 자신도 이녁의 잡지가 그리 요란스럽게 광고나 선전으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서른다섯해 동안 제 잡지를 펴낸 경력만 갖고 본다면 그를 직업적인 잡지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저 여느 잡지쟁이는 아니다.
『성서 연구』는 국민학교 교과서 크기에 두텁기가 겨우 서른 페이지쯤 되는 잡지이다. 그래서 얼핏 그의 잡지 표지에 적힌 '무교회 신앙 잡지'라는 글자만 본 사람은 무슨 예수교 선전 책자인 줄로 알기가 쉽다. 『성서 연구』는 표지에 쓰인 대로 무교회 신앙 잡지이다. 문화-공보부에는 1960년 8월 10일에 '월간 정기 간행물'로 등록했다. 그렇지만 이 잡지는 실제로는 1946년 11월부터 세상에 나왔다.
1972년에 잡지 협회에서 펴낸 『잡지 총람』에 따르면 『성서연구』는 그 성격이 '기독교 경전인 신-구약 성서를 연구하고 기타 신앙 논설, 성서 번역, 신앙 체험으로 짜여진' 잡지이다. 그리고 '주필 노평구의 성서 연구지'이며 '부대 사업으로 주일마다 공개 성서 연구회와 해마다 하계 특별 성서 연구 집회를 가진다'고 쓰여 있다. 곧, 그의 잡지는 먼저 장삿속부터 따지는 잡지가 아니라 그가 공부한 기독교 경전 곧 성경 공부의 결과를 발표하는 개인 잡지임을 알 수가 있다.
노평구는 '홀로' 잡지를 만든다. 혼자서 그달치 편집 계획을 세우고, 원고를 청탁하고, 손수 원고를 쓰고 교정을 보고 제본소까지 쫓아가고, 다 된 잡지를 발송한다. 잡지 만드는 사무실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집 서재가 편집실이자 발행처이고 공급처이다.
그가 교정마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 것은 돈도 돈이려니와 불안하기 때문이다. 원고만 쓰고 앉아 있는 게 '따분해서 견딜 수도 없지만' 제가 쓴 원고 내용도 만족을 못해서 교정을 보면서 또 고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맡길 수가 없다.
그는 보통 잡지가 여섯달, 또는 일년을 단위로 정기 구독 신청을 받아 경영에 보태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달치씩 예약을 받는다. 그는 잡지에 드는 돈을 마련하려고 생각을 한 끝에 무교회주의자들에게서 끌어오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잡지를 예약받고 돈을 미리 받는다. 『성서 연구』는 성격이 무교회 신앙 잡지 이듯이 독자도 실제로 무교회주의자들이다. 독자들은 제값보다 훨씬 많은 돈을 낸다. 잡지는 한권에 사백원인데 사백원만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체로 몇천원부터 시작해서 몇십만원까지 내는 사람도 있다. 특히 해마다 연초에는 칠팔십만원에서 백만원까지 들어온다. 유월, 칠월에는 들어오는 돈이 뚝 떨어졌다가 크리스마스 무렵에 다시 돈이 많이 들어온다. 그는 돈이 모자랄 때에는 미리 광고를 낸다.
"현재 3월 중 출간을 목표로 교정 중입니다. 교우 중 아직 예약 않으신 분들의 협조를 빕니다. 요새 물가도 뛰고 있어 출판비도 좀 걱정됩니다. 계속 협조를 빕니다. 노 백."
그는 또 필자에게 원고료를 주지 않는다. 그 대신 이녁의 잡지에 글을 실어 주는 대가로 게재료를 받는다. 그의 잡지의 필자도 무교회주의자들이라 지금은 필자들이 원고를 하나 보낼 때면 잡지 만드는 데나 그의 생활에 보태라고 으레 몇천원이라도 함께 넣어 보낸다.
그의 잡지의 독자는 사백명쯤이다. 그리고 그는 독자가 더 늘어나는 것을 그리 원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잡지처럼 잡지가 나올 때쯤에 신문에 광고를 내는 일이 없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책방에 잡지를 깔지도 않는다. 딱 한번 그 잡지의 독자가 칠백명까지 늘어난 적이 있었다. 그는 육이오 때에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도 잡지를 계속해서 냈는데 '사람들 심리가 불안하니까 종교에 기대려는' 것인지 독자가 늘어 났었다.
"독자가 늘어나는 것도 골치야. 사람이 많아져 봐. 책에 대해서 갖가지 요구를 다해 온단 말야. 그렇게 되면 내 잡지의 본질적인 것이 흔들려."
언젠가 시골에 사는 독자 하나가 그에게 찾아와 돈을 댈테니 한번 '크게 벌리자'고 제의를 해 왔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는데 그것은 일이 크게 벌어지면 그의 잡지가 '물에 물 탄 듯 되어' 그가 고집하는 순수성을 잃어 버리고 '불순하게' 되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 잡지의 독자에 대해 다른 어느 잡지보다 자랑스러워한다.
"내 잡지를 찾는 사람은 성경을 좀 연구하는 사람이지. 그런 사람을 상대로 만들어야지. 사실, 난 내 잡지가 중-고등학생에게 읽히는 것을 원하지 않아. 내 잡지는 단순한 읽을거리는 아니란 말야. 사상이 필요하단 말야. 우린 그저 조용히 공부나 해야지. 조금씩 커 가면 한국 기독교에도 기여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우리 사회에 제 잡지를 알리려고 애쓰지도 않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제 잡지에 은근히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의 잡지는 1946년 11월에 그 첫호가 나왔다. 1946년이면 해방이 되고 나서 우리 민족이 한창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 찬탁이니 반탁이니 하는 데모를 벌일 때였다.
"하루는 종로 쪽에 나갔는데 거기서 양쪽이 부딪쳤어. 저쪽 사람들은 남산에서 남대문을 거쳐 온 거고 이쪽 사람들은 메디칼 센타 쪽에서부터 나온 거야. 참 사람의 물결이 무섭대. 다행히 맞부딪치지는 않고 서로 피해 갔지만 그걸 바라보자니 안 되겠다 싶어. 이 민족이 언제까지 이럴 건가 참 암담하대. 종교가 아니면 안 되겠다 싶었던 거야."
그는 우선 같은 무교회주의자인 친구들에게서 돈을 끌어들여 잡지를 시작은 했지만, 막상 계속해서 펴내야 할 것을 생각하자 앞으로 꾸려 나갈 일이 걱정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대로 속셈이 있었다.
"그땐 아무도 삼팔선이 굳어져 버리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어. 나도 그랬단 말야. 그래 기껏해야 서너해 뒤면 삼팔선이 풀려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거야. 그땐 이북에 기독교 신자가 더 많았어. 서너해만 고생하면 독자도 칠팔백명으로 늘어나고 그러면 잡지도 그런대로 해 나갈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겠다 싶었지. 그런데 풀리기는커녕 영영 굳어져 버리고 만 거야. 한때는 그만두고 학교 선생이나 할까 생각했지만 이왕에 시작한 잡진데 주위에서도 하라고 하고 나도 그만두고 싶지 않았어."
그는 국민학교 양호 선생을 하고 있던 아내를 '달래고 달래서' 조산원을 차리게 했다. 그리고 집안 살림은 완전히 아내에게 맡기고 그는 잡지 만드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한번도 달마다 꼬박꼬박 월급을 타는 고정된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 스물다섯살 때 그와 혼인을 한 그의 아내 안정자는 "김교신 선생이나 쓰까모도 선생이 아니었다면 당신 같은 사람하곤 벌써 헤어졌을 것"이라고 잔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꾸준히 조산원을 꾸려 나가면서 살림을 도맡아 해 왔다.
"사람들이 오면 꼭 그걸 묻대. 돈 때문에 고생하셨지요라고. 물론 돈이 아쉽긴 아쉽지. 그렇지만 돈이 없어서 제 할 일을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돼. 더 큰 문제는 사상이 말라 버리는 거야. 사상이 늘 왕성하게 솟아나와야 돼."
실제로 돈 때문에 고생한 사람은 그의 아내이다. 그는 해방되고 이사를 서른번쯤은 했다. 아내의 직업 때문에, 산파일이 잘 되는 곳, 이를테면 시장 가까이나 네거리의 길목 같은 곳을 찾아 다녔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가 제 집을 지니지 못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그가 등촌동에 땅이 육십평이고 건물이 스물네평인 자기 집, 정확하게 말해서 그의 아내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집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아내의 오랜 고생 덕택이다. 그는 아내에 대해서 "자기 때문에 밥 먹은 건 알지만 그게 운명이지 뭐"라고 그다지 고맙지 않은 듯 말하지만 실제로는 아내에게 가끔 "혼인하지 말 걸 그랬어"라는 농담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한다.
잡지를 만드는 일말고는 '두가지 일은 못하는 성미' 때문에 그는 집안 일을 등한히 했다. 그래서 아들 둘만 대학에 보내고 딸 둘은 생활도 어려웠고 여자를 대학 교육시켜서 뭐 하겠느냐란 생각으로 대학을 안 보낸 것을 지금에야 안타까와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애들한테는 전부 실패"했다. 자식들이 아무도 종교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것만은 꽤 덤덤하게 대한다.
"신앙은 유전도 아니고,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영혼이니 양심 문제까지 깊이 들어갈 수는 없단 말야. 결정적인 것은 스스로의 영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스스로에게 맡겨야지."
그는 '왕성하게 솟아나와야 할 사상'을 사람들에게 불어넣기 위해서 1960년에 『진리와 독립 』이라는 계몽 잡지를 따로 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 잡지도 『성서 연구』와 마찬가지로 예약금이나 기부금으로 경비를 메워 나갔는데 처음에는 칠팔백권이 팔리고 격려의 편지가 쏟아져 들어와 '신이 났지'만 잡지 두개를 혼자서 만들어 펴내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에 돈을 대던 친구들이 점차로 줄었다. 그들의 아내들이 더는 돈을 댈 수가 없다고 반대를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는 돈도 돈이었지만 친구들이 "사상 연구나 사회 비판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 성경이나 착실히 공부해라"고 해서 이 잡지를 팔호까지 내고 그만두어 버렸다.
그는 잡지도 잡지지만 책에 큰 욕심을 낸다. 그것은 모든 사상은 저작을 통해서 먹혀 들어가야 하며, 책은 한 나라의 문화의 잣대라는 생각으로 자신이 공부한 것을 책으로 엮어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잡지를 만드는 동안에 책도 함께 펴냈다. 그의 스승인 김교신의 전집 일곱권과 제 잡지에 실었던 원고 중에서 신약 성경의 한 부분인 로마서를 연구한 『로마서 강연』을 한데 모아냈고, 머릿말을 모아서 『종교와 인생』이라는 제목을 붙여 책으로 내기도 했다. 그는 책은 본디 제 나라 말로 씌인 것을 읽어야 한다고 믿어 틈틈이 어학을 공부했다. "게을러서 쉰다섯까지도 본격적으로 성경 공부를 안 했다"는 그는 성경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라도 영어뿐만이 아니라 독일어, 일본어, 그리스어, 히브리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어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한 주일에 한두번 배웠지만 "워낙 어학에 소질이 없어 제대로 완성한 것이 없다."
그가 한번은 영어로 된 성경의 한 부분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는 누구에겐가 그것을 보여 주고 평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같은 고향 사람이고 불문학을 공부한 평론가 이헌구를 찾아갔다.
"자긴 불문학을 해서 모르니 양주동을 찾아가라는 거야. 그래 다시 같은 고향 선배인 김광섭을 찾아갔어. 그랬더니 대번에 욕을 퍼붓는단 말야. '네가 희랍어도 모르고 어떻게 제대로 성경을 번역했다고 하느냐. 나도 영시를 번역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하면서 쫓아냈어. 맥이 탁 풀려서 양주동 선생 찾아갈 엄두도 안 나. 그때부터 어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어."
그는 어학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저작과 서양 고전도 읽었다. 그가 이렇듯이 늘그막까지 공부를 계속하는 것은 '그저' 하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잡지를 만드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쓰는 원고 중에서 '성경 연구'는 적어도 참고서 대여섯권은 읽고야 쓰는데, 그 대여섯권 속에는 으레 일본어, 독일어, 영어로 되어 있는 책들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는 그가 공부한 것과 무교회주의를 고집하느라고 기존 종교계와 많이 싸웠다.
"난 참 욕을 잘 한단 말야. 신학자들, 특히 구라파를 갔다 온 사람들은 나더러 다른 책은 아무 것도 읽지 않고 성경만 붙들고 앉아서 욕만 한다고 비난했어. 그런데 내 주위의 사람들은 그까짓 것 안 읽어도 다 통한다고 감싸 줬지. 그건 뭐냐 하면 서양 사상이나 철학이 따지고 보면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의 정통 원리를 깨달으면 다른 철학 사상들도 어떤지 알 수 있지."
그는 실제로 현대 사상이나 동양 사상과 동양 고전의 책은 읽지 않는다. 동양 사상은 도피적이고 소극적이고 무엇보다도 도덕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상이 세계성을 띠려면 먼저 서양 고전을 소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공부에 대한 욕심은 많아서 현대 사상에서 큰 역할을 한 싸르트르가 죽자 그의 사상이 어떤지를 알려고 신문, 잡지에 실린 기사를 모두 모았다. 한때는 까뮈에 대해서 사람들이 떠들자 그가 잘 아는 불문학 교수를 붙들어 앉혀 한나절을 까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그들에 대해서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실망했다. 싸르트르는 '인간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했고 까뮈는 '신의 의도와 부당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노평구는 그들을 '반 기독교적'인 인간으로 몰아부친다.
그가 '순수'를 고집하는 것은 잡지에 뿐만이 아니다. 그가 믿는 무교회주의에 대해서도 그는 '종교의 순수성'을 고집한다.
"교회를 이루면 제도가 중심이 될 수 있어. 그러니 무교회는 성경 연구를 하는 집회를 중심으로 키워 하나가 크게 되는 것보다는 새끼를 많이 치는 거야. 지금 대전, 광주, 대구, 인천에 모임이 생기고 있어. 그렇지만 횡적인 관계는 없어.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 돼. 너무 수효가 많은 것은 필요없어. 자발적으로 되야지. 시간이 필요한 문제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얼핏 그가 꽤나 까다롭게 사람을 '고르는' 사람 같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사람이건 사람은 '흐물흐물하게' 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장면 정권 때 노동 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무렵에는 그가 인쇄를 맡겼던 꽤 큰 인쇄소의 노동자들이 그에게 격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정치 문제에 끼어들기 싫어서' 끝내 써 주지는 않았지만, 그는 사람과 그렇게 쉽게, 깊이 친해진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그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감격스럽기까지 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있다.
올해로 나이가 예순아홉인 노평구는 아무리 봐도 일흔에 접어드는 늙은이 같지가 않다. 키가 크고 몸이 마른 그가 한번 이야기를 꺼냈다 하면 마치 웅변을 듣고 있다 싶게, 듣는 사람의 넋이 빠질 만큼, 정력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난 사실 감정적이야. 옛날엔 과격했지. 학생 운동도 했고 스트라이크도 많이 일으켰어. 내가 일본에서 와서 서울에 있을 때는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지금 고향 사람들은 네 정치 연설을 들으려고 날마다 라디오 앞에 앉아 있다'라는 것이야."
그렇게 '정치 지향적'이었던 그가 이제는 정치보다 사상과 종교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그는 1930년 무렵부터 서너해 동안 빈민촌에 살았다. 그는 그 전에 배재 고등 보통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광주 학생 운동이 온 나라로 퍼지면서 고향인 함경북도 경성으로 내려갔다가 학생 운동의 주모자로 몰려 퇴학을 당하고 한해 동안 옥살이를 치렀다. 한해 동안 옥살이를 치르고 나온 그는 서울의 길바닥에서 그가 어릴 때에 그의 고향에 자주 오가던 일본 사람을 만났다. 그가 거지로만 알고 있었던 그 일본 사람은 그의 사정을 듣더니 대뜸 "너도 갈 데 없고 나도 갈 데가 없으니 우리 가난한 사람이 사는 동네에 가서 살자"고 하면서 마포에 있는 빈민촌으로 그를 데려갔다.
산꼭대기에 있는 그 빈민촌에 집이란 땅을 파서 막대기로 받치고 거적을 깐 토막이었다. 그 산꼭대기에는 그런 토막이 사백개가 넘었고 한 토막마다 식구 네댓명이 먹고 자고 있었다. 그 빈민촌 남자들의 직업은 거의 지게꾼이었다. 그는 거기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아침반, 오후반, 저녁반으로 반을 갈라 가르치고 일요일에는 교회 학교를 열었다.
그가 빈민촌의 선생으로 선뜻 그곳에 머무르게 된 것은 빈털털이 신세였기 때문이었지만 가가와 도요히꼬라는 일본 사람한테서 받은 영향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일본의 기독교도이며 사회사업가였다. 배재 학교에 다닐 때에 가가와의 책을 읽었던 그는 가가와가 주장하고 몸소 행동으로 보였던 '사랑의 실천'에 무척 큰 감명을 받았다.
"그때는 죽어도 애들을 위해서 일하자는 생각이었어. 애들 죽는 것도 많이 봤지. 열일고여덟쯤 된 애가 하나 있었어. 걔가 병이 들어 죽어갈 때 나는 다른 애들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내 손을 꼭 잡고 놓지를 않아. 할 수 없이 달래서 손을 떼고 나왔는데 죽었어. 얼마나 가슴이 아프든지. 지금 생각하니 처참해."
그 생활에서 그는 가가와가 말한 사랑의 실천을 스스로 해낼 수가 있었지만 형식적인 사랑의 실천 곧 사회 사업이나 사회 구조의 개혁, 크게는 정치라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성이라든지 영혼의 문제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가 그렇게 느끼게 된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하루 번 돈으로 술을 마시고 주먹질과 싸움질이 그칠 새 없는 것을 보고 그곳이 범죄 소굴이라고 생각하면서 부터였다.
자신의 일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괴로와하고 있을 때에 그는 또 한번 '운명적'으로 책방에서 김교신이 펴내고 있었던 『성서 조선』을 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괴로와하고 있던 문제가 '종교가 아니면 해결될 수 없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아직까지도 '종교는 사람의 삶에 등뼈를 세워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의 삶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렇게 과격했던 그의 정치관은 그가 종교를 믿게 된 지금에 와서는 아주 이상적인 꿈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는 요새 그가 '만일 서울 시장이 된다면' 잠실에 도시 하나가 들어설 만한 터를 새로 닦아 그곳에 무료 시설을 짓겠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지나치다가 쉴 곳이 없을 때 들어와 쉴 수 있는 무료 휴게실, 나라 안의 거지를 모두 불러 모아 일도 하고 잠도 자게 할 수 있는 공장과 무료 기숙사, 여행하는 사람들이 하룻밤이라도 편히 묵어갈 수 있는 무료 숙박소 같은 것들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요즈음에 그가 잡지의 인쇄를 맡기는 곳은 서울 마포 쪽 중림동의 '뒷골목'에 있는 작은 인쇄소이다. 처음에는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은 인쇄소에서 하기도 했는데 한면을 조판하는 데 천원쯤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고 뒷골목으로 옮겨 버렸다. 원고가 모두 인쇄소에 들어가면 그는 집과 인쇄소를 드나들면서 교정을 보는데 교정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손수 공장 안으로 들어가서 직원들에게 이것저것 부탁도 하고 지시도 한다.
인쇄를 다 마치면 같은 뒷골목에 있는 제본소로 가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인쇄소는 그런 대로 활자가 괜찮은 데에 견주어 제본소는 그가 옆에서 꼬박 지켜 서 있어야 할 만큼 "풀칠도 제대로 못한다." 다 된 잡지를 집에 가져와서 그의 아내가 다시 꼼꼼히 풀칠을 하면 미국과 독일과 대만에 있는 몇 안 되는 독자에게까지도 합해서 사백부를 그가 하나하나 손수 발송한다. 이 일을 그는 잡지가 처음 나올 때부터 모두 혼자 했다. 심지어는 모든 원고를 그가 만들어 쓰기도 했지만 워낙 글재주가 없어서 점차로 몇 가지만 빼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가 쓰는 원고는 머릿말과 성경 연구와 그의 일기를 모은 '잡감록'과 독자들의 편지와 신앙 체험을 정리한, 정신적인 공동체라는 뜻의 '코이노니아'들이다. 그는 그의 책도 마찬가지지만 머릿말을 몹시 중요하게 여기는데 머릿말은 그때그때 세상 돌아가는 일을 무교회주의자인 그의 처지에서 느낀 대로 쓸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원고가 다 될 때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막판'에 가야 '폭발적'으로, '즉흥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쓴다.
그는 '나돌아 다니면 생각이 끊기므로' 될 수 있으면 집 밖에 잘 나가지 않는데, 폭발적이고 즉흥적인 것을 그가 재미있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 군데에 오래 붙어 있질 못한다. 집에서 원고를 쓰다가도 생각이 안 나면 그냥 드러누워서 자 버리거나 밖으로 나와 버린다.
그도 스스로 말하듯이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말고는 운동도 안 하고, 음악이나 미술에 취미도 없고, 심장이 나쁘다고 해서 특별한 건강법을 세워 나가지도 않을 만큼 '생활이 건조한' 그도, 해마다 여름과 겨울이면 '놀러'간다. 그가 놀러간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한다는 뜻인데, 무교회주의자들끼리 특별 집회라고 부르는 행사를 손수 열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이른다. 한 주일쯤씩 절이나 산을 찾아다니며, 성경을 공부하는데 그때는 어른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식구들까지 와서 특별 집회는 그야말로 그로서도 '특별히 노는' 모임이 된다. 올해도 그는 지난해에 갔던 동학사에 다시 갈 생각인데 오고 싶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못 올까 봐 될 수 있으면 경비를 적게 들이려고 애를 쓴다.
그가 하는 일들, 이를테면 일요일의 성서 연구 집회, 특별 집회, 책을 펴내는 일이 모두 잡지와 함께 그의 '공부의 하나'이다.
노평구가 『성서 연구』를 펴내는 것은 그가 무교회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른다섯해를 무교회 신앙을 밑바탕으로 해서 이녁의 잡지를 펴내 왔다.
무교회주의란 십구세기 말에 일본 기독교계의 지도적인 사상가였던 우찌무라 간조오가 일으킨 것으로서 기독교 신교의 한 갈래이다. 현재의 교회 제도나 의식을 없애고 성경을 올바로 인식하고 연구해서 성경 속의 복음 곧 진리를 바탕으로 해서 신앙을 굳건히 하고 종교 단체나 직업적인 종교가를 통하지 않고 전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찌무라가 무교회주의를 일으킨 것은, 서양 문명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가 기독교 본디의 모습을 잃고 서양 사회제도나 문명과 혼합된 '형식'이라고 보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성경이므로 이 성경을 일본인들이 스스로 연구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찾자는 뜻에서였다.
이런 성격 때문에 이 나라에서 무교회주의는 '일본 국가주의의 냄새가 난다'는 따위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노평구는 기존 기독교계에서 다만 무교회의 '없을 무 자'에 크게 놀라 반발한 데에 있다고 본다.
이 나라에 무교회주의를 들여온 사람은 우찌무라의 제자이며 노평구의 스승인 김교신이다. 그는 우찌무라가 '일본인들이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자'고 외친 것처럼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이 자주적으로,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신앙을 올바로 갖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김교신은 1901년에 함흥에서 태어나 1919년에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우찌무라의 제자가 되어 그 밑에서 일곱해를 지냈다. 따로 박물학을 공부했던 그는 귀국하여 양정 고등 보통학교에서 선생 일을 보면서 함석헌, 송두용 들과 함께 무교회 신앙 잡지인 『성서 조선』을 1927년에 만들었다. 『성서 조선』은 1942년에 김교신이 머릿말로 쓴 '조와'라는 글이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트집이 잡혀 폐간되었다. 이를 가리켜 성서 조선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때 이백명쯤 되는 독자들이 모두 잡혀 들어갔고, 김교신은 잡혀가 한해 동안 옥살이를 치렀다.
이 나라에서 무교회주의는 발생지인 일본만큼 널리 퍼지지 못했다. 그 까닭은 무교회주의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말고는 별다른 행사라는 것이 없이 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고 이들이 다른 종파, 기독교나 가톨릭에 대해 배타적인 성격을 띠었던 데에 있다. 또 기존 한국 교회의 반발도 큰 원인이 된다. 숭전 대학교 철학과 교수 조요한은 "이들이 해방된 뒤로 널리 퍼뜨릴 생각을 안 해서 그렇지 실제로 그 활동이 계속되어 왔다"고 한다.
노평구가 무교회주의를 믿게 된 것은 김교신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마포의 빈민촌애서 일을 하다가 김교신이 펴낸 『성서 조선』을 읽게 되었고, 이에 자극을 받아 김교신을 만났다. 그는 김교신에게서 무교회주의를 받아들였고 김교신이 권하는 대로 직접 성경을 공부하러 1936년에 일본에 갔다. 일본에서 우찌무라의 제자인 쓰까모도의 밑에서 공부를 하던 그는 1945년에 김교신한테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귀국했다.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와 보니 김 선생은 벌써 돌아가신 뒤였어. 그때 선생은 흥남 질소 비료 공장에 계셨는데 한국인 노동자가 오천명쯤 되었단 말야. 선생이 이들의 관리를 맡고 계셨는데 나더러 와서 교육을 맡으라고 했어. 더우기 병원도 지을 거니 내 아내는 간호원을 하라는 거야. 그래서 달려왔더니 벌써 돌아가신 뒤였어. 김 선생이 돌아가시고 넉달인가 뒤에 해방이 됐어."
평양에 있는 아내의 집에서 그는 해방을 맞았다. 이듬해 봄에 서울에 온 그는 잡지를 만들 채비를 했는데 그의 말마따나 김교신이 살아 있었더라면 『성서 연구』라는 그의 잡지는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노평구는 김교신의 사상을 곧바로 잇는 제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김교신과 친한 친구였으며 같은 무교회주의자였다가 해방된 뒤로 퀘이커 쪽으로 돌아선 함석헌과 요새는 관계를 맺지 않고 지낸다.
"함 선생은 박식하고 천재야. 일제 때만 해도 동양적인 것은 없었던 힘 선생은 무교회 신앙으로도 일본까지 통틀어서 당할 사람이 없었어. 참 놀라와. 해방된 뒤에 차츰 기독교와 동양사상을 연결시켜 선생님 식으로 해석하는 것 같애. 김 선생이나 함 선생이나 나라 사랑은 마찬가지야. 그렇지만 김 선생은 함 선생처럼 그렇게 현실에 뛰어들지 않았어. 기독교는 앞으로 삼백년 앞을 내다봐야 한다고 하셨어."
그는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로 나가 주길 바랐던 함석헌이 무교회 신앙에서 퀘이커로 옮긴 것이 좀 섭섭하다.
그렇지만 '저마다 생각하는 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함석헌의 말에 따르면 노평구는 형식을 싫어한다. 그뿐만 아니라 무교회주의자들이 모두 그렇다. 함석헌은 자기도 옛날엔 마찬가지였지만 "나만 사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나는 전체와 항상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무교회주의만을, 고집하는 노평구는, 순수가 지나치면 그만큼 폭이 좁아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좁다면 좁고 강하다면 강하다"라고 한다.
『성서 연구』는 올 유월에 통권 304호가 나왔다. 이 나라에서 지금 나오고 있는 잡지 중에서 이렇게 오래 계속되어 온 잡지는 드물다. 일본 제국주의 때부터 여지껏 나온 잡지를 볼 때 꽤 오래 나온 잡지는 종교 잡지이다. 그것은 아마도 종교라는 주제가 현실 세력에 맞부딪치는 것을 막아 주는 방패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가장 오래 된 종교 잡지로는 가톨릭 재단에서 펴내는 『경향 잡지』로 이것은 올 유월로 1,347호가 나왔다. 또 안식일 교회 재단에서 펴내는 『시조』가 칠월로 688호가 나왔고 천도교 중앙 본부에서 펴내는 『신인간』이 칠월로 379호가 나왔다.
무교회 신앙 잡지는 노평구의 『성서 연구』말고 또 하나가 있다. 『성서 신애』라는 것으로 김교신과 같이 일했던 송두용이 펴냈었는데 지금은 다른 몇몇 사람들이 모여 만든다. 『성서 신애』는 『성서 연구』보다 먼저 나왔지만 몇번인가 중단되었었기 때문에 이제 130호가 조금 넘었다.
『성서 연구』가 이 나라의 잡지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개인'의 '연구 잡지'라는 점 때문이다. 이 나라에는 아직까지 개인 잡지 또는 개인의 연구 잡지가 거의 없다. 종교계에서 그런 잡지가 나오는 것이 있기는 하다. 이화 여자 대학교의 교목인 김흥호가 펴내는 『사색』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제 118호까지 나왔다.
『성서 연구』와 마찬가지로 오래 계속해서 나온 다른 종교지는 개인 잡지가 아니다. 법인체 형식으로 되어 몇 사람이 모여 편집하고 어떤 분야의 전문가에게 원고를 청탁하는, 대부분의 잡지와 비슷한 성격으로 한 개인이 제 사상을 연구하고 정리해서 잡지를 내는 것은 아니다.
노평구는 이 나라에 그런 개인 잡지가 없는 것을 안타까와 한다. "일본에는 교육 잡지도 개인이 내는 것이 많아. 서양에서는 교수의 강의를 기록한 것을 모으면 곧 책이거든. 자꾸 써서 책으로 엮어야 돼."
그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대중매체에 오르내렸다고 하면 우쭐대는 풍토를 비웃는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런 데에 신경쓸 게 아니라 차라리 자신이 공부한 것을 조금씩이라도 잡지로 엮어내면 그것이 모여 한권의 저작이 되는 것이니, 일반 사상이나 학문 분야에서도 개인 잡지를 많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개인 잡지가 많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면 그가 생각하듯 "학자는 학교 안에서 연구만 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될 가능성도 커질 수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예술과 사상 같은 것들도 그가 고집하듯이 제 '순수성'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한 십년만 더 살게 되면 무엇보다도 내 책을 스무권쯤 내고 싶어. 그리고 나면 할 일이 있어. 신약만은 내 신약을 꼭 만들고 싶어."
그는 잡지와 책을 함께 내려니 '힘도 들고' 공부도 제대로 못한다고 한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보고 책을 집어치우라고 한다. 그가 김교신의 전집을 냈듯이 누군가가 그의 전집을 꾸밀 거라고 말이다. 그들의 말이 귀담아 들음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가 갈등을 느끼는 것은 잡지만 갖고는 만족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가 그런 불만 상태에 있는 것을 또 좋아한다. 그는 "탐탁치 않은 상태가 좋아. 중요한 것은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거든. 다 완성되어 있는 것은 재미없어" 하기 때문에 어차피 죽을 때까지는 그가 모두 해야겠다고 한다.
그런 그를 두고 그의 친구들이 그가 '한줄기 오솔길'을 가고 있다고 한 것은 썩 잘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지난해 십이월에 나온 '300호 기념호'에서 그의 친구 유달영은 그에게 시를 지어 바쳤는데 그 시가 그의 삶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줄기 오솔길을 가네
넓은 길 버리고 좁은 길 가라신
그 뜻을 지켜서 한 외길을 가네
돌뿌리, 가시덤불, 매운 바람
지칠줄 모르고 걷느라면 싱싱한 푸른 숲,
향기로운 들꽃 하늘엔 흰구름, 조각달도 빛나네
내일도 오늘처럼 쉬지 않고 가려네
안혜령 / 뿌리깊은나무 기자
첫댓글 대구에서 한번 걍의를 들어는데 돌아가셨다니 가슴이 아픕니다. 한국기독교사에 음지에서 대형교회 브랜드목사들과 같이 대접도 못 받으시면서 하늘나라가 가신것 같습니다.
대형교회 목사 같은 대접 받기를 원하지도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지 않을까요?
어려운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네요.
...
성서만으로 믿음만으로 은혜만으로 를 주창하시던 노선생님. 아련하네요~ 후진으로써 참된 무교회 신앙을 계승하는 것도 하나님의의 뜻임을 재삼 깨닫습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