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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지식이나 도덕의 교사로서는 배우는 자로부터 절대의 존경을 받는 것이 교사 된 자의 최대의 성공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사의 경우는 좀 다르다. 엄밀한 의미의 기독교 교사의 직책은 사람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중개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저는 깊은 의미의 존경이나 신뢰를 자신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자로 하여금 이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바치게 함으로써 성공하는 것이다.
예수의 선구자요 소개자인 세례 요한은 자기를 결혼 중개인에 비유했으며, 특히 “예수 그는 흥하여야 하고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위대한 발언을 남겼다. 예수는 그를 “여인이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고 했는데 그는 실로 기독교 교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결혼 중개자가 신랑이나 신부를 가로챈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서 대체로 열심 있고 유명하다는 신앙 교사나 신자들을 보면, 가정부인이 자기 남편이나 가족 또는 가사(家事)보다도 목사나 선생을 더욱 생각해야 한다고 하여 분주히 다니다가 부도덕한 가정 파탄을 일으키고, 심지어 불미한 추문을 퍼뜨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들은 대체로 이를 신앙 열심으로 돌리지만, 이야말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바쳐야 할 믿음과 사랑을 사람에게 그릇 바침으로써 일어난 신앙의 병적 현상인 것이다.
이 때 목사나 선생은 자기가 하나님과 예수 대신이 됨으로써, 여기 무서운 일종의 우상 신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기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 운운하는 교황이나, 자기를 예수 혹은 예수의 재림 운운하는 박 장로 따위가 다 이런 신앙의 우상성을 지닌 자들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에는 개신교 교회 자체가 또한 이런 우상의 지위로 전락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인간적이고도 우상적인 신앙 관계에 있어서는 신자와 교사의 감정적 파탄이 곧 신앙의 파탄이 되고 마는데, 이는 인간 관계였던 신앙의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결국 신앙 교사는 신자를 철저히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중개함으로써, 비로소 교사와 신자 둘 다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둘 다 지옥에 떨어질 뿐이다.
한편 우리나라 교계에는 소위 토마스 아 켐피스 유(類)의 불미(不美)한 신앙 현상인 인격적인 그리스도의 모방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즉 예수와 열 두 제자의 생활을 그대로 재현시키려는 수도원적인 경향이 심한데, 이 때 선생은 스스로 예수가 되고 제자들은 위대한 사도가 됨으로써, 결국 우상적인 집단이 될 것이 명약관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건전한 신앙은 교사가 직접 신자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여 저로 하여금 영적으로 신생하여 오직 성령으로 사는 독립적인 인간, 도덕적인 인간이 되게 하는데 있다. 이것이 진정 종교 교사의 직책이자 한계인 것이다.
<성서연구> 제84호 (1959년 9, 1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