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현대사 - 좌우를 넘어서 민족을 하나로
‘해방은 뜻밖에 왔다.’
해방을 맞는 이들이 감격에 겨워 모여든 곳은 여운형의 집이었다.
숨막히는 일제통치속에 여운형은 언제나 이들과 함께했다.
<이기형(88) /시인>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이 올라와.
몽양을 찾아와
몽양을 찾아오고 계속 올라오니까, 지방 사람들이...
서울 사람만 오는게 아니야...
-46년 3월 소련 정보 보고서
‘통일임시정부수상후보는 여운형이다. 그는 당대 조선인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민주주의자였다.’
(47년 주한총영사 랭던)
<리처드 로빈슨 / 당시 미군정관>
(국무성은) 그를 인기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보았다.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 여운형은 서울한복판에서 동족에 의해 암살된다.
‘몽양 여운형’ 그의 노력과 죽음은 통일조국의 꿈이 어떻게 좌절되어 갔는지에 대한 잊혀진 기록이다.
-한국의 집/ 서울 중구 필동
(해방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
45년 8월 15일 이곳에선 여운형과 정무총감 엔도가 만났다.
치안유지권을 넘길테니 신변보호를 해달라는 총독부의 요청이었다.
‘조선의 정치범을 즉각 석방하고 치안유지와 청년조직의 건설에 간섭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여운형은 제안을 승낙한다.
그리고 이튿날.
여운형은 방송과 전단을 통해 완전한 독립국가건설을 구심점으로 건국준비위원회결성을 선포한다.
그날 휘문중학교정에서 행한 연설은 여운형의 모습이다.
아쉽게도 육성은 남아있지 않다.
<연설내용>
이제 우리민족은 새역사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해야 합니다.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일사불란한 단결로 나아갑시다.
이기형(88) / 시인
그 당시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건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어 충천했어...
그때 군정청에서 여론조사를 할 때도 몽양이 1등을 했다고...
그 당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기라는건 대단한거죠.
*건국준비위원회본부 (서울 종로구 YMCA)
놀랍게도 건국준비위원회는 출범이틀만에 체계를 갖춘 모습을 드러낸다.
석방된 독립투사들이 귀향하면서 지방에서는 치안대가 꾸려졌다.
해방의 감격과 환희속에 건국준비위원회는 보름만에 145개 지부를 설치한 전국조직으로 확대된다.
치안대의 치안유지활동역시 자리를 잡는다.
첫댓글 좋은 글 ㄳ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