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바빌론 강변 곳곳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고 울었노라. 거기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거문고를 걸어 놓았도다. 우리를 사로잡은 이들이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이 저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시온의 노래 한가락을 불러보라’ 하는구나. 아, 그러나 우리가 이방에 있어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리오.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으로 재주를 잊게 하라. 내가 만일 너를 사모치 않을진대 아니, 내가 만일 예루살렘으로 나의 가장 큰 기쁨을 삼지 않을진대 내 혀로 내 입천장에 붙게 하라.
이는 구약 시편 137편이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 포수되어 부른 애국의 노래 한 구절이다. 그들의 이 조국에 대한 애절한 사모야말로 고대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 강대국 사이에 낀 면적 6천 평방마일의 일개 소국가로서, 더욱이 정치적으로 그 무수한 변전과 고난과 불우와 박해 가운데서, 인류 만대의 사표(師表)요 모든 문명의 동력인 위대한 종교와 도덕을 창설해낸 힘다.
칼 힐티가 말한 대로, 세계와 인류를 논하는 인도주의(人道主義)는 왕왕 추상적이고 공허한 감정이기 쉽다. 이점 개인주의 역시 그것이 높은 의미라 해도 이기주의와 안일과 나태의 노예 되기 쉬운 것이다. 이런 인간에게 무엇보다도 공적이고 실제적이며 고귀한 감정은 역시 애국의 감정이다. 이는 국민 된 개개인에게, 민족을 위해 문명과 역사를 창조하는 높은 목표와 사명과 열정, 그리고 희생정신과 공공정신과 인내심을 제공한다. 인류사에서 문명은 언제나 민족을 단위로 하는 공동 창조로써 인류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더욱이 타민족의 압제에서 벗어나 민족의 백년대계를 세워야 하는 이 중대시기에 애국의 열정이 아주 고갈되었다. 교육이란 다만 일신의 영달을 위한 살벌한 경쟁이요, 해외에 나가 지식을 닦은 청년들은 외국의 밥찌끼에 허기가 들어 귀국을 하지 않는다. 최고학부의 학생과 교수들, 저들은 38선이 열리기 전에는 만사무익이라 하여, 진리 탐구도 포기하고 절망과 자포자기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일제하에서의 모습 그대로.
그러나 진정한 애국에 절망은 있을 수 없으며, 참 진리에 불가능은 없다. 근래 애국의 화신을 자처하던 군사혁명 주체인 정치인이 총총 국외로 뜨더니, 워커힐, 빠찡고, 새나라차 등 망국적인 망언으로 국민을 놀라게 했다. 이리하여 여기 우리에게는 눈곱만큼의 애국도 없다. 이상도 없다. 그러면 다음에 오는 것은 분명하다. 오직 황폐와 망국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