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인민위원회의 분포도
*전남장흥
그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사진한장을 꺼내 놓았다.
강수희옹(89) / 사진작가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치안대의 모습이었다.
‘이 사진은 해방되어서 주로 청년단, 치안대 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남지역 치안대(청년단) 씨름대회 /1945년 가을
강수의(89) / 장흥 치안대 참여
청년단이 조직된 뒤, 내 위치는 선전을 맞았어요.
일본인들에게 횡포부리지 말고 잘 보내자...
(어떤사람들은) 일본사람살림 강탈하려고 야단이었었거든요.
-치안대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을 향한 약탈을 막고 더 나아가 일제경찰을 몰아내며 일제잔재의 청산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서중석교수 / 성균관대 사학과
해방이후에 건준같은 조직이 없었더라면 굉장한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임시정부를 포함한 중요한 독립운동단체는 해외에 너무 멀리떨어졌거든요.
그런데 해방이 되기전부터 여운형의 건국동맹이 만들어졌고 그래서 해방이 되는 날부터 바로 건준이라는게 조직이 돼 가지고 활동할수 있었기 때문에 우선 치안유지같은 것을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나서서 할 수 있게 됐다.
이건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이죠.
-20세기초 세계의 정보가 모여들던곳 상해
해방후 건준을 이끌던 여운형이 처음 독립운동을 시작한곳이 상해였다.
1918년 33의 여운형은 ‘신한청년단’결성을 주도한다.
1차세계대전의 종전협상인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을 알릴 대표로 김규식과 여운홍이 선출됐고 청년단원들은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3.1운동의 준비과정을 도왔다.
이어 3.1운동의 평가물로 출현한 것이 상해임시정부.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초대내각에서 외무부차장을 맡았다.
그해가을 여운형은 일본의 초청을 받는다.
그것은 상해의 독립운동세력을 와해하려는 일제의 노골적인 공작이었다.
그대상으로 지목된 여운형에게 비난이 쏟아지자 그를 옹호한 이가 도산 안창호였다.
여운혁(85) / 여운형의 육촌동생
도산 안창호 선생은 “가라” 너 몽양 네 길이라면 말이지, 갈 것 같으면 걔네들한테 말려들어가는일 없이 충분히 우리주장을 관철하고 그러고 효과를 거두고 올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가라” 하는걸로 해가지구 안창호 선생이 그때 돈으로 300원의 여비도 마련해 주셨어요.
*강덕상 / 재일한국역사자료관 조사위원장
독립운동의 제2세대는 장덕수라든지 여운형같은 좀 더 젊은 세대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의 정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정세도 알고 러시아정세도 알고 있고 미구정세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연장선 속에 중심 인물들이 일본에있어서는 무서운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 중심인 신한청년단의 대장 여운형을 데리고 오면 무너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본동경
여운형이 공직을 사퇴하고 개인자격으로 일본에 온 것은 1919. 11 그에겐 국빈에게만 허용되는 일왕의 비원 (아카사카궁)관람을 비롯해 임정탈퇴를 조선으로한 회유책이 쏟아졌다.
그러나 제국호텔에서 수백명의 기자를 상대로 한 마지막 연설까지 여운형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